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204)
삼 년 전 어느 날.
[현아.] [네. 부…..] [둘만 있을 때는 아빠라고 해도 좋다.] [네. 아빠.] [우리 말괄량이가 올해로 열일곱이니 다 큰 숙녀가 됐구나.] [헷. 숙녀라면 요조숙녀인가요?]현아라 불린 그녀가 화려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자신의 들뜬 기분을 자랑했다.
그러자 기품이 느껴지는 수려한 외모의 중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경(詩經)을 공부했구나.] [네. 시경에 이르길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라 하잖아요.]시경(詩經)에 이르길 요조숙녀 군자호구라 한다.
얌전하고 정숙한 여인은 군자와 잘 어울리는 배필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저는 요조숙녀가 되고 싶진 않아요.] [왜 그러느냐?] [세상에 태반이 여인이고 그 여인들더러 요조숙녀가 되라니 뭐니 하는데, 저는 그렇게 고리타분해지고 싶지 않아요.] [그럼 어찌하고 싶느냐?] [남자도 삼처사첩을 거느리는데 저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이런 그녀의 말에 중년인이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뿐인 여식이라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가끔은 걱정이 되기도 하다.
아직 이 아이는 자신의 품 안에 있기에 무서운 게 없지만 암략과 권력투쟁이 넘쳐나는 이곳도 그렇고 세상은 험하기 그지없었다.
[현아.] [네.] [숙녀니 정숙이니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나 너도 이제 다 자랐으니 이 아비가 한 가지 당부하마.] [무엇을요?] [지금 네가 누리는 모든 것은 오로지 네 성씨(姓氏)와 그 피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 고귀한 혈통이고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나……] [하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이 왜요?] [네게 주어진 그 성씨(姓氏)와 혈통의 힘을 너무 과신하지 말거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네 혈통과 이 애비가 네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만 언젠간 그 울타리가 아무 소용이 없을 때가 있을 게다.] [……..] [그 두렵고 혼란스러운 순간이 온다면 결국 너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이 애비도 이 성씨도 아닌 오직 너 자신의 판단이 될 거란다.]* * *
-쿵!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평생을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살아왔던 그녀였다.
한데 난생처음 겪어보는 타인의 악의(惡意)에서 비롯된 공포심은 그녀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떨림이 그치지 않게 만들었다.
-파르르르르!
떨림에 진정되지 않는 손발을 보며 그녀는 문득 부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늘 오냐오냐했던 부친이 처음으로 엄한 얼굴로 자신에게 충고를 했었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순간이 온다면 결국 너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이 애비도 이 성씨도 아닌 오직 너 자신의 판단이 될 거란다.]그때는 부친이 심기가 불편해서 하는 말이라 여겼다.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부친이 말한 그런 순간이 과연 오기나 할까?
자신은 절대적인 혈통을 가졌고 그 성씨였기에 같은 혈족이 아니고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거라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 그 모든 게 소용없는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니 절로 현실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귓가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릎도 꿇었겠다 사죄만 하면 되겠군요.”
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려왔다.
‘내가…..내가 이런 천한 무뢰배 같은 자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자신은 중원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다.
그런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고귀한 혈통을 위해 체면을 지키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게 그리 어렵나보군요. 이러면 여기 있는 모든 분들한테 민폐일 텐데요.”
목경운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였다.
객잔 내에 있는 사람들이 원망의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며 수군거렸다.
‘빌어먹을. 그게 그렇게 어렵나?’
‘그냥 사죄하면 끝나는 일이잖아!’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들까지 이렇게 당해야 하는 거야?’
‘제 까짓게 뭘 얼마나 잘났다고!’
작게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그 모든 소리들이 이상하리만큼 고막에 때려박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자존심을 부릴 수 없도록 막다른 곳으로 내몰았다.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그 누군가는 범 노인이었다.
“끄으으으.”
어깨 뼈가 부러져 살점을 뚫고서 튀어나오는 부상을 입은 범 노인.
그런 범 노인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참….으…..셔….야….합니다?’
-꽉!
이런 범 노인의 말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수모를 겪는 모든 순간이 괴롭고 화가 났지만 여기서 그 모든 걸 드러내면 자신을 비롯해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
객잔의 하찮은 것들은 모두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고귀한 혈통인 자신의 목숨도 그렇고 부친께서 붙여준 범 공을 이런 자리에서 죽게할 순 없었다.
이에 결국 그녀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심경으로 입을 열었다.
-으득!
“제가……공자님께…..큰…..죄를……흐윽……”
-뚝뚝!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말을 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너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이 애비도 이 성씨도 아닌 오직 너 자신의 판단이 될 거란다.]그러나 부친의 그 말을 곱씹으며 결국 그녀는 모든 말을 마쳤다.
“지었습니다……부디…..용서해….주세요.”
결국 굴복하여 사죄를 마치자 객잔 내의 모든 시선은 목경운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긴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 자가 약조를 깨고서 전부 죽인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며 두려워했다.
그때 목경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해야 겠군요.”
‘아쉽다고?’
이런 목경운의 말에 범 노인이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가씨가 끝까지 버텼다면 정말로 객잔 내에 있는 자들을 전부 몰살시킬 작정이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심성이 악독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아가씨……’
범 노인은 그녀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화를 터뜨리고 자존심을 지켰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그녀에게 독이 된다기 보다 약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고귀한 신분과 혈통이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슥!
범 노인이 목경운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러자 목경운이 피식하고 웃더니 몽무약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거두세요.”
“네.”
명이 떨어지자 몽무약이 그녀에게서 검을 거뒀다.
자신의 목에서 검이 떨어지자 굴욕을 참아가며 사죄를 한 그녀가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앞으로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거나 수모를 당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로 말이다.
그리고,
‘용서치 않을 거다.’
자신을 이런 수모를 안겨준 저 남자.
절대로 잊지 않을 거다.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신에게 이런 수모와 굴욕을 안겨다주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당장은 즐겨라.
하나 머지않아 네놈은 가장 비참한 형태로 내게 빌게 될 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객잔 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함으로서 상황이 무사히 끝나게 된 것에 모두가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그녀는 가증스러웠다.
저놈들도 똑같았다.
자신들의 안위나 걱정한다고 정작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자신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웠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이놈들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수모를 겪는데 일조하고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모두가 마주치는 것을 회피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저 놈들이 이곳을 떠나게 되면 호위들로 하여금 저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 수치스러운 일이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길 원하지 않았다.
이런 그녀의 살의에 찬 모습을 보며 목경운이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이내 범 노인의 멀쩡한 반대편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객잔의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쏴아아아아아!
밖으로 나와 객잔에서 떨어지게 되자 몽무약이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섭춘이 그런 그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이런 그의 물음에 몽무약이 섭춘이 아닌 목경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군.”
“왜 그러시죠?”
“그냥 이렇게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이 물음에 섭춘이 왜 그러나하다가 이내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저도 무약과 같은 생각입니다.”
“무엇이 말이죠?”
“힘에 억눌려서 굴복하기는 했으나 상당히 자존심이 세보였습니다. 그리고 신분을 계속 운운하는 것이…..”
“관의 고위 관료의 자제이거나 혹은 황궁 쪽 사람 같았습니다.”
몽무약의 이 추측에 섭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황궁? 한데 황궁 쪽은 너무 간 거 아닌가? 황족이라면 저것보다 더 호위가 많지 않았을까?”
“초절정의 극에 이른 노고수에다 일류에 이른 무사들을 여덟이나 호위로 붙였는데, 그 정도면 그렇게 적지 않은 듯 한데?”
“그래도 황족이라면 군사들도 대동했을 것 같은데.”
“그야 모르지. 암행을 하려고 조용히 나온 건지 모를 일이니까.”
이런 몽무약의 말에 섭춘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의 말이 맞다면 이 정도로 끝내기에는 후환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에 섭춘이 목경운에게 말했다.
“주군. 차라리 이왕 일이 벌어졌으니 속하들이……”
“그럴 필요없어요.”
“네? 어찌?”
“차도살인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차도살인?”
차도살인(借刀殺人).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말로 남을 이용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의미다.
목경운이 어째서 이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해하는데,
-꺄아아아아악!
객잔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섭춘과 몽무약이 의아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 * *
목경운과 그 일행들이 나가자 그녀가 부상 당한 범 노인에게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범 공 괜찮아?”
“하아….하아……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뼈가 부러져서 살점을 뚫고 튀어나온 걸 보니 이걸 괜찮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범 노인은 부친도 인정하는 대단한 무공의 고수였다.
이 정도는 본인의 말처럼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정말 괜찮겠어?”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런 범 노인의 대답에 그녀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하면 공. 한 가지 부탁 들어줄 수 있겠어?”
“그게 무슨?”
“몸을 추스르고 나면 호위 무사들과 함께 이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처리해줄 수 있어?”
‘!?’
이런 그녀의 말에 범 노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느 정도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는데, 그 불똥이 객잔에 있는 이들에게마저 튀었을 줄이야.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위대한 혈통인 그녀가 자신이 수모를 겪는 모습을 모든 이들에게 보였으니 말이다.
‘별 수 없구나.’
이런 그녀의 잔인한 선택을 탓할 수가 없었다.
이에 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슈슈슉!
‘!?’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범 노인이 황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어깨의 부상 때문에 그런지 몸이 뜻대로 말을 듣질 않았다.
이에,
-푸푸푹!
“흐읍!”
범 노인이 자신의 몸을 방패삼아 날아드는 무언가를 일단 등으로 받아냈다.
등이 화끈거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암기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몸이 왜 이러지?’
분명 오른쪽 어깨 부상이 심하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몸이 무거워지며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악독한 녀석이 가볍게 두드렸던 어깨의 감각이 이상했다.
마치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흠칫! 팍!
화들짝 놀란 범 노인의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복부를 뚫고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왔다.
-푹!
바로 앞에서 이를 본 그녀가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파악!
“악!”
그런 그녀를 범 노인이 다급히 앞으로 밀쳐내며 몸을 돌려 조법을 펼쳤다.
-파파팍!
“큭!”
-촤르르르르!
범 노인의 조법에 가슴을 격타 당한 누군가가 뒤로 밀려났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객잔 내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낭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데 한 사람이 다가 아니었다.
낭인들이 어느새 도검을 뽑으며 범 노인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이들이 어찌?’
범 노인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
-쏴아아아아아!
같은 시각 객잔 바깥.
목경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거기 있던 낭인들 중 한 분께 넌지시 이야기해줬거든요. 저기 귀하신 아가씨께서 이리 망신을 당했는데 과연 당신들을 가만히 내버려둘까 하고 말이죠.”
이 말에 섭춘과 몽무약이 이내 혀를 내둘렀다.
목경운이 말한 차도살인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 객잔 안은 이제 저들끼리의 싸움으로 피의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럼 이제 갈까요?”
목경운은 더 이상 이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섭춘과 몽무약은 진심으로 목경운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상황을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히 자신의 뜻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런 자가 적이 된다면 진심으로 무서워질 것 같았다.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