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bullying and become a genius RAW novel - Chapter (77)
왕따 그만두고 천재합니다-77화(77/221)
77. 성장 (3)
77. 성장 (3)
“영어로 된 논문 20개야. 전부 다 해석해 와.”
“미…미친.”
내 손에 이끌려 연구실에 들어온 이재성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내 자리를 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내가 미리 출력해 두었던 논문 뭉치들을 보고 경악했다.
이재성은 화학을 잘한다. 이재형 말로는 화학 빼고는 다 못한다고 했지만, 그동안 같이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사실로 미루어봤을 때 그는 고루고루 다 잘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못하진 않았다.
딱 하나만 빼고.
“이걸 다 해석해 오라고? 굳이? 왜?”
“그럼 이제 연구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영어 논문 하나도 제대로 못 읽으면서 연구를 할 생각이었던 거야?”
“그, 그건! 어차피 인터넷에 보면 번역기도 있고 그러니까-”
“번역기가 만능은 아니잖아?”
나는 탑처럼 쌓인 논문을 그에게 건넸다. 어영부영하다가 엉거주춤한 상태로 논문을 받아 든 그는 지금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재성이 당황해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줄 알고 부푼 맘을 가지고 왔건만, 정작 그에게 주어지는 건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영어 논문들이었으니까.
“…이거 다 해석하고 앉아있을 시간에 연구를 하는 게 훨씬 나아. 애초에 과학자한테 영어는 필수 아니거든?”
“연구원들한테는 필수야. 애초에 한글로 된 논문보다 영어로 된 논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한정된 데이터에서 연구해봤자 의미 없는 거 몰라? 그리고 번역기? 번역기 돌렸다가 완전 다르게 번역해 주면 어떡할래? 전문 용어 같은 경우엔 번역기도 제대로 해석 안 될 텐데.”
지금 시대는 2008년. 아직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pmp나 mp3, 전자사전 등을 애용했다. 그 말인즉슨 번역기의 성능도 내가 있던 시대와 비교하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말.
결국 내 말에 K.O.된 이재성이 삐뚜릅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분하긴 한데, 딱히 받아칠 말이 없으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 녀석의 마음을 간단히 바꿀 마법의 단어를 알고 있다.
“역시 일반고 학생이라 그런지 영어에 약하네.”
“?”
“과고 애들은 영어 논문 읽는 건 껌인데. 너한테 너무 어려우-”
“전문 다 해석해 올 테니까, 딱 기다려라.”
이재성은 논문을 보더니 품에 안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사실 과고 학생이라고 해서 영어 논문을 잘 읽는 것도 아니고, 일반고 학생이 영어에 약한 것도 아니다. 진리의 사람 바이 사람이지만 일일이 설명해 주긴 귀찮았다.
어차피 뭐, 계획대로 된 거 같으니까.
나는 이재성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연구실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체로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연구실에 있는 사람의 수는 대략 10명 정도. 10명이 늘 동 시간에 같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평균적으로 4~5명이 연구실에 같이 있곤 했다. 김성진 교수님 밑에서 연구를 한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중에는 개인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부터 이미 박사과정을 끝내고 포스트 닥터, 즉 포닥 신분으로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연구하고 있는 주제도 다양했다. 그러나 모두 신경인지, 즉 인지 혹은 신경과 관련된 주제들이 많았다. 혹은 MRI나 fMRI와 같은 영상 기기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노트북을 챙겨 세미나실로 이동하려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 아까 이재성에게 건네줄 때 하나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Advancements in Cognitive Restoration through Gene Editing and Synaptogenesis in Dementia Models]‘? 이건 뭐지?’
저번 주, 연구실에 방문한 나는 일단 참고 문헌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비록 전생 때도 같은 일을 해봤기에 논문 중에는 읽었던 것도 있었고, 선행 연구로 레퍼런스에 사용했던 것들도 있었다. 적어도 치매와 관련된 논문들은 한번쯤 다 봐뒀던 내용이었다.
[치매 모델의 유전자 편집 및 시냅스 생성을 통한 인지 회복의 발전]이라는 꽤나 진부한 내용의 제목이었기에 기억에 안 남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과거로 회귀한 이후부터는 학계로부터 외면받거나 조금 과한, 어떻게 보면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안한 논문들을 위주로 봐왔으니까.그렇게 자리에 앉아 논문을 읽어나갔다.
[유전자 편집 기술 중 하나인 HDR(Homology-Directed Repair)을 사용하여 신경 퇴행성 질환인 치매를 치료하였다. 이 연구는 인지 결손을 나타내는 쥐의 뇌에서 시냅스 형성에 대한 표적 유전자 편집의 영향을 조사, 인지 기능의 회복에 유망한 결과를 제시하여…]논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HDR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하여 시냅스 형성을 늘렸다는 이야기였다.
내용은 간단했지만, 이것이 담고 있는 가치는 엄청났다.
읽는 내내 손에서 땀이 났다. 이 논문을 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는지,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으니까.
‘이런 논문이 있었다고? 분명 대학원생 시절엔 없었는데…’
분명 이 정도의 연구 성과라면 내가 못 보고 지나쳤을 리가 없었다. 이 논문 내용만 있었다면 적어도 1, 2년의 연구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논문이 왜 발견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찝찝함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일단 뭐가 됐든 이 이후로도 후행 연구가 이뤄졌을 거야. 그걸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면…’
논문의 주인은 마지막 결론 및 한계점에서 이 실험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 예를 들자면 ‘인간이 아니라 쥐로 실험을 했다는 것.’,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치료된다고 하더라도 향후에 일어날 부작용에 대해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 ‘연구를 하는 데 있어 연구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 등. 여러가지 한계점들과 당부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그 문장들은 격려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한계들이 있지만, 뒤따라오는 연구자들은 꼭 해결해달라고.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당신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에.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논문을 쓴 사람을 확인했다. 제1저자. 가장 앞장서서 연구를 이끈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어?”
하지만 논문을 확인한 나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순간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두 눈을 비비고 봐도 이름 석자는 그대로였다.
[Authors: Choi Kang Seok]최강석이었다.
*
생물 올림피아드 1차 지필고사가 치러지고 난 뒤, 최한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합격을 예감했다. 사실 생물이라는 학문은 학교 시험을 위해 대비한 적은 있어도 따로 심화 공부를 할 정도로 좋아하는 과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물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상을 받아와야 했기에, 그녀는 공부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합격인 것이고.
‘그래. 너가 그렇게 진심이라면 국제 생물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금상을 받아오렴. 그럼 생각해 보겠다.’
‘어머! 한별아, 너무 잘됐다. 이번에 열심히 공부해서 금상 받으면 되겠네?’
어머니 한은영은 최한별의 ‘국제 올림피아드 출전’ 이라는 목표를 보고 기뻐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로 딸이 뭔가에 먼저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을 뿐더러 국제 대회에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한별은 올림피아드 대비 수업을 위해 별실로 이동했다. 1차 지필고사 합격자가 2명밖에 안 되는 탓에 거의 일대일 수업, 그것도 실험 위주의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드르륵. 문을 여니 아무도 없었다. 수업 마치고 다른 합격자인 김만덕과 같이 이동할까 싶었지만… 그녀는 자리에 앉아 [생물 올림피아드 대비 교재]를 꺼냈다. 가방에 한동안 달려있던 키링이 없으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이거 줘!’
‘어… 그건…’
‘한별아, 할아버지 드리자. 똑같은 거 하나 사면 되잖니?’
모처럼 할아버지를 뵈러 갔던 날, 최한별의 가방에 걸려있던 강아지 키링을 보더니 할아버지가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 최한별은 이렇다 말도 못 한 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분명 새로 사면 되는 건데, 애초에 그런 키링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최한별은 키링을 주는 그 순간까지도 아쉬운 마음이 남아있었다.
드르륵, 그 순간 앞문이 열렸다. 김만덕이었다.
사실 아까까지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고 종례까지 했던 사이였기에 특별히 반갑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게다가 합격자가 2명뿐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른 한 명은 김만덕이라 생각했으니까.
김만덕도 마찬가지인 듯,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저 약간 불편한 듯 최한별이 있는 자리보다 멀찍이 떨어져 앉았을 뿐이다.
‘…내가 불편한가?’
그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김만덕은 계속 쭈뼛쭈뼛한 모습으로 내 쪽을 흘깃 쳐다봤다. 이따금씩 말을 붙이려고 하다가도 뭔가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최한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어?! 어! 어. 안녕이네, 안녕!”
“…?”
역시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불현듯 이 상황에 대한 데자뷰가 일었다.
경직된 남학생. 버벅이는 말과 부자연스러운 행동. 그런 행동을 보인 남학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최한별에게 고백을 하곤 했다.
“자, 얘들아. 벌써 왔니?”
“어? 선생님이 쭉 가르치세요?”
“왜. 싫어?”
그때, 송형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활짝 웃으며 출석부를 열더니 곧바로 닫는 그.
“어차피 2명뿐인데 출석 부르고 말고 할 것도 없네.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자.”
“네.”
송형민은 프린트된 일정표를 나눠줬다. 일정표에 빨간 글씨로 적혀있는 ‘겨울캠프’에 눈이 갔다.
생물 올림피아드의 경우 겨울방학에 합숙 캠프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 말은 김만덕과 2박 3일동안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화학이나 물리는 적어도 9일에서 10일이던데. 생물은 고작 2박 3일이라니.
짧아서 아쉽다. 아니, 아쉽나?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최한별은 흠칫 놀랐다. 집을 떠나서 생활해본 건 단기 해외 연수차 방학 때 미국에 갔던 걸 빼고는 없었기에 그녀에게 이런 캠프는 낯설고 불편했다. 하지만 2박 3일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너희도 알겠지만 이번에 생물 올림피아드 일정이 많이 미뤄졌어. 그래서 오리엔테이션은 원격으로 진행되고 원격 교육 일정도 조금 팍팍하게 잡혔다고 하네. 이제 종이 뒷장 넘겨볼래?”
종이를 넘기자 생물 올림피아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시험 안내가 적혀있었다.
“다른 올림피아드랑 마찬가지로 국가대표로 선정되는 인원은 4명이야. 좋은 성적을 거둬서 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전 세계 똑똑이들이랑 겨뤄보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똑똑이들이요?”
“똑똑한 사람들 말야.”
아하. 김만덕이 짧게 소리냈다. 그 모습을 본 송형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같은 경우에는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닌데 사실 좋다고도 보기 어려워서. 한때 암흑기처럼 여겨지던 날들도 있었고. 일단 이번 첫 시간에는 역대 실험 평가 문제들 교재에 수록되어있으니까 이거 보면서 정리해 보고 종 치면 쉬는 시간 갖자.”
“네.”
그 말을 끝으로 송형민은 실험 평가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물 올림피아드의 경우 이론 평가를 제외하고도 따로 실험 평가는 총 4파트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내용 자체도 어려웠다. 그렇게 올림피아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종이 쳤다. 송형민은 시계를 한번 확인하더니 ‘10분 후에 들어올게.’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
“…”
다시 또 불편한 정적이 시작됐다. 한동안 교재에다가 뭔가를 적고 고뇌하는 김만덕의 모습은 마치 원맨쇼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나가려는 무렵, 뭔가를 결심한 김만덕이 최한별을 바라봤다.
‘아… 설마?’
경직된 자세. 부자연스러운 행동. 흔들리는 동공.
그녀의 데이터 베이스가 말해주고 있었다. 필시 이것은 ‘그것’일 것이라고.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까 고민하기도 찰나, 김만덕이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응.”
“너희 아버지 많이 바쁘셔?”
“…응?”
김만덕은 최한별의 부친에 대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