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bullying and become a genius RAW novel - Chapter (66)
왕따 그만두고 천재합니다-66화(66/221)
66. 각자의 사정 (2)
66. 각자의 사정 (2)
“아, 아니!! 그런 걸 왜 미리 말을 안 하는데요!”
“아니, 말해봤자 뭐해. 괜히 청승 떨고 그럴 바에 그냥 깔끔하게 떠나는 날 말해주면 되는 거지.”
“떠나는 날이 내일이잖아요! 그럼 내일 말해주려고 했던거에요?!”
일요일 오전. 나는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박성민부터 찾았다. 그의 자리는 이미 상자들로 인해서 정리가 다 끝난 상황이었다. 나는 산처럼 쌓여있는 연구 파일들과 각종 책을 보며 배신감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같이 연구한 시간이 있는데. 이걸 말도 안 하고 그냥 갈려고 했다고?’
정확히는 배신감보다 서운함에 가까운 마음이었지만, 박성민은 오히려 태평했다.
“에헤이, 누구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비행기만 타면 올 수 있어.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건 너무하잖아요.”
“미안하다, 미안해. 그 대신 오늘 맛있는 저녁 사줄게.”
장난스레 어깨를 툭 치는 박성민. 그는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진지할 때는 한없이 진지해지다가도 정작 자기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이렇게 장난스러워지는 모습이.
박성민과 알게 된 건 이번 생이었다. 전생 때는 내가 특별반에 2학기가 되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는 이미 박성민이 미국으로 간 뒤였다. 그러니 박성민과의 인연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인연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더 뜻 깊었다.
“김성진 교수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그리고 그 인연은 내 전생의 인연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김성진이 연구소 탐방을 허락해 줬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박성민은 내 말에 시선을 피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누구? 김성진?”
“모르는 척하셔도 소용없어요. 그날 두 분 같이 가는 거 봤거든요.”
“이야~ 만덕이 눈 좋다. 시력 2.0이디?”
“말 돌리지 마시구요.”
박성민은 머쓱한지 허허 웃었지만, 집요한 내 질문 끝에 결국 실토했다.
“대학교 동기. 근데 연구실 탐방은 내가 부탁한 거긴 해도 너랑 같이 연구한다고 한 건 걔가 직접 정한 거야. 나는 거기에 전혀 개입한 거 없다?”
“연구실 탐방은 왜 부탁하신 건데요? 이제 떠나시니까요? 언제부터 복귀 스케쥴이 잡혀있었는데요?”
“하나씩 질문해다오…”
물음표를 연달아 쏘아대는 탓에 박성민이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우리는 잠시 연구실을 빠져나와 연구소 중앙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이동했다. 연구원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조성된 휴식 공간이었다.
다행히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햇빛이 그나마 잘 드는 창문 쪽에 앉았고, 박성민은 내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복귀 날짜는 사실 한국에 들어오는 날부터 정해져 있었어. 원래는 8월에 돌아가기로 했는데 있다 보니 좀 늦어져서.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가게 된 거야.”
8월이라. 8월이면 박성민이 전생 때 없었던 이유도 납득이 갔다. 원래라면 8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을 테고, 2학기 수업을 아예 맡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변수가 생겼고 그의 귀국 날짜는 늦어졌다.
그리고 그 변수는 다름 아닌 ‘나’였다.
“그래도 8월에 네가 연구실에서 여러가지 실험을 도와준 덕에 유의미한 데이터들을 많이 수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거 정리하다 보니 좀 더 늦어진 감도 있고. 게다가 네가 워낙 바쁜 몸이었잖니? 그래서 괜히 신경 쓰게 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어.”
“연구실 탐방은요? 왜 하필 김성진 교수였어요?”
“응?”
내 질문에 박성민이 미간을 좁히더니 찬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박성민은 뇌과학 분야에서 명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관련 분야와 연관된 인맥도 많을 것이고, 꼭 김성진이 아니더라도 뇌 관련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연구실쯤은 쉽게 부탁할 수 있었을터다.
“뭐랄까… 제일 너랑 비슷한 놈이라서?”
“예? 저랑 김성진 교수님이랑요?”
으엑, 하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 모습을 본 박성민이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 뭐야. 지금 김성진 교수랑 비슷하다고 했더니 인상 쓴 거냐? 이거 그대로 전해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저랑 교수님이랑 전혀 안 비슷하던데요.”
김성진 교수는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좀 부족하다. 말도 필요한 것 외에는 하지 않고,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게다가 유머 감각도 나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나와는 비슷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성격이 닮았다는 게 아니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둘이 비슷하다는 거야.”
“연구요?”
“그래. 걔도 하나 눈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고 그것만 파거든. 게다가 너도 아마 들었을 텐데? 걔 연구 분야가 뭔지.”
“…치매 아닌가요?”
내 말에 박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 김성진에 대해 듣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전생 때 종종 같은 연구팀에서 지도 교수인 김성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었지만, 나는 그런 자리가 불편해서 일부러 자리를 뜨곤 했었다.
“맞아. 물론 내 주변에 치매 관련해서 연구하는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야. 미국에서 연구하던 친구놈 중 몇몇은 한국에 들어와서 교수하고 있기도 하고. 근데 왜, 김성진 걔가 불편해?”
“불편한 게 아니라…”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김성진이 불편한 건 아니다. 싫은 것도 아니다.
‘내가 다시 그와 연구를 한다고 한들… 전생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까?’
전생의 나는 연구팀에서 쫓겨났다. 만약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라는 가설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그리고 그 일이 내가 연구소에 쫓겨날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라면.
“제가 교수님 밑에서 연구를 하는 게 맞는 걸까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연구팀에서 쫓겨난 일은 엄청난 트라우마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일을 기점으로 과학계에서 아예 발을 빼버렸으니까.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공사판에 들어섰고, 몸이 힘드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이 줄어드니 사람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다시 연구에 뛰어든다거나,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서 계단에서 굴렀지. 그리고 아마 그 끝은… 죽음이었을 거고.’
문득 내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래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건강해진 상황이었다면. 나는 김성진 교수를 다시 찾아갔을까?
“뭐야. 왜 갑자기 무섭게 혼자 웃는데?”
“아뇨. 그냥 재밌는 상상을 해서요.”
“하여간 싱겁기는. 어쨌든 니가 고등학생이라서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충분히 이해하는데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어떻게 보면 너 나랑도 같이 연구했다? 단순히 fMRI에서 뇌 영상 찍는 거 말고도 너가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들이면 충분히 자질이 있어.”
그는 웃어 보이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는 나를 믿고 있었다. 내가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했다.
신뢰. 전생의 내게는 없었던 것.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있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사람을 믿는 건 곧 전쟁에서 등을 내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팀 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진행했고, 팀원들의 조언을 모조리 묵살했다.
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사실 내가 먼저 그 팀의 모두를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쫓겨난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나.’
전생 때와 같이 흘러갈까 봐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팀에서 나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전생 때와 같은 상황은 아닐 거라고.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박성민은 내 표정을 보더니 씩 웃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이미 파악한 듯했다. 그저 “아이들은 금방금방 커버린다니까.”라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 송별회 때 우리 팀 연구원들 다 모인다니까 너도 꼭 참석해라.”
“저도 가는 거였어요? 저한테는 말도 없이 떠나려 하시길래 안 부르실 줄 알았죠.”
“아잇, 사내자식이 계속 꽁해있긴! 말하려고 했었대도!”
그렇게 박성민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으며 우리는 자리에 일어났고,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동의 시간. 박성민의 짐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하나하나가 다 문서들이었기 때문에 꽤나 무게가 나갔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갔다.
“흣짜! 드디어 다 옮겼다!”
“나머지는요? 그냥 둬도 돼요?”
“어차피 다 업체 통해서 바로 앨런으로 보낼 거야. 그리고 반출하면 안 되는 문서들도 몇 개 있어서 이 정도면 돼.”
우리는 정리된 상자를 들어 중요한 물건들 위주로 차에 옮겼다. 박성민은 “오늘 저녁에 먹일 소고깃값 미리 한다고 생각해라!”라며 나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역시 나를 노예로 부리려고 데리고 온 게 분명한…
툭. 그때 신문 한 부가 떨어졌다. 기존에 유통되는 신문이라기엔 종이가 더 좋고, 크기가 작은.
“이걸 아직도 가지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자랑하고 다니는데.”
박성민이 자랑스럽게 ‘카이스트 신문’을 들어 올렸다. 내가 발표하는 장면이 실려있는 호였다. 그는 잠시 서서 그 신문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만덕아. 나중에 미국에 오게 되거든 꼭 연락해라.”
“네? 미국이요?”
“전에 그랬지? 해외 쪽으로 대학 다니고 싶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 때는 가지 못했던 해외 유학의 길. 이번 생에는 못 갈 이유가 없었다. 돈도, 성적도,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단, 한 가지가 걸릴 뿐.
‘어머니… 아직까지는 건강하시니까.’
전생 때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어머니를 두고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나마 이동이 편리한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유, 병원에 갔다 왔대도.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는 괜찮아.’
비록 시간이 없어서 집에 내려가지는 못했지만… 병원 검사비로 쓸 돈은 다달이 보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과 박성민이 주는 연구원비 중 일부를 용돈으로 계속 보내드리기도 했다.
아무리 치매 연구가 좋다고 한들, 내 가족의 건강보다 중요한 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었고 나에게 있어 1순위는 늘 어머니였다.
유방암의 경우엔 다른 암보다 전이 속도가 매우 빠르다. 한마디로 치료 시기를 놓치면 일파만파 암이 퍼진다는 소리. 그렇기에 초기 발견이 중요했다.
이번 추석 때는 꼭 뵙고 와야지, 마음을 다잡은 채 있자, 박성민이 말했다.
“표정이 진지해졌네. 어쨌든 해외 유학이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데는 도움이 될 거다. 천재라는 개념이 나라마다 다르듯이 치매라는 병을 대하는 관점도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을 테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이제 올라가 볼까? 다른 애들 저녁에 온다고 했지만 꼭 일찍 오는 애들도 있거든.”
박성민은 웃으며 말했고, 우리는 연구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 어,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며 맞이하는 이재형을 보고 빵 터졌다.
*
“버, 벌써, 지, 집에, 가, 가게?”
“이제 기숙사 입실 시간이어서요.”
즐거운 송별회 시간. 박성민은 그동안 노예로 부려 먹었던 것을 청산이라도 하듯이 소고기를 시켜줬다. 무려 꽃등심!
선홍빛 육질과 사이사이 보이는 마블링된 꽃등심은 식욕을 자극했다. 안 그래도 한창 배고플 나이인 이재성은 꽃등심을 받는 족족 구워 먹었고, 그 모습을 보던 박성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재형이 그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사장님! 여기 꽃등심 추가요!”라고 외쳐댔다.
‘이정도쯤이야 뭐, 푼돈일 테니까.’
국립뇌과학연구소와 앨런뇌과학연구소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박성민도 굳이 추가하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나중에 미국에 오면 꼭 보자.”라고 웃어 보일 뿐이었다.
“으, 갑자기 추워지네.”
갑자기 오한이 드는듯한 착각에 나는 양팔을 감싸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학교까지 직행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확인한 후, 정류장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저리 불안한 듯 움직이는 한 노인. 9월이면 밤공기가 차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노인의 옷차림은 얇아 보였다. 게다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갑자기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노인이 정류장 앞에서 서성이자 사람들이 불편한 듯 자리를 비켰다. 사람들은 노인을 지켜보면서도 뭔가를 물어보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단지 내 옆에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할아버지!!”
빠아아앙! 소리와 함께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빨간불인 횡단보도로 뛰어든 할아버지의 팔을 낚아챘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손과 등에 땀이 흘렀다.
절체절명의 위험했던 상황. 내가 붙잡지 않았다면 분명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터. 나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아버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드시면 어떡해요.”
“아이고, 아이고. 아냐. 저쪽으로 가야해!”
“여기서 이러시는게 아니라, 좀 있다 신호등 바뀌면 가세요. 네?”
“안 돼! 가야 해!”
어눌한 말투. 날씨에 맞지 않는 옷차림. 그리고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까지.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치매 환자다.’
치매를 연구해 온 내가 치매 환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눈앞의 노인은 높은 확률로 치매일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112에 신고를 하자. 그러면 보호자가 찾으러 오겠지.’
보아하니 집이나 시설에 있다가 뛰쳐나온 듯했다. 그때 노인의 목에 걸린 핸드폰의 액정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온 듯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전화 좀 대신 받아도 될까요?”
“안 돼! 이건 내거야! 가져가지 마!”
“그럼 빌려주세요. 그대신 제 핸드폰 드릴게요. 됐죠?”
“핸드폰을 준다고?”
나는 능숙하게 내 핸드폰을 건넸다. 노인은 불안한 듯 핸드폰을 꼭 쥐고 있더니 내쪽을 향해 내밀었다.
[여보세요? 아버님, 지금 어디세요!]“아, 저기. 저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여기 할아버지가 혼자 위험하게 계셔서…”
[어쩜 좋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거기가 어디죠? 제가 빨리 갈게요.]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중년 여성이었다. 위치를 말하자,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금방 가겠다. 잠시만 거기에 있어달라.”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노인에게 핸드폰을 건네줬다.
그런데 어째 노인의 핸드폰에 걸려있는 키링이 익숙하다. 분명 전에 최한별한테 줬던 강아지 키링이랑 닮았다.
‘에이, 싸구려 키링 비슷한게 얼마나 많은데. 그냥 우연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할아버지를 데리고 있는데, 저 멀리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차 문이 열리자마자 우아한 외모의 중년 여성이 버선발로 내 쪽을 향해 뛰어왔다.
“아이고, 아버님. 대체 얼마나 걸으셨길래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진짜 내가…”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감정이 터져 나오는 걸 꾹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둘의 만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빠지려고 하는데,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학생 맞죠? 학생 아니었으면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위험해 보이셔서 잡아드린 것뿐이에요.”
“그래도… 아! 이거 얼마 되지 않는데 용돈으로 써요.”
“예? 아뇨. 괜찮은데-”
“…애비냐?”
그때 내 옆에 있던 노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툭 말을 내뱉었다.
“아버님, 그이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그러니까 어서 가요. 네?”
“병원 안간다. 병원을 내가 왜 가! 그런데는 아픈 사람이나 가는거다.”
“아, 진짜 아버님…!”
완고한 노인의 고집에 여자는 애가 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노인과 옥신각신 다투던 여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노인의 팔뚝을 꽉 잡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보호자도 왔겠다, 이만 가도 되겠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출발하면 기숙사 입실 시간까지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노인의 핸드폰에 걸려있는 키링이 자꾸 눈에 밟혔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학생, 정말 학생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아버님. 가요.”
“안 간다. 안 가! 날 이상한 곳에 보내려는거지! 절대 안 간다! 애비야, 이 여자 쫓아내라.”
“…”
치매 환자의 특징 중 하나는 고집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피해 망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저항이 심한 편이고, 아무리 노인이라 하더라도 중년 여성과의 힘겨루기에선 쉽게 이겨내는 편이었다.
“…도와드릴까요?”
“정말…고마워요. 사례는 꼭 할게요.”
나는 노인의 왼쪽 팔을 붙들었다. 노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
“애비냐?”
“네. 아버지. 이제 집으로 갈까요?”
“그래, 요새는 날이 추워서 밖에 있다간 금방 감기에 걸린다. 어여 드가자.”
“네네.”
무성의한 답이었지만, 노인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노인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이 여자도, 나도 아니었다. 나는 여자의 안내에 따라 차 앞까지 이동했다. 하지만 노인은 꿈쩍도 안하고 문 앞에 서있었다.
“타라.”
“예?”
“너도 집에 가야지? 자, 어서.”
“아,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탈 정도는 아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뿐더러 이 차에 타는 순간 기숙사 입실 시간을 놓쳐 버릴게 뻔했다.
“애비야. 어서-”
“아버지!”
“!”
그 순간, 한 남자가 바로 뒤에 차를 대더니 뛰쳐나왔다. 그는 곧바로 노인을 향해 달려오더니 노인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주변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보, 이 학생이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줬어요. 어찌나 착한 학생이던지.”
“지금은 경황이 없지만 나중에 꼭 보답해주마. 전화번호라도 남겨주렴.”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사례를 바라고 도와드린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노인의 모습이, 행동이, 결코 나한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뒷걸음질쳤다. 게다가 이미 사례랍시고 여자한테 받은 만원짜리들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럼 학교라도 알려주렴. 나중에 학교 측에 네 이야기라도 전해줄 수 있게 말이다.”
남자는 끈질겼다. 괜히 학교에서 소란스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지만, 남자는 내 이름과 학교를 꼭 알아내길 원하는 듯 했다. 결국 입실 시간이 얼마 안남은 나는 체념하듯 말했다.
“한국과고 1학년 김만덕 입니다.”
“그래, 한국…한국과고? 1학년?”
“네.”
“…1학년 1반?”
“예? 맞는데 어떻게…”
“허.”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