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387)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야릇한 옷을 입고서 누군가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고혹적인 외모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채린.
당대 비살문의 후계자이자 사대살수 중 하나인 비살염객의 칭호를 물려받을 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빌어먹을.’
하채린은 속으로 욕을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내뱉었다.
백일백살(百日百殺)의 마지막 목표물만 다른 인물로 정했었다면 진즉에 문주로 등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백일백살을 실패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연목검장 이후로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아직도 자신이 어쩌다 이곳 천지회에 있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솔직히 가망이 없었다.
아무리 사대살수의 칭호를 물려받을 후계자라고 하나 이곳은 현 무림을 삼분하고 있는 세 거대 세력 중 하나인 천지회였다.
그리고 자신이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이자는 이 거대 세력을 다스리는 회주의 제자였다.
‘목숨줄을 연명한 걸로 만족해야 하는 거야?’
화가 많고 자존심이 강한 그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 빌어먹을 놈이 천지회 회주의 제자만 아니었다면 독살이든 암살이든 무엇이든 간에 시도해서라도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흠. 거 제대로 주무르지 못할까?”
“네넷!”
‘으으으.’
솔직히 두려웠다.
몇 번이나 도망치고 반항했다가 이자의 손에 안면 뼈가 거의 함몰 직전까지 따귀를 맞았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이자가 손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움찔할 만큼 무서웠다.
이렇게 고분고분해진 그녀를 보며 천지회주의 둘째 공자 장능악, 아니 그의 육신에 빙의한 고찬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은퇴 후에 연목검장에 들어가 그녀를 다시 봤을 때만 하더라도 모든 게 제대로 꼬였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천하의 사대살수의 칭호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비살문의 은퇴한 살수 출신인 자신의 다리나 주무르며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흐흐흐. 새옹지마(塞翁之馬)로구만.’
역시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주인인 목경운 덕분에 저 계집의 몸에 빙의해서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버틴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부리며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찰나였다.
-우우웅!
그 순간 공간이 일렁이며 연기로 된 문이 열리더니 이내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웬 방사 복장을 하고 있는 단발에 귀여운 외모의 소녀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고찬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여수린?”
여수린.
그녀는 해선각(諧仙閣) 적미노선(赤眉老仙)의 제자로 스승의 명을 받고서 파견된 방사였다.
목경운과 계약을 맺어 육인강령술(六人降靈術)의 술법으로 생시귀가 된 원살각주 인서옥을 통제하며 원살각은 관리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쩌다 갑자기 이곳에 술법까지 쓰면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너······. 다친 것이냐?”
고찬이 놀라서 화들짝 일어나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고 어깨와 복부 쪽이 피로 번져 있는 걸로 보아 다친 듯했다.
그때 그녀가 다그쳤다.
“물러나요!”
“뭐?”
이와 함께 여수린이 황급히 보구를 찬 손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러자 연기로 만들어진 문이 빠르게 닫히며 사라졌다.
이것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하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몰골로······.”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니?”
“원살각주가 생시귀가 된 사실을 들켰어요.”
“뭣? 그게 정말이야? 아니 그보다 대체 누구한테 들킨 거야?”
적어도 방일 급인지 뭔지 할 정도로 주력이 뛰어난 방사가 아니고는 들킬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의아해하는데 여수린이 심각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르겠어요. 순식간에 제 술법을 주력(呪力)만으로 파훼할 만큼 엄청난 괴물이었어요.”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대단하다는 거지?”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니예요. 어쩌면······.”
“어쩌면?”
“방신(方神) 혹은 그에 근접한 방사일지도 몰라요. 어떻게 그 정도 방사가 이곳에······. 으윽.”
쓰러지려 하는 여수린을 고찬이 황급히 부축했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물었다.
“목 공자······. 목 공자는요?”
“아직이다.”
고찬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 또한 목경운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올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청령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목적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공자를 찾을 순 없는 건가요?”
“······개봉까지 간 분을 무슨 수로 말이냐?”
물론 식신이라 연(緣)이 연결되어 있어 작정한다면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워낙 거리가 멀어져서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식신인 자신이 멀쩡하다는 건 목경운 또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아아, 큰일이네요. 분명 그자 정도의 방술 실력이라면 역으로 추적하려 들 텐데.”
그녀의 우려에 고찬이 물었다.
“역으로? 설마 주인님께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런 고찬의 물음에 여수린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상대가 정말로 방신(方神)의 경지에 이른 방사라면 목 공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위험할지도 몰라요.”
* * *
그로부터 보름 후,
그 사이에 천지회 내부는 급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사흘 전부터 병상을 앓고 있는 회주가 의식마저 잃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졌다.
평소라면 이런 소문이 퍼져나갈 기미가 보이면 회주 직속대와 정보단이 신속히 움직여 이를 사전에 차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회주의 거처가 있는 내성 본단으로 의원이 수시로 드나드는 걸 목격한 이들이 너무 많았다.
병상에 있더라도 의원조차 들이지 않았던 회주였다.
그런데 의원이 드나들 정도의 사태라면 회주의 상세가 최악에 이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 소문은 회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회 내부가 급속도로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굳건히 중립을 유지했던 자들 역시도 움직이고 있었다.
후계자가 확실히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기에 이런 내부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회주의 병환과 마찬가지로 회 내부를 알게 모르게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파부왕 호태강의 분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들인 부멸단의 대단주 오강부섬(五剛斧殲) 호종혁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회의 최고 간부라 할 수 있는 오왕(五王)의 일인이자 현 무림의 최고수라 일컬어지는 팔성(八星)의 일인인 파부왕의 자식이 죽었다.
당연히 회 내부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한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안 그래도 큰 사건인데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다름 아닌 명도왕 손윤의 대제자인 우호랑이었다.
죽은 호종혁의 몸에 남아있는 사인은 초상승도법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도흔은 다름 아닌 명도왕 손윤의 독문 절기인 명일도법이었다.
이를 확인한 파부왕 호태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명도왕 손윤의 제자인 우호랑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명도왕 본인은 아니다. 그였다면 세 초식 내로 이 아이를 베어버렸을 거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오직 놈뿐이다.]같은 오호(五虎)의 일인인 우호랑이라 여겼다.
엽위선 따위가 아니었다.
놈 정도의 무위로는 자신의 자식을 죽일 수 없었다.
우호랑이 범인이라 확신한 파부왕 호태강은 곧장 우호랑을 죽이기 위해 명도왕 손윤을 찾아갔고 이는 두 사람이 격렬히 부딪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만약 회주의 두 제자인 장능악과 위소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파부왕 호태강은 끝을 보았을 것이다.
[믿어주십시오. 저는 정말 결백합니다.]물론 범인으로 지목 당한 우호랑 역시 나서서 그에게 해명한 것도 컸다.
분노로 인해 무작정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던 호태강이었지만 냉정을 되찾은 그 역시도 자식인 호종혁의 죽음이 석연치가 않았다.
분명 그 도흔은 명일도법이 틀림없으나 확실히 우호랑이 그를 죽일 명분이나 이유가 없었다.
둘째 장능악과 막내 위소연이 동맹을 맺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분히 의도적이다.’
도흔을 남긴 것 자체가 불순한 의도로 가득했다.
회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오히려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게 숨겨야 할 일이었다.
이로 인해 파부왕 호태강은 순순히 돌아갔다.
아니 정확히는,
[대가로 오른손 검지를 받아가겠다.]끝내 우호랑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서 가져갔다.
명도왕 손윤이 길길이 날뛰며 이를 막으려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팔성의 일인인 파부왕 호태강이 작정하고 나서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우호랑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냈기에 싸움은 소강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파부왕 호태강과 명도왕 손윤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 여파는 기어이 장능악과 위소연의 동맹 파기로마저 이어졌다.
* * *
위소연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양암곡주 기해의 첫째 여식 기옥련이 다소 섭섭하다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속이는 건 좋은데. 아가씨, 굳이 우 오라······아니 우 대단주의 오른손 검지까지 자를 필요가 있었을까요? 도객에게 검지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해. 옥련.”
“하나······.”
“원래라면 팔 정도는 베었어야 했어. 한데 파부왕께서 화를 참고 양보하신 거야.”
“화를 참았다고요?”
“그래. 적이 의도한 대로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했어야 했어. 그래야······.”
“이 사태를 벌인 자가 속을 테니까요?”
“맞아. 하나 파부왕께서도 적의 농간에 넘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진범도 아닌데 우 대단주의 팔까지 베는 것은 과하다고 여겨서 이 정도로 끝낸 거야.”
“······그렇군요.”
기옥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해는 했지만 우호랑을 사모하는 그녀로서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적이 누군지 모습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우 오라버니의 검지를 자르고 동맹마저 깨뜨리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범인이 저희의 의도대로 움직일까요?”
“모르겠어. 아까도 말했지만 적어도 팔 정도는 베고 명도왕과 파부왕께서 격렬히 싸워 누군가는 다치는 지경까지 이른 걸 보여줬다면 모를까 대사형이 이 정도로 속을지는 확신이 가지 않아.”
그들 모두가 진범이라 여기는 자는 대공자 나율량 측이었다.
파부왕과 명도왕의 싸움에서 가장 커다란 이득을 보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화를 통해서 풀어나갔지만 어느 정도 보이기식을 위해 우호랑의 손가락을 자르고 공식적으로는 동맹을 깬 것이었다.
“나율량 공자는 역시 파부왕께 접촉하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
자식을 잃고 분노했음에도 원수를 갚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 바로 파부왕 호태강이었다.
당연히 나율량은 그에게 접촉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의 산하로 끌어들이기 용이할 테니 말이다.
만약 대공자가 그렇게 접촉해온다면 파부왕 호태강은 그 산하로 들어가 고육지책(苦肉之策)을 펼칠 작정이었다.
다만,
‘······사부님의 병환이 깊어진 게 변수야.’
갑자기 사부님이 위독하다는 소문이 난 후로 활발히 움직이던 대공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것도 거의 사흘 가까이 말이다.
대공자답지 않았다.
영악한 그라면 자신들의 계책을 눈치챌 수 있다는 걸 상정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조용하니 불안하기마저 했다.
만약 이럴 때 사부님께서 정말 숨을 거두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다.
“하아······.”
위소연이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답답하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럴 때 그가 있다면 든든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위안이 되었을 텐데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부회주 전에서 귀띔받은 대로라면 기밀 임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너무 오래 걸린다.
대체 무슨 임무를 맡고 있는 걸까?
혹 회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경운······.’
그렇게 그녀가 속으로 목경운을 그리워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 황급히 문을 두드렸다.
-쿵쿵!
“아가씨!”
초해검방의 소방주 양일의 목소리였다.
다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위소연이 불안했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이에 양일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급하게 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다급히 온 것치고 표정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이에 의아해하는데 양일이 말했다.
“아가씨. 목경, 아니 목 공자가 나타났습니다.”
‘!!!!!!’
고상하게 찻잔을 들고서 앉아있던 그녀가 체면도 잊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