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201)
-쏴아아아아!
여전히 빗줄기는 거세기 그지없었다.
강의 인근에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소하촌(小河村)이었다.
촌(村)이라고는 하나 나루터가 있는 곳답게 인근에서는 규모가 꽤 되는 마을로 백오십여 명 정도 되는 사공들과 어부들이 모여 살았다.
마을 자체가 나루터를 운영하다 보니 강에 인접해 있었다.
“강물이 더 불어나면 집 몇 채는 휩쓸리겠는걸.”
마을로 가는 길에 섭춘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흙으로 둑을 쌓아서 막아두기는 했으나, 철썩이는 물살을 보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를 보며 걱정스러워하는 섭춘과 달리 목경운이나 몽무약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몽무약의 머릿속에는 큰 배의 주인을 찾는 것 이외에는 없었고, 목경운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면 타인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목경운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흠.’
그것은 불안해 보이는 둑의 한쪽 편에 죽의를 입은 채 앉아 있는 흰머리의 노인이 보였다.
묘한 이질감에 그곳을 보았었는데 의아해졌다.
폭우로 인해 물살이 세서 금방이라도 둑이 무너질 것처럼 위험해 보이는데, 대체 저 노인은 무얼하고 있는 걸까?
유심히 바라보니 노인의 앞 쪽에 휘어진 대나무 막대가 보였다.
이를 본 목경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낚시?’
설마 이런 폭우 속에서 낚시를 한다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목경운은 이내 관심을 끄고서 마을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그냥 가려고 하던 목경운이 발걸음을 멈칫했다.
‘······뭐지?’
순간 별생각 없이 지나가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폭우가 아무리 거세다고 하나 누구보다 기감에 예민한 자신이었다.
한데 방금 전 그 노인에게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치 주변의 사물에 동화된 것처럼 말이다.
-슥!
목경운이 고개를 돌려 다시 둑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
방금 전까지 있었던 노인이 어느새 사라졌다.
혹시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노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해진 목경운이 전음으로 물었다.
-청령. 방금 그 노인 보았나요?
-노인? 왠 노인 말이냐?
-저 둑에 앉아서 낚시 같은 걸 하던 노인요.
-낚시를 하는 노인? 이 날씨에 무슨 낚시를 한다는 게냐?
-······.
-뭐라도 본 게냐?
-······아뇨. 착각했나 보네요.
시야가 열려있는 청령조차 보지 못했다.
정말 헛것을 본 걸까?
“주군?”
그렇게 멈춰 있던 목경운을 섭춘이 의아해하며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그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소하촌이라 적혀 있는 마을 비석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쏴아아아아아!
폭우가 거세고 어두운 저녁인지라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몽무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 정도 큰 배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이 마을에서 제법 잘 사는 부호나 호족일 겁니다.”
“당연한 소릴 하네.”
섭춘이 그 말에 빈정거렸다.
그러자 몽무약이 노려보며 심기 불편함을 드러냈다.
서로를 보며 으르렁대는 두 사람에게 목경운이 어딘가로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저기 객잔이 있군요.”
“아!”
마침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객잔 하나가 있었다.
굳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 물어보는 것보다 객잔으로 가서 알아보는 편이 빠를 듯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빗살을 가로질러 객잔으로 들어갔다.
물기로 질퍽거리는 가죽신으로 객잔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보다 낡고 허름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낡은 내부와 달리 객잔 안에는 꽤 많은 손님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동안 이어지는 폭우 덕분인지 발이 묶여서 머물고 있는 외부인들인 듯했다.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서자 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목경운과 일행들에게로 잠시 향했다.
죽의를 입고 있다고 하나 허리춤과 등에 도검과 같은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한데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객들만이 아니었다.
배의 주인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섭춘과 몽무약 또한 객 중 몇몇에게 시선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인.’
가장 안쪽에 자리한 탁자에 있는 객들과 우측 맨 끝 탁자에 있는 이들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었다.
여기서 참으로 묘한 것은 우측에 있는 여섯은 복장이나 거친 생김새를 보면 낭인들이나 혹은 사파 계열의 무인들 같았다.
반면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자들의 복장은 상당히 정갈하고 깔끔했다.
복장도 거의 통일된 걸 보면 호위 무사들처럼 보였다.
저들이 호위하는 자는 당연히 한가운데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인 듯했다.
나비 문양의 수놓아진 푸른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꽤 기품이 느껴지는 게 귀한 신분으로 추측됐다.
“주군.”
섭춘이 목경운을 불렀다.
그 이유는 여인의 옆에 앉아 있는 수염 하나 없는 노인 때문이었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여인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하고 있는데, 다른 이들과 다르게 기운이 갈무리되어서 무위를 추측하기 힘들었다.
이를 느낀 것은 섭춘만이 아니었다.
‘저 노인 대체 뭐지?’
기감을 아무리 집중해도 그 경지가 파악되지 않았다.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신이 파악할 수 없을 정도라면 그 이상의 고수임을 의미했다.
이런 그들의 경계심이 목경운이 웃으며 말했다.
“신경 끄세요. 배를 구하러 온 거잖아요.”
하나 목경운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들과 따로 안면이 있거나 부딪칠 일도 없는데,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여겨서였다.
“알겠습니다.”
이에 섭춘이 객잔 주방 쪽으로 가 점소이를 불렀다.
그러는 사이 면사의 여인이 흥미롭다는 투로 목경운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런 촌에 갇혀 답답하던 차에 보물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구나.”
이런 그녀의 말에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가며 비위를 맞추던 노인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군······아니 아가씨.”
“그래.”
“방금 전에 들어온 저 잘생긴 청년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이 물음에 면사의 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이어지는 폭우로 사흘째 마을 객잔에 갇혀 있던 그녀는 객잔에 들어온 새로운 객 중 한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물에 젖은 머릿결하며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다.
저런 얼굴은 ‘그곳’에서조차 보기 힘들었다.
“공(公). 비가 그치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저 미색이 뛰어난 자에게 접대를 받고 싶군.”
“아가씨. 송구하오나 저들은······.”
“무림인이지?”
“그렇사옵니다.”
“그 정도는 저런 병장기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네네, 훌륭한 안목이십니다. 하온데 소인이 아가씨께 미리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괜히 무림인들과 엮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말인가?”
“네네. 맞사옵니다. 하오니 부디······.”
“공. 공이 본······녀를 호위하기 전에 했던 말이 있지 않은가?”
“······.”
“무림에서도 공 정도 되는 고수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이야.”
“그렇긴 하오만······.”
“하면 본녀의 지루함과 짜증을 달래기 위해 이런 부탁도 들어줄 수 없단 말인가?”
‘허어.’
이런 면사 여인의 말에 수염이 없는 노인이 난처함을 금치 못했다.
이미 객잔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기감(氣感)을 통해 저 객들의 무위가 보통 자들이 아님을 파악한 그였다.
저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들은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고작 저 나이에 저리 훌륭한 경지들에 이르렀다면 무림에서도 명문가의 자제이거나 대문파의 제자일 확률이 높다.’
면사 여인이 지목한 17세, 18세 정도로 보이는 저 아이 역시도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완숙한 절정 정도로 보이는 게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은 난감하다는 눈빛으로 저들을 바라보았다.
‘어쩐다.’
음식도 잘못 먹으면 심하게 탈이 난다.
지금이 딱 이런 상황이었다.
저쪽 편에 있는 보잘것없는 낭인 나부랭이 같은 것들이야 얼마든지 건드려도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저 정도 되는 이들은 달랐다.
괜히 잘못 건드리면 피곤해질 수도 있었고, 암행 중에 구설수에 얽히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다만,
‘계속해서 누르기만 한다면 분명 터지겠지.’
면사의 여인은 너무도 고귀하게 자랐기에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뤄야 직성이 풀렸다.
광주성까지 오고 가면서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겨우 어르고 달래면서 여기까지 왔다.
‘쌓일 대로 쌓였어.’
연일 계속되는 폭우로 이 습하고 허름한 객잔에서 사흘째 갇혀 있던 터라, 그녀의 심기는 최악에 가까웠다.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면 그 화가 결국 자신에게 미칠 것이다.
그리되면,
‘노부의 앞길도 힘들어지겠지.’
면사의 여인이 화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괜히 ‘그분’의 귀에 들어가 잘못 고해지기라도 한다면 향후가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다소 번거롭기는 하나 어느 정도의 절충이 필요한 듯했다.
노인이 면사의 여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하오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이와 함께 노인이 생각했던 바를 이야기하자 면사의 여인이 뭔가 탐탁지 않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 * *
-쏴아아아아!
객잔의 뒤편.
목경운과 일행들은 객잔의 주인이자 숙수를 겸하고 있는 노파를 따라 주방을 지나 객잔 뒤편으로 나왔다.
그렇게 뒤편으로 나온 노파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아니. 젊은 친구들이 뭐가 급하다고 그 배를 찾소?”
이런 노파의 물음에 섭춘이 공손히 말했다.
“어르신. 저희가 시일이 급한 상황인지라 당장 강을 건너야 해서요.”
“그건 아까 그대들이 말해서 알겠다만, 이 날씨에 저런 격랑에 배를 잘못 띄우면 큰일 날 수도 있네.”
“알고는 있습니다만 저희도 사정이 있습니다.”
이런 섭춘의 말에 노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이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마을의 북서쪽 가장 언덕 쪽이었다.
빗줄기가 워낙 거세서 미처 몰랐는데 그쪽에 상당히 큰 장원 같은 것이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마을에서 제법 잘 나가는 부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 짝에 가면 그 배 주인이 살기는 한데 가봐야 소용없을 것이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봐야 소용없다고 하는데 귓등으로 듣는가?”
“네?”
“그짝에 사는 배 주인······. 그러니까 그 집 어른이 못된 짓 하다 천벌 받아서 죽어가고 있네 그려.”
그 말에 섭춘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벌을 받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했잖는가. 그 집 어른이 죽어가고 있다고.”
“혹시 그 집 어른이 배의 사공입니까?”
“그렇네.”
“한데 죽어가고 있다고요?”
“그렇다 하지 않았나. 그 양반 수귀(水鬼)에 씌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야. 괜히 가봐야 자네들도 부정 탈 수도 있으니 그냥 비가 그치는 걸 기다리게.”
이런 노파의 말에 섭춘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에 걸렸나 했는데 수귀에 씌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의아해하는데 목경운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가보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에 노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지인이라 괜히 화를 당할까 봐 이리 얘기해주는데도 믿질 않는구만. 뭐 그리 부정 타서 죽고 싶다면야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
그 말과 함께 노파가 획하고 객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를 보며 섭춘이 찝찝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노친네가 재수 없게시리. 허참.”
천벌이니 수귀(水鬼)니 그런 것은 그저 괴담이 아닌가.
왜 이런 소리를 해대는 모르겠다.
그러는데 목경운이 말했다.
“어쨌거나 배 주인이 누군지 알았으니 가보면 알겠죠.”
“뭐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그들은 배 주인이 있다는 장원으로 곧장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몇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그런 그들을 누군가 불렀다.
“이보시게. 소협들.”
-흠칫!
그 부름에 섭춘과 몽무약이 순간 경계심에 찬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빗줄기가 거세다고 하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정도의 거리라면 충분히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위치였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돌린 그들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 자는?’
그들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객잔에 있던 그 수염이 없는 노인이었다.
안 그래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감으로 그 경지를 파악할 수 없기에 조심스러웠던 차에 대체 저 노인이 왜 자신들을 부른 거지?
의아해하는데 노인이 두 손을 모아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가던 길에 불러서 송구하네만. 노부는 범 모라고 하오.”
그런 노인의 말에 몽무약이 경계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아아. 소협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노부는 자네들을 해코지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라네.”
그들의 경계심을 알아차렸는지 스스로를 범 모라고 칭한 수염 없는 노인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에 몽무약이 재차 물었다.
“한데 어인 연유로 부르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허허허. 젊은 소협이 많이 급한가 보오.”
“······.”
“좋네, 하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아까 노부가 본의 아니게 자네들 사정을 듣게 되었네. 강을 건널 큰 배를 찾고 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이런 범 노인의 말에 몽무약이 미간을 찡그렸다.
본의 아니게 라고 했는데 결국 노파와 자신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불쾌감이 들려고 하는데 범 노인이 말했다.
“사실 노부도 모시고 있는 아가씨의 성화로 그 배 주인을 찾아갔었네.”
“배 주인을 찾아갔었단 말입니까?”
“그렇네. 한데 지금 이리 객잔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대충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이 가지 않나?”
이런 그의 말에 이번엔 섭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배를 빌리지 못한 겁니까?”
“그렇다네. 노부도 배 주인을 만나보았는데, 이미 오늘내일하고 있어 도저히 배를 몰 상황이 아니었다네.”
오늘내일한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인가?
이런 범 노인의 말에 섭춘이 이를 어찌할 거냐라는 표정으로 몽무약을 쳐다보았다.
배를 조종할 수 있는 사공의 목숨이 위태롭다면 삯이고 협박이고 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는데,
“말씀 감사합니다. 한데 그걸 알려주시려 저희를 부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목경운이 범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범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맞네. 해서 그런데 모시는 아가씨께서 날이 개기를 기다리는 동안, 소협들과 교분을 쌓고 싶어 하시는데 괜찮다면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는가?”
“교분요?”
“그렇네. 서로 기다리는 처지라 딱히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가씨께서 워낙 자네들에게 관심을 보인지라 노부가 이렇게 부탁함세.”
그 말과 함께 범 노인이 다시 한번 포권 지례를 했다.
워낙 공손한 태도로 말하는지라 몽무약과 섭춘이 난감하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그들은 기밀 임무 중이기에 다른 누군가와 접촉할 만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비가 그치길 기다리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에 섭춘이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어르신의 권유에는 감사합니다만 저희가 워낙 급한 상황인지라 모시는 분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허어.”
이런 섭춘의 말에 범 노인이 혀를 찼다.
그러더니 이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참 난감하구만. 어차피 당장에 강을 건널 수 없는데 굳이 그리 무리할 필요가 있겠는가?”
“상황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허어. 이것 참.”
“하면 어르신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흠칫!
그 순간 섭춘과 몽무약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그것은 범 노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강렬한 기세 때문이었다.
뒷짐을 지고 있었지만 흡사 날카로운 검을 연상케 하듯이 범 노인의 기세가 그들을 압박해왔다.
‘극(極)······. 초절정의 극이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범 노인은 굉장한 고수였다.
이미 기세에서 나오는 진기만으로도 그 격차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천지회로 치면 간부 급에 비견될 수준이었다.
범 노인이 이렇게 살벌하게 기운을 드러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보게. 소협들. 노부가 이리 부탁하지 않나. 노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가씨와 교분을 쌓아주길 바라네.”
말은 공손했으나 거의 반 협박에 가까웠다.
섭춘이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저희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허허허. 협박이라니 그럴 리가 있는가.”
범 노인은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격차를 알려준 후에 아가씨가 원하는 자리를 가지게 할 작정이었다.
적어도 아가씨의 명에 성의를 다했다는 표시를 내기 위해서였다.
“협박이 아니라 협조라고 보면 될 걸세.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리해줄 수 있겠나?”
그렇게 범 노인이 더욱 기운을 끌어올리며 그들을 압박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범 노인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흠칫!
순간 범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목소리는 아가씨께서 지목했던 그 제일 어린 청년의 것이었다.
‘언제?’
분명 저들 셋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범 노인은 이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협박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한데 알려드릴까요?”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