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bullying and become a genius RAW novel - Chapter (58)
왕따 그만두고 천재합니다-58화(58/221)
58. 체험학습 (1)
58. 체험학습 (1)
3주라는 짧은 방학이 지난 후, 학교라는 전장에 돌아온 아이들의 표정은 꽤나 비장했다. 처참한 1학기 성적표를 받아들고 방학을 맞이했으니, 뭐.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하이. 만덕쓰”
“안녕.”
이인성과 이인영이 나를 보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인영은 2주동안 내리 봤으니 익숙했고, 이인성도 방학 중에 한번 봐서 그런지 어색한 느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 방학을 했었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들었다.
“벌써 2학기라니. 시간 참 빠르네.”
“그래도 2학기에는 체험학습도 있고 축제도 있어서 다행이야… 1학기 때는 진짜 공부, R&E, 공부밖에 없었다고!”
미간을 찡그리며 질색하는 이인성. 그의 말대로 한국과고의 1학기는 좀 스파르타 성향이 강했다면, 2학기는 조금 자유로웠다. 큰 행사들이 굵직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체험학습은 연구실 탐방이겠지?”
“응. 2학년은 그때 수학여행 간다던데. 그것도 해외로.”
“아, 부럽다아아아-”
부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이인성.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체험학습이라고 불리는 행사는 연구실 연계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진로와 관련된 연구실을 탐방하고 간단한 소감문을 작성하는 체험학습이었다.
“너는 어디 갈 거야? 카이스트? 서울대? 아니면 포스텍?”
이인영의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전생이었다면 바로 카이스트를 가겠지만, 이미 나는 그곳에서 구르고 온 상황이었다. 굳이 다시 카이스트를 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아직은 먼 체험학습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교실 문을 열고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최한별이었다.
최한별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순간적으로 반이 조용해졌다. 그녀의 등장은 1학기 동안 같이 지내 온 반 친구들에게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조용하게 자리로 온 최한별이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최한별하고는 R&E도 한 사이고, 꽤 대화도 나름 많이 한 사이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한별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최한별이 나와 쌍둥이들이 모여있는 쪽을 쳐다봤다. 이인영은 원래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보니 그렇다 쳐도, 이인성은 최한별 앞이라 그런지 입도 뻥끗 못 하고 있었다.
“…”
그렇게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 앉는 최한별.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가 같이 흔들렸다. 강아지 키링이었다.
“어, 그거…!”
“!”
나도 모르게 아는 척을 해버렸다. 그러자 최한별이 조금 빠른 속도로 내 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눈이 이전보다 조금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리켜 버린 손가락을 살짝 후회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 줬던 거 맞지?”
“…응.”
최한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신촌 오락실에서 사격 경품으로 받았던 강아지 키링이었다. 우연히 만난 최한별한테 건넸었지만… 솔직히 그녀가 이걸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메이커 가방에 달려 있는 싸구려 키링이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데.’
키링 때문에 가방이 짝퉁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최한별은 그런 거에는 무감각한지 그냥 키링을 끼워둔 상태였다.
“뭐야? 무슨 키링인데?”
이인영이 고개를 돌려 최한별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가방에 걸린 키링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저거 너가 오락실에서 사격하고 경품으로 받은 거 아니야?”
“만덕쓰… 우리 좀 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윽고 키링에 대해 알게 된 이인성도 나를 바라봤다. 쌍둥이 두 명 다 내게 ‘대체 저게 뭔 일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라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날 핸드폰 가지고 오다가 우연히 만난 게 다야. 그때 키링 준 거고.”
“우연히 만났다고? 근데 키링은 왜 주는데?”
“어… 난 필요 없으니까?”
이인영이 내 대답을 듣고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입을 삐죽였다. 이인성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차마 최한별이 있어서 그런지 쉽게 질문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최한별과 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최한별은 책을 다 꺼내고 난 뒤, 평소처럼 문제집을 꺼내 조용히 자습을 시작했고 그 결과 반 분위기도 다시금 조용해졌다.
적막을 깨고 드르륵, 문이 열렸다.
“뭐야. 왜 다들 조용한 건데?”
반에 들어온 담임 박민철이 엥? 하는 표정과 함께 물었다. 그는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새학기 첫날을 기대했겠지만, 그가 마주한 건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반 아이들이었다.
“새학기 첫날부터 무리하면 연말에 가서 골병든다. 뭐든지 템포 조절이 중요한 거야, 템포 조절이. 그런 의미에서 책 펴라.”
“아니 방금까지 템포 조절이 필요하다면서요.”
“그 템포는 자습 템포고, 수업 진도는 빨리 나가는 편이 좋아.”
박민철은 앞으로 있을 수행평가와 굵직굵직한 대회들을 설명하면서 교재를 펼쳤다.
“다들 알겠지만 2학기때는 물리Ⅱ 내용을 배운다. 운동과 에너지, 전기와 자기장, 원자와 원자핵. 딱딱 짝도 잘 지어져 있다 그치? 한학기동안 물리Ⅱ만. 심플하지?”
웃으며 칠판에 지필고사와 수행평가 반영 비율을 적는 박민철. 그러나 그를 따라 웃는 학생은 없었다. 말이 심플이지 물리Ⅱ의 난이도는 악명높았기 때문이다.
과학고 수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렵고 복잡한 내용들이 등장했다. 교과서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학 교재의 일부를 발췌해서 수업을 하거나 아예 개별 교재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교사도 있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박민철은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물리Ⅱ의 첫 단원. 운동과 에너지였다.
“운동과 에너지 단원에서는 중력장 내의 운동, 만유인력에 의한 운동, 단진동, 열역학의 법칙 등에 대해서 배운다. 이미 물리Ⅰ때 어느 정도 배웠던 개념이 다시 재탕되니까 따라오는 건 별로 안 어려울 거다. 그리고 다들 학원에서 한 바퀴 돌리고 왔을 테고.”
그 말과 함께 박민철은 내쪽을 흘긋 쳐다봤다. 아마 학교 측에서 지급되는 장학금도 있겠다, 이번 방학 때는 학원을 다녔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학원에 다닌 적은 전생 때도, 지금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교육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김진수한테 문제집이 없었다면 내가 전교 1등을 할 수 없었을테니까. 단지 굳이 학원에 갈 메리트가 없었을 뿐이다.
이미 내가 모르는 개념은 없다. 전생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덕에 뇌 어딘가에 어렴풋하게 개념이 남아있었다. 관련된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듯이 줄줄이 내용이 떠오르곤 했다.
‘학원을 굳이 다닌다면 문제 때문일텐데… 내가 가진 돈으로는 김진수가 가진 문제보다 더 좋은 걸 얻을 수 없어.’
목동이 낳고 대치동이 키운 아들. 목동의 학원가에서 한국과고 입시를 준비한 김진수는 한국과고 합격 후, 의대 전문 입시학원이 있는 대치동으로 터를 옮겼다. 가끔씩 그가 들려주는 살인적인 스케쥴을 들을 때면 말을 잃고 사교육 시장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단과 강좌에만 수백만 원이라는데, 내가 장학금으로 받는 돈은 월 50만 원이다. 물론 방학동안 연구실에 일하면서 받은 돈이 있긴 하지만 지금 쓸 돈은 아니었다. 훗날을 위해 잠깐 기다릴 시기.
“다들 벡터 개념은 알고 있을 테니까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벡터는 크기와 방향성을 갖는 것으로 흔히 우리가 속도와 속력의 차이를 설명할 때 벡터와 스칼라로 나타내지. 한번 설명해 볼 사람?”
박민철의 말에 여러 학생이 손을 들었다. 다른 학교였다면 분명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겠지만, 과학고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걸 좋아했다. 박민철은 손을 든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김만덕. 대답해 봐라.”
아니, 저 손 안 들었는데요.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박민철을 바라봤다.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서 안달 난 학생들을 제쳐두고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굳이 고르다니.
“속력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스칼라 값입니다. 그에 반해 속도는 크기와 방향 모두 갖기 때문에 벡터입니다.”
“잘 설명했다.”
내 말이 끝나자 박민철은 칠판 위에 수직선을 그리더니 속도와 속력의 차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벡터의 합성. 사실 이 부분에선 딱히 어려운 내용도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쉬운 축에 들었다.
“자, 이제 지금까지 배웠던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아주 간단하고 쉬운 문제다.”
박민철이 칠판에 그림을 하나 그리기 시작했다. 추의 진자 운동을 그려놓은 걸로 시작점A, 최하점B, 현재 위치C가 표시되어 있는 간단한 모식도였다.
“가만 보자…우리 반에서 물리 전공이 누가 있었더라?”
그 말에 최한별이 살며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인성이 번쩍 손을 들었다.
“김만덕, 알짜힘이 뭔지 설명해봐라.”
“…여러 힘이 물체에 작용할 때, 그 물체에 작용하는 전체 힘을 알짜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 문제의 B에서의 알짜힘에 대해 말해봐라.”
“…B는 방향이 변하는 순간이므로 B에서 알짜힘은 장력의 크기가 중력보다 큰 상황이므로 양수입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 담임 박민철한테 찍힌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물리 전공들 앞에서 나를 갈굴 이유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갈군다고 쉽게 갈궈질 성격은 아니었다.
“단진자 운동의 경우 알짜힘이 0이라면 추가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계속 진자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구심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알짜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깔끔한 내 설명에 박민철은 더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칠판에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긴긴 수업이 끝나고, 내 쪽으로 애들이 몰려왔다.
“역시 전교 1등 클라스. 학원은 안 다닌다고 했지? 그럼 미리 예습해 온 거야?”
“물리는 진짜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감이 안 와…”
“근데 담임 왤케 만덕이만 갈굼?”
어느덧 1학기 때에 비해 조금은 친해진 애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담임의 이상행동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나 선배한테 들었어. 물리쌤 중 한 명 별명이 전교 1등 킬러라던데.”
“킬러?”
“응. 전교 1등한테만 끈질기게 질문한대. 대답 못 하는 순간부터는 안 물어본다던데?”
그 순간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 때도 박민철은 이런 식으로 집요하게 질문을 하곤 했다. 단지 그 질문의 대상이 내가 아닌 최한별이었을 뿐이다.
“뭐야. 그러면 그냥 일부러 모르겠습니다. 하고 넘어가면 되겠네?”
“근데 또 일부러 모른다고 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내서 벌 청소 시켰다던데? 괘씸죄라면서.”
“아니, 대체 어쩌라는 거야.”
내 말이. 아이들은 담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나를 보며 동시에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이러나 저러나 전교 1등한테만 하는 질문이라니까, 나한테 질문할 일은 없겠지-하면서. 복잡한 표정을 한 반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금세 다음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그렇게 수업, 쉬는 시간, 수업의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어느새 특별반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들어간 곳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하이.”
“…친한 척 하지마.”
“그냥 인사한 건데.”
“…말 걸지 마.”
반가운 나와 달리 곽진환은 여전히 재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한껏 누그러진 모습이었기에 녀석을 대하는데 있어 어려운 건 없었다.
곽진환의 비밀, 방송 조작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학생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경계를 받고 있는 듯했지만, 동시에 녀석이 가장 솔직하게 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곽진환은 저번 특별반 수학 수업때 풀이 과정을 한 줄이나 적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진환아… 그걸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이게 단데요.’
물론 칠판 앞에 풀이과정이랍시고 꼴랑 한 줄만 쓴 그를 보며 수학 교사 오석훈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지만 그걸 지켜보는 나는 감개무량했다.
여러분 우리 애가 드디어 풀이를 적어요…!
아이가 처음으로 수를 셀 때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그만큼 곽진환이 연기하던 가면을 한 꺼풀 풀어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동시에 그의 책가방 속에 늘 들어있는 ‘정보 기하학’ 원서도 나를 흐뭇하게 하기 충분했고.
나는 곽진환의 가방 안에 있는 ‘정보 기하학’ 책을 바라봤다. 녀석은 내 시선이 향하는 쪽을 보더니 홱 지퍼를 닫았다.
‘물론 곽진환의 연구가 지금 당장 나한테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할 일은 아니지.’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학문이 갑자기 필요해지는 때가 있다. 설령 지금 겉으로 볼 때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여도 곽진환의 연구가 다른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은 연구가 내 연구에 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다.’
이전의 연구를 바탕으로 내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설령 유명한 과학자의 논문이 아니더라도,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시시한 논문에 그치더라도 내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거인이었다.
“얘들아 오랜만이야. 1학기 때는 잠깐 봤었는데 이젠 자주 보겠네. 잘 부탁해.”
2학년 생명과학 수업을 맡고 있는 송형민이 웃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 내에서 그가 화를 내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답게 그는 늘 웃는 상이었다.
‘전생 때도 이런 이미지이긴 했지.’
내가 특별반에 들어온 건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난 후.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후였다. 특별반 수업은 집중 이수제로 진행된다. 한마디로 모든 과목을 똑같은 시수로 돌아가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리와 수학, 화학과 생물처럼 관련 있는 과목들을 묶어서 집중적으로 수업한다는 소리였다.
‘1학기 때는 물리랑 수학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2학기 때는 화학이랑 생물 위주랬지.’
전생 때 처음 특별반에 와서 들었던 생명과학 수업.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내용보다는 그가 처음 나를 보고 한 말 때문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네?’
웃으며 하는 말이었고, 물론 상황이 장난스런 분위기인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저 웃는 얼굴 뒤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되기에 더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고.
송형민은 출석부를 보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사실 생명과학 수업이라고 하면 암기 위주의 수업을 떠올리는 게 당연하긴 해.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배우는 것 중에 암기가 필요 없는 학문이 있니? 수학도 공식을 모르면 아예 못 푸는 문제들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평범한 초등학생한테 적분 기호를 보여주면 ‘이게 뭐에요?’하고 말겠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는 송형민.
“그나마 생명과학에서 어려운 파트가 있다면… 그래. 만덕이 너는 생명과학에서 뭐가 제일 어렵니?”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묻는 송형민. 그러나 나는 순간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생명과학, 그러니까 생물이 어려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지금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연구처럼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해가는데 있어서 생물처럼 어려운 학문은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준의 생명과학은 내게는 너무 쉬웠다.
생각, 생각하자. 여기서 ‘다 쉬운데요?’ 라고 말하는 순간 분명 편치 못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게 눈에 선했다.
‘나는 지금 평범한 고등학생 1 이다. 나는 지금 생명과학 책을 처음으로 펼친 거다. 제일 어려운 단원, 제일 어려운 개념, 제일 복잡해 보이는… 내가 제일 어려워 하는…’
아. 그 순간 한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주제.
“유전이요.”
생명과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을 멀어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단원이었다. 단순히 세포 분열이나 유전 법칙, DNA 염기를 공부하는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개념이 어렵다기보다는 계산 문제로 변형해서 나올 때 가장 높은 오답률을 자랑했다. 실제로 생명과학에서 만점을 받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틀리는 문제가 유전 단원이었으니까.
“하하. 맞아. 그래서 지금부터 유전 문제를 좀 풀어보려고 해.”
“네?”
“자, 다들 기본 풀이 방법은 알고 있지?”
송형민은 준비해 온 시험지를 꺼냈다. 출석부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시험지가 들어있었다.
“시간은 15분. 문제수는… 10문제야. 어때 풀 만하지? 1문제당 1분 넘게 시간이 있네.”
생긋 웃는 모습이 비열해 보인다. 유전 문제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조건을 따지며 풀어야 한다. 한마디로 각각의 경우의 수를 맞춰본 후 그 다음 단계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
1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여간 다들 참…’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하고자, 앞으로 있을 수업을 좀 더 원활히 이끌고자,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이렇게 학생과 교사간의 신경전은 유구한 전통인 듯했다. 보통이라면 교사의 승리로 끝나며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겠지만…
“자, 그럼 지금부터…시작!”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생물에서는.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