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389)
같은 시각,
천지회 내성 대공자 나율량의 장원.
상석에 기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술잔을 단숨에 들이킨 대공자 나율량이 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잔이 깨지자 나율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심복인 모약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 좋으신 겝니까?”
“암, 좋다마다.”
폐관 후에 놈을 찾았지만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한동안 열의가 식었던 그였다.
타고난 살의에 감정이 메마른 그는 천부적인 무재로 거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사부인 천지회주와 팔성의 칭호를 가진 두 오왕(五王)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그의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사제들조차 애송이에 불과했기에 아무런 감흥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던 그때 놈이 나타났다.
‘목경운.’
난생처음으로 만나게 된 괴물.
싸우는 도중에 성장해 약관도 되지 않은 상태로 벽을 넘어섰다.
그것도 모자라 후에 섬독왕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자신을 패배시키기마저 했다.
그때 후로 나율량은 처음으로 삶에 흥미를 찾았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명백한 하나의 감정이었다.
-꽉!
나율량이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놈이 나타나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기밀 임무이기에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안이오? 밖이오?] [그 역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부회주를 통해 그가 알게 된 것은 단 하나였다.
놈이 회주의 기밀 임무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회주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고 장로전에서 자신에게 전해온 한 가지 제안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한데 드디어 목경운 그놈이 나타났다.
-팍!
대공자 나율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약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공자. 설마 지금 당장 놈을 죽이러 가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럼 더 기다릴 이유가 있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 말에 나율량이 싸늘한 눈빛으로 모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놈과 다시 싸우는 그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런데 지금 자신을 만류하려는 건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데 모약이 이런 그의 심기를 읽었는지 조심스레 말했다.
“놈은 회주가 내린 기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율량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답했다.
“······사부님을 뵈러 가지 않고 암종으로 향했다고 했나?”
“네. 그리고 놈은 사라질 때와 달리 회의 정문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약의 이 말에 눈매가 가늘어진 나율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토사구팽을 두려워한 거로군.”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회주의 상태를 알지 못할 텐데, 곧장 본단이 아닌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암종으로 향한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그의 판단에 나율량이 혀를 찼다.
정파 볼모 출신이라고는 하나 놈의 엄청난 무재 때문에 사부님의 눈에 들어 기밀임무를 받았나 했더니, 그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패였나.
고작 출신 따위에 발목을 잡히다니.
“운이 따르지 못하는군.”
“그거야 저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요. 하나 아직 모릅니다. 토사구팽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회주의 명으로 암종으로 곧바로 향한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거였나?”
“네.”
모약이 경계해야 본다는 건 후자였다.
그저 전자였다면 오히려 그를 처리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러나 후자라고 한다면 회주의 기밀 임무를 행하고 있는 자를 건드리는 꼴이 된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굳이 공자께서 직접 움직이거나 저희 패를 드러낼 필요가 없죠.”
“가만히 내버려 두자는 것이냐?”
“아닙니다. 가장 적합한 패가 있지 않습니까?”
“적합한 패? ······호오. 놈을 말하는 건가?”
대공자 나율량의 말에 모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어차피 그분을 시험하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위소연 아가씨나 명도왕 측과 확실히 등졌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네놈의 잔머리는 역시······.”
“계략이나 전략이라는 좋은 말을 놔두고 왜 계속 잔머리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게 그거다.”
대공자 나율량의 말에 모약이 입을 쩝쩝거리며 다셨다.
그러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공자께서 허락하신 걸로 알고 그분을 움직이겠습니다.”
대공자 나율량이 모약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방식보다 직접 움직이는 것이 편했지만, 확실히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자를 통해 시험해서 나쁠 건 없었다.
“좋을 대로.”
나율량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약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말했다.
“후후후. 설령 고육지계(苦肉之計)를 펼친다고 할지라도 동맹을 맺은 위소연 일파나 명도왕의 대제자 우호랑 때와는 달리 보이기 용으로라도 제대로 손을 쓸 겁니다. 운이 없다면 반병신이 될지도 모르고요.”
그 말에 나율량이 코웃음을 쳤다.
상대가 최악이기는 하나 만약 이걸로 반병신이 될 정도라면, 녀석은 지금의 자신과 겨룰 자격이 없다.
* * *
한편,
암종주 환야선의 표정이 굳어졌다.
호위무사이자 심복인 벽은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자신의 등 뒤로 검을 겨냥하니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아였던 그를 직접 발탁하여 무공을 전수하며 키웠기에 그 충성심만큼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겼었다.
한데 이런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정보부와 간자를 다루는 암종의 수장이었지만 이것만큼은 다소 믿기지가 않았다.
“······벽. 정말 배신한 것이냐?”
“저는 오직 목경운 주인님만을 따를 뿐입니다.”
“네가 어찌!”
평정심이 깨진 환야선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실망감에 사로잡힌 환야선의 인피면구로 가려지지 않은 목 부위가 붉게 달아올랐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겼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실상은 배신이 아니었다.
그저 벽은 목경운의 충실한 식신인 마승에게 빙의 당했을 뿐이었다.
방술이나 원혼, 이매망량과 같은 이치를 모르는 환야선으로서는 이 관계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잘못됐어.’
그는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환야선은 조심스레 왼손 중지로 손바닥의 노궁혈(勞宮穴)을 지그시 눌렀다.
그와 함께 특유의 웃음 소리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오호호. 검은 머리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더니.”
“······.”
간자들을 다루는 종파의 수장답게 감정 조절에 능숙한 그였다.
어차피 제자인 목경운과 심복 벽이 자신을 배신한 게 확실하다면 언제까지 실망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힐 수만은 없었고 말이다.
지금 당장은 불리한 상황을 헤쳐나갈 활로를 강구해야 했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던 암종주 환야선이 목경운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안타깝구나.”
“무엇이 말이죠?”
“네 조부이신 장 호법이 교를 져버린 너의 변질을 알게 된다면 저승에서 통탄하실지도 모를 테니 말이야.”
그 말에 목경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처음 암종주 환야선이 배화교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를 속이기 위해 적당히 상황을 끼워 맞춰 할아버지를 이름 모를 노사라 칭하며 배화교 사람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는 정말로 배화교의 사람이었다.
암종주 환야선은 당시 목경운이 말하는 할아버지가 마치 누군지 알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그분께서 네게 끝까지 함구하셨다고 하니 당장 알려주기는 힘들구나. 하나 본교에서도 상당히 높은 분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한데 그 말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그는 의외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재밌네요.”
“재밌어? 지금 이 상황을 두고 하는 소리더냐?”
“네, 정말로 사부님께서 머릿속에 떠올린 분일 줄은 몰랐거든요.”
이런 목경운의 대답에 암종주 환야선이 미간을 찡그렸다.
작은 단서만으로도 많은 것을 유추할 만큼 눈치가 빠른 그였지만, 목경운이 지금 하는 말은 무슨 의도로 하는 건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목경운과의 대화보다는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왼손바닥의 노궁혈(勞宮穴)을 지그시 누르던 환야선이 팔에 힘을 뺐다.
그 순간,
-파파파팍!
그의 왼팔의 살점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에 닿자,
-퍼퍼퍼퍼퍼펑!
회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에 환야선의 등을 검으로 겨냥하고 있던 벽에게 빙의해 있는 마승이 황급히 그를 금나수의 수법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런데,
-파팍!
그 순간 환야선이 버드나무가 흔들리는 듯한 경신법으로 마승의 손을 순식간에 피하더니, 그의 팔목을 잡아 그대로 꺾어버리고는,
-우득!
-퍽!
발로 가슴을 걷어찼다.
아무리 뒤를 잡혔다고 해도 암종주 환야선 또한 초절정의 고수였다.
절정의 극에 이른 벽의 육신으로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슈우우우우우!
어느새 연기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를 들이쉰 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기를 마시는 순간 몸에 힘이 풀리며 전신이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독무(毒霧)인 듯했다.
몸이 굳어져 경련을 일으키는 그를 바라보며 환야선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네가 자초한 거다. 본 종주가 그리도 아꼈거늘.”
이 독무는 환야선의 비장의 수였다.
마비독과 여러 독이 섞인 것으로 수술을 통해 왼팔에 늘 숨겨놓았다.
최악의 상황에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연기가 이십여 장 가까이 퍼져 나갈 만큼 강한 운무였다.
물론 내가고수라면 이를 운기조식으로 막아낼 수 있지만, 잠시 동안은 이를 막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벽을 넘어선 고수에게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목경운이 화경의 고수라는 것이었다.
이미 회주와 겨루는 것을 보았기에 그의 실력이 이미 자신을 능가했다는 것을 알기에 비장의 수마저 꺼낸 것이었다.
목경운에게 이것이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이 틈에 성화령주를 데리고 도주를 시도해야 했다.
-흠칫!
서둘러 마차로 신형을 날리려 했던 암종주 환야선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그것은 주변을 가득 메우는 방대한 진기 때문이었다.
‘무슨 진기가?’
그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우우우우우!
주변의 시야마저 가릴 정도로 뿌옇던 회색 운무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였다.
이것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흐름은,
‘설마?’
암종주 환야선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넓게 퍼져서 움직이던 운무가 점점 위로 좁혀들며 회오리를 치고 있었다.
이를 보며 환야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방대한 진기가 운무를 가두어 회오리치게 하여 이것을 위로 올려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회오리가 치며 위로 솟구치던 회색 운무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럴수가······.’
오직 진기 하나로 독무를 날려 버릴 정도라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누구지?
이 정도의 진기를 다룰 수 있는 자는 오왕(五王)에서도 팔성(八星)급 이상이어야 가능할까?
아니 회주나 되어야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그런 그의 시야로 목경운이 손을 내밀고서 검지를 위로 슬쩍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진기는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
암종주 환야선의 두 눈이 커졌다.
이걸 한 게 목경운 저 아이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바짝 말랐는지 마른 침을 삼켰다.
무공의 발전 속도가 자신의 예상을 넘어설 만큼 굉장히 빠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의 영역을 벗어났다.
기밀 임무를 나간 몇 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우득! 우득!
놀라서 할 말을 잃고 있던 환야선이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심복이자 호위무사인 벽이 굳어진 몸을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푸슉!
그의 열 손가락 끝에서 독(毒)으로 짐작되는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닛? 독을······체외로 배출한다고?’
그것도 이 짧은 찰나에?
벽이 비록 자신이 직접 키운 만큼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기습적으로 독무에 노출되었기에 이렇게 빨리 대응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당혹스러워하고 있던 차였다.
-끼이이익!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누군가 지팡이를 짚으며 내려오는데 그자를 보는 순간 환야선의 두 눈동자로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서렸다.
‘성화령주.’
과연 황궁 지하금옥에 갇힌 그녀를 다시 보게 될 날이 올까 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다니.
위기 속에서도 감격스러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으득!
이를 어찌해야 하나.
아무리 감격스러운 해후라고 해도 그녀를 이곳 천지회에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회의 밖으로 데려가야 하는데······.
그때였다.
“야선 교부.”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
당장에라도 성화령주를 부르며 예를 갖추고 싶었지만, 혹여 회주 측에서 보낸 정보부의 눈과 귀가 있을까 그는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이에 환야선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시늉을 하려 하는데, 성화령주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그분께 당장 몸을 낮춰 예를 갖추게.”
“지금 무슨 소릴······.”
“자네의 눈앞에 계신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성화(聖火)의 주인일세.”
‘!!!!!!’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