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gy marriage RAW novel - Chapter 1
│1. 1순위
이틀간의 짧은 외박을 마친 은채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은채야, 천 서방 이런 것도 잘 먹나?”
별안간 방문을 밀고 들어온 희정이 투명한 반찬통을 보이며 물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은채는 빼꼼히 통 안을 살폈다.
“박대?”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더라니. 통 안엔 불그스름한 빛깔의 반건조 박대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응. 아까 진영 이모네서 가져온 건데, 물 좋은 거라더니 정말 좋은 거 같아서.”
“좋은 거면 엄마 먹지, 왜.”
“나야 혼자 있는데 먹어봐야 한두 마리지. 양념해줄 테니까 가져가서 천 서방이랑 나눠 먹어.”
“여튼 사위 어지간히 이뻐해.”
“이쁘지 그럼. 그렇게 이쁜 짓만 골라 하는데. 아까도 전화 왔었어.”
“윤제 씨한테?”
“내 선물 사 오겠다고 신발 사이즈 물어보더라.”
하여간 좋아하는 사람한테 신발 사 주는 버릇은 여전하지.
은채는 알 만하다는 듯한 얼굴로 픽, 헛웃음을 터뜨렸다.
싱글벙글한 엄마를 올려다보다 문득 방문 옆에 걸린 액자에 시선을 멈췄다.
몇 달 전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가운데 의자에 앉은 희정과 그 뒤에 저와 천윤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그와 정말 가족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천윤제와 결혼식을 올린 지도 벌써 일 년 남짓.
불안하고 어설펐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제법 안정적인 결혼 생활에 접어든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투닥투닥, 부딪힐 일도 많은 게 사실이긴 했지만.
불과 일주일 전의 일만 해도 그랬다.
일 년 내내 그렇게 딱 붙어 지냈으면 됐지, 고작 일주일 떨어지기 싫다고 그 중요한 올림픽 유치단 일정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었던가 말이다. 혼자는 안 가겠다 고집을 부리는 천윤제를 억지로 떠밀어 보내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그날의 끔찍했던 실랑이를 다시금 떠올린 은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 지퍼를 닫았다.
“참. 너 진영 이모 손녀딸 못 봤지?”
때마침, 희정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첩을 열어 보여 주었다. 귀여운 아기가 앙증맞은 머리띠를 하고 꺄르르, 까르르 웃는 영상이었다.
“어머. 얘가 정민 오빠 딸이야? 너무 귀엽다! 어째 오빠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다행이니, 딸인데.”
희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 아닌 농담을 읊조렸다. 그러다 문득, 영상 속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은채를 살피다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쪽 어르신들은, 아이 얘기는 안 하시니?”
은채의 눈이 동그랗게 희정을 향했다.
“뭐, 늬들 나이가 아직 어리긴 하다지만, 그래도 어른들은 내심 바라고 계실 수 있으니까.”
은채도 그녀의 말에 일견 동의했다. 다들 내심 아이 소식을 기다리시면서도 자신과 윤제가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말을 안 하고 계신 걸 수도 있겠다고 짐작은 했었다.
“아직은, 뭐. 별말씀 없으시긴 한데.”
어쩐지 머뭇거리는 은채의 답에 희정이 질문을 이었다.
“너희는? 니들도 아직 생각 없고?”
생각을 아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 후 지난 일 년간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단 생각을 종종 하긴 했었다. 워낙에 아이를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디 그게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천윤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갖 변태 같은 짓은 다 해대면서도 의외로 피임엔 늘 철저한 편이었다. 덕분에 잔뜩 쌓아 둔 콘돔 박스만 해도 커다란 팬트리의 한 면을 족히 채우고도 남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간 그에게 아기 이야기를 쉽사리 꺼낼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천윤제는 지금 마지막 올림픽을 위해 컨디션 조절을 하는 현역 선수이니까. 조금이라도 신경 쓰일 말은 하지도 말자고 생각한 거였다.
“그래, 뭐. 거야 늬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은채가 답을 않자 희정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잉.
때마침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은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희정은 전화를 받으라며 방을 나섰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전화했나 싶어 화면을 보니 예상했던 그가 아닌 예슬이었다.
-야. 나 지금 뭐 보고 있게?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장난기 가득한 예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채는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또 뭔데? 뭘 보고 있길래?”
-니네 혼인 신고 인증샷.
“뭐?”
-구청 민원실 왔더니 니네 혼인 신고할 때 인증샷 찍은 거 붙어 있네? 것도 제일 잘 보이는 창구 앞에 대문짝만하게.
“아, 진짜. 그걸 또 왜….”
그녀의 말에 은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쌌다.
일 년 전쯤, 구청 직원에게 사정을 해서 겨우 내렸더니만 그게 왜 또다시 거기 걸려 있나. 그새 또 직원이 바뀌기라도 했나.
-이게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혼인 신고서에 사인하고 찍은 사진이란 거잖아?
재차 묻는 예슬의 어조가 아주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슬은 두 사람의 얼렁뚱땅 혼인 신고 썰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천윤제가 언론에 결혼 발표부터 냅다 내질러 버렸던 이후, 한 달쯤 뒤였던가.
그는 웬일로 오랜만에 야외 데이트를 한답시고 그녀를 차에 태우고 대뜸 구청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그러곤 한다는 소리가….
‘무슨, 무슨 신고요?’
‘혼인 신고.’
‘그걸 지금? 지금, 하겠다고요?’
‘어.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지금 하지, 뭐. 지갑에 신분증 있지? 내리자.’
은채의 욕지거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자상히 조수석 문을 열어젖힌 그는 뻔뻔스레 그녀의 손을 맞잡고 구청 민원실로 향했다.
민원실 입구에서부터 천윤제를 알아본 사람들의 시선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무래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아 있는 키와 어딜 봐도 우월한 외모 덕이었다. 거기에 일부러 걸쳐 쓴 선글라스는 그런 천윤제를 외려 더 돋보이게만 할 따름이었다.
은채는 제대로 된 항의 한마디 못 하고 그와 함께 창구 앞에 섰다. 결혼 기사가 나간 지 한 달도 안 돼 불화설, 파혼 기사가 뜨게 할 순 없었으니 말이었다.
‘어머, 두 분 결혼하신단 기사 봤어요! 축하드려요!’
창구 직원의 호들갑스러운 한마디에, 일제히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은채는 그렇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혼인 신고서에 사인을 하고, 완성된 신고서를 들고 인증샷까지 찍고 나서야 구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30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야말로 얼렁뚱땅 유부녀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준비부터 몇 달은 걸리고도 남을 결혼식이야 어찌 되든, 법적으로라도 먼저 그녀를 묶어 놓으려는 천윤제의 개수작이었던 게 분명했다.
혼인 신고조차 참으로 천윤제다워 딱히 화도 안 났던 게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었다.
“거기 직원한테 초상권자가 원하지 않으니 사진 좀 떼달라고 전해 줄래.”
-왜, 보기 좋구만. 하여간 니들 진짜 귀엽다, 귀여워.
키득거리는 예슬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군산이야?
“응. 이제 올라가려고.”
-휴가가 너무 짧은 거 아냐? 이제 입학까지 하고 나면 더 바빠질 텐데.
“뭐, 그렇긴 하겠지.”
본격적인 결혼 준비와 함께 학교에 복학한 은채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했다. 천혜진은 그런 그녀에게 회사에 들어와 본격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 업무를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지만 정작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그녀는 혜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마지막 학기, 은채는 트라우마 같았던 수영 수업을 무사히 해내면서 문득 재활 스포츠학을 더 공부해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게 자신처럼, 엄마처럼. 그리고 천윤제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해서 곧바로 대학원에 입학 원서를 냈고, 두 달 전 대학원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번 윤제의 출장에 동행하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너 따라 입학하겠단 소린 안 하디?
“왜 안 했겠어.”
예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큭큭 웃었다.
“어쨌거나 학교엔 얼씬도 말라고 경고를 하긴 했는데….”
-와우. 정은채 껌딱지 천윤제가 참 잘도 그러겠다.
예슬은 징글징글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마지막 학기에 천윤제가 보인 만행을 떠올리면 절대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은채 또한 내심 그런 그녀의 반응에 적극 동의했다.
그때였다.
“은채야! 얼른 나와 봐, 응?”
돌연, 거실에서 자신을 부르는 희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끊으며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거실엔 당황스러울 정도의 선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기사가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은채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해 왔다.
“이게 다 뭐….”
“천 선수님께서 사모님 모시고 오면서 이것들도 같이 가져다드리라고 하셔서요.”
아무래도 엄마가 몸살감기라 겸사겸사 군산에 내려왔다는 은채의 말 한마디가 불러온 상황인 듯했다.
하여튼 그에겐 무슨 얘길 못 한다.
“아니, 그 멀리에서까지 뭐 이런 걸 잔뜩 보냈대, 바쁜 사람이!”
희정은 바닥에 널린 선물들을 하나씩 살피며 감탄했다. 커다란 꽃다발과 인삼을 비롯한 각종 건강식품, 그리고 과일 등의 먹거리가 대부분인 듯했다.
“잠깐만. 그럼 차 있으니까 김치도 더 가져가고, 다른 반찬들도 좀 더 가져가면 되겠다. 응?”
희정은 꽤나 신난 얼굴로 후다닥 주방으로 향했다. 그때, 아니나 다를까 손에 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은채는 결국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윤제의 전화를 받았다.
* * *
짝!
은채는 어느새 제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한 남자의 손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자꾸 이럴래요?”
불시에 목적지를 잃은 손은 하릴없이 무릎 위 그녀의 손 위에 안착했다. 은채는 그 파렴치한 손을 단속하려는 듯 일일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껴 단단히 포박했다.
“헤어지기 싫으니까 그렇지.”
애가 타 죽겠단 얼굴의 윤제가 은채를 돌아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손 한 번 못 잡고 헤어지는 안타까운 연인인 줄 알겠으나, 기실 두 사람은 사흘 밤낮을 기진맥진할 만큼 진득하게 뒹굴다 나오는 길이었다.
며칠 전 천윤제는 호주에서의 올림픽 유치단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침나절 도착해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막 잠에서 깬 은채를 안기 시작한 그는, 이후 그녀를 밤낮으로 물고 빨며 집요하게 괴롭혀댔다.
마치 떨어져 있었던 지난 6일간의 할당량을 다 채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은채가 땅에 받을 디딜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선 채로 그의 성기를 받을 때뿐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심지어는 화장실에 갈 때마저 그녀는 천윤제에게 안긴 채로 움직여야 했다. 집요한 남자는 그녀가 잠시 살갗을 떨어뜨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왕복 스무 시간이 넘는 시간을 비행하고, 그 빡센 유치단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인간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의 괴물 같은 체력이었다.
그렇게 밤낮의 경계조차 모호해져 갈 때쯤. 시의적절하게 걸려 온 손성욱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집에 며칠을 더 감금되어 그에게 한참을 더 시달려야 했을 거였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가정에 고개를 저으며, 은채는 조용히 벨트를 풀었다.
“도서관에 계속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해요.”
그러곤 짧은 인사를 남기고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별안간 그녀의 허리 밑으로 단단한 팔뚝이 밀려 들어왔다.
윤제는 조수석에 앉은 은채의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상체를 숙인 그가 그 가녀린 어깨 위에 제 턱을 올려놓곤 애교를 부리듯 킁킁거리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기 시작했다.
“헤어지기 너무 싫다. 자기야, 우리 그냥 집에 돌아갈까?”
은채는 며칠을 빨려 예민해진 살갗을 건드리는 그를 슬쩍 밀어내며 눈을 흘겼다.
“무슨 소리예요, 이제 와서.”
“그니까.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그냥 못 한다고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어서. 내 주제에 무슨 애들을 가르치겠냐.”
스스로 도통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지, 그는 미간을 설핏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 전. 고질적인 어깨 회전근 부상 때문에 잠시 훈련을 멈춘 윤제에게 손성욱은 유소년 선수들의 단기 코칭을 제안해 왔다. 천천히 재활하며, 아이들이나 한번 가르쳐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윤제는 당연히 고민도 없이 거절하려 했지만, 은채의 만류로 그러지도 못했다.
이제 곧 그의 마지막 올림픽이 끝나고, 그가 은퇴하고 나면 지도자로서의 진로도 또한 고려해봐야 한다는 게 은채의 생각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의외로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을 수도 있잖아요. 나도 잘 가르쳐줬으면서.”
“너니까 가르친 거지, 나 너 말곤 누구 가르쳐본 적도 없어. 게다가 애들이라잖아. 너 나 애새끼들이라면 딱 질색하는 거 알지.”
윤제는 진저리를 쳤다.
은채는 누구보다 애새끼 같은 당신이 할 말은 아니라는 말을 겨우 삼키며 또 다른 말을 이었다.
“두 달만 참고 해봐요. 어차피 나도 이제 입학하면 바빠질 건데 혼자 심심해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는 은채의 목덜미에 입술을 더 깊게 묻으며 속삭였다.
“그럼 나도 그냥 자기 따라서 학교나 더 다니지, 뭐.”
“자꾸 농담할래요?”
“농담 아닌데. 같이 학교 다니면서 공식 CC 하자. 내가 다음 학기 신입생으로 들어가면 자기 후배 되는 거잖아? 그럼 나 예뻐해 줄 거죠, 은채 선배?”
“…미쳤어.”
은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끔찍한 소리를 태연히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은채는 끝도 없이 제게로 달라붙는 그를 간신히 떼어 내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애들 기다리니까 늦지 말고 가서 열심히 가르치고 와요. 응?”
“후…. 알았어. 한다구.”
그 마지 못한 답을 들으며, 은채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이따 봐요.”
그러곤 다시 한번 몸을 돌리려는데 그가 돌연 풀어지려던 손가락을 다시 얽어 당겼다.
“뽀뽀.”
“…….”
그의 뻔뻔한 요구는 이곳이 학교 도서관이라는 것도, 이 화려한 스포츠카가 문밖의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띌지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결국 짧은 숨을 내쉰 은채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쪽, 소리와 함께 말캉한 감촉이 빠르게 닿았다 떨어졌다. 윤제의 잇새에선 여지없이 빙구 같은 헛웃음이 샜다.
“나 이제 진짜 가요.”
붙잡을 새도 없이 발그레해진 두 뺨의 여자가 신기루처럼 쏠랑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윤제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그녀의 작은 뒤통수가 건물 안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까지 바라봤다.
결혼 1년 차. 이제는 제법 콩깍지가 벗겨질 때가 되지 않았냐는 소리를 듣긴 했으나 과연 그런 날이 제게 오긴 할까 싶었다. 이렇게나 날이 갈수록 더 미친놈 같아지는데.
하여간에 누구 마누라인지, 더럽게 예쁘다.
물고 빠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꼭꼭 씹어 먹고 싶을 지경이라는 걸 알면 또 적잖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겠지 싶다.
윤제는 고작 뽀뽀 한 번에 또 슬며시 강직을 시작한 제 고간을 내려다보며 머리칼을 쓸었다.
이윽고 다시 출발한 스포츠카는 은채의 학교 내에 위치한 수영장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그는 더플 백을 하나만 가볍게 챙겨 들고 수영장 안으로 향했다. 복도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가 시끌벅적했다.
아이들 코칭 같은 건 영 내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정은채가 해보라는데. 그는 이미 그녀가 죽으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을 등신이 된 지 오래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착한 등신은 얌전히 로커룸으로 향했다. 샤워 후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나가는데,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윤제를 응시해 왔다.
“오, 저기 왔네요!”
손성욱이 가장 먼저 반가운 표정으로 윤제를 맞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손성욱은 천윤제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도 내심 염두에 뒀던 듯했다.
한달음에 다가온 손성욱이 윤제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야. 엄마들 앞에선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마. 애들만 가르쳐. 알겠지?”
손성욱은 신신당부를 하며 윤제를 끌고 사람들 앞에 섰다.
수영복을 입은 열댓 명의 아이들 뒤로, 학부모들과 허가를 받아 들어온 기자들 몇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윤제를 연예인 보듯 흘긋대며 입을 틀어막기 바빴다.
쏟아지는 관심에, 윤제는 피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이마를 긁적였다.
“여기 천윤제 선수가 오늘부터 두 달간, 우리 아이들 코칭을 해주실 겁니다. 박수!”
짝짝짝, 요란한 환호 소리와 함께 기대 어린 시선들이 일제히 윤제를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손성욱의 당부대로, 그는 그저 가볍게 묵례했을 따름이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리는 찰나. 맨 앞줄에 서서 저를 올려다보는 웬 초딩과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이상한 눈싸움이 시작됐다.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린 놈의 새끼가, 어른한테 눈빛 봐라.
눈썹을 꿈틀거린 천윤제는 속으로 참으로 말세라고 생각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무표정의 천윤제와 마주하게 되면 겁을 집어먹어 먼저 시선을 피할 법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새가 제법 싸가지가 없는 초딩의 냄새가 풍겼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수업 시작해야 하니까, 학부모님들과 기자분들은 관중석이나 대기실로 퇴장해주시고요.”
손성욱의 말에 학부모들이 우르르 수영장을 빠져나갔다.
이미 준비운동과 가벼운 몸풀기를 마친 아이들은 윤제에게 1:1 개인 코칭을 받기 위해 레인 밖에 한 명씩 차례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윤제는 한 명씩 기초적인 자세 위주로 코칭을 시작했다. 앞으로 두 달간 아이들의 기본기를 잡아주는 것. 그게 손성욱이 윤제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전국대회 입상권의 아이들을 모아놨다더니, 아이들은 전체적으로 꽤나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윤제가 자세를 슬쩍 바로잡아주거나, 몇 마디 코칭을 던지면 바로바로 알아듣는 정도는 되는 수준이라 가르치기도 수월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실력의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맨 앞줄에서 윤제와 눈싸움을 하던 초딩이었다.
“야. 너 팔 다시 뻗어 봐.”
가만히 아이의 스트로크를 지켜보던 윤제가 그를 불러 세우며 주문했다. 고개를 쳐든 아이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툭, 성의 없이 팔을 뻗었다.
찰박!
“이렇게요?”
“누가 어깨를 그렇게 많이 빼래. 다시 해 봐.”
찰박!
이번에도 툭, 뻗는 손동작에 여지없이 짜증이 묻어났다.
“다시.”
찰박!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하단 판단이 섰다.
“야.”
보다 못한 윤제가 누워있는 아이를 툭 쳐올렸다.
“어깨 빼지 말고 뻗으랬지?”
다소 싸늘한 윤제의 일갈에도, 아이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다시 해.”
아이는 다시 팔을 뻗었다.
이번엔 윤제의 주문대로, 적당한 각도와 정확한 깊이로 움직였다. 지금껏 본 아이들 중 가장 정석이라 할 만한 스트로크였다.
그러니까, 할 수 있으면서 일부러 몇 번이나 고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이게 진짜.
윤제는 다소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야. 너 이름 뭐야.”
“이한결인데요.”
신경질적으로 수경을 벗어 던지고 윤제를 빤히 올려다보며 답하는 아이의 얼굴엔 쪼는 기색조차 없었다.
“야, 이한결. 어깨가 아프면 치료를 받든가, 훈련을 조절하든가. 어디서 아프다고 네 멋대로 팔 돌리고 고집을 부려?”
“저 안 아픈데요?”
“쪼끄만게 어디서 구라를.”
윤제는 한결의 어깻죽지를 툭 움켜쥐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고통을 느낀 아이의 얼굴이 흠씬 일그러졌다.
25미터 앞에서 다른 아이들을 코칭하고 있던 손성욱이 슬쩍, 윤제와 한결을 돌아봤다.
“너 나가. 치료 다 끝날 때까지 내 수업 들어오지 마.”
그러고 다음 순번의 아이를 불러들이려던 찰나였다.
“싫어요.”
윤제는 제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결을 돌아봤다.
“뭐?”
“저 선발돼서 여기 들어온 건데요. 기록 좋아서.”
“근데.”
“저 아픈데 없어요. 치료 같은 것도 필요 없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쫓겨날 이유가….”
“니가 의사야? 안 아프면 가서 진단서 받아 오든가. 진단서 받아 오기 전엔 넌 내 수업 들어올 생각 하지 마.”
“수업 들을 때 진단서 필요하다는 말 못 들었는데요.”
“하. 뭐?”
“지금 나 가르치기 싫으니까 트집 잡는 거죠?”
제법 발칙한 대꾸에 윤제가 인상을 푹 구겼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손성욱이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이야?”
“쟤 어깨 부상 있어요. 못 가르치니까 내보내세요.”
“뭐?”
손성욱이 놀란 얼굴로 한결의 어깨를 부지런히 살폈다.
“야, 이한결. 너 어깨 아파?”
주변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학부모들까지 한결을 주목했다.
그러자 한결은 인상을 푹 우그러뜨리며 제 부상을 성욱에게 일러바친 윤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치 그가 자신의 중대한 비밀을 폭로라도 했다는 듯이.
“뭘 봐. 나가라니까?”
그럼에도 윤제는 아랑곳 않고 한 번 더 명령했다.
결국 아이의 눈매가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물 밖으로 솟아 나갔다. 손성욱이 물 밖에 있던 보조 코치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손성욱을 대신해 얼른 한결을 뒤따라갔다.
윤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시선을 돌리곤 다른 아이들에게 스트로크를 지시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 훈련이 끝날 때까지 한결은 수영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첫 수업이 끝나고, 손성욱은 라커룸으로 들어서는 윤제를 바짝 따라붙었다.
“아까 걔 어깨 부상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지난주에 대회까지 나갔던 앤데.”
“이번 주에 다쳤나 보죠. 아님 그 동안은 부상 숨기고도 할만했는데, 이젠 그걸 못하겠다 싶었던가.”
윤제가 무심히 답했다.
“한결이 걔 이번 전국 소년체전에서 2관왕 한 애야. 할머니 말론 수영 시작한 지 딱 1년 됐다더라.”
“아. 그래서 그렇게 뽕 들어가선 싸가지없이 굴었구나.”
누가 할 소릴.
손성욱은 픽 코웃음을 쳤다.
“야, 넌 저만할 때 더 싸가지 없었거든? 쪼끄만게 어른한테 눈 부라리고 씩씩대던 거 생각하면 내가 진짜, 어후, 울분이….”
“뭐래. 난 쪼그마한 적 없었거든요. 암튼 걘 당분간 수업 못 들어오게 해요. 아시겠지만 계속 그렇게 했다간 어깨 아작나요.”
“글쎄 말이다. 그랬음 싶은데 내 말을 들으려나. 여기 못 오게 하면 다른 데 가서 연습할 놈이라.”
손성욱은 잘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두 달짜리 애들이라도 그렇지, 너무 나 몰라라 하시는 거 아닌가.”
윤제의 타박에 손성욱은 어지간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하여간 지 올챙이 적은 생각 못 하고. 야, 내가 너 쫓아다니느라 그때 힘 다 써서 이런 거다!”
“그래서 지금 갚잖아요, 몇 배로.”
윤제는 쯧, 혀를 차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을게요. 수업 끝나면 천천히 와요.]은채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곧바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갚을 거면 좀 제대로 갚든가, 인마. 내가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예. 그럼 계속 개고생하시고, 전 갑니다.”
윤제는 손성욱의 잔소리를 무참히 끊어버리곤 바쁜 발걸음을 빠르게 내디뎠다.
* * *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은채는 어느새 책을 내려놓고 제 앞의 한 아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개월쯤이나 됐으려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듯한 어린아이였다.
어느 순간, 엄마 손을 놓고 아장아장 걸어오던 아이가 은채와 시선을 맞추느라 풀숲에 풀썩 주저앉듯 넘어졌다. 그저 웃으며 바라보던 은채는 곧바로 일어나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아이를 안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볼을 달싹이던 아이가, 돌연 생긋 웃으며 은채를 올려다봤다.
“어머, 감사해요!”
어느새 후다닥 달려온 아이 엄마가 아이를 일으켜준 은채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은채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묵례했다.
은채의 손가락을 잡고 있던 아이는 엄마를 보자 배시시 소리를 내어 웃곤 그녀에게로 와락 안겨들었다. 그런 아이를 세상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천윤제와 아이를 낳는다면 어떨까. 그냥 아이도 귀여운데 제 아이라면 얼마나 더 귀엽고 사랑스러울지, 짧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외양과 피지컬이야 보나 마나 아빠를 닮아 훌륭할 거고, 머리도 좋고 운동 신경도 남다르려나. 아, 다른 건 다 닮아도 부디 그 성질머리만큼은 닮지 않아야 할 텐데….
그녀가 조그만 머릿속을 이런저런 상상으로 채워 갈 때였다.
“뭐 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은채가 바라보고 있던 아이와 아이 엄마의 뒷모습을 흘긋 보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요.”
“근데 뭘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
“좋아 보여서요.”
의미가 모호한 답에 천윤제의 눈썹이 설핏 들썩였다. 그의 질투는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뭐가 좋아 보이는데?”
“그냥, 행복해 보이는 게?”
“애 키우느라 개고생이겠구만, 행복은 무슨.”
예상했던 대답에 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수업은 잘하고 왔어요? 어땠어요? 애들 가르칠 만해요?”
“아니. 애새끼들 말 더럽게 안 듣더라, 어휴.”
“애들이 다 그렇죠, 뭐. 윤제 씨도 어릴 때 손 코치님 말씀 죽어라 안 들었다면서요.”
배실배실 웃으며 묻는 은채의 말에 윤제는 퍽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죽어라 안 듣긴, 무슨. 나만큼 코치님 위해주는 선수도 없었거든?”
“글쎄요. 손 코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던데.”
“자기야.”
윤제는 황당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불리할 땐 늘 얼굴 공격을 하는 게 습관인 그였다.
“자기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 존나 착한 어린이였어요.”
“그래요. 뭐, 그렇다 쳐요.”
“그냥 그렇다 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니까.”
윤제는 썩 억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놀리듯,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의 은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말을 끊었다.
“네. 존나 착한 천윤제 씨. 나 배고픈데.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네?”
그러곤 단단한 윤제의 팔에 팔짱을 끼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쌍꺼풀 없는 그의 커다란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휘었다. 잇새엔 하릴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흘렀다.
“배고파? 뭐 먹고 싶은데?”
그는 제게 바짝 매달리는 은채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녀의 앞에 무슨 음식이든 곧바로 대령해 바칠 기세였다.
“음, 오랜만에 윤제 씨가 해주는 파스타 먹고 싶은데.”
“그 거지 같은 걸, 또 먹겠다고?”
윤제는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윤제는 확실히 요리에 소질이 없었다. 그는 지난 은채의 생일상을 직접 차린 이후, 다시는 음식물 쓰레기를 생성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었다.
한데, 그 쓰레기를 또 만들어 달란 건가.
“그냥 사 줄게. 맛집 가자.”
“아뇨, 난 윤제 씨가 해준 게 먹고 싶은 건데요.”
“아니, 왜? 그 맛 없는 걸 굳이 왜?”
“맛없지 않았어요. 먹을 만했어.”
“진심이야?”
진지하게 되묻는 윤제에게 은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 보였다.
윤제는 썩 곤란하단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습관처럼 레시피 영상을 검색해대는 그를 보며, 은채는 슬금슬금 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 *
결국, 파스타는 맛도 보지 못한 채 식탁 위에 뉘어진 은채는 쉼 없이 밀려드는 그 뜨거운 살덩이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밀어내기는커녕,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에 매달리고,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춤을 감아 벌리는 행위가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었다.
빨릴 대로 빨려 이미 얼얼하게 부은 입술을 한 번 더 쭉 빨아들이자, 야릇한 신음이 샜다.
“흐으, 응.”
그 참을 수 없는 고자극에, 윤제는 미간을 흠씬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떼어 냈다.
“자기, 취했어?”
그가 발그레해진 얼굴의 은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식탁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침대로 가자고 칭얼거렸을 그녀가 되레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하는 게 영 의아해서였다.
돌이켜보니 먼저 자극을 해 온 것도 정은채였다. 음식 만드는데 옆에서 종알종알 간섭하는 게 귀여워 그저 가벼운 키스만 적당히 하다 말려고 했던 걸, 그녀가 먼저 제게 매달려 안기며 깊은 키스를 유도하지 않았던가.
취한 게 틀림없다. 파스타를 세 번이나 다시 만드는 동안 혼자 홀짝홀짝, 맥주를 세 캔이나 마시더니만.
“아뇨. 안 취했어요.”
야살스레 속삭이며 다시 목덜미를 끌어당기는 손길 또한 어지간히 야했다.
“근데 왜 이렇게 야하게 굴어? 사람 미치게.”
“그래서, 싫어요?”
“아니? 뭔 소리야, 존나 고맙지.”
손을 내린 그가 거침없이 그녀의 팬티 천을 젖히고 침입했다. 오랜 키스로 이미 흥건하게 젖은 그녀의 속살이 그의 손가락을 축축이 적셨다.
“씹, 너 여기 언제부터 이랬어?”
윤제는 상스러운 감탄을 내뱉으며 허리를 세웠다.
“좆 같은 파스타고 나발이고, 보지가 이 지경이었으면 나한테 진작 말을 했어야지.”
그는 썩 기특하다는 듯 갈라진 틈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며 클리토리스와 질구를 게걸스레 왕복하기 시작했다.
“으응….”
그러다 어느 찰나, 정숙하게 다물려 있던 입구를 찾아 단단한 손끝을 푹 쑤셔 박았다. 찔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조여 물었다.
“하, 존나 좁아.”
그렇게 쉴 새 없이 박아 넓혔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좁은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이 참 멀다 싶었다.
“하으, 응….”
그렇게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안을 파고들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그녀의 몸을 조금 더 풀어내려 할 때였다.
돌연 슬쩍 몸을 일으킨 그녀가 윤제의 앞섶으로 손을 뻗어 이미 발기한 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치솟는 육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윤제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손가락 말고, 윤제 씨꺼 바로 넣어요. 응?”
그 말 한마디에 완전히 핀트가 나간 듯, 그는 미간을 훅 일그러뜨리며 이를 아득 물었다.
“정은채, 너 오늘 왜 이렇게⋯, 후.”
이렇게나 적극적인 정은채라니. 아무래도 매일 술을 먹여야 하나 싶었다.
그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하곤 한계까지 단단해진 윤제의 성기를 살짝 움켜쥐고 있었다. 말캉하고 보드라운 손바닥에 비벼지는 표피에 울퉁불퉁, 검붉은 핏줄이 흉측하게 솟아났다.
“알겠어, 잠깐만.”
윤제는 가까스로 무너져내리는 이성을 부여잡으며, 그녀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거실에 비치해 둔 콘돔 박스를 가져오려는 거였다.
“잠깐 기다려. 콘돔 좀 가져….”
“그냥 해요.”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돌아서려던 윤제가 다소 의아한 기색으로 은채를 응시했다.
“뭐?”
“콘돔, 없이 하자구요.”
발그레한 두 뺨이 수줍게 달싹였다.
윤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수백, 아니. 수천 번쯤 정은채와 섹스를 한 것 같은데 이런 소리는 또 처음인 까닭이었다.
“콘돔 없이? 생좆을 박으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음에도 은채는 말갛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녀의 손 안에 쥐인 기둥의 선단에선 이미 시허연 정액이 질금질금 새고 있었다.
‘씨발, 진짜 이러다 싸겠는데.’
갈등과 불길함을 동시에 느끼며 미간에 힘을 주는 찰나였다. 도톰한 입술에서 더더욱 믿기지 않는 말이 새어 나왔다.
“윤제 씨. 우리, 아이 가질래요?”
“…뭐?”
“나 임신하고 싶어요.”
“…….”
“당신 아이 가지고 싶다구.”
확실히 솜털이 바짝 솟을 만큼 자극적인 말임에는 분명했다. 임신하고 싶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이미 그녀의 손바닥에 정액을 줄줄 쏟아 내고 있었으니까.
짜릿한 오르가슴을 느끼면서도, 윤제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정은채의 표정을 꼼꼼히, 주의 깊게 살폈다.
존나 야하게 생긴 주제에, 저를 보는 동그란 눈동자는 또 제법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단순히 취해서, 혹은 흥분에 못 이겨 내뱉는 말은 분명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윤제는 한층 거칠어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진심이야?”
“응. 진심이에요.”
은채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천윤제 씨 닮은 아이 낳고 싶어요.”
잘생긴 얼굴에 점점 더 복잡한 기색이 퍼져나갔다.
“윤제 씬, 어때요?”
아이라니.
언젠가 천 회장이 은근슬쩍 아이 얘기를 꺼내자 한 번이라도 은채 앞에서 그런 얘길 꺼내면 아예 연을 끊어 버리겠다 퍼부었을 때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단어였다.
윤제는 은채가 아이를 원하고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싫어요?”
아무런 답이 없자, 초조해진 그녀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왔다.
잠시간 가만히 눈동자만 깜빡이던 윤제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난 싫어.”
옅은 색 동공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왜, 왜요?”
말까지 더듬으며 되묻는 얼굴이 꼭 놀란 토끼 같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라면 질색을 하는 성미도 성미였지만, 기실 은채에 대한 걱정이 큰 까닭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깨질까, 부서질까 전전긍긍인데. 이 여리고 가냘픈 몸으로 열 달간 아이를 품고, 생살을 찢어 애를 낳아야 한다니. 그로선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는 상상이었다.
윤제는 말없이 팔을 뻗어 티슈를 뽑았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 묻은 진득한 정액을 꼼꼼히 닦아 내기 시작했다.
은채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혹시 아이 생기면 윤제 씨 훈련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래요?”
“…….”
“올림픽 준비해야 하는데 힘들까 봐? 그런 이유인 거면, 내가 윤제 씨 신경 안 쓰이게 더 많이 노력할 테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럼요?”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지.”
“…….”
“임신하고 애 낳으면 너 아프고 고생할 거 뻔한데. 난 그 꼴 못 봐, 차라리 내 배를 찢으면 찢었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윤제의 대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만 벙긋거렸다.
“난 아이 같은 거 필요 없어. 정은채 너만 있으면 돼.”
윤제는 어이없어하는 은채의 허리와 뒤통수를 소중히 받쳐 안아 올렸다. 그러곤 그대로 침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윤제 씨.”
어느새 푹신한 시트 위에 뉘어진 은채가 그의 팔뚝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아이 가질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응. 없어.”
윤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훅, 벗어 던져 버렸다. 동시에 탄력 있고 쫀쫀한 근육들이 그녀의 몸에 뱀처럼 단단히 휘어 감겼다.
그는 하도 물고 빨아 울긋불긋해진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여전히 흉흉히 발기해 있는 제 성기 위에 콘돔을 뒤집어씌웠다.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의 콘돔임에도 늘 버겁게 작게 느껴지는 비닐의 크기에 매끈한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혹시 생좆으로 박히고 싶어서 한 말인 거면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 가서 묶고 오고. 사실 나도 그동안 자기랑 나 사이에 이딴 좆 같은 이물질 끼어드는 거 싫기는 했어.”
“잠깐, 잠깐만요!”
은채는 점점 더 아래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는 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그래봤자 저에겐 미약한 힘이었지만, 윤제는 그녀에게 밀려나는 척 슬쩍 몸을 물렸다.
“왜애.”
“그러니까 지금, 평생 아이 없이, 둘이서만 살자는 소리예요?”
“응. 안 돼?”
어느새 완전히 몸을 일으켜 앉은 은채가 황당하다는 듯 흐르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겼다.
그녀는 차라리 지금은 아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은퇴한 후에 천천히 아이를 갖자 말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 얘길 먼저 꺼내면서도 어쩌면 시기가 이른 건 아닐까 걱정을 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평생을 아이 없이 살자니. 그것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나 이해가 잘 안 돼요.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평생 아이 없이 살자는 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고작이라니? 그게 나한텐 제일 중요한 이유인데?”
“나는 괜찮다고요. 아파도 좋고, 고생해도 좋으니까 난 윤제 씨 아이가 갖고 싶다니까요?”
“난 안 괜찮다고요. 내가 너 대신 아파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너 애 낳는 게 장난인 줄 알아?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일인데, 너같이 여리여리하고 연약한 애는 애 낳다가 죽을 수도 있어. 정은채 너, 나 홀아비 만드는 게 꿈이냐?”
“아니, 대체 지금 무슨 소릴…!”
대화의 흐름이 갈수록 황당해지고 있었다. 천윤제는 뻔뻔히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랑 어머니한테도 이미 말했어, 애 만들 생각 없으니까 손주 얘기는 말도 꺼내지 마시라고.”
“미쳤어요? 나랑 상의도 안 하고 어머님 아버님께 왜 그런 말을 해요?”
“상의? 프러포즈할 때도, 결혼할 때도 내가 말했잖아.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자고. 너도 그러자고 울면서 고개 끄덕여놓고, 이제 와서 딴말하는 건 너 아니야?”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속할 거예요, 진짜?”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결국 참다못한 은채가 얼굴을 훅 찌푸리며 윤제를 흘겼다. 그러자 그 눈빛조차 괴로운 듯, 윤제의 미간도 따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묘한 침묵이 얼마쯤 이어졌을까.
타이밍 절묘하게도, 어디선가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 어딘가에 던져둔 윤제의 핸드폰 벨 소리였다. 소리는 꽤 집요하게도 몇 번이고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들려왔다.
결국 윤제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침실을 빠져나갔고, 침대 위 홀로 남은 은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매사 제멋대로인 천윤제라지만, 아이 문제에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간 너무 방심을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퍽 막막한 기분이었다. 제가 얼마나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 줘야 아이 갖는 걸 동의해 줄는지.
은채는 침대 한 귀퉁이, 박스로부터 잔뜩 쏟아진 콘돔 다발을 응시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첨벙첨벙!
마구잡이로 물을 잡고 가르는 손길이 난폭했다.
‘천윤제 씨 닮은 아이 낳고 싶어요.’
‘나는 괜찮다고요. 아파도 좋고, 고생해도 좋으니까 난 윤제 씨 아이가 갖고 싶다니까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아프고, 고생스럽고, 위험하기만 한 일을 왜 구태여 하고 싶다 떼를 쓰는 건지.
제가 좋아서, 저와 살겠다고 결혼한 거면서, 왜 그렇게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걸까. 저 하나로는 부족한 걸까. 지난 1년간, 매 순간 정은채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하! 하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터뜨리며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애한테 뭐라고 하더니만 똑같은 짓거릴 지가 하고 있네.”
멀찌감치서 지켜보고 있던 손성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윤제에게로 다가왔다.
“너 부상 회복 중인 거 잊었어? 뭔 몸을 이렇게 미친놈처럼 풀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얼굴에서 후드득, 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손성욱이 툭 던지듯 건넨 수건을 잡아채 얼굴을 감쌌다.
“적당히 해라, 어? 이러는 거 최닥 알면 또 기절한다. 안 그래도 기사까지 났던데. 너도 봤지?”
오늘 아침, 짤막한 단신으로 난 스포츠 뉴스를 말하는 거였다. 세간에선 어깨 회복을 이유로 세계 선수권 대회 출전을 포기한 천윤제를 두고 슬슬 악성 루머들이 번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천윤제도 이제는 슬슬 힘에 부치는 것 아니냐, 애초에 세 번째 올림픽 메달 도전은 무리가 아니었느냐. 심지어는 결혼하더니 정신이 딴 데 팔려선 제대로 연습이나 하겠냐는 비아냥조의 말들까지도 포함된 루머들이었다.
“아까 천 대표 통화하니까 기자 새끼들 다 조져놓겠다고 씩씩거리던데.”
“뭐 그런 개소리에 아직도 일일이 반응을 한대요, 한두 번 겪나.”
“천 대표가 옛날부터 스캔들 기사는 참아도 네 실력 갖고 트집 잡는 기사는 못 참았잖냐.”
윤제는 손성욱의 말을 흘려들으며, 젖은 머리칼을 무심히 쓸어 넘겼다. 루머고 뭐고, 지금 머릿속에 온통 정은채 생각뿐이라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는 까닭이었다.
“참.”
돌아서려던 손성욱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이따 한결이 놈 수업 들어올 거야. 적당히 받아줘.”
“아픈 새끼를 어떻게 받아요?”
“그럼 난? 아픈 네놈 새끼 받아주는 난 뭔데.”
손성욱이 기막히다는 듯 따져 물었다.
“아침에 그놈 할머니 찾아오셔서 나한테 죄송하다고, 당신 손자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당신이 죄송하다고, 그냥 같이 훈련만 받게 해달라고 통 사정하시더라. 그냥 좀 받아줘. 병원엔 끝나고 내가 따로 끌고 갈 거니까.”
“걘 보호자가 없대요? 왜 코치님이 병원을 데려가요?”
“형편이 안 좋아. 가족이라곤 할머니 한 분뿐인데, 물리 치료니, 다른 애들처럼 정성 쏟으면서 뒷바라지할 사정도 아니고.”
“아직도 자선 사업하시나 봐요.”
불시에 정곡을 찔린 손성욱이 왈칵 인상을 썼다.
“투자, 인마! 투자!”
“사모님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그깟 코치 월급 몇 푼이나 된다고 허구한 날 자선 사업이세요?”
“이게, 진짜…!”
발끈한 손성욱이 상스러운 말로 반박하려 할 때였다.
수영장에 일찍 도착한 아이들이 들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잘재잘,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는 소리였다.
“코치님, 안녕하세요!”
걸어들어온 아이들은 손성욱과 윤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합창을 했다. 어느새 손성욱의 얼굴에 분노가 삭제되고 자상한 아빠 미소가 어렸다.
“어, 그래. 다른 친구들 다 모일 때까지 몸 풀고 연습들 하고 있어. 응?”
“네!”
손성욱의 다정한 말에 합창을 한 아이들이 와르르, 어린이 전용 레인으로 달려 나갔다.
“아유, 귀여운 것들.”
손성욱이 흐뭇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야. 말은 좀 안 들어도 귀엽지 않냐? 애들이라 그런지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이는 게 가르치는 맛도 있고.”
“전혀요. 전혀 안 귀여운데.”
“하여튼 이 정나미 없는 놈아.”
손성욱은 쯧, 혀를 찼다.
“나중에 너도 네 애 생겨 봐라. 무슨 짓을 해도 다 귀여워 보일 테니까.”
“…….”
“왜 아닐 거 같냐? 너 인마, 은채 씨 닮은 딸 생기면 네가 안 귀여워하고 배기겠어? 뭐, 은채 씬 너 닮은 아들 바라는 것 같긴 했다만.”
무심하게 말을 듣던 윤제가 홱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정은채한테 애 얘기하셨어요?”
“어. 했는데, 왜. 이제는 은채 씨랑 사담한 것까지 너한테 보고해야 하….”
“아, 진짜!”
버럭 높아진 목소리가 확연 짜증 조였다. 당황한 손성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오지랖 넓게 쓸데없는 소릴 하셔선 애한테 이상한 생각하게 만들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은채 씨가 먼저 나더러 결혼하고서 언제 아이 가졌냐고 물었어, 인마. 그래서 대답 좀 해주다 얘기가 길어진 건데 뭘…, 아니, 근데 이게 왜 갑자기 짜증을 내고 지랄이야?!”
대답을 하다 보니 울컥 화가 치미는지, 손성욱은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윤제를 보며 같이 소리를 높였다.
윤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은채가 먼저 아이 이야기를 물었다니. 제 예상보다 더 진지하게 아이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수건을 움켜쥔 커다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너 혹시 은채 씨랑 싸웠냐?”
평소보다 저조한 천윤제의 심기를 눈치챈 손성욱이 물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윤제는 즉답하지 못하고 눈썹만 깊숙이 들썩였다.
그 얼굴을 면밀히 살피던 손성욱이 귀신처럼 말을 이었다.
“은채 씨는 아이 낳자, 넌 싫다?”
“어떻게….”
“뻔하지, 신혼부부들 그맘때쯤 투닥거리는 이유야.”
손성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은채 씨 상처받았겠다. 가서 먼저 사과해, 인마.”
“상처요?”
“당연하지. 사랑하는 남편이 자기랑 아이 낳기 싫다는데, 상처 안 받을 여자가 어딨냐?”
“정은채랑 애 낳기 싫다는 게 아니라, 저는 은채가 힘들고 고생하는 게 싫으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이 자식아. 은채 씨 의견은 존중 안 하냐?”
“정은채 아픈 건 죽어도 못 보겠는 걸 어떡해요, 그럼. 그 여린 애한테 그 위험한 일을 어떻게 하게 하냐고요?”
“어휴, 이 팔불출아. 사랑싸움도 어지간히 닭살 돋게 한다, 진짜.”
손성욱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때마침 아이들이 다시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수업이나 제대로 해. 수업 끝나면 얼른 가서 은채 씨한테 사과하고.”
대화를 무심히 끊은 손성욱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후…….”
도대체 뭘 어쩌라고.
젖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리는 윤제의 잇새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도서관을 나서던 은채는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매끈한 스포츠카에서 내린 천윤제가 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엔 집채만 한 크기의 꽃다발을 든 채로.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행색에, 지나치던 사람들이 대놓고 두 사람을 흘긋거렸다.
“이거 뭐….”
“오다가 자기 생각나서 샀어.”
그는 은채의 품에 꽃다발을 안기며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특유의 묵직한 향기가 코끝에 훅 끼쳐 들었다.
“자기야.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머리칼을 넘겨주는 척, 은근히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엔 불순한 의도가 다분했다.
“지금 일부러 이러죠. 나 화 못 내게 하려고.”
“어떻게 알았어? 나한테 화내지 마라, 정은채, 나 넘 무서워. 응?”
뻔뻔한 입술이 츠읍, 말캉한 뺨에 진득하게 닿았다 떨어지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쏟아지는 시선들이 더욱 짙어졌다.
“차로 가요. 가서 얘기해.”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그녀는 다급히 천윤제의 손을 붙잡아 채어 차로 향했다. 픽, 웃은 윤제가 단숨에 그녀를 앞질러 섰다. 그러곤 능숙하게 보조석 문을 열어 은채를 태웠다.
은채는 무릎 위에 올려놓기도 버거울 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가만히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뭐 이렇게 큰 걸 사왔어요.”
“못고르겠길래 꽃집에 있던 거 종류별로 하나씩 꽂아달라고 했더니 커지더라. 어때, 예쁘지?”
“네, 무지 예쁘네요.”
은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빤히, 은채를 바라보고 있던 윤제도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근데, 수업은요? 아직 끝날 시간 안 된 것 같은데.”
“오늘 좀 일찍 끝냈어. 영 집중이 안 돼서.”
은채의 무릎에 올려진 꽃다발을 뒷좌석으로 옮겨놓은 윤제는 달카닥, 직접 그녀의 벨트까지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했다고. 알아?”
어젯밤, 그렇게 다투고 화해할 겨를도 없이 헤어졌던 게 종일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어요. 나도 오늘 종일 마음 불편하고 힘들었어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갖는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앞으로 천천히 의견을 맞춰나가면 될 일을 괜히 욱하는 마음에 과하게 화를 냈던 게 아닌가, 종일 후회가 된 거였다.
“어제는, 내가 너무 흥분했던 거 같아요. 미안해요.”
은채가 담백하게 사과했다. 반자동처럼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린 윤제는 고개를 깊이 숙여 그런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뭔 소리야, 내가 미안하다니까. 너 속상할 말을 그렇게 심하게 씨불였는데. 내가 존나 개새끼였지. 미안해, 자기야.”
은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그게 그렇게 떼쓴다고 될 일이 아닌데.”
“그건 그래. 너답지 않게 좀 떼를 쓰긴 하더라.”
여지없는 대꾸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 그렇게 내 애가 갖고 싶어?”
은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윤제 씨랑 예쁜 아이 낳고 싶어요.”
“존나 야한 소릴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네.”
은채는 어이가 없단 듯 헛숨을 터뜨렸다.
“당장 결정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요, 우리. 어차피 나도, 윤제 씨도 지금은 할 일이 있으니까, 각자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좀 더 신중하게요. 응?”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단단한 눈동자가 지그시 저를 마주해왔다.
“내 말 오해하지 마. 너랑 아이 낳는 게 싫단 게 아니라 난 그냥 네가 힘들어지는 게 싫은 거야. 나한텐 네가 1순위이니까.”
어쩌면 늘 막무가내에, 제멋대로 구는 쪽은 천윤제가 아닌 저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늘 이렇게 저를 1순위로 받아주는 남자니까.
다정한 손이 그녀의 이마 위에 흐르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은채는 저를 어르고 달래려는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알아요, 윤제 씨 마음.”
매끄럽게 뻗은 입술이 조금 더 짙은 호선을 그리더니 이내 은채의 입술에 쪽, 하고 와 닿았다 떨어졌다.
“아니. 넌 내 마음 죽을 때까지 몰라.”
낮은 목소리가 입술 위에서 진동했다. 스르륵, 눈꺼풀을 내리감자 고개를 흠씬 기울인 그가 그녀의 두 뺨을 앙 물었다.
따끔한 감각에 하얀 미간이 찡긋거렸다. 윤제는 그런 은채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피식거리며 말캉한 입술을 깊이 빨아들였다.
빈틈없이 겹친 잇새로 간지러운 잔웃음이 몽글몽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