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476)
죽인 이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핏물.
그 핏물들이 들썩이더니 이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현 무림의 정점인 칠천(七天)의 일인인 정의맹 맹주 정현문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둥실거리는 핏방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시혈곡주 이지염은 점차 세상이 붉어지고서야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대체?’
산봉우리 바닥이 질척일 만큼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둥둥 떠 있는 핏방울들로 인해 세상이 마치 피로 물든 것만 같았다.
그러는데 정의맹주 정현문이 주변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왔으면 모습을 드러내라. 소월.”
‘소월?’
이지염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분이 돌아오신 것인가?
하는 순간이었다,
-팟!
분명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의맹주 정현문이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로 몸을 젖히며 신형을 날려 거리를 벌리려는데,
-촥!
어느새 그의 검이 자신의 목을 가르려 했다.
이를 피하고 싶어도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육신이 그 속도에 반응하지 못했다.
‘고작 일검도 받아내지 못한다고?’
부상을 떠나서 팔성(八星)과 칠천(七天)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는 거리란 말인가?
그렇게 피할 수 없는 검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이었다.
-채아아앙!
검날이 목에 닿기 일보 직전의 순간,
분명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의 핏물에서 솟구친 무언가가 목을 가르는 명검 일휘의 검날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파아아앙!
“헛!”
섬뜩하면서 음한 기운에 의해 이지염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부상을 입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뒤로 날려 보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지염은 진기로 반탄강기를 펼치지 않았다.
밀려나는 그의 눈동자로 면류관을 쓰고 있는 한 존재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바로 대를 이어 모시는 마지막 월맥의 가주 류소월 청령이었다.
“원혼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나약하구나. 인정에 휘둘려 이 목을 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이가의 후손을 구하다니 말이야.”
비아냥거리는 정의맹주 정현문의 말에 청령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저 빼앗는 것밖에 모르는 네놈이 무엇을 알겠느냐?
“해서 이리 다시 빼앗으러 오지 않았느냐? 나의······.”
-채아아아앙!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정현문의 명검 일휘가 청령의 곰방대에 의해 위로 튕겨 나갔다.
-닥쳐!
그녀의 폭발적인 영력(靈力)에 정현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혼의 한계를 초월했나?’
이는 자령(紫靈) 아니, 그마저 넘어서는 영력이었다.
고독의 술법으로도 시간과 공을 들여도 이렇게 강한 원혼을 탄생시킬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원망이 극에 이르렀다는 것이겠지.
하나,
-촥!
검이 튕겨 나가는 순간 정현문의 검결지가 전광석화처럼 청령의 이마를 찔러왔다.
청령이 빠르게 바닥의 핏물 속으로 들어갔으나, 순식간에 그녀가 쓰고 있던 면류관이 박살 나며 튕겨 나고 말았다.
-스르륵!
그렇게 정현문의 일검을 피해낸 그녀의 신형이 바로 십여 보 뒤의 핏물 속에서 올라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정현문이 웃으며 말했다.
“예전처럼 검으로 겨뤄볼까?”
-네놈의 뜻대로 휩쓸릴 것 같으냐?
적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은 없던 그녀였다.
자신의 세상으로 끌어들인 이상 확실하게 난도질을 해서 죽일 작정이었다.
-슥!
그녀가 곰방대를 휘두르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수많은 핏방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핏방울의 진동처럼 보였지만,
‘회전하고 있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시혈곡주 이지염은 그것이 핏방울들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벌어진 현상임을 알 수 있었다.
-촤르르르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핏방울이 얇게 펴져서 빠르게 회전하며 날카로움과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핏방울을 전부 통제하고 있는 건가?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과연.’
정현문도 입가의 웃음기가 사라지며 사뭇 진지해졌다.
그만큼 지금 청령이 하려는 것은 심상치가 않았다.
이에,
-쩌적!
그의 이마가 갈라지며 세 번째 눈동자가 눈을 떴다.
그 광경에 이지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설마?’
그때 천지회 내전에서 대공자 나율량에게서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하면 정의맹주 정현문도 그 밀회라는 곳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대체 밀회라는 곳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다른 이도 아니고 현 무림의 정점인 칠천의 일인 정현문마저 속해있는 거지?
이지염은 내심 우려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숨겨져 있을지 말이다.
그러는데,
-죽어.
-슥!
청령이 곰방대를 뻗자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던 핏방울들이 일제히 정의맹주 정현문을 향해 쇄도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회전하는 피의 방울 하나하나가 몸에 파고드는 순간 그 부위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아무리 목간이라 해도 자신이 오랫동안 계속 고심해서 만들어온 이 수법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당혹스러워할 거라 여겼던 정현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흠칫!
대체 저게 무슨 의미지?
하는데 정현문이 명검 일휘를 바닥에 꽂고서 두 팔을 활짝 펴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이걸 그대로 받아내려는 것인가?
하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팟!
그 순간 그를 향해 날아든 맹렬히 회전하는 핏방울들이 이내 몸에 닿기도 전에 미끄러지듯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청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배의 식.’
날아드는 강한 힘을 미끄러지듯이 튕겨내 버리는 저 수법은 파사팔식(破思八式) 중 하나인 배(排)의 식(式)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파사팔식의 수법들에 한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그였다.
-파파파파파파파파!
그렇게 튕겨 나간 핏방울들은 그대로 살아남은 시혈곡의 무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햇!”
시혈곡주 이지염이 황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적들을 막느라 지쳐있는 그들에게는 이를 피할 여력이 없었다.
-파앙!
사상자가 나려는 그 찰나의 순간 청령이 바닥을 향해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러자,
-촤아아아아아아아!
고여있던 핏물이 위로 솟구치며 사방을 두르는 장벽을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배의 식에 의해 튕겨 나간 핏방울들은 그대로 피의 장벽에 스며들면서 하마터면 역으로 입을 뻔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아······하아······.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청령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아직까지 영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목간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낮과 밤에 개의치 않고서 쉼 없이 달려 이곳에 도달한 것이었다.
해서 그녀는 단시간에 목간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정의맹주 정현문과 승부를 내려 했지만 이미 그것은 소용없어졌다.
더 이상 영력을 소모하는 큰 수법을 썼다간 자신이 더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이에,
-슥!
손을 휘젓자 봉우리의 바닥부터 사방을 핏빛으로 물들이던 귀의영역(鬼意領域) 혈계(血界)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거둬졌다.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데 정의맹주 정현문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그만하지, 그래.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하다.”
-반항? 뭔가 착각하는데. 이건 복수야.
“복수······. 후후후. 그것도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네가 하려는 건 그저 발버둥에 불과하다. 소월.”
청령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럼 발버둥 한 번 실컷 쳐볼게. 그 발길질에 네놈의 머리가 으깨지도록 말이지.
-슥!
그 말과 함께 청령이 월맥의 검식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시혈곡주 이지염이 소리쳤다.
“주군! 받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이지염이 등에 차고 있던 검집을 그녀에게로 던졌다.
-착!
날아오는 검집을 보지도 않은 채 뒤로 손을 뻗어 받아낸 그녀가 이내 검을 검집에서 단번에 뽑았다.
-챙!
맑은 검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순백의 검.
그것은 대명장 구야자의 후손 구문혁이 만든 오직 그녀만을 위한 독문병기인 명검 순연(順戀)이었다.
그녀가 검을 쥐는 순간 순연에서 검광이 일렁이며 강한 공명음이 흘러나왔다.
-우우우우웅!
백여 년 만에 만난 주인의 손에 쥐어진 순연이 울고 있었다.
‘너도 오랫동안 기다렸구나. 순연.’
참으로 명검이다.
육신으로 쥔 것이 아니라 영체 상태로 검을 쥐었는데 주인인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순간 순연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슈우우우우!
‘이건?’
그것은 백 년 동안 쌓여왔던 명검 순연의 정념(情念)이었다.
백 년의 정념은 순도 높은 기운이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들어오자 극심한 수준까지 소모되었던 그녀의 영력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청령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명검이기는 하나 요검은 아닐 진데 이런 능력도 있었던가?
‘구문혁 그대의 안배인가? 아니면 백 년의 세월이 너를 이리 만든 것이냐?’
자신을 위해 검을 만들고 가져다준 명장 구문혁.
그는 자신을 위한 최고의 검을 만든 듯했다.
명검 순연을 꽉 움켜쥔 청령이 오랜만에 검객의 마음으로 돌아가 기수식을 취했다.
-솨아아아아아!
그녀가 기수식을 취하는 순간 사방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왔다.
달라진 그녀의 기세에 정의맹주 정현문이 바닥에 꽂혀 있던 명검 일휘를 뽑아 들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시혈곡주 이지염에게만 들리도록 자신의 의사를 보냈다.
-이자는 본좌에게 맡기고 지금 당장 수뇌부들에게 정의맹과 사련맹과의 싸움을 멈춰야 한다고 전해라.
‘어찌?’
이지염이 이를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이자,
-이건 놈의 계책이다. 본좌의 혼(魂)인 위소연이나 천지회만을 노린 게 아니야. 놈이 진짜로 노린 것은 무림인들의 대다수를 한 곳으로······.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느새 거리를 좁혀온 정현문이 그녀를 향해 천(天)의 검식을 펼쳤다.
이에 그녀도 황급히 순연으로 월의 검식으로 대응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명검 일휘와 명검 순연이 부딪치며 푸른 불꽃들과 함께 사방으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그때와 다르게 검을 섞는 순간 정현문의 눈빛이 묘해졌다.
백여 년 만에 섞어보는 검이었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이었고 이윽고 현란하기 그지없는 정교한 초식을 펼치며 그녀를 밀어붙이려 했다.
-채채채채채채챙!
‘월의 검식에서 놈의 색이 느껴지다니.’
청령이 펼치는 검은 예전에 그가 알고 있던 월의 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놈의 검법과 흡사해져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채채채채채채챙!
격렬해지는 검초에 정신을 분산해서 따로 의사를 보내기 힘들어졌는지 청령이 이지염에게 소리쳤다.
-어서 멈추게 해!
그런 그녀의 외침에 이지염이 잠시 망설였다.
그것은 청령의 환생체라 할 수 있는 위소연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잠시 져버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명을 어길 수 없기에 신형을 날렸다.
-팟!
이지염이 봉우리에서 내려가자 검초를 펼치던 정의맹주 정현문이 비웃음을 흘렸다.
“이미 늦었다.”
-아니. 네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안타깝군. 소월 넌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이제 그만 모든 걸 잊고 나와 다시 함께하자꾸나.”
-닥쳐! 설령 이것이 마지막이라 소멸할지언정. 너와 함께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채앙!
검을 위로 쳐낸 청령이 핏빛 영력을 검에 휘감았다.
그리고는 핏빛의 영력을 회전시켜 정현문의 안면을 꿰뚫으려고 했다.
그러자 정현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씨익!
-채애애애애앵!
‘이걸 받아낸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악!
그녀의 핏빛 영력이 감긴 회심의 검초를 받아내는 것과 함께 이화접목(梨花接木)의 수법으로 자신의 진기를 담아 위로 튕겨냈다.
-파아아아아앙!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청령의 영체가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 가까이 솟구친 그녀는 영력으로 자신을 감싸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렇게 멈춰 섰는데, 어느새 그녀의 가까이로 정현문이 따라붙어 있었다.
청령이 신형을 바로 잡고서 그를 공격하려 했는데,
-흠칫!
그녀는 이내 두 눈으로 들어오는 광경에 이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십만대산의 산봉우리에서조차 보이지 않던 저 지평선 너머에서 지상을 까맣게 물들이며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매망량.’
그것들은 이매망량이라 할 수 있는 괴이들이었다.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괴이들이 십만대산을 향해 우글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몰려오는 속도만 본다면 머지않아 이곳으로 당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을 등지고서 정의맹주 정현문이 입을 열었다.
“말했지. 이미 늦었다고. 후후후.”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