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bullying and become a genius RAW novel - Chapter (45)
왕따 그만두고 천재합니다-45화(45/221)
45. 계산 (2)
45. 계산 (2)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냐. 아무것도.”
김진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분명 꿈을 꿨는데 기억이 안난단 말이지.’
깨고 나니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 그것만큼 찝찝한 것도 없었지만 더 매달려봤자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눈 앞의 문제를 바라봤다.
“이 문제를 풀 때는 sin과 cos이 서로 상보적 관계라는 걸 이해하면 풀기 쉬워.”
“상보적 관계?”
“sin이랑 cos을 각각 제곱해서 더하면 늘 1이 나오는 거 말이야.”
김진수와의 거래가 성사되고 난 후, 우리는 점호 전까지 수학 문제 및 다양한 문제를 푸는 시간을 가졌다.
[y=(sinx+1)/(cosx-2)의 최댓값을 구하시오. (0≤x≤2π)]간단한 삼각함수 문제였지만, 김진수는 좀처럼 풀지 못했다. 결국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게 종이를 밀었다.
“풀이 과정 좀 적어줘. 기왕이면 단계별로.”
“풀이 과정 적는 것보다 일단 개념부터 짚어야겠는데.”
“어차피 중요한 건 공식이잖아. 그리고 이거 기울기로 해서 푸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외웠는데.”
“수학 풀이를 외웠다고?”
“응. 과외쌤이 이런 문제 나오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기울기로 풀라고 했어. 그래야 빨리 풀린다고. 보자마자 공식이 떠올라야 한다던데.”
김진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지필고사의 경우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생각하는 시간보다는 바로바로 문제에 맞는 풀이법을 꺼내 쓰는 게 중요했으니까.
나는 문제를 풀다 말고 김진수를 바라봤다.
“그런데 전에도 궁금했던 건데, 이런 문제집은 다 어디서 얻어오는 거야?”
“뭐, 루트는 다양하게 있지. 대치동 일타 강사 강의도 있고, 족집게 강사님한테 개별적으로 수업 들을 때도 있고.”
김진수의 주말 일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오전에는 대치동에 있는 스타 강사에게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과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입시반에서 소수 정예 수업을 받는다. 그렇게 마치고 집에 오면 또 쪽집게 강사로 유명한 전문 과외 선생에게 수업을 듣는다고. 심지어 남는 시간에는 다음 학원 숙제를 하느라 1분 1초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언제 쉬어? 쉴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뭐… 이동할 때 잠깐 눈 붙이는 거지. 나보다는 부모님이 더 힘드셔. 내 학원비 감당하시느라 뼈빠지게 일하고 계시니까.”
김진수는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의 결말이 좋지 않았을 뿐이지만.’
그의 인생이 대학 입시에서 끝났다면 아마 이 방법은 좋은 방법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살아갈 날들이 많았다. 대학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김진수에게 문제 풀이법을 설명해 주다가 말을 멈췄다. 안 그래도 1시간이라는 짧은 과외 시간인데,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김진수가 조급한 듯이 재촉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고 말아? 빨리 이어서 설명해 줘.”
“이 이상은 너가 스스로 풀어야 해.”
“뭐?”
김진수는 문제를 잘 푸는 편이었다. 한국 과고에서 17등이라면 일반고에 갔을 때는 1등을 할 수 있는 성적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한국 과고에서 상위권에 들려면 그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서 풀어보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유형이 나오면 못 풀어.”
“그게 무슨 말이야. 빨리 시간 끌지 말고 알려줘.”
“시간 끄는 게 아니야. 결국 너가 원하는 건 문제를 풀어달라는 게 아니라 성적을 올려달라는 거였잖아? 근데 내가 문제를 풀어주면 너한테 남는 게 뭔데?”
김진수는 1시간 동안 내게 문제를 주고 풀이 과정을 적어달라고 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 풀이를 보면서 그는 암기하듯이 외웠다. 물론 그 과정이 내게는 득이 되기도 했지만, 이대로면 김진수에겐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나는 김진수와 나, 둘 다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싶었다. 김진수는 내 말에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생각을 해서 문제를 풀라고 하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나름 눈썹도 씰룩이면서 고개도 까딱거리면서, 그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사교육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잘 받은 사교육은 순식간에 학생의 성적을 올려줄 수도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던 것들을 배워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움’을 줄 뿐이었지, 그 이상은 학생 스스로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김진수가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길 바랐다. 스스로 문제를 찾고, 생각하고, 틀리기도 하다가, 결국 문제를 풀어내길 바라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내일 이 시간까지 풀이법 생각해 와.”
끄응, 소리를 내며 앓던 김진수가 인상을 쓰며 머뭇거리더니 결국 문제집을 덮었다. 그리곤 책상 서랍 안쪽에 있던 파일을 내게 건넸다.
“이거 과외쌤이 구해다 준 족보야. 과목은 물리. 나머지는… 일단 그거 다 풀면 줄게.”
“고마워.”
나는 김진수에게서 두꺼운 문제 파일집을 받았다. 스프링 제본된 문제집의 두께는 족히 200페이지는 넘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거 풀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걸?”
“음, 일단 한번 보고.”
나는 영어 수행평가 대비 교재를 펼치고 본문을 줄줄 외우는 김진수를 뒤로 하고 침대에 앉아 문제집을 쭉 훑었다.
회전운동, 관성모멘트, 각운동량 보존…그 밖에도 유체역학 문제와 단순 조화 운동 등 전생때 꽤나 고생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전생때 나는 여전히 이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해하는 건 내게 문제가 아니었다. 필요한 건 개념을 적용한 실전 문제 풀이.
‘내일 자습때 풀면 다 풀겠네.’
그러나 이미 문제 푸는데도 도가 튼 내게 있어 두려울 건 없었다. 나는 쭉 스트레칭을 한 뒤, 잘 준비를 했다.
평화롭고, 치열한 시험 준비 기간이었다.
*
“자, 다들 시험 유의사항은 숙지 했지? 전자기기 모두 제출하고 부정행위 발각되는 즉시 0점처리다. OMR카드도 종 치자마자 바로 걷어갈 테니까 나중에 마킹 못 했어요, 이런 소리 해도 어쩔 수 없다.”
박민철은 시험 유의사항에 대해 안내했다. 전생에서도 익히 들었던 내용이라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주위 아이들은 바짝 긴장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박민철이 조례를 마치고 잠깐의 시간동안 아이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눴다. 내용은 대충 나 공부 못했어, 저런, 나돈데. 와 같은 이야기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어? 어… 괜찮아.”
나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이인영을 보며 안부를 물었다. 이인성의 상태도 썩 정상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서로 극딜하고 있을 애들인데… 무슨 일이지?’
“이번에는 1교시가 물리네. 어때 공부 좀 했어?”
“어, 어.”
물리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여전히 떨떠름한 이인성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이인성이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근데… 우리 학교 의대 잘 보내는 편인가?”
“갑자기?”
“아니. 그냥.”
의대? 이인성은 입학하고 나서 의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기 초에 의대 가려는 과고생들을 비판한 적은 있을지언정 그 외에는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그렇게 평소와는 너무 다른 쌍둥이들의 모습을 뒤로한 채,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
기말고사는 너무도 잔잔하고 쉽게 흘러갔다. 중간고사를 뒤집어 놨던 풀이 위주의 고난도 문제는 없었다. 교사들끼리 단단히 협의를 한 모양이었다.
“문제 수가 미친 거 아니야? 이걸 어떻게 이 시간 내에 풀어?”
“내가 문제 푸는 기계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 대신 문제 수가 중간고사에 비해 훨씬 늘었다. 보통 24문제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30문제 정도였으니까.
1분 1초가 귀한 시험 때는 한 문제가 차지하는 심리적 압박은 어마어마하다. 시간이 없다는 생각은 현재 문제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난이도도 전체적으로 높은 축이다 보니 오히려 많은 학생이 또다시 벽을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내게는 벽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때, 이번 시험 잘 쳤어?”
“…나름?”
R&E 발표회가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시 모였다. 김진수가 묘하게 만족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 옆에서 최한별은 별 대답은 없었지만, 뭐. 최한별이 못 쳤을 리는 없으니까.
“그럼 이제 마무리 단계에만 들어가면 되겠다. 지금까지 정리했던 거 쭉 펼쳐놓고 한번 다듬어볼까?”
“좋아.”
생각보다 R&E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비록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인영은 전생 때처럼 그래핀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그때 당시의 이인영은 혼자였고, 어떻게든 팀을 살려내야 한다는 압박이 강했겠지. 그 압박감이 결국 성과를 이뤄냈던 거고.’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정신적 핀치에 몰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옆에서 그녀에게 힌트를 계속 넌지시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떠올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거 내가 발표하는 수밖에.’
이인영한테는 미안하지만, 이번 R&E 발표는 중요하다. 삼성의 눈에 들어 앞으로 지속적인 후원을 받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전생의 이인영이 삼성 측으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삼성이 한국과고에 지속적으로 지원해 준 걸 보면 분명 결코 적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이인영을 바라봤다.
“그럼 일단 R&E 발표 때는 그래핀의 특성 위주로 설명을 하고… 음, 결국 상용화할 제품 만드는 건 힘들겠네.”
“어쩔 수 없지. 그러게 내가 진작에 주제 바꾸자고 했는데 말이야. 누가 고집이란 고집을 부려서 말이지.”
김진수가 일부러 이인영을 보며 약을 올렸다. 딱히 악의가 느껴진다기보다는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미안.”
하지만 이인영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김진수는 순식간에 폐급이 되어버렸다. 장난으로 친 농담에 진심으로 반응을 해버리니 분위기는 더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졌다.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다들 시험 끝나서 피곤하잖아.”
“그, 그래! 그러자!”
“…그래.”
먹구름이 잔뜩 낀 팀원이 있는데 회의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결국 R&E 회의는 빨리 해체되었다.
나는 모두가 가고 남은 교실에 홀로 앉았다.
오늘은 시험이 끝난 금요일. 학생들이 집에 일찍 가는 게 허락된 날. 그 말은 외출도 허락되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고민 끝에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네, 함수연 연구원님. 김만덕입니다.”
이 먹구름이 잠깐 지나갈 소나기인지, 아니면 폭풍을 끌고 오는 먹구름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함수연에게 전화를 걸자, 그녀는 비교적 산뜻한 목소리로 만남에 응했다. 갑자기 잡은 약속임에도 불편해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번화가 프랜차이즈 카페에 도착하자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함수연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밥이라도 사드려야 하는데…”
“됐어. 고삐리한테 뭐 얻어먹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휴일을 희생해 연구를 봐주던 함수연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게 명목상의 이유.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LK머티리얼즈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평소와 다른 쌍둥이들의 태도. 우울하다 못해 땅굴까지 파고들려는 이인영의 모습은 낯설었다. 그리고 저번부터 느꼈던 묘한 이질감. LK머티리얼즈가 내 기억 속에 없는 것도 찝찝했다.
함수연은 퀭한 눈으로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리고 얼음까지 씹어먹던 그녀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발표 준비는 잘 되어가고?”
“네. R&E 끝나고도 종종 찾아뵐게요.”
“음… 그래도 되긴 하는데 아마 난 여기 없을 거야.”
얼음을 오독오독, 씹던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왜요?”
“연구소 옮길 거거든. 아마 이달 말이나 내달에.”
역시. 뭔가 있다. R&E중에 알게 된 함수연은 유능한 인재였다. 그런 그녀가 연구소를 옮긴다는 건 필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시장의 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정도의 기업이 사라지는 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함수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희한테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말이 아니거든. 그래핀 때문에 말이야. 물론 이해는 해. 기술 혁신 기업들 대부분이 기술로 먹고 사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여기는 그 한계를 벗어났어.”
함수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브레이크가 없는 회사의 끝은 파산뿐이야. 회사 운영의 기본은 리스크 관리니까. 아무리 혁신을 추구해도 안정적인 토대 위에서 진행해야 하는 법인데, LK머티리얼즈는…아직 꿈을 꾸고 있거든.“
그래핀에 대해 이야기하는 함수연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래핀은 꿈의 신소재가 맞다. 하지만 상용화를 하려면 적어도 10년, 아니 20년은 이르다. 그리고 LK머티리얼즈는 그 시간을 버틸 자본이 없다.
”손절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마냥 붙잡고 있는 게 능사가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함수연은 더이상 회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듯 보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감정은 씁쓸함뿐이었다.
간단하게 커피를 마시고 헤어진 나는 멀어지는 함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함수연의 심정은 어떨까. 그리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양재역으로 가주세요.”
LK머티리얼즈가 있는곳으로 가야만했다.
*
LK머티리얼즈의 회장, 이광용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하늘에 드리워져 낮이었지만 낮이 아닌 듯했다. 막막하고 뿌연 풍경은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핀 사업을 접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광용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2주 전, 그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 사람은 다름 아닌 LK머티리얼즈 연구소의 함수연이었다. 함수연은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은 채 답했다.
‘그래핀을 상용화하기에는 내구성이 큰 걸림돌이 됩니다. 물론 내구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이광용. 평소에는 온화한 성품에 가까웠지만 근래들어 그래핀 관련 프로젝트로 인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래핀 연구를 우리 회사가 가장 먼저 뛰어들었네. 저기 저 높은 기업들도 못 가진 기술들을 우리 이 LK머티리얼즈가 가지고 있단 말일세! 근데 포기? 이제 와서 이걸 다 포기하라는 말인가?’
그래핀이 세상에 나온 날, 이광용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소재라고. 대기업들이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기술을 사들이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그는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들을 절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그 예산을 모두 그래핀에 쏟아부었다. 정부의 R&D 사업도 따오고 각 투자기관에게 그래핀을 소개했다. 꿈의 신소재, 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돌아온 건 차디찬 현실이었다.
‘돈이 안 됩니다.’
함수연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CVD(Chemical Vapor Deposition), 화학기상증착을 이용하면 기존에 물리적으로 그래핀을 얻던 방식보다는 확실히 저렴하게 얻어낼 수 있습니다.’
CVD 방식. 고체 또는 필름을 형성하기 위해 화학 기체를 사용하는 공정. 이 방식을 이용해 얇은 필름, 코팅, 나노구조체 등을 제조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실현시키기에는 어려웠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업적인 문제 때문에.
‘이 시설을 유치하는 데만 최소 수백만 달러가 듭니다. 저희 회사 규모로는 불가능입니다.’
함수연은 입안이 썼다. 그녀는 필시 연구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그 반면 진짜 사업가인 이광용이 오히려 연구에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핀, 포기하셔야 합니다.’
이광용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포기하라고? 안 되지 안 돼.
그래핀에 투자한 돈만 수십억, 아니 수천억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그 돈은 허공에서 사라지는 거다.
그래, 원래 모든 혁신에는 도전이 필요한 법이니까.
이광용은 알고 있었다. 사업가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꿈의 신소재는 말 그대로 꿈과 같아서, 결코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회사채 발행, 진행시켜.”
투둑, 투둑.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꿈에서 깨기엔, 그는 아직 단잠에 취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