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11)
3화 괴이(怪異) (4)
“방금 전에 말했던 거 한 번 해보세요.”
“지, 지금 무슨……”
“괴이를 통제해서 장주의 입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서요.”
방사 묘신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당연히 장주를 살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하!’
호위 고찬 역시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인과 척을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방사에게 어떻게든 장주를 살리도록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설마 대부인과 같은 요구를 할 줄이야.
고찬이 목경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공자. 대체 어쩌시려고요?”
“들으셨잖아요.”
“네?”
“대부인이 원하는 것을 장주님의 입에서 들을 수 있다잖아요.”
그 말에 호위 고찬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공자. 지금 그걸 알아내서 어쩌시려고요?”
그 물음에 목경운이 옅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도리어 물었다.
“알아서 어쩌시려고요?”
역으로 되묻자 호위 고찬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물음의 의미는 간단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달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미친 놈. 대체 어쩌자고.’
대부인이 노리던 것을 가로채서 어찌하려 한단 말인가.
난감해 하던 호위 고찬이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신의 의견을 들을 녀석도 아니었다.
하나 이러다가 일이 꼬여서 무슨 사달이라도 벌어질까봐 우려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경운은 방사에게 이를 재촉했다.
“얼른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방사 묘신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안 한다고 거절했다간 이 살기 넘치는 공자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모를 일이었다.
묘신은 구석 편에 세워둔 배서함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주먹보다 작은 그것은 목각(木刻) 인형이었다.
뜬금없이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을 가져오기에 목경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 거죠?”
“이 목각 인형이 매개체가 될 겁니다.”
“매개체?”
“……이대로 장주께서 직접적으로 다시 괴이와 접촉하게 되면 제령은커녕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십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한 번 육신에서 떨어져나간 괴이 혹은 부정.
그것을 다시 접촉하게 된다면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다.
괴이에 대해서 잘 아는 방사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짓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목경운의 반응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방사 묘신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놈의 집안 사람들은 장주가 죽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구나. 그나저나 실패하면 큰일인데.’
묘신이 긴장된 눈으로 바닥에 있는 잘려진 장주의 팔을 보았다.
부적에 의해 괴이를 억눌렀으나 근본적으로 저것은 살(殺), 즉 저주로 파생된 부정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장주도 그렇고 방사 자신도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젠장.’
마른 침을 삼킨 묘신이 이내 부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七星下降符]부적에 七(칠)이 셋 그리고 경계 안에 또 셋, 그리고 경계 안에 또 셋.
칠성하강부
이것은 칠성(七星)의 수호를 받는 부적이다.
방술을 행하다 자칫 자신에게 살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슥슥!
그리고 또 하나의 부적을 직접 붉은 먹을 적셔 적어나갔다.
대(代), 통(通).
기이한 문양과 함께 그리 적혀 있었다.
긴장된 얼굴을 하고서 묘신이 대(代)라 적혀 있는 부적을 목각 인형에 붙인 후에 붉은 실로 머리를 둘둘 감았다.
그 다음에는 잠들어 있는 장주의 머리에 통(通) 부적을 붙이며 목각 인형에 감아두었던 붉은 실의 반대편을 가져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감았다.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육인유혼부.’
묘신이 여태까지보다 긴 부적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육인유혼부(六人遊魂符)라 하여 우인(인형)을 만든 뒤 혼을 불어넣어 마음대로 조종하는 법술을 위한 부적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뒤로 물러나주십시오.”
그 말에 목경운과 호위 고찬이 방 끝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묘신이 왼손으로 수인을 그리며 오른손으로 부적을 들고서 유혼주(幽魂呪)를 외웠다.
“괴뢰변화 천지변복 여아해행 신일육침 오지소유 신귀불측 급급여율령.”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묘신이 수인을 그리는 손을 장주에게로 향하자,
-파르르르!
장주의 몸이 신기하게도 경련을 일으켰다.
그 상태에서 묘신이 수인을 천천히 목각인형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우우우우!
목각 인형에 붙여져 있던 대(代)라 적혀 있던 부적의 글씨가 진해지며 묘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흡사 목각 인형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름 돋는구만.’
이를 지켜보는 호위 고찬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온갖 일들을 겪어보았지만 이런 괴이나 방술 관련된 일들은 께름칙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뭘 어쩌려고 하는 것일까?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탁!
방사 묘신이 목각 인형을 움켜쥐고서 조심스럽게 괴이에 잠식되어 있는 팔을 향해 옮겼다.
그리고는 팔의 바로 앞에 목각인형을 두었다.
그러자 압(壓) 부적을 붙여두었던 장주의 잘려진 팔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부적에 억눌려 있지만 핏줄이 꿈틀거리며 아까 전처럼 불룩불룩 튀어나올 기세를 보였다.
그때,
-팍!
묘신이 압이라 적혀 있던 부적을 떼냈다.
그러기가 무섭게 잘려나갔던 장주의 오른팔에서 핏줄들이 흉측하게 튀어나오며 이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목각 인형을 움켜쥐었다.
-콱!
“흐헉!”
목각 인형을 움켜쥐는 순간 장주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엇?”
기이한 일이었다.
목각인형을 움켜쥐었는데 장주가 반응을 하다니 말이다.
-꽈아아악!
“끄으으으.”
목각인형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장주는 고통이라도 느끼는 듯이 괴로운 신음성을 냈다.
‘이, 이거 큰일나는 거 아냐?’
호위 고찬이 목경운을 쳐다보았다.
한데 목경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떼지 않고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스멀스멀!
그때 장주의 잘려나간 오른팔에 있던 음산한 무언가가 목각인형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신일육침 오지소유 신귀불측 급급여율령.”
‘됐다.’
주술을 외우고 있던 방사 묘신이 안도의 눈빛을 했다.
다행히 괴이가 매개체를 장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일종의 속이기였다.
만약 괴이가 목각인형을 장주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폭주해서 사달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속이기는 통했다.
그런데,
-파칵! 파칵!
완전히 괴이가 옮겨간 목각인형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
이를 본 방사 묘신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각 인형은 정제된 버드나무로 만들어져 사기에 매우 견고했다.
한데 괴이가 들어가자마자 균열이 생긴다는 것은……
‘……..살(殺)이 너무 강해.’
묘신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도중에 방해를 받았다지만 씌워졌던 육신에서 나왔고 제령 과정에서 어느 정도 힘이 약해졌다고 여겼던 차였다.
그런데 그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런…….’
하긴 생각해보면 그랬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기(氣)를 수련하는 무림인에게 씌여서 목숨마저 위협할 정도의 괴이라면 여느 부정들과는 그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위험해.’
순간 방사 묘신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 살이 강한 괴이는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듯 했다.
여기서 억지로 그러려고 하다간 목각인형이 부서지면서 제압되었던 괴이가 풀려나는 사태가 벌어질 지도 몰랐다.
“공자 아무래도……”
방사 묘신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목경운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흠칫!
아무리 생각해도 괴이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저런 죽은 자와 같은 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슥!
그때 목경운이 날카로운 검날을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이를 본 묘신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 미친 공자 놈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아!’
그 순간 방사 묘신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자신이 진즉에 이런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만큼 이 상황에서는 자구책이나 다름없었다.
묘신이 말했다.
“공자 괴이를 통제하겠습니다. 한데 꽤 중요한 것 같은데, 저분도 함께 들어도 괜찮은 겁니까?”
묘신이 고개 짓으로 가리킨 자는 다름 아닌 호위 고찬이었다.
“무슨? 아……”
순간 무슨 소린가 했던 고찬이 이를 알아들었다.
지금 장주의 입에서 들으려고 하는 것은 비급서와 장주 직인이 있는 위치였다.
해서 아랫사람도 같이 들어도 상관없냐는 것이었다.
“저는 잠시 나가있겠습니다.”
진짜로 아랫사람은 아니지만 고찬은 괜히 목경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알아서 피해 있는 게 낫다고 여겼다.
목경운도 그럴 생각이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알아서 고찬이 방문 밖으로 나가자 묘신이 유혼주를 다시 외웠다.
“괴뢰변화 천지변복 여아해행 신일육침 오지소유 신귀불측 급급여율령!”
-파르르르르!
“끄으으으으!”
목각인형이 강하게 흔들리며 장주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파각!
목각인형에 또 다시 금이 생겨났다.
역시 못버티고 있었다.
묘신은 이를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서 한 손으로 호지(虎指)의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급급여율령. 유혼은 부름에 답하라!”
“끄으으으…..누…….누가…….나……나를…….부……..르…..느…..냐?”
괴로워하던 장주의 입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묘하게 울리는 것이 꼭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와도 같았다.
-파각!
목각인형의 가슴에 한 줄의 금이 갔다.
이를 바라보는 묘신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혀갔다.
“급급여율령. 유혼은 물음에 답하라!”
“무……..어…….를…….말…….하…….는…….것……이……냐?”
“급급여율령. 장주의 비급서와 직인이 어디에 있는지 답하라!”
-파르르르르!
그 물음이 떨어지자 목각인형과 마찬가지로 장주의 머리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심하게 흔들리는데 눈꺼풀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파각! 파각!
그와 함께 목각 인형의 눈과 목 부위에 금이 갔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때 장주가 입을 열었다.
“약……..당…….지하…….정(丁) 석………문…….안……….”
‘약당……지하 정….석문?’
분명 그렇게 들렸다.
뒤에 뭔가를 이어서 이야기하려던 찰나였다.
-콰직!
그 순간 목각 인형이 우그러지며 흉측한 형태로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울렁이는 섬뜩한 무언가가 붉은 실을 타고서 연결되어 있는 장주에게로 향하려고 했다.
이에 묘신이 황급히 외쳤다.
“공자! 실을 끊어야 합니다!”
‘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목각 인형이 부서지면서 곧장 알아차렸다.
목경운은 일렁이는 무언가가 타고 흘러가는 실을 향해 황급히 검을 내리쳤다.
-촥!
절묘하게 울렁이는 섬뜩한 무언가가 실이 끊기며 길을 잃고 말았다.
‘된 건가?’
막은 건가 싶어하던 찰나였다.
-우우우웅!
그때 일렁이는 무언가가 검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올라왔다.
이를 알아차린 목경운이 검병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나 복잡한 미로처럼 아주 길게 얽혀놓았던 붉은 실과 달리 검의 길이는 짧기 그지없었다.
-파악!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싸늘한 감각.
그 감각은 팔을 타고서 급속도로 체내로 파고들었다.
몸이 덜컥거리며 목경운은 번개라도 맞은 것 마냥 몸을 흔들었다.
‘됐다!’
이를 본 방사 묘신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의도대로 되었다.
목각인형은 애초에 저 살(殺)이 가득한 괴이를 견디지 못했다.
그렇기에 육인유혼법을 행하는 도중에 결국 압(壓)에서 풀려날 거라 짐작했었다.
이에 묘신은 목경운에게 괴이가 옮겨가도록 의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했다.
-팍!
방사 묘신이 품속에서 압(壓)이라 적혀 있는 부적을 꺼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목경운의 이마에 붙였다.
‘일석이조(一石二鳥)로구나.’
장주의 입에서 대충이나마 비급과 직인의 위치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이놈에게로 괴이도 떠넘겼다.
괴이도 의지라는 것이 있기에 학습을 한다.
제령의 술도 겪었고 육인유혼법까지 견딘 녀석이기에 이제 더 이상 방술로 괴이를 떼어낼 방법은 없었다.
‘안타깝지만 네놈이 나를 몰아붙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억지로 괴이를 떼어내려 한다면 씌인 자가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대부인의 의뢰만 완수하면 되는 입장이니 말이다.
* * *
눈앞이 환해졌다.
정(正)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청량한 기분이 드는 이 약수터는 늘 매일 아침 같이 물을 길러 오는 곳이었다.
‘뭐지?’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같다.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찰나에 꿈을 꾼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잠시 멍을 때린 것 같기도 했다.
‘찝찝한데.’
뭔가를 깜빡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위에 걸터앉아 고민하던 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려놓았던 물지게를 짊어졌다.
‘서둘러야겠다.’
늦으면 할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정은 물지게를 짊어지고 가파른 산길을 뛰었다.
매일 같이 달리던 이 산길은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철썩철썩!
물지게에 걸려 있는 물통 속 물이 흔들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은 조금도 밖으로 넘쳐흐르지 않았다.
절대로 물이 넘치게 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따르다보니 어느새인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정은 달렸다.
한참을 달려 산꼭대기에 이를 쯤,
‘!?’
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 검은 연기가 보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집이 있는 곳이었다.
이를 본 정은 물지게를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그곳을 향해 달렸다.
이윽고 그곳에 도착했다.
-화르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집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정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져갔다.
주변을 다급히 둘러보던 정은 불타고 있는 집의 뒤편으로 뛰어갔다.
후원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기를 수 있는 약초는 직접 기르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텃밭에서 약초를 뽑는 할아버지였다.
‘제발…..제발….’
텃밭으로 달려간 정은 발걸음을 멈췄다.
터질 듯이 커진 그의 두 눈동자로 피로 얼룩진 무언가가 보였다.
몸 속에 있어야 할 것들이 텃밭에 널브러져 있다.
-으득!
정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피와 조각들이 이어지는 곳을 따라갔다.
언덕의 아래를 쳐다 본 정이 소리쳤다.
“할아버지!”
그곳에 할아버지가 있었다.
아래쪽은 뜯겨져나가고 상체만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상태로도 겨우 숨이 붙어있는지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이성이 날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옆에 누군가 서있었다.
흰자가 없는 검은 눈동자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존재였다.
정은 전혀 그를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인가?’
정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존재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순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분노하던 정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대체?’
언덕 아래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졌나 싶어 고개를 돌리는데, 불타고 있던 집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우두커니 있었다.
게다가 엉망이던 텃밭도 멀쩡했다.
그런 텃밭에서 허리를 두드리며 약초를 따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
그러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왔으면 돕지 않고 멀뚱히 서서 뭘 하는 게야?”
그런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 같다.
다시는 할아버지를 잃지 않을 거다.
죽었어야 할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가게 해준 이유니까.
이런 정을 뒤에서 지켜보는 검은 눈동자의 누군가.
그가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영원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거라. 다시는 소중한 것을 잃지….’
바로 그때였다.
몸을 파르르 떨며 감격해하던 정이 느닷없이 고개를 획하고 돌렸다.
‘!?’
검은 눈동자의 존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이 죽은 사람과도 같은 흉흉한 눈동자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놈은 절대로 자신을 인식할 수 없….
-푹!
그 순간 정의 두 손가락이 검은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아악!’
정의 손가락이 그의 눈알을 그대로 후벼 파며 뽑아버렸다.
갑작스럽게 눈이 뽑힌 검은 눈동자의 존재는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그런 그에게 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거슬리네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로 장난질을 치다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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