Stop bullying and become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56)
왕따 그만두고 천재합니다-156화(156/221)
156. 신뢰 (2)
156. 신뢰 (2)
사실 임상 실험 대상자와 연구원이 직접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임상 실험 중인 약을 주는 경우엔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권하는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어떤 물리적인 치료보다는 약을 처방하는 쪽에 가까운 이 연구의 경우 더더욱 그랬고.
“아이고, 실제로 보니까 더 앳된 학생이었네.”
“그래, 그래. 이 학생이 그때 그 방송에 나왔던 학생인 게지?”
“…진짜 가능성이 있을까요?”
모인 환자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애초에 환자보다는 보호자 모임에 가까웠고. 김성진 교수는 그들을 보며 내게 조용히 말했다.
“혹시라도 이 자리가 불편하면 피해도 된다. 꼭 여기에 있지 않아도 돼.”
“괜찮아요.”
나는 그들을 바라봤다. 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왔겠지만, 그들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피로는 익숙한 것이었다. 오래전 어머니에게서 봤던 표정과 같았으니까.
치매가 잔인한 병 중 하나는, 치매를 겪는 그 환자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도 같이 서서히 좀먹어 가는 질병 중 하나니까.
“의사 선생님, 우리 어머님 좀 꼭 좀 치료해 주세요, 정말이지 믿을 곳이 의사 선생님밖에 없어요.”
“많은 걸 바라진 않습니다. 그래도 제 자식들은 기억할 수 있어야죠. 기억력이라도 회복되면 더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사람들은 나보다 최강석을 더 의지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새파랗게 어린 학생보다는 흰 가운을 입고 서 있는 최강석이 더 믿음직해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최강석은 냉철한 사람이었다.
“임상 실험에 참여한다고 해서 꼭 나아질 거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의사가 그런 말을 하면 쓰나! 꼭 나아질 수 있다고 해야지!”
“그때 방송에서는 치료제를 꼭 만들고 말겠다고 하던데···아닌가요?”
그의 말에 몇몇이 불안한 모습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런 말들에도 불구하고 최강석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치매 치료제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도 개발된 게 없습니다. 뇌 기능 개선제라고 불리고 있는 약들이 있지만 유의미하게 치매 증상을 호전시킨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그거야 저희도 이미 병원에서 들었던 내용이죠. 방송에서 치매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온 거고요.”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갑작스런 내 말에 최강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김성진 교수도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를 향하는 수십 개의 시선들에 순간 멈칫했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으니까.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는 중인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번 임상 실험에서 하는 약은 환자 분들의 뇌에 축적되어 있는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을 분해시켜서 배출해내는 거고요.”
“그게 치매가 치료되는 거랑 다른 거야 학생?”
“엄연히 말하면 치료되는 과정의 일부에요.”
나는 차근차근 환자의 보호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 중 몇몇은 옆에 있는 환자의 손을 매만졌고, 다른 누구는 내 이야기를 불신 가득한 눈으로 듣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있어 임상 실험은 어렵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무섭다는 생각과, 잘못 하면 이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아래에 깔려있다.
“뇌에 있는 단백질 축적을 제거하고 나면 더이상 뇌세포가 사멸되는 건 막을 수 있지만 한계는 분명해요. 아무리 축적된 걸 배출해 낸다고 해도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면 계속 생겨날 테니까요.”
“허매, 그럼 우째해야 하는교?”
“그래서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하려고 해요.”
나는 최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했다. 전문 용어들은 지우고 일상 생활에 접할 수 있는 단어들을 활용해서.
“우리 몸에는 질병이랑 연관이 있는 정보가 있어요. 그 정보를 유전자라고 하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대장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대장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져요.”
“거봐! 병에 걸리는 거 다 타고 나는거라니께? 날 때부터 수명은 정해져 있는거여!”
“그렇다고 이 유전자가 전부라는 건 아니에요. 생활 습관도 중요하니까요. 어쨌든 몸에서 특정 유전자가 발견되면 사전에 제거를 하는거에요. 가위처럼.”
가위질을 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자, 사람들이 오오, 하는 모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사람들은 줄기세포와 관련된 내용들도 이어서 물어봤고 최대한 설명했다.
방금까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 얼굴 위로 옅은 빛이 일었다. 어느정도 내용이 이해가 가다보니 두려움이 줄어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눈물을 닦았다.
“어유···진짜 빨리 치료되면 좋겠어, 진짜루.”
“아이참, 여보, 갑자기 왜 울고 그려.”
“의사 선생님, 진짜 이것만 받으면 치료되겠죠? 그러겠죠?”
그녀의 간절한 물음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있는 답. 하지만 확신을 담아 말해도 되는걸까.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할수 있는 말을 하기로 했다.
“…꼭 치료제를 만들겠습니다. 꼭이요.”
완전히 낫게 해주겠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이 연구를 통해 눈에띄게 변할거라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간절함 앞에서 도저히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할 순 없었다.
“학생.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할 테니까 부탁드릴게요.”
“저도요. 재촉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러니까···하여튼 간에 잘 부탁해요.”
사람들은 한마디씩 내게 말을 건네며 방을 빠져나갔다. 환자를 데리고 왔던 보호자는 걸음걸이도 이제 어색해진 환자를 부축하며 나갔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고 방 안에는 최강석과 김성진,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남았다.
“환자를 그렇게 다루면 안 되네.”
최강석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소파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말없이 그의 안내에 따라간 우리는 검은색 소파에 앉았다.
“환자에게는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만 해. 굳이 개인적인 바람이나 일어났을 법한 기대를 담아서 설명을 하다 보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비난과 원망을 다 받게 되니까.”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말을 했을 뿐이에요.”
문득 줄기세포와 관련해 크리스 교수에게 걸려 오던 사람들에겐 냉정하게 말해놓곤, 치매 앞에서는 조금 달라진 내 모습을 자각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다른 병도 아니고 치매니까. 그들이 원하는 게 곧 내가 원하는 것이었고 나도 모르게 다시 또 희망을 걸어버렸다.
최강석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임상 실험 대상자로 싸인까지 한 사람들이네. 여기서 자네가 한마디를 추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그리곤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던 명단 표를 내게 건넸다. 그중에는 총 1,924명의 환자 목록이 적혀있었다.
나이대는 만 65세부터 만 75세 사이의 성인 남녀로, 치매 중에서도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은 사람들이었다.
“우선 아밀로잽의 경우에는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 분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만큼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 약을 투약할 예정일세. 동시에 기존에 제공하고 있던 콜린에스테라제 억제제와 메만틴도 처방할 거고.”
알츠하이머병. 흔히 치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병이기도 했다. 콜린에스테라제 억제제의 경우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농도를 증가시키는 역할이었으며 메만틴은 반대로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과하게 축적되어 악영향을 주는 걸 방지하는 역할이었다.
나는 명단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최강석에게 물었다.
“하지만 기존에 처방되는 약 자체도 뇌에 부담을 주고 있는데 아밀로잽까지 투여하면 부작용이 일어나진 않을까요?”
“안 그래도 그 점을 걱정해서 아밀로잽 투여는 조금씩 늘려갈 예정이지. 게다가 아밀로잽의 경우도 경구 투여가 아니라 정맥 주사 형태로 바꿔서 말일세.”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김성진 교수가 대화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문득 내가 아밀로잽을 연구하던 것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아밀로잽은 실험 쥐의 척추관에 적정량을 주사하는 방식이었다. 척수를 둘러싸고 있는 뇌척수액에 약물을 전달하는 경막강 내 주사방식.
새삼 김성진 교수와 이재성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며 이 연구에 매달렸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아밀로잽을 더욱 발전시켜 임상 실험을 하는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모두가 노력하고 있네.”
김성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최강석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맞장구치듯 답했다.
“또 유전 데이터를 받기 위해 따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뭐, 자네가 그렇게 원하던 유전자 데이터도 받았겠다. 이제 자네가 할 일은 정해져 있네.”
“제가 할 일···.”
“나랑 김 교수는 여기서 단백질 제거에 초점을 맞출 테니까. 그 이후엔 뭘 해야 하는지는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영원히 진행되지 않을 것만 같던 실험이 한 걸음씩, 한 단계씩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주게나.”
최강석 교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마치 이 뒤는 나에게 맡긴다는 듯이, 든든한 미소와 함께.
*
‘…잘 할 수 있을까.’
한 차례의 커다란 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 나는 지체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쌍둥이들은 내 빠른 귀국에 퍽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처음 목적이 최강석과의 만남이었던 만큼 이젠 돌아갈 때였다.
쌍둥이들도 달라진 내 표정을 보더니 더는 붙잡지 않았다. 그저 “진짜 10년은 무슨, 이러다가 20년 뒤에 보자고 하기 없기야.”라며 툴툴대며 배웅해 줄 뿐이었다.
나는 집에 들르기 전 동아리실을 찾았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데이브가 좀 마음에 걸렸기에.
“데이브, 잘 지냈···?”
그러나 문을 연 곳엔 데이브가 없었다. 동양인 남학생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남학생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학생이기도 했다.
“…김진수?”
“김만덕? 김만덕 맞지? 진짜 김만덕?”
네모난 안경을 쓴 채 바싹 마른 얼굴로 죽어가고 있는 김진수가 나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김진수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치고 뭔가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마치 누가 강제로 시킨 것 같은 표정.
“어? 손 멈췄잖아?”
“헉!”
“5억 달러 카운팅 들어가 볼까?”
그리고 뒤에서 걸어 나오는 데이브. 녀석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알 수 없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채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뭐야, 빨리 왔네?”
“어···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그보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하하, 그게 말이지.”
데이브는 웃으며 간이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노트북을 가리켰다. 슈퍼진단키트와 관련해 작업을 할때마다 연결하던 데이브의 노트북이었다.
나는 노트북 위에 덕지덕지 붙여져 있는 스티커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데이브가 슬픈 표정으로 말을 했다.
“네가 준 유전자 데이터들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거든? 근데 그날따라 뇌가 안 돌아가는 느낌인 거야. 그래서 동아리실에서 끙끙대고 있는데 예전에 네가 해주던 말이 떠오르더라고.”
새로운 환경은 뇌에 자극을 준다! 그 말이 떠오른 데이브는 카페에 슈퍼진단키트와 노트북을 들고 향했고,
“역시 네 말대로 거기에 있으니까 막 머리가 뻥 뚫린 것처럼 완전 몰입이 되더라고? 그래서 이제 마지막 코드를 짜려는 순간!”
데이브가 웃으며 김진수를 가리켰다.
“저 녀석이 노트북에 커피를 쏟아버렸지 뭐야.”
“아하.”
“그래서 다 날라갔어.”
“아.”
처음엔 설마, 하는 느낌이었는데 다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데이브가 하는 일은 앞으로 내가 할 일의 원천이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지. 이건 존슨앤존슨에서 투자받고 있는 프로젝트이고, 너는 방금전 행동으로 5억 달러를 날려버렸다.”
“5억 아니지 않아?”
“씁, 내 시간과 노력까지 포함하면 5억은 싸게 친 편이지! 어쨌든 그래서 옆에서 손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키고 있었어.”
그렇게 된 일이었군. 그렇게 고개를 돌려 김진수를 바라보는데, 김진수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 마냥 애처롭고 불쌍한 눈으로.
“…미국은 어쩌다 오게 된 거야? 여행?”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만덕키이이임!!!”
갑자기 자리에서 뛰쳐나와 내 쪽으로 오는 김진수. 그 모습을 보고 데이브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야 해방되었다는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끌어안으려던 김진수를 피했다. 그러자 멋쩍은지 다시 큼큼, 거리며 원래의 태도로 돌아온 김진수.
“이번에 의대 합격하고 가족끼리 단체로 여행을 왔거든. 그리고 지금은 보시다시피 미국 문화를 체험하고 있는 중이지.”
“이게?”
“…조금 의사소통의 차이는 있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야.”
김진수는 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충 저녀석한테 내가 피해를 준게 맞긴 한데, 이 뒤의 일은 어디까지나 내가 선의로 도와주고 있다는 뜻.
하지만 난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김진수를 바라봤다.
“그런데 데이브가 한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엉?”
“저 5억 달러라는 수치에는 좀 과장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적어도 100만 달러는 투자 받을 예정이었거든.”
근데 너가 다 망쳐버렸네? 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더니 김진수의 표정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방금까지 아군을 만난 표정이었는데 알고보니 적군이었다.
김진수는 억지로 웃으며 “루, 룸메이트 동맹은···”이라고 말했고 나는 웃으며 “나 자퇴했는데?”라고 답했다.
‘그나저나 김진수는 결국 의대에 갔구나.’
뭔가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전에, 김진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배신자를 바라보듯 내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떠났다.
음, 장난이 너무 심했나? 고개를 돌려 데이브를 바라보니 그는 간이 침대에 앉아 예전 노트북을 열었다.
“…? 그거 고장 났다고 하지 않았어?”
“응. 고장 났지. 정확히는 마우스 터치 패드부분이.”
“…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데이브가 어깨를 으쓱이며 반응했다.
“아니, 아까는 고장나서 하던 거 다 날아갔다며?”
“조금 과장했지. 어떻게 그걸 다 날려? 중간 중간에 세이브 해두는 건 기본인데. 애초에 날려보낼 수도 없는 구조고.”
“…그럼 김진수는 왜 저기 있던 건데?”
“그야 심심하니까?”
악마다. 악마야. 나는 진심으로 경멸을 담아 데이브를 바라봤다. 하지만 데이브는 여전히 ‘무슨 문제라도?’ 라는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무리 김진수가 노트북에 쏟은 건 잘못이라지만 이 정도로 착취당할 일은 아니다. 보아하니 내가 전화를 걸던 날부터 계속 부려 먹은 것 같은데···나는 동맹이었던 시절, 그때의 정을 떠올려서라도 김진수를 빼내기로 했다.
“근데 난 안 와도 된다고 했어.”
“어?”
“봐봐, 막말로 지금 저렇게 갔는데 내일 안 오면 내가 어떻게 다시 찾아? 난 쟤 전화번호도 모르고 사는 주소도 몰라.”
“그럼···”
“지가 배우고 싶어서 계속 오는 거야. 여기.”
데이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곤 만지고 있던 노트북을 들어 테이블에 올려놨다. 헌 노트북과 새 노트북이 나란히 켜져 있었다.
“이 노트북도 걔가 새로 사서 온 거야. 어차피 이번 대학 입학 선물로 받았다나? 자기는 쓸 일도 없었다고 자기가 알아서 들고 온 거라고.”
“…흠.”
“난 강요한 적 없어. 진짜로.”
결백을 주장하는 데이브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보인 태도는 선을 넘었었다. 아무리 김진수가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싶어서 왔다고 해도 5억 달러를 가지고 협박하는 건 아니지. 초짜한테 코드를 직접 짜게하는 건 더더욱이고.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데이브가 웃으며 “이걸 보면 너도 나랑 똑같이 할 걸?”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 노트북을 가리켰다.
화려하고 현란한 코드들이 짜여져 있는 옛 노트북과, 그에 반해 심플한 코드가 짜여져 있는 김진수의 노트북.
“어느 쪽이 녀석이 짠 것 같아?”
“그야 아까까지 이걸 쓰고 있었으니까···아.”
“맞아. 이녀석 미X놈이야.”
데이브의 표현은 과격했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화려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코드를 보고 좋은 코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그와 좀 달랐다. 일반적으로 좋은 코드란 가독성이 좋고, 효율적이며, 오류를 잘 처리하는 걸 이야기했다.
중언부언식으로 길어지는 코드보단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하고, 효율적인 그런 코드.
김진수가 짠 코드가 그러했다.
“이 녀석 재능이 있다고. 프로그래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녀석이었는데 단숨에 이런 코드를 짤 수 있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녀석이 아니고 뭐라 그래?”
“얼마나 효율적이길래···그래도 전문가인 네가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물론 나도 같이 보고야 있지. 하지만 이 녀석은 대단해. 쓸모 있어. 이 정도 속도면 아마 이번 학기 안에 다 끝날걸?”
“…이번 학기 안에?”
두 눈이 커졌다. 적어도 반년, 아니 자잘한 오류까지 생각하면 그보다 더 오래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김진수의 노트북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데이브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래도 내가 심했어?”
“아니. 더 심하게 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볼 땐 네가 제일 나쁜 놈이야.”
그렇게 나는 내일도 마치 귀소본능마냥 동아리실을 찾아온 김진수를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룸메이트 동맹은 영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