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318)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저 배신자 늙은이보다 너 정도 되는 괴, 아니 대단한 무재를 지닌 인재라면 그분께서도 충분한 대가를 주고서라도 데려오길 원하실 거다.”
흉터의 중년인 이광의 말에 구양가의 가주 구양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그가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장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직의 후환이나 그간의 명성을 개의치 않고서 기껏 굴복했더니, 저 괴물 같은 놈이 조직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차라리 아무도 없었다면 모를까 조직의 간부인 제 이계(二界) 이광 저놈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이를 어찌해야 하지?’
만약 이광이 저놈과 함께 자신을 공격해온다면 어떻게 해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 괴물 같은 놈 혼자서도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구양소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팔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원기(元氣)의 손상도 있어서 도망치기도 어려웠다..
‘빌어먹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는데 이광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이 자신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입 꼬리를 올리더니 목경운에게 말했다.
“겸살귀. 조직에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조직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줄 수 있나?”
“아직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는데 요구부터 하는군요.”
“자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세. 그리고 자네도 우리 조직인이 된다면 반드시 해줘야 하는 일일세.”
“그게 뭐죠?”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일세.”
“배신자? 아아.”
이광이 구양소를 빤히 쳐다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어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던 구양소가 황급히 목경운에게 소리쳤다.
“이보게. 아무리 자네에게 굴복했다고는 하나 조직의 후환까지 각오하고서 한 걸세. 한데 이제 와서 노부를 노린다면 정말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광이 다그쳤다.
“너무한 처사? 늙은 여우 놈아! 낯짝이 얼마나 두꺼우면 어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느냐?”
“뭐, 뭐라?”
“초빙해서 기껏 대우해줬더니 조직을 배신한 주제에 그걸 자랑스럽게 내뱉다니. 쯧쯧, 이 모든 게 네놈의 인과응보다.”
“대우? 하!”
이런 그의 빈정거림에 구양소가 뭔가 기가 차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저 괴물 놈이 어떻게 나오냐가 문제였다.
그러는데,
“해서 죽여달라는 건가요? 아직 정식으로 합류한 것도 아닌데 일이 많은 곳이로군요.”
“양해해주게. 엄밀히 저 자가 조직을 배신한 것에는 자네의 책임도 있지 않은가.”
“뭐 그렇게 되나요.”
“그분께 자네의 공을 꼭 알리겠네. 하니 당장….”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팟!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는지 구양소가 바닥을 박차며 그들이 있는 곳에서 반대편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구양소가 갑자기 도망치자 이광이 소리쳤다.
“저 배신자 늙은이를 잡아야 하네!”
쩌렁쩌렁한 그의 외침에 안 그래도 몇 안 남은 복면인들 중 두 명이 황급히 구양소가 있는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아니. 이 녀석들이?’
그들에게 한 말이 아니었는데 쫓아가다니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구양소가 배신했다고 하나 제까짓 놈들이 쫓아간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작자가 아니었다.
‘설마?’
순간 이광이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진짜로 구양소를 잡기 위해 쫓아간 게 아닌 듯 했다.
복면인들의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고 피투성이가 돼서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이나 도망치는 구양소를 보면 누가 봐도 상황이 불리하다.
저들은 구양소를 쫓는 것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도주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에 이광이 여유를 부리고 있는 목경운에게 소리쳤다.
“겸살귀. 저 늙은이를 놓치면 조직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오. 그리 된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소.”
“참. 여러모로 성가시군요.”
-스륵!
이에 결국 목경운이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흩어지듯이 사라지자 이광이 이를 악물었다.
하반신만 멀쩡했었어도 자신이 직접 쫓아가서 저 배신자 놈의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한데 내심 불안해졌다.
겸살귀 그놈이 구양소 그 늙은이를 붙잡는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나 일부러 놓아주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분께서 자신을 죽음으로 처벌할지도 몰랐다.
‘놈이 부디 잡아와야 할 텐데.’
안 그러면 정말로 곤란해진다.
* * *
-파파파파팟!
팔이 비틀려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부상을 입었지만, 명색이 벽을 넘어선 화경의 고수답게 팔독사장 구양소는 엄청난 속도로 수풀을 가로지르며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속도는 말이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보다도 훨씬 빨랐다.
스쳐지나가는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구양소는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젊었을 때조차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면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이광 그놈은 지금 걸을 수도 없으니 그 괴물 놈만 따돌릴 수 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렇게 달리면서도 추적을 조금이라도 방해하기 위해 경로마다 지니고 있는 모든 암기와 하독(下毒)까지 했다.
‘!?’
그런데 그렇게 달리던 구양소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직 뒤만 신경쓰고 있었던 그였다.
한데 그가 경공을 펼치고 있는 방향으로 한 인영이 보였다.
‘빌어먹을!’
구양소는 본능적으로 그가 목경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에 안 되겠다고 여긴 구양소가 그 인영을 향해 독기(毒氣)가 실린 강기를 날려버렸다.
-촤아아아아!
그리고는 방향을 다시 동쪽으로 틀었다.
임시방편에 불과했으나 뭐든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팔독(八毒)이 실린 10성 공력의 강기였으니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팍!
그 순간 그의 바로 다섯 보 앞에 흐릿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곧바로 진해졌는데,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요.”
바로 목경운이었다.
인상이 일그러진 구양소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벽의 벽을 넘어섰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격차가 날 줄은 몰랐다.
결국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부처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단 말인가.
결국 구양소가 허탈함을 금치 못하고 멈춰 섰다.
단념한 듯한 그의 얼굴 표정에 목경운이 말했다.
“좀 더 반항할 생각은 없나요?”
“뭘 어찌 반항한단 말인가? 노부를 가지고 노는 겐가?”
“그럴 리가요.”
목경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구양소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메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노부가 아직 생에 미련이 많아 조직의 후환까지 감수하면서 항복을 했네. 한데 정말 너무하네 그려. 기어코 노부를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나?”
“생에 미련이 있으시다니 안타깝네요. 저는 딱히 죽일 생각이 없었거든요.”
“……..”
그래. 이광 그놈의 요구사항이었지.
이에 구양소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제발 노부를 놓아줄 수 없겠나? 아무리 이광 그 자가 조직을 위해서니 뭐니 요청을 했다지만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 아닌가. 어찌 자네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겐가?”
“글쎄요. 상황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죠.”
“군자라면 모름지기….”
“저는 군자도 아니고 제 발언을 금과 같다고 여긴 적이 없답니다.”
“………”
씨알도 먹히지 않자 구양소가 답답함과 허탈함에 말문이 막혔다.
이놈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듯 했다.
적어도 도리라는 게 있으면 자신을 놓아주거나 일말의 자비라도 베풀 줄 알았는데, 그건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자존심도 버리고 목숨을 구걸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독으로 끝을 보진 못했더라도 딱 한 가지만은 어떻게든 이루고 싶었었다.
한데 이번 생애서는 무리인 듯 했다.
이에 단념한 구양소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눈을 감고서 읊조렸다.
“아아아. 기어이 승부를 보지 못하는군.”
“승부? 무엇이 말이죠?”
“말한다고 살려줄 것도 아닌데 뭘 어쩌란 말인가.”
구양소는 더는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자존심을 던질 대로 던졌고 굳이 살려주지도 않는데 잘 보일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그에게 목경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죠. 보는 눈도 없는데 마음이 동할지 누가 압니까?”
“…….이미 한 번 했던 약조도 깨려고 하는데 노부가 자넬 어찌 믿는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어르신도 살기 위해서 조직과의 신의를 깬 것이나 다름없는데 제가 어르신을 어떻게 믿지요?”
“그건…….”
이에 구양소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해도 상대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네. 자네 말이 맞군.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는 하나 쉽게 굴복하고서 정보를 누설한다고 했으니 이 노부가 더 신뢰 못할 인간이로군.”
“아니까 다행이군요.”
“……..”
이놈 은근히 말로 뼈를 때린다.
내심 불쾌했지만 힘으로는 되지 않으니 이를 꾹 참고 있는데 목경운이 말했다.
“한데 궁금하긴 하군요. 목숨 때문에 후환까지 신경 쓰지 않고서 쉽게 배반할 정도면서 왜 그 조직을 따랐던 거죠?”
“그걸 들어서 뭘 하려는 건가?”
그 물음에 목경운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죽일지 아닐지를 결정하려고요.”
“죽일지 아닐지를 결정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노부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닌가?”
구양소가 인상을 쓰며 반발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목경운이 팔짱을 끼고서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작 목숨의 무게를 논하는 것 같나요? 그보다는 생사여탈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명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흠칫!
참으로 묘했다.
딱히 기운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서슬 파란 느낌이 목을 감싸고 있었다.
이에 흠칫한 구양소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자신이 살아온 생에 절반, 아니 삼분지의 일도 살지 못한 녀석인데, 어째서 이 정도의 무게감과 위압감을 지닌 거지?
의아해하던 구양소는 이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두머리의 그릇인가?’
이놈 이제보니 군림자의 그릇을 타고났다.
나이와 상관없이 군림자의 그릇은 지도자나 패자로서 타인을 아우르고 자신이 만든 길로 만인을 인도한다.
구양소는 내심 탄성을 흘렸다.
자신이 이 녀석에게 위축되는 것이 단순히 힘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렇게 속으로 놀라워하고 있는데 목경운이 말했다.
“말씀이 없으신 건 죽음을 택한다는 의미이신가요?”
그 말에 구양소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빚을 갚기 위해서였네.”
“빚?”
“그렇네.”
“어떤 빚이죠?”
“노부의 손녀는 불치에 가까운 병에 걸렸네. 그들이 구해준 금장초(錦帳草)라는 약초 덕분에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네.”
“금장초? 그건 극도로 차가운 설원 지역에서 난다는 희귀한 풀이 아닌가요?”
‘이 녀석?’
목경운의 약재에 관한 지식에 구양소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금장초는 구양가의 장원이 있는 서역뿐만 아니라 중원의 약재상들이나 의원들도 거의 알지 못하는 특수한 약재였다.
자신 역시도 손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겨우 알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금장초를 알고 있다니 약재에 관한 지식도 보통이 아니었다.
대체 이 녀석 정체가 뭐지?
그러는데 목경운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어찌 되었든 구하기 힘든 금장초 때문에 손녀 분의 목숨을 대가로 저들과 함께 하기로 했단 거네요.”
“…….그렇네. 어쩔 수 없었네. 금장초는 서역이든 중원이든 자생하기 힘든 약초였고 노부 역시도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기에 그들의 도움이 절실했네.”
“혈육의 목숨이니 그러시겠죠. 한데 그러면 더더욱 배신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 자네의 말도 맞네. 하나 노부는 저들에게 충분히 빚을 갚아주었네. 저들을 위해서 자그마치 근 십 년 가까이 일했고 금장초를 볼모로 너무 많이 끌려 다녔네.”
그 말에 목경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금장초를 한 번만 쓴 게 아니었나요?”
“한 번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꾸준히 복용해야 했네. 그들이 어디서 금장초를 구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정 수량을 늘 공급해 왔고 그것 때문에 노부 역시 별 수 없이 그 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도울 수밖에 없었네.”
그 말을 하는 구양소의 목소리에 묘한 회의감이 서렸다.
손녀의 목숨이 저당 잡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직과 함께 하고 있으나 그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독으로 인해 무림인도 아닌 수많은 민간인들조차 목숨을 잃게 되자 더욱 그들과 연을 끊고 싶은 마음이 커진 상태였다.
이런 그를 보며 목경운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손녀의 목숨보다 본인의 목숨을 택한 셈이군요.”
그 말에 구양소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노부를 뭘로 보는가. 아무리 노부가 그들에게 끌려다녔다고 해도 약재에 관해서는 중원과 서역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네.”
“호오. 설마 금장초를 대체할 해법을 찾은 겁니까?”
“…….자넨 눈치가 정말 빠르군.”
구양소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대로일세. 십 년 동안 노부는 남은 금장초를 분석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약재를 만들었네.”
“저들과 연을 끊을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군요.”
“그렇네. 사실 자네로 인해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당인해 그놈과 결착을 내고서 가솔들을 데리고 은거를 할 참이었네.”
“…….결착이라는 게 천독수 당인해를 말하는 거였군요.”
“녀석과는 오랫동안 겨뤄왔지만 줄곧 결착을 내지 못했지. 그게 늘 미련으로 남았었기에 마지막으로 겨루고 싶었었네.”
독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불리는 팔독사장 구양소와 천독수 당인해는 중원인들 누구나가 인정하는 호적수였다.
그리고 그들 역시도 서로를 늘 의식해왔고 겨뤄왔다.
이런 구양소의 순수한 미련에 그를 바라보는 목경운의 눈빛이 묘해졌다.
-왜 납득이 가지 않느냐?
청령이 목경운에게 물었다.
이에 목경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네겐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필생을 두고서 겨룰 만한 호적수가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다.
-그런가요?
-당연하지. 본좌에게도 그럴 만한……아니다. 어떻게 할 거냐? 살리고 말고는 중생 네 마음이다만 뒤에 미칠 영향은 계산해야 한다.
-그래야죠.
그러는데 구양소가 비밀을 털어놓아 속이라도 시원한지 한층 개운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서 노부를 어찌할 건가?”
그런 그의 물음에 목경운이 턱을 쓰다듬다 답했다.
“흐음. 그냥 죽이기에는 확실히 아깝군요.”
그 말에 구양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면 노부를 약조대로 놓아줄 텐가?”
“그건 어렵지 않은데, 놓아주게 되면 그쪽이 원하는 결착도 도망치느라 하기 힘들 테고, 가솔들까지도 위험해질 텐데 상관없나요?”
이 물음에 순간 구양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당장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만 조직에서는 어떻게든 그를 제거하려 할 테고, 그를 찾기 위해서 아직까지 도망치지 못한 가솔들을 노릴 거다.
원래의 계획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조용히 사라질 수 있었는데 제대로 꼬였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복잡한 상황에 구양소는 답답함에 탄식을 흘렸다.
“하아……”
그런 그에게 목경운이 말했다.
“하지만 꼭 방법이 없는 건 아니군요.”
“방법이 있다는 건가?”
“네. 그냥 죽으면 해결 될 일이니까요.”
“뭐?”
목경운의 답변에 구양소가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뭔가 해결 방안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해놓고는 결국 자신이 죽으면 된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당혹스러워하는 그에게 목경운이 입 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말했다.
“꽤 아프긴 하지만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 정도는 감내할 수 있겠죠?”
‘!?’
* * *
-쏴아아아아!
빗살이 조금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제 이계(二界)이광이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양가의 가주 구양소가 도망친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 늙은이는 손녀가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조직을 배신하기도 힘들다.
물론 본인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에 굴복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자신이 지켜봐왔던 구양소는 그리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살려고 아등바등했던 걸까?
심지어 도망까지 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수풀 사이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첨벙! 첨벙!
고여 있는 빗물을 밝고서 걸어오는 그는 바로 목경운이었다.
목경운이 나타나자 이광의 시선이 자연스레 어딘가로 향했는데, 그것은 바로 오른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을 보자 이광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과연! 과연!’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목경운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구양소의 잘려진 머리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혀까지 늘어져서 죽어 있는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이놈 정말 물건이구나.’
놓치거나 혹은 놓아주는 상황을 상정했던 그였다.
그런데 아주 깔끔하게 목을 베어서 가져왔다.
대종사 급의 무위에 이르렀다보니 여유를 부렸음에도 손쉽게 따라잡아 배신자 놈을 처단했다.
‘됐어.’
이 정도라면 그분께서도 구양소를 잃었지만 흡족해 하실 거다.
그보다 더 뛰어난 인재를 얻었으니 말이다.
“이거면 됐나요?”
-쿵! 첨벙!
목경운이 이광의 가까이로 구양소의 머리통을 던졌다.
혀를 내밀고 있었으나 자신이 죽은지도 모르는 것처럼 별다른 표정이 없는 그의 모습에 이광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직도 이 발전 속도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정말 대단하다.
화경의 고수조차 이리 당한 걸 보면 말이다.
“고생했네. 조직의 수장이신 그분께서도 자네의 공을 치하하실 걸세.”
“치하까진 필요없고 제가 원하는 바만 주었으면 하는군요.”
“걱정하지 말게. 자네 말대로 그분에 대한 의문이나 조직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무조건 들어주실 걸세.”
“그래준다면 감사하겠군요.”
“암 당연한 일일세.”
“그럼 이건 이제 필요없겠군요.”
그 말과 함께 목경운이 걸어와 이내,
-콰직!
“지, 지금 뭘…..”
뭐라고 말릴 틈도 없이 목경운이 구양소의 머리통을 밟아서 으깨버렸다.
이 광경에 이광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물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수급을 가져가서 확인시켜주려 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를 으깨버렸으니 그럴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목경운의 성급한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어하던 이광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
마냥 아랫사람 같았으면 다그칠 일이었지만 이 녀석은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대종사 급의 경지에 이르렀을 만큼 괴물 같은 잠재력을 지녔다.
분명 그분께서 중용하실 게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악연으로 시작했는데, 이 정도 일을 가지고 나무라서 서로 간에 얼굴을 붉혀봐야 좋을 게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네.”
아무 말도 못하고 단념하는 그 모습에 목경운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가 이렇게 나오리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그였다.
이로써 구양소는 이들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이 되었고 더는 시신이고 뭐고 확인해볼 길이 없었다.
목경운의 머릿속에 기겁을 하던 구양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 * *
구양소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노, 노부의 얼굴 가죽을 벗기겠다고?] [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네.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 얼굴 하나를 희생해서 저들과 결별할 수 없다면 값싼 대가가 아닌가요?] [아니 얼굴 가죽만 가지고 대체 이광 그 자를 어찌 속이겠단 건가? 머리라도 베어가지 않는 한 절대 믿지 않을 걸세.] [그렇지 않아도 하나 쓸 만 한 게 있더군요.]그렇게 말한 목경운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건 죽은 복면인의 잘린 머리통이었다.
구양소를 쫓아가면서 도망치던 두 복면인을 발견했고 그들 두 사람을 단 번에 목을 베어버렸던 차였다.
[그걸로 대체 뭘?] [이 머리통에 어르신의 얼굴을 씌우려고요.]‘!!!!!’
이를 들은 구양소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자네 인피면구도 만들 줄 아나?] [네. 뭐 그리 어렵진 않아요. 특히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벗긴다면 더더욱 말이죠.]이 말에 구양소는 혀를 내두르다 못해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 녀석의 능력은 어디까지인 거지?
* * *
얼굴 가죽을 벗긴다고 해서 식겁해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구양소는 이것만이 그들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 여겼기에 결국 목경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 제안에도 약간의 대가가 따르긴 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광이 속았기에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는데 이광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그보다 이제 한 식구나 다름없는데 하반신의 기운도 해소시켜줄 수 있겠나?”
이광이 눈짓으로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목경운이 구양소를 잡으러 간 사이에 계속해서 하반신을 파고드는 기운을 해소시켜보려고 했던 그였다.
그런데 일부 기운을 내보낼 수 있기는 했으나, 완전히 해소시킬 수가 없어서 여전히 근맥이 회복되지 못했다.
“어려울 게 있나요. 한데 그 전에 제가 원하는 자에 대한 정보를 먼저 줄 수 있을까요?”
이런 목경운의 말에 이광이 미간을 찡그렸다.
조직에 들어오겠다고 해놓고는 굳이 자신의 하반신으로 흥정하려 하는 건 무슨 짓이지?
일말의 의구심이 생겨난 이광이 말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가?”
“아직은요.”
그 말을 들은 이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정도 대단한 녀석이 인재로 들어온다는 그분이 공을 치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들떠서 의구심을 잠시 거뒀었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화로 의구심이 조금 더 올라갔다.
혹 녀석이 정보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합류하는 척 하는 거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에 이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군. 한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일세. 만약 자네가 원하는 정보만 듣고서 나를 죽일 수도 있지 않나?”
“융통성을 발휘한다고 했는걸요.”
“그 말을 내가 어찌 믿는단 말인가?”
“원하는 대로 독공을 쓰는 어르신까지 죽여드렸는데, 꽤 피곤하게 나오시네요. 이러면 꽤 곤란해지는 데요.”
그 말과 함께 목경운은 가볍게 위압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광이 압박감에 다소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하면 하나만 더 증명해보이게.”
“뭘 또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죠?”
“성화령주를 먼저 수하들을 통해서 보내게 해주게. 대신 나는 어차피 자네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이곳에서 닷새 동안 함께 있겠네.”
이런 그의 제안에 목경운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생각보다 이자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광이 목경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녀석이 자신들의 조직에 들어온다고 한 것은 새빨간 거짓이다.
‘어떻게 나올 거냐?’
하며 반응을 살피는데,
“뭐 그게 증명이 된다면 그렇게 하시죠.”
목경운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그러자 이광이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기우였나?’
자신이 너무 크게 의구심을 가졌던 걸까?
녀석은 자신의 요구를 계속 군말 없이 들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보내면 되나요?”
목경운이 주변에 두르고 있던 진기를 거두고는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어르신을 여기로 모셔와주세요.”
그런 목경운의 명에 숙소 주변을 지키며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의아해했지만, 이내 섭춘이 성화령주를 데리고 가까이로 왔다.
한데 여기서 목경운의 흥미를 끄는 일이 일어났다.
이광을 발견한 성화령주가 그를 알기라도 하듯 굳은 얼굴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찬가지로 이광 또한 그녀를 아는지,
“성화령주. 오래간만입니다.”
“……..”
성화령주가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이광이 피식하고 웃더니 이내 손짓으로 살아남은 복면인들을 불렀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이광이 그녀에게 말했다.
“예언의 그것은 어디에 있소?”
“……..”
그 물음에 성화령주가 더욱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이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장 호법, 아니 문노 그 노친네를 찾지 못했을 것 같소?”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경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문…..노?’
그것은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