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bullying and become a genius RAW novel - Chapter (57)
왕따 그만두고 천재합니다-57화(57/221)
57. 여름학교 (5)
57. 여름학교 (5)
모든 생물체는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다. 살아남으려는 본능. 그리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야. 김만덕 쟤 전교 꼴등이래.’
‘뭐? 전교 꼴등? 한 줄로 찍어도 꼴등은 안 하겠다.’
첫 시험을 치고, 받아 든 성적표는 내게 현실을 알려줬다. 이 과학고에서 나의 위치, 그리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날을 기점으로 난 살아남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가 즐거워서 했다면, 과학고에 들어온 이후에는 살아남는다는 목적이 강했다. 물론 과학은 여전히 즐거웠지만… 즐거운 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1등이다’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하던 날. 달라진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들의 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깃들어 있었다. 부러움, 동경, 질투, 시기. 그리고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
그때 나는 어떤 감정이었나, 후련했었던가. 아니면…
“34등…이라는데?”
이인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역시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늘 1등만 해오던, 모의고사 올 백 신화를 썼던 애가 갑자기 34등이라니. 하지만 이 등수의 뜻을 모르는 이인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야, 이 분위기는. 34등이면 잘한 거 아니야? 거기 총 몇 명인데?”
“71명.”
“아…”
내 대답에 이인성이 짧게 탄식했다. 71명 중 34등이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등수였으니까.
“괘, 괜찮아…! 어차피 너희 이거 중간평가라며? 최종 평가랑 합산해서 겨울학교 학생 선발하는 거면 아직 기회 남은 거 아니야?”
“상위권은 안 변해.”
이재성이 무심하게 툭 말했다. 그 말에 쌍둥이들이 미간을 좁혔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상위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건 그들 역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71명 중 32명만이 겨울학교 입교 대상자가 된다. 만약 이게 최종평가였다면 나는 국제화학올림피아드 출전은커녕 다음 겨울학교에도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렇다면 반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가?
원래라면 나는 국제생물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수상한다. 화학의 경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국가대표로 선발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쌍둥이들과 이재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방금까지 신나게 이야기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졌다. 지금 이렇게 놀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심각해?”
하지만 그건 아니지.
“어?”
“중간 평가잖아. 인성이 말처럼 아직 최종 평가도 남아있는 거고.”
“하지만… 미니 테스트 때도 그렇고 상위권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치면 이번에 바뀐 거 아니야? 내가 내려간 대신 다른 애가 올라갔을 거 아니야.”
“어…그런가?”
나는 눈앞의 떡볶이를 집으며 말했다. 아직 식지 않아 김이 나고 있었다.
불안하지 않냐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아직이다.
“아직 뒤집을 기회는 남았어.”
냠. 떡볶이를 입에 넣으며 친구들을 바라봤다. 자신들 등수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나보다 더 우울해하고 있는 녀석들.
하지만 녀석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 거니까.
짧은 일탈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여름학교로 돌아왔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알차게 놀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에 있을 최종 평가를 위해.
*
이인영은 기숙사에 들어와 생각에 잠겼다. 책상에 앉아 일반화학 원서를 펼쳐놓은 상황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녀의 등수는 4등. 안정적으로 국가대표에 들려면 계절학교 시험 때마다 3등 안에는 들어야 했다. 국가대표는 총 4명만 선발하니까. 하지만 지금 이 질문 속 대상은 이인영이 아니었다.
처음 김만덕을 봤을 땐 재수 없는 애라고 생각했다. 화학을 제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화학에서 1등한 것도 그녀의 자존심을 긁기 충분했고, 집요하게 ‘물화생지 중에서 뭐가 제일 좋아?’라고 물었을 때마다 김만덕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생물’이라고 했다.
한 번쯤은 빈말로라도 화학이라고 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외골수 같은 모습이 마냥 싫게만 느껴졌던 건 아니었다. 누가 그리 묻는다면 이인영 역시 예외 없이 화학이라고 답했을 테니까.
사락사락, 종이를 넘기자 전에 김만덕이 어려워했던 단원이 눈에 보였다.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도서관에서 스터디를 하면서 서로 어려워하는 부분을 짚어줬기에 알 수 있었다.
이인영은 화학을 좋아한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제일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화학을 좋아하는 만큼…
“…도서관에 가봐야겠어.”
분명 김만덕이라면 밤늦게 도서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김만덕은 가장 여유로우면서도 또 가장 독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학생들은 김만덕이 천재여서, 그래서 전교 1등을 하는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글쎄. 가장 곁에서 봐온 이인영은 김만덕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고 있었다. 주말에 학교에 가면 늘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었던 애니까.
그렇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원서와 혹시 모를 학원 교재들도 한 아름 챙겨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메시지라도 보내둘까 싶었지만, 아마 한번 공부에 빠진 김만덕은 핸드폰을 열어볼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숙사 계단을 내려가는데, 익숙한 머리통이 하나 보였다. 그 머리통도 이것저것 챙겨 백팩에 가득 넣고 이동중이었다.
“…뭐야.”
“뭐.”
“어디 가는데?”
“…알아서 뭐하게.”
이재성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인영은 이재성을 보는 순간 자신과 비슷한 동족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동족의 생각을 추론한 결과,
“너도 도서관 가?”
“…신경 쓰지 마.”
“넌 김만덕 어디 있는지 모르지?”
난 아는뎅. 이인영이 약 올리듯이 말했다. 물론 이재성이 도서관을 가는 이유가 김만덕 때문이 아닐 수도 있지만, 글쎄 이인영이 볼 때 거의 100% 확률이었다.
“…같이 가든가.”
“싫은데? 내가 왜?”
메롱. 이인영은 이재성을 앞질러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재성도 질세라 빠른 걸음으로 이인영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김만덕을 향해 자신들이 가진 교재, 혹은 노트들을 품에 안고.
*
“지난 2주간 여름 학교는 잘 보냈나요? 이번 최종 평가를 치르고 난 뒤에는 폐교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다들 시험 종료 후 밖에서 대기했다가 같이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고 1반 조교 박상명이 늘 그랬듯이 오늘 일정에 대한 안내를 시작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떨리는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문제수는 총 18문제입니다. 중간평가 때와 동일하게 시험지에 작성해서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시험시간은 총 2시간입니다.”
이윽고 타이머가 울리고, 시험지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종 평가가 시작되었다.
첫 장을 넘기자 문제가 바로 나왔다. 전지 전위와 관련된 문제.
이인성이 틱틱대면서 열심히 알려주던 문제였다.
중간평가 등수가 발표되던 날. 우리는 여름학교로 돌아왔고, 기숙사 앞에서 헤어졌다. 이인영은 여전히 착잡한 표정을 한 채 헤어졌고 같은 방을 쓰는 이재성도 부쩍 말이 줄어들었다.
‘어디 가게?’
‘아. 도서관 좀 가려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좀 있어서.’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것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도서관이 좀 더 편했다. 넓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자극이 되기도 했고. 이재성은 그런 나를 보며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삐죽거렸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되는데.’
‘어?’
‘난 화학 졸라 쉬우니까.’
뭐지. 이재성은 큼큼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자뻑을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물음표가 띄워졌지만 이내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화학 모르는 거 물어봐도 다 대답해 줄 수 있다고.’
짜식…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틱틱대지만 이재성 나름대로 아까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매일 연구 가지고 악랄하게 비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럼 전기화학 파트 좀 알려줄래? 여기 전위차 계산하는 게 좀 헷갈려서.’
이재성은 생각보다 덜 틱틱대면서 알려줬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며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 3번 문제들도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그렇게 쭉 풀어가던 중, 또 익숙한 문제가 나타났다.
‘이거 방사성 붕괴 관련 문제거든? 학원에서 변형 문제로 그래프 쫙 뽑아서 정리해 놨으니까 한번 풀어봐.’
‘이거 나 풀어봐도 돼? 너희 학원에서 어렵게 구한 거 아니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인영이 찾아왔다. 그 뒤에 이재성도 뒤따라왔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고르던 둘은 나를 발견하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스터디실로 연행.
이인영과는 원래 스터디를 하던 사이긴 했지만 평소랑은 좀 달랐다. 그전에는 서로가 아는 내용을 적당히 공유하는 느낌이었다면 약간의 필사적임도 느껴졌다. 이재성도 못지않았고.
‘괜찮아. 어차피 문제는 풀라고 있는 건데 뭐. 누구나 풀면 되는 거지. 그리고…’
‘?’
‘너 국가대표 할 거라고 했잖아. 그럼 우리 이미 팀인 거 아니야?’
이인영은 그 말을 하고는 고개를 홱 돌려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평소 낯부끄러운 이야기는 죽어도 안 하는 애인데, 이번엔 좀 무리한 건지 귀가 빨개져 있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세 명이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때로는 각자 문제를 풀기도 하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면서.
혼자 공부를 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혼자 공부하는 것도 물론 좋았다. 깊게 몰입하고 집중하는 느낌. 하지만 같이 공부한다는 건…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친구는 좋은 라이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제가 될 수 있으니까. 이인영은 나와 이재성을 보면서 화학에 대한 열정을 더 불태웠고, 이재성은 나를 보면서 치매 연구 관련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나 역시도 이인영과 이재성을 보면서 더 불타오르는 게 있었고.
‘또 에어컨 밑에 앉아서 골골대지 말고! 담요라도 덮고 있어.’
‘…단 거 먹어. 포도당은 뇌 굴러갈 때 필요하니까.’
단순히 라이벌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모두를 쓰러뜨리고 나 혼자만 이기려고 했던 전생의 나는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자, 시험 종료 10분 전입니다.”
시험 종료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부지런히, 열심히, 또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풀었다. 단순히 나를 위해서 문제를 풀었었다면 지금은 그 느낌이 달랐다.
나는 모두와 함께, 더 오래 있고 싶었다.
이 아이들과 함께 겨울학교에 들어가고, 고 2반 계절 학교들을 수료해서 최종적으로 국가대표까지.
그래서 환하게 웃으면서 금메달을 모두가 손에 들고 있는 모습까지.
“자, 시험 종료되었습니다! 다들 손 아래로 내리고 대기합니다.”
조교의 말과 함께 모든 학생이 손을 내렸다. 몇 학생들이 계속 풀이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이내 조교의 제지에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중간 평가 때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인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는 게 느껴졌다. 다 풀어도 나가지 않고 아마 수십 번을 검토했으리라.
그렇게 조교가 시험지를 확인하는 동안 이인영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말없이 웃었고, 이인영도 웃었다.
“네! 이제 이동하셔도 됩니다. 10분 휴식했다가 다 같이 폐회식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학생은 엎드려 울고 있었고, 몇 명은 낙담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잘 쳤냐?”
“응.”
이재성도 어느새 옆으로 와서 넌지시 물어봤다. 짧은 내 대답에 녀석도 안심한 눈치였다. 그렇게 우리는 짧게 소감을 나눈 뒤 폐교식을 하러 과학관으로 이동했다.
교장 최형수는 입교식 때 입었던 정장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긴 연설을 이어 나갔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수고했다. 너희는 대한민국 화학의 미래다.”였다.
가볍게 폐교식을 마치고 기숙사에서 짐을 챙긴 채로 모였다. 우리는 [2008 화학 올림피아드 여름학교 폐교식]이라고 적힌 플랜카드 앞에 섰다.
이인영은 아버지 이광용의 차에 타고 집으로 갔다. 이재성 역시 이재형이 몰고 온 차에 타고 집으로 갔다. 둘은 헤어지면서 담백하게 “다음에 보자.”라고 이야기했다.
“어이~ 미래 화학자님~”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니 생물이 제일 좋다면서 화학 올림피아드 치러 간다길래 난 또 화학으로 바꿨나 했지.”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생물도 치러 간다고 전에 말했었잖아요.”
나는 나를 데리러 온 박성민의 차에 탔다.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고 했지만 “어차피 지나가던 길이니까.”라고 말하는 박성민 덕에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박성민은 차에서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애들은 어떤지, 화학 난이도는 어땠는지, 여름 학교에 있으면서 어떻게 한 통도 전화나 문자를 안 할 수 있는 건지.
나는 그런 질문들에 하나씩 대답해 주면서 장난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고, 나는 짐을 내린 후 가볍게 인사를 했다.
박성민은 떠나기 전, 창문을 열고 나한테 물었다.
“그래, 지금 마음은 어때?”
지금 마음이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3주라는 짧은 여름방학이 지나갔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냈고, 매일 같이 연구실에 살기도 했고 여름 학교 기숙사에서 화학책을 붙들며 살았다. 그리고 짧지만 다 같이 놀기도 했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후련한 거 같아요. 진짜로요.”
후회 없이 보낸 여름방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