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gy marriage RAW novel - Chapter 2
│2. 사고
연일 터질 것 같은 불볕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운전석 문을 열어젖히기 무섭게 후끈한 열기가 왈칵 밀려들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콘크리트에선 지글지글 열이 피어올랐다.
아니. 내 머리에서 열이 오르는 거였던가.
탁!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은 윤제가 인상을 구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진짜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이딴 스케줄 잡아 봐. 그땐 위약금이고 뭐고 확 다 펑크내버릴 거니까.”
-귀여운 놈, 앙탈 부리기는. 너 지금 실검 1위 하고 난리 났거든? 이거 다 은채랑 내 덕인 줄이나 알어. 아니었음 천윤제 선수 지금도 사람들한테 이미지 개망나니세요.
“연예인이냐? 수영 선수가 수영만 잘하면 됐지, 이미지는 개뿔.”
윤제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혜진의 말에 사납게 반박했다.
-하여간, 마지막 촬영까지 사고 치지 말고 잘해. 은채 없다고 괜히 핑계 김에 싸가지 부리지 말고.
“하, 씨발, 담배 땡겨.”
별안간 들려온 그 그리운 이름에, 윤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초조한 얼굴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보고 싶다. 존나 보고 싶다. 존나 존나, 보고 싶어 미치겠다.
별안간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집채처럼 그를 덮쳐 왔다.
-담배? 너 선수라는 게 자기 관리 똑바로 안하지?
자기 관리? 그딴 건 해서 뭐하나. 어차피 정은채도 못 보는데.
혜진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윤제는 기어코 주머니 속 담배를 찾아 꺼내선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이거라도 안 피우면 정말이지 지금 당장 공항으로 달려갈 것 같아서였다.
-은채 없다고 자꾸 이렇게 막 나가지? 너 어제도 홍 팀장한테 개진상 부렸다면서? 홍 팀장이 너 때문에 간만에 온몸에 소름 끼쳤다고….
“혹시 누나랑은 연락 잘 돼?”
-뭐? 연락? 누구랑? 은채?
“어. 둘이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잖아.”
-왜? 은채랑 연락이 안 돼?
“아니, 후. 되긴 되는데. 씨발, 무슨 인터넷이 나라 옮겨 다닐 때마다 끊겨선, 생존 확인이나 겨우 하고 있으니까…. 하…. 씨발, 좆 같은 유럽 인터넷.”
-야. 너 혹시 바쁜 애 들볶으면서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지? 은채 놀러 간 거 아니다? 원래 그런 데 가면 교수들 쫓아다니기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한 이틀 참으면 돌아올 건데 염병 좀 작작 떨어. 어?
윤제는 귓등으로도 안 들리는 혜진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마무리 짓고 잇새에 묻어 둔 필터를 깊이 빨아들였다.
커다랗고 유려한 손이 덜덜 떨려댔다. 흡사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약물 중독자 같은 모습이었다.
한 달 전. 여름 방학을 맞은 은채는 유럽 5개국을 도는 학술 연수를 떠났다. 입학 성적과 한 학기 동안의 성적을 집계해 뽑힌 소수의 장학생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회라 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윤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따라나서려 했다. 그간 계약했던 방송 출연과 CF 촬영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망상이었다.
혜진은 윤제 앞에 계약서를 들이밀며 모든 위약금을 모조리 청구할 거라고 이를 갈았다. 그때 윤제는 별다른 고뇌 없이 무신경하게 사인을 갈겼던 제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은채를 따라가지 못한 데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은채가 출국하기 일주일 전, 희정이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술까지 한 엄마를 두고 떠나는 걸 무척이나 고민스러워했다. 윤제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어머님을 직접 살피겠다며 불안해하는 은채를 안심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그는 한 달간 정은채와 생이별을 하게 됐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까. 정은채 없는 좆 같은 대한민국.
뙤약볕 밑에서 청승을 떨고 있던 윤제는 한참 만에야 담배를 비벼끄고 다시 희정의 집 대문으로 다가섰다. 초인종을 누르기 무섭게 달카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익숙한 발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윤제는 언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안면을 싹 바꾸며 목소리를 높였다.
“장모님, 천 서방 왔습니다.”
“왔어?”
휠체어에 앉은 희정이 반가운 표정으로 윤제를 맞았다.
“덥지? 냉장고에 옆집 언니가 시원한 식혜 갖다 놨는데, 얼른 그거 꺼내 마셔.”
“식혜요?”
“응. 식혜 좋아하나 모르겠네.”
“아, 어머니.”
“왜…. 별로 안 좋아해?”
“제가 또 식혜에 미친 건 어떻게 아시고.”
심각한 표정으로 냉장고로 냉큼 사라지는 윤제를 보며 희정은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다리는 좀 어떠세요?”
어느새 식혜 두 잔을 따라 나온 윤제가 희정을 향해 물었다.
“멀쩡하지. 아침저녁으로 여사님 오셔서 도와주시니까 불편할 일도 전혀 없고.”
“이만하시길 다행이에요, 진짜.”
“나 때문에 자네가 무슨 고생이야. 난 이제 괜찮으니까, 오지 마. 힘든데 괜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하나도 안 힘듭니다. 어차피 일주일에 두 번 애들 수업하는 거 말고는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요, 뭐.”
윤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은채를 대신해 희정을 살피고 있었다.
희정은 그런 윤제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또 기특했다. 윤제는 딸보다 더 싹싹하고 다정한 사위였다. 처음에 들리는 소문만 믿고서 걱정을 했던 게 다 무색하고 미안할 정도였으니까.
돌연 머리 위 식탁 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천장을 향했다.
“왜 이러지? 전구가 나갔나?”
“새 전구 가진 거 있으세요?”
“응. 새거가 창고에 있긴 한데….”
희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 창고로 향한 윤제는 새 전구 하나를 찾아 들고 와 의자를 밟고 섰다.
가볍게 전구를 갈아 치우는 윤제를 보며, 희정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함을 느꼈다. 꼭 죽은 은채 아버지가 딸을 위해 보내준 사위 같았다.
“은채는 여전히 연락이 잘 안 되지?”
“네. 뭐, 그렇죠. 그래도 하루에 한두 번씩 메시지는 주고받아요.”
“한창 좋을 때인데, 보고 싶어서 어째.”
“어쩔 수 있나요.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죠.”
윤제는 제법 정상인 같은 대답을 하며 듬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기실은 매일 밤 정은채 사진을 보며 울다 웃다 그녀의 속옷으로 자위까지 해대는 미친 나날들을 보내는 주제에….
“아. 이제 일어났을 시간일 것 같은데, 지금 전화 한번 해볼까?”
희정이 돌연 반가운 말을 꺼냈다. 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은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심한 척 식혜를 들이켜던 윤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희정의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신호음이 몇 번이나 이어졌을까.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 흐릿한 화면 안에 떠올랐다.
“은채야!”
-엄마. 어? 윤제 씨도 있네?
은채가 흘긋, 희정 뒤에 고개를 내민 윤제를 발견하곤 눈동자를 부풀렸다.
“응. 지금 천 서방 와서 같이 있다. 너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응, 잘 지내지. 엄마는? 다리는 어때요?”
“나야 괜찮은데, 나보단 천 서방이 고생이지, 뭐.”
희정은 윤제 쪽으로 화면을 돌려주며 말했다.
며칠 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에 윤제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은채의 미모가 저질스러운 화질도 뚫을 듯 선명하게 빛났다.
정은채와 떨어지기 싫어 결혼까지 했는데, 이런 날벼락 같은 생이별을 겪게 될 줄이야.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울컥, 서러움이 치솟았다.
-고마워요, 윤제 씨. 윤제 씨 아니었음 나 진짜 여기 못 왔을 거야.
해맑은 그녀의 미소에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시렸다. 자신은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데, 이게 고맙단 말을 들을 일인가 싶어서.
역시나 혼자만 애가 타 미치겠나 보다. 씁쓸한 자조가 밀려들었다.
-이제 공식 일정은 다 끝났어요. 내일 예정대로 비행기 탈 거니까 한국시간으론 모레 저녁에 도착할 거예요.
모레 저녁이면 아직도 48시간 이상이 남았단 소린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 달을 좆 빠지게 기다렸는데, 아직도 기다릴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게.
윤제는 지금 당장 오라고 떼를 쓰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모레 도착 시간 맞춰서 공항으로 데리러 갈게.”
-응, 고마워요.
속도 모르고 어지간히 예쁘게도 웃는다.
-어제 여기 대학에서 만난 애들이랑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해서요. 이제 씻고 나가려구요.
어디선가 은채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점심? 뭐 먹을 건….”
-아. 윤제 씨, 미안한데 전화 끊어야겠어요! 나중에 연락해요!
나중에 언제…?
묻고 싶은 질문을 되묻지도 못했건만, 짧은 통보와 함께 전화는 매정하게 끊겨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정은채의 얼굴과 목소리가 사라져 버리자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핑그르 돌았다.
설마 이게 그 강 박사나 최 닥이 말하던 공황장애인 건가. 공황장애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라 했는데.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아니다. 차라리 내 부고 소식을 들으면 정은채가 조금 더 빨리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래, 죽자. 죽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끔찍한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때였다.
“천 서방…?”
돌연, 윤제의 눈앞에 희정의 당황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제의 상태를 심각한 표정으로 살폈다.
어쩐지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윤제가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을 때였다.
“설마, 자네…, 지금 우나?”
마른 두 뺨 위로, 뜨끈한 물줄기가 주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선연했다.
* * *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드는 남자의 눈동자가 퍽 초조했다.
윤제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기계적으로 사인을 해주고 있으면서도 이제나저제나 정은채가 나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기다리던 말간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윤제는 곧장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섰다.
“윤제 씨!”
윤제를 알아본 은채가 반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미소가 새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단숨에 가까이 다가선 그는 두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 자기야. 보고 싶었어.”
윤제는 상체를 깊숙이 숙여 접고 은채의 목덜미와 어깨에 제 얼굴을 미친 듯이 비벼댔다. 흡사 집으로 돌아온 주인에게 달려드는 대형견 같은 모양새였다.
“나도요.”
예쁘게 말려 올라가는 입가에도 반가운 미소가 고였다.
쪽.
아니나 다를까, 충동을 참지 못한 그가 결국 그녀의 입술에 잔 뽀뽀를 했다. 말갛던 두 뺨에 수줍은 홍조가 피었다.
“그, 그만하고 빨리 가요.”
주위를 의식한 은채의 재촉에, 한참 만에야 마지못해 몸을 떼어 낸 윤제가 카트를 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은채는 자연스럽게 윤제의 팔짱을 끼고 그의 보폭에 속도를 맞춰 걸었다.
차에 오르고 나서도 윤제의 시선은 보조석에 앉은 여자의 머리꼭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입술은 그러쥔 그녀의 작은 손등에 1분에 한 번씩 입술을 맞춰대느라 분주했다.
이런 분리 불안 증세의 남자를 한국에 두고 한 달이나 해외를 다녀오다니.
은채는 이 남자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짓을 한 건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오느라 힘들었지.”
“아뇨. 편하게 왔어요. 윤제 씨야말로 나 기다리느라 힘들었죠.”
“존나 당연한 소릴. 너 기다리다 죽을 뻔했어. 알어?”
여과 없는 윤제의 어리광에 절로 웃음이 샜다.
“근데, 이 차는 뭐예요?”
은채는 낯선 세단의 내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윤제가 평소에 타고 다니던 날렵한 스포츠카가 아니어서였다.
“새로 샀어.”
“원래 타던 차는요? 그건 어쩌고요.”
“홍 팀장이 점검 맡겨야 한다고 하도 잔소리를 하길래 내줬지.”
“타던 차 점검 맡긴 사이에 새 차를 샀다는 거예요?”
“어. 오늘 너 데리러 와야 하니까.”
“그럼 그냥 택시 타거나 차를 빌리면 되는….”
“더럽게, 다른 새끼들 타던 차에 널 어떻게 태우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윤제를 보며, 은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느끼지만 윤제는 결코 저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붉은 신호에 걸린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그걸 기회 삼아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 내리던 윤제가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말랐어?”
“그래요? 아닐 텐데…….”
은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뺨에 손등을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긴 뭐가 아냐.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반쪽이 됐구만.”
애를 씨발, 굶기면서 데리고 다녔나.
겨우 욕지거리를 삼켜낸 그가 이를 으득 갈았다.
어쩐지 그게 귀여워 은채는 덥석, 찡그린 윤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그가 그러했듯이,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천윤제 씨야말로 살 빠진 것 같은데? 벌써 체중 조절 시작한 거예요?”
빤히 응시하는 연갈색 눈동자가 도르르, 소리가 날 것처럼 투명하게 굴렀다. 앙증맞게 오물거리는 입술은 또 어떻고.
그걸 보고 있으려니 뒷덜미가 뻐근해지는 감각이 훅 치솟는 기분이었다. 아니. 제 뺨에 와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단전 아래가 이미 묵직했다.
“근데 못 본 사이에 왜 더 잘생겨졌지, 우리 남편.”
배시시, 미소 짓는 새하얀 얼굴마저 눈앞에서 아른대자, 윤제는 이성의 끈이 뚝 끊기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공항에서부터 지금껏 자신이 어떤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다.
찰나, 미간을 훅 일그러뜨린 윤제는 거리낌 없이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와 입을 맞췄다.
“흐읍!”
놀라 벌어지는 잇새로 허겁지겁 혀를 밀어 넣고 입술을 빨았다. 농도 짙은 호흡과 타액이 마구잡이로 섞여들었다.
끊어질 듯 팽팽해지는 벨트의 텐션도 무시하며, 거대한 상반신을 보조석으로 급격히 기울여 내릴 때였다.
빠아앙!
뒤에서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번쩍 뜬 은채가 다급하게 그를 밀어내며 윈드실드 너머의 신호등을 가리켰다.
“신호, 신호 바뀌었어요!”
하릴없이 입술을 떼어 낸 남자의 붉은 눈매에 채워지지 못한 욕망이 그득했다.
그는 핸들을 콱, 움켜쥐며 액셀러레이터를 신경질적으로 지르밟았다. 아슬아슬하던 인내는 바닥난 지 이미 오래였다.
* * *
인적 없는 으슥한 어느 천변의 주차장.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무광 블랙의 고급 세단 한 대가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차 안의 공기는 두 남녀가 내뿜는 열기로 이미 터져나갈 듯 뜨거웠다. 결국 집까지 가지 못하고 차를 세운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정신없이 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고개의 각도를 이리저리 기울여가며 점막을 빨고 휘저어 대는 남자의 혀 놀림이 말도 못 하게 사나웠다. 두툼한 혀가 꼭 성기로 아래를 쑤시듯 좁은 잇새를 밀고 들어와 그녀의 안을 무자비하게 헤집어대는 거였다. 헤 벌어진 입가에 타액이 질질 새어 흘렀다.
“으으, 흐….”
결국 호흡이 달린 은채의 잇새에서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이 샜다. 탄탄한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몸을 뒤로 내빼듯 바르작거리자, 그가 득달같이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 붙잡았다.
이미 한계까지 발기해 드로어즈 밖으로 대가리를 드러낸 그의 기둥이 그대로 그녀의 아랫배에 질척하게 비벼졌다. 어찌나 길고 딴딴한지, 여러 겹의 천을 사이에 두고도 그 에로틱한 감각이 퍽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꼭 얇은 천을 모조리 뚫고 들어와 금방이라도 아래를 게걸스레 쑤시고 들 것처럼.
한껏 예민하게 달아오른 은채가 어깨를 부들거리자, 윤제는 물컹한 혀를 길게 빼 내 그녀의 턱에 흐르는 타액을 게걸스레 핥으며 속삭였다.
“자기야. 나 좆 터질 것 같아.”
제 말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그는 작은 손을 가져와 드로어즈 밖으로 튕겨 나가는 성기를 쥐여주었다. 한 손으로 다 쥐어 감쌀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발기한 기둥의 표피엔 우둘투둘한 핏줄이 흉측하게 튀어 올라 있었다.
그저 한 번, 손바닥으로 쓸기만 했을 뿐인데 선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쿠퍼액이 흥건했다.
은채는 그걸 윤활제 삼아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와 빤히 눈을 맞춘 채로.
“너무 보고 싶었어요.”
달뜬 호흡과 함께 들려온 목소리가 더없이 야했다.
씨발. 욕지거리를 뱉어낸 윤제는 결국 은채의 얇은 상의를 들쳐 올리며 그 속에 제 머리를 훅 밀어 넣었다. 그의 머리통이 그녀의 가슴 아래 불룩 솟아올랐다.
“흣…!”
바짝 곤두선 유두가 츄릅, 츄릅,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빨려 들어갔다. 윤제는 은채의 양 가슴을 두 손으로 한껏 움켜쥔 채 발기한 젖꼭지를 물고 빨고 씹으며 희롱해댔다.
“아흑, 으…!”
예고 없는 강한 흡입에, 은채는 길고 단단한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들썩였다. 덕분에 가랑이 사이에서 강하게 피어오른 성감은 맞닿은 그의 음경에까지 고스란히 전달됐다.
“하아, 으응….”
흥건히 젖어 더욱 얇아진 천 아래로 두 사람의 성기가 질척한 소리를 내며 마찰을 시작했다. 노골적인 움직임은 확연 서로의 성기에 대고 자위를 하는 모양새였다.
어느 틈에 아래로 손을 내린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에 콱 쥐어 불렸다. 덕분에 말캉한 살덩이가 쪼개듯 벌어지며 팬티 속 숨어 있던 음순 또한 활짝 열렸다.
우둘투둘, 핏줄이 불거져 오른 남자의 성기 위, 도드라진 그녀의 클리토리스와 외음부가 강하게 눌리며 비벼졌다. 찌릿찌릿, 머리가 아찔해지는 성감이 그녀를 휘어 감았다.
“하, 흐읏.”
은채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더 바짝 매달려 아래를 비볐다. 감질나는 쾌감에 점점 더 애가 탔다.
“가서도 내 생각하면서 이렇게 혼자 했어?”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앙가슴에서 낮게 울렸다.
“하으, 아니, 안, 했, 하으응.”
야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런 음란한 짓까진 한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자기 생각하면서 혼자 많이 했는데. 보여 줄까?”
뭘 보여 주겠단 건가.
설마 하며, 고개를 든 은채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 때였다.
커다란 손이 불쑥 그녀의 엉덩이를 훅, 받쳐 들었다. 기어코 하의를 벗겨 내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그 손짓에, 그녀도 협조하듯 몸을 설핏 들썩여 움직였다.
매끈한 다리를 감싸고 있던 얇은 슬랙스와 작은 팬티가 단번에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윤제는 발목에 달랑달랑 걸린 그녀의 팬티를 스윽 빼내 제 기둥의 선단에 대고 커다란 손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은채의 동공이 터질 듯 부풀었다.
“하, 미쳤어! 더럽게, 뭐 하는 거예요!”
“더럽겐 뭐가 더러워. 네 냄새 묻어서 향긋하기만 한데.”
윤제는 부러 동그랗게 젖은 부위에 코를 묻고 킁킁대기까지 했다. 경악한 그녀는 남자의 손에 걸린 제 팬티를 휙, 낚아챘다.
“이 변태가, 진짜!”
“그러니까. 변태가 자기도 없이 한 달이나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고개를 훅 기울인 남자가 하얀 목덜미를 질척하게 핥으며 손을 내렸다.
“다리 좀 더 벌려봐, 은채야.”
은근한 목소리가 그녀를 유혹했다.
“흣…….”
곧은 손가락이 불시에 가랑이 사이의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꾹, 짓눌렀다. 이미 그의 손길에 길든 몸이 불식간 부르르 떨려댔다.
그 흥분을 대변하듯,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질구에선 쪼르르, 애액이 새어 나와 윤제의 허벅지를 적셨다.
“뭘 이렇게 많이 쌌어. 자기도 많이 힘들었어?”
“흐으, 응.”
조금 더 깊숙이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발름거리며 손끝을 물어댔다. 익숙한 방향으로 손가락을 푹, 쑤셔 찔러주자 붉은 잇새에서 자지러지는 교성이 샜다.
“아, 아흣.”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얼굴을 붉히는 얼굴과 달리, 사납게 오물대는 점막의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저속했다.
목을 와락 끌어안고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대는 건 또 어찌나 야한지….
그 순간, 윤제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좁고, 뜨겁고, 축축한 곳에 어서 자신을 밀어 넣고 싶다는 생각.
“좋아, 정은채?”
“으응.”
홍조 어린 두 뺨이 정처 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왜 이렇게 예뻐, 너.”
예쁘게 헐떡이는 그녀를 보며, 윤제는 질벽을 긁던 손끝을 갈고리 모양으로 오므렸다. 그러곤, 자신만이 아는 정확한 지점을 찾아 쿡, 쑤셔 박자 질구가 머금은 손가락을 끊을 듯 강한 수축을 해댔다.
“응, 아흑!”
안에서 주르륵 쏟아져 나온 흥분액이 윤제의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그럼에도 흥분에 달뜬 그녀는 엉덩이를 흔들며 더더욱 윤제에게 매달려 안겼다. 아무래도 이젠 한계였다.
“후.”
괴로운 듯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윤제가 자연스럽게 콘돔이 들어 있을 글러브 박스로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무언가 불길한 자각이 머리를 스쳤다.
콘돔.
콘돔이 없다, 씨발.
오늘 아침 급하게 바꿔 탄 새 차엔 미처 콘돔 박스를 채워놓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점검.
이미 실핏줄이 벌겋게 곤두선 눈동자에 억누르지 못한 짜증이 스쳤다. 고개를 설핏 들어 올린 그녀가 멈칫한 그를 향해 동그란 눈을 치켜떴다.
“하아, 왜요?”
물기까지 어릴 만큼 흥분에 겨운 눈망울이 눈앞에서 아른댔다. 미칠 지경이었다.
이 얼굴을 보고 어떻게 멈추라고.
한 달을 내 그렇게 참고 참았는데, 더 이상의 인내는 불가능했다.
윤제는 이를 아득 물며 그녀의 양쪽 엉덩이를 확 움켜쥐었다. 그러곤 발갛게 벌어진 질구에 제 성기를 단숨에 푹 찔러 박았다.
“아흣!”
눈이 돌았다. 터뜨릴 듯 아래를 조여오는 빠듯한 감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이 뜨겁고 좁은 정은채의 구멍이 제 성기를 삼키다 못해 완전히 녹여버릴 것 같았다.
윤제는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내리며 가장 깊은 곳, 자궁구까지 뭉툭한 귀두를 처박아 짓이겼다.
흥분에 젖은 눈매에 시뻘건 열기가 그득했다.
“흣, 윤제, 씨, 콘돔…. 하아!”
평소와 다르게 더 적나라해진 감각을 눈치챈 은채가 허리를 들추며 그의 가슴을 짚었다.
“없어. 그냥 하자.”
윤제가 말캉한 귓불을 씹으며 낮게 뇌까렸다.
“하아, 그럼 집에, 가서 해, 으읏!”
“알잖아. 이 상태로 집까지 못 가.”
잘록한 허리를 감은 단단한 팔뚝이 뱀처럼 그녀를 조여들었다. 덕분에 슬쩍 빠져나갔던 기둥이 한 번 더 막다른 곳을 강하게 찧었다.
“으응!”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품으로 쏟아지듯 안기는 여자의 몸이 발발 떨려댔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고정하듯 움켜쥔 채 허리를 거칠게 추어올렸다. 그 강한 힘에 풍만한 젖가슴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하, 깊게, 너무, 하지! 으응, 아! 아!”
“싫어. 더 더 더 깊게 쑤실 거야.”
“흐, 응! 너!”
“그래, 너. 너 지금 엄청 조인다고. 씨발, 돌겠네.”
그는 인상을 훅 구기며 스퍼트를 높였다. 버거운 감각을 견디다 못한 은채의 고개가 절로 꺾이기 시작했다.
상반신을 숙인 윤제는 출렁이는 젖가슴을 한입에 베어 물고 빨았다. 그와 별개로 빠르게 몰아붙이는 허리 짓은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퍽, 퍽.
둔부와 골반이 맞닿으며 젖은 살갗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은채를 옭아맨 채 성기를 욱여넣는 윤제의 움직임이 악착같았다.
어찌나 격렬하게 추삽질을 해대는지 그 반동에 무거운 차체가 다 삐걱대며 들썩거릴 정도였다.
“하, 아! 흐응!”
성기에 꿰뚫린 여린 몸이 박자를 잃고 위아래로 콩콩, 튀었다. 흉악한 기둥이 부풀어 오른 내벽을 긁고 헤집으며 쳐들어올 때마다, 흥분에 젖은 그녀의 교성이 스타카토로 끊어졌다.
“하으, 으! 천천, 히, 응!”
윤제는 그녀의 애원을 귓등으로 들으며 우악스러운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제발, 아! 읏! 응! 윤, 제, 아!”
“응, 은채야.”
“나, 아흐, 앙! 아!”
“그래. 나도 기분 존나 좋아, 자기야. 흣.”
광포하다 못해 다소 무식하게까지 느껴지는 허리의 힘과 달리 유유자적하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더없이 은근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리며 타액이 고인 그녀의 발간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치아를 내밀어 깨물 듯 흡입하자, 기둥에 뚫린 내벽이 경련하듯 조여들었다.
“안에, 하읏, 하지, 마! 으응.”
절정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한 은채가 다급히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얄밉도록 잘생긴 눈매가 윙크라도 하는 듯 그녀를 향해 찡긋거렸다.
“하으, 안, 돼! 으응! 안에, 하면!”
“왜, 안에 싸면 자기 원하는 임신 할 수 있는데.”
“하, 윽! 하지 마, 임신, 하읏! 나쁜 놈아!”
은채가 마구 도리질을 치며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워 물어댔다. 왜인지, 외려 그게 더 배덕감을 자극해 미칠 것 같았다.
정은채가 안 된다고, 안에 싸지 말라고 애원하면 할수록 더더욱 안에 싸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후우, 씨발.”
콘돔 없이 마찰하는 뜨거운 살갗에서 찐득한 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순간 사정감이 훅 치밀어 올랐다.
한계에 다다른 윤제의 미간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뭉툭한 귀두 끝이 자궁 입구를 쿵, 찍어 누르는 순간, 벼락이 이는 듯한 강렬한 절정이 뇌리를 관통했다.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곤두서고,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경련했다.
“아! 아, 아앙!”
그는 제 어깨 위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여자의 목덜미를 달래듯 쓰다듬어 내렸다.
꿀렁꿀렁, 토해낸 정액이 좁은 질 내부에 고여 흐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녀의 안에 자신의 체취를 남겼다는 만족감과 포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분이었다.
“하아, 하….”
쌔액, 쌕.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여자의 얼굴이 자못 울상이었다.
“하, 안에다 하면 어떡해요!”
“어떡해, 그럼. 당장 급해 돌겠는데.”
윤제는 발그레, 달싹이는 뺨 위에 쪼듯이 뽀뽀했다.
“왜. 임신할까 봐?”
“싫다면서요, 아이 갖는 거.”
“그렇긴 한데.”
그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다정하게 넘겨주며 속삭였다.
“나 아무래도 묶을까 봐. 안에 싸니까 존나 더 좋다.”
보란 듯 강직된 성기를 쳐올리는 허리 짓이 무람없었다. 덕분에 빈틈없이 꽉 맞물린 구멍 안에서 찔끅찔끅, 음탕한 소리가 샜다.
“그만해요.”
은채는 눈을 흘기며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픽, 입꼬리를 올린 그가 그대로 그녀를 들어 올리며 길쭉한 제 음경을 빼냈다.
그러자 마개가 뽑힌 듯, 질 내에 한가득 고여 있던 정액이 주르륵 쏟아졌다.
팔을 뻗어 휴지를 가져온 윤제가 그녀의 질구와 가랑이 사이에 묻은 정액을 꼼꼼히 닦아 냈다. 그러다 불현듯 움찔거리는 음부 사이로 손가락을 불쑥 밀어 박았다.
“뭐, 뭐 하는…! 하!”
“가만있어. 구멍 속에 내 정액이 이렇게 흥건한데. 이거 빨리 안 빼내면 임신한다, 너.”
영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손가락을 두 개나 밀어 박고 이리저리 찔러가며 왕복운동을 해대는 진짜 의도가 너무나도 뻔했다.
은채는 힘 풀린 주먹을 쥐어선 그의 가슴에 솜방망이 같은 펀치를 이리저리 날려댔다.
“하아, 하지 마요, 으읏.”
그럼에도 아래를 휘젓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더 가속을 더해 갔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잘 뻗은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렸다. 결국 그의 장난을 견디다 못한 은채가 도리질을 치며 그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만하라구, 으응! 나쁜 새끼, 야, 흣!”
“응. 나 나쁜 새끼야. 개새끼라고도 해줘. 자기 욕하니까 너무 섹시하다. 여기도 때리면서 욕 해줘. 응?”
윤제는 반대쪽 뺨까지 밀며 그녀의 손바닥에 콧날을 비벼댔다. 그러다 불쑥, 그녀의 손가락을 입속으로 집어삼키며 쪽, 쪽, 사탕을 빨 듯이 빨아대는 거였다.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흣, 미쳤…! 우읍…!”
오물거리는 입술이 그대로 삼켜지며 그녀의 뒷말은 자연스레 완벽한 묵음이 되었다.
열기로 후끈한 차 안, 다시금 시작된 찐득한 마찰 소리만이 요란할 따름이었다.
* * *
은채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 있던 혜진에게 돌아와 커다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여기요.”
“아, 드디어 받네. 은채 너 아니었으면 난 벌써 제 명에 못 살고 죽었다, 화병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혜진을 보며 은채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윤제가 몇 날 며칠을 미뤄두고 서명하지 않았던 천 회장의 주식 증여 서류였다. 은채가 한참을 설득한 끝에 천 회장이 준 건 십원한 장 안 받을 거라던 윤제의 완고한 고집을 마침내 꺾은 거였다.
“후, 암튼 진짜 진짜 고마워. 나 갈게, 쉬어.”
“벌써 가시게요? 들어 오셔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어머님이 어제 좋은 차 보내주셨는데.”
“아냐. 바빠서 얼른 가 봐야 해. 담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같이 밥이나 먹자.”
그대로 돌아서려던 혜진이 불현듯 휙 고개를 돌리며 은채의 얼굴을 살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안색이 창백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천윤제 못지않게 눈썰미가 남다른 혜진이었다. 은채는 제 뺨을 슬쩍 감싸며 작게 답했다.
“아…. 아픈 건 아니고요, 미열이 좀 있긴 한데….”
“열이 나?”
화들짝, 목소리를 높인 혜진이 은채의 이마에 툭,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어머, 진짜네? 약은? 약은 먹었어?”
“아뇨, 아직.”
“병원 갈래? 내가 가는 길에 태워다 줄까?”
“아니에요. 병원 갈 정도는 아니고, 그냥 좀 머리랑 몸이 무거운 정도예요.”
“감긴가? 요즘 여름 감기 한 번 걸리면 무섭더라. 조심해. 얼른 약 먹고, 더 아프면 꼭 병원 가고. 응?”
“네. 그럴게요.”
꼭 엄마 같은 혜진의 잔소리에 은채는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혜진이 집을 나서고, 다시 홀로 남은 은채는 곧장 침실로 향했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요 며칠, 또 그에게 사납게 시달리느라 몸이 버거워하는 건가 싶었다.
침대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어쩐지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 * *
일부러 멀찌감치에서 택시를 세워 내린 은채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수영장 건물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느새 무겁던 몸도 한결 가벼워지고, 미열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집에만 있을 때보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걸으니 외려 컨디션이 빠르게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집에만 있을 체질은 못 되는 건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수영장 입구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다소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쭈뼛쭈뼛, 은채에게로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 수영장 들어가세요?”
“네.”
은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기 직원이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제 남편이 선수여서요. 남편한테 뭣 좀 가져다주려고 왔어요.”
은채는 손에 들린 작은 도시락 가방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지난주부터 재활 훈련을 재개하며 마지막 올림픽 준비를 시작한 윤제를 위한 샐러드 도시락이었다. 이제 곧 여름 방학이 끝나면 챙겨 주고 싶어도 못 챙겨 줄 테니, 이런 닭살 돋는 짓도 미리 실컷 해두려는 거였다.
은채의 대답을 들은 노인이 말을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그게…. 아가씨한테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너무 미안해서….”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실은 내 손주 놈도 이 안에서 훈련 중이거든요. 혹시 아가씨가 들어가서 내 손주한테 이거 좀 대신 전해 줄 수 있을까 해서요. 아침에 분명히 도시락 챙겨 가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이 녀석이 깜빡했는지 놓고 가서는….”
그녀는 퍽 미안한 듯 멋쩍어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수영장 앞을 지키고 선 직원들 때문인 듯했다. 국가 대표 선수들이 훈련 중인 곳이라 출입증이나 관계자 확인 없이는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긴 했다.
“미안해요, 아가씨도 바쁠 텐데. 아무래도 내가 괜한 부탁을….”
“어르신,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들어가실래요?”
노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은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세요, 저랑.”
그녀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며 은채를 따랐다.
은채는 입구의 직원에게 출입증을 내밀어 보이며, 노인을 제 일행으로 확인시켜 줬다.
가볍게 입구를 통과한 노인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은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아가씨. 덕분에 손주 점심 먹일 수 있겠네.”
“별말씀을요. 근데, 손주분도 국가 대표 선수인가 봐요.”
“아유, 아니에요. 아직 초등학생이라.”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기다란 복도 끝을 빠져나간 두 사람은 널따란 수영장으로 빠져나가는 입구 앞에 섰다.
“아이고, 저기 있네요.”
찰박, 찰박!
물살을 가르는 요란한 소리에, 절로 시선이 꽂혔다. 빠른 스트로크로 빠르게 치고 나가며 야무지게 터치 패드까지 다다른 아이가 튀어 오르듯 물 밖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 앞엔 초시계를 든 손성욱이 환호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이의 기록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어? 은채 씨?”
무심코 고개를 돌린 손성욱이 은채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윤제 지금 안에서 도수 치료 중인데 곧 나올 거예요.”
“네. 여기서 기다릴게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리는데, 할머니에게서 도시락을 건네받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예요?”
“아, 요즘에 윤제 놈이랑 치고받는 꼬맹이.”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은채의 눈동자에 작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한결! 이리 와봐.”
손성욱이 아이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제야 은채는 윤제에게서 얼핏 들었던 그 이름을 기억해 내며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쥐뿔 가진 것도 없는 어린놈이 버릇도 없고 싸가지는 더 없다고 했던가. 그러면서도 천윤제는 아이의 훈련 비용이며 병원비 일체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했다. 하여간 아이들 코칭도 희한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이 아이인 모양이었다.
“아, 네가 이한결이야? 천윤제 선수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으나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 난 천윤제 선수 와이프야. 반갑다, 이한결.”
한결은 그제야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아이고, 아가씨가 우리 코치님 부인이었네요.”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가워했다. 그녀는 곧바로 들고 있던 또 다른 봉투 하나를 손성욱에게 내밀었다.
“이거, 별건 아니지만 코치님들 드시라고 싸 온 건데….”
“아유, 뭘 이런걸 다! 잘 먹겠습니다, 어르신!”
손성욱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의 도시락을 덥석 받아들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은채를 향했다.
“감사합니다. 우리 한결이가 코치님들 덕분에 이런 좋은 수영장에서 훈련도 하게 됐어요.”
“별말씀을요. 손주분 실력으로 얻은 기회일 텐데요.”
은채는 윤제를 대신해 제게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저 아직 훈련 시간 안 끝났어요. 할머니 가세요, 이제.”
한결은 싸늘하게 세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끊었다. 그러곤 다시 수영모를 챙겨 들며 레인을 향해 가차 없이 돌아서 가 버리는 거였다.
할머니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한결이 훈련하는 거 구경하다 가셔도 되는데.”
손성욱의 말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다들 바쁘신데 괜히 방해나 되지. 모쪼록 우리 한결이 놈 잘 좀 부탁드립니다, 코치님.”
“걱정 마세요. 보시다시피 무지 잘하고 있습니다. 기록이 뭐 매일 쭉쭉 단축되고 있어서 천 코치나 저나 앞으로를 더 기대하고 있고요. 하하!”
“감사합니다.”
손성욱의 대답을 들은 노인은 몇 번이고 감사 인사와 묵례를 하며 돌아섰다.
“잠깐만요, 한결이 할머님!”
돌아서는 그녀를 따라간 은채는 제가 가지고 있던 수영장 출입증을 덥석 쥐여 주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다음에 또 한결이 보러 오실 때 입구에서 보여 주시면 언제든 들어오실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이걸 나한테 주면….”
“전 또 발급받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가져가세요.”
“아유, 고마워서 어쩌나.”
은채는 선한 얼굴의 노인을 바라보며 동그랗게 웃었다.
그녀를 배웅하고, 다시 손성욱 옆으로 돌아온 은채는 가만히 레인을 가로지르는 한결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남다른 자세와 스피드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물건이죠, 쟤.”
“네. 그런 거 같네요.”
은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손성욱의 말에 동조했다.
“엄청나요. 꼭 천윤제 어릴 때 보는 것 같달까.”
손성욱이 웃으며 혀를 찼다.
“뭐, 더러운 성질머리까지 똑같은 게 큰 문제긴 한데.”
그의 단번에 알아들은 은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둘이 지긋지긋하게 처싸워요. 똑같은 것들끼리 아주 가관이라니까요. 중간에서 내 등만 줘 터지고, 어휴.”
손성욱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저 멀리서, 존재감 뚜렷한 남자가 뚜벅뚜벅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은채를 보자마자 자석이라도 붙은 듯 그녀의 손을 맞잡은 그는 손성욱을 향해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뭐, 인마! 우리 별말 안 했거든?”
그 짜증 섞인 안광을 인지한 손성욱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단번에 은채에게로 시선을 돌린 윤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
“이거 주려고 잠깐 들렀어요.”
손에 걸린 작은 통이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뭔데? 설마 그거 도시락이야?”
“응. 샐러드 좀 만들어 왔어요.”
“자기야. 귀찮게 뭘 이런 것까지 해왔어. 밤에 피곤했을 텐데 낮잠이나 자면서 쉬고 있지.”
어쩐지 낯부끄러운 소리에 은채가 볼을 붉히며 손성욱의 눈치를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진 윤제가 입술을 내려 동그란 이마에 입을 촉, 맞췄다.
결국 견디다 못한 손성욱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저 미친 새끼.”
* * *
윤제와 은채, 그리고 손성욱과 한결까지. 네 사람은 커다란 휴게실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사이좋게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도란도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치료받으면서 졸았다며? 웬일이냐, 네가 낮잠을 다 자고?”
“어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별 그지 같은 꿈을 꿔 가지고.”
“꿈? 뭔 꿈?”
“어떤 개새끼가 은채한테 찝쩍거리는 꿈이요.”
예상치 못한 육두문자에 흠칫 놀란 은채가 마주 앉은 한결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얼굴만 한 헤드셋을 착용한 한결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놈이었는데?”
손성욱이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 평소 미신을 맹신하는 그는 자칭 타칭 해몽 전문가이기도 했다.
“강서준.”
“강서준? 연예인 강서준?”
따가운 시선에 은채가 설핏 고개를 돌려 윤제의 눈을 마주했다.
며칠 전, 함께 뒹굴며 영화를 보다 강서준 때문에 한바탕 목소리를 높였던 기억이 생생했다. 강서준을 향해 무심결에 내뱉은 은채의 감탄사 한 마디가 싸움의 발단이 된 거였다.
천윤제는 어떻게 제 앞에서 다른 새끼 얼굴을 보고 잘생겼다고 할 수가 있느냐며 아이처럼 서러워하다, 종국에는 강서준이 천화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란 사실을 알아내곤 혜진에게 전화까지 걸어 말도 안 되는 개진상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 끔찍했던 순간을 떠올린 은채가 눈을 흘겼다.
“강서준이 너한테 보석까지 갖다 바치면서 작업 걸더라. 개새끼, 이쁜 건 알아선.”
천윤제는 그게 다 실제였다는 양 이까지 으득 갈았다.
“그니까, 강서준이가 은채 씨한테 보석을 줬다고?”
코치님까지 왜 이러시나. 은채는 꿈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두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만들 하시고 식사나….”
“바로 조져놨어야 했는데, 하필 그때 깨서는.”
진심으로 읊조리는 그를 보며, 윤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 보니 씩씩거리느라 잠 못잤구만, 이거.”
손성욱이 혀를 차며 웃었다.
“야, 원래 그렇게 유명한 연예인 나오는 꿈이 길몽인 거야, 인마. 씩씩댈 게 아니라 가서 로또라도 샀어야지. 게다가 뭘 받기까지 했으면 더 좋은 거라고. 이런 꿈은 보통 태몽으로도 해석을 하는….”
멈칫.
생각 없이 말을 늘어놓던 손성욱이 싸늘한 공기를 느끼곤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성욱을 쏘아보는 윤제의 눈빛이 싸늘하다 못해 냉랭했다.
“야야, 한결아. 먹고 있냐? 좀 팍팍 좀 먹어. 어?”
궁지에 몰린 손성욱이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괜스레 한결을 나무랐다.
한편,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건 윤제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은채의 동공에 또한 미묘한 그림자가 졌다.
이상하리만큼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 * *
두 줄.
두 줄이다.
너무나도 선명한 두 줄의 빨간 선을 바라보며, 은채는 얼굴을 푹 감싸 쥐었다.
혹시나 해서 사 온 세 개의 테스트기에서 모두 두 줄의 선이 나왔다.
아무래도 임신이 분명해 보였다.
“하…. 미치겠네.”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임신은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기에 꽤나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윤제도 아이를 내켜 하지 않는 데다, 아직은 나이도 어리고, 각자 해야 할 일도 많으니 이후 천천히 그를 설득하고 난 뒤에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서 다음 학기부터 대학원 공부를 하며 지도 교수의 연구팀에 합류해 논문 준비까지 시작할 계획까지 세웠다.
한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임신이라니.
일순 자그마한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났다. 이대로라면 기껏 계획했던 일들을 모두 다 수정하고, 취소해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마지막 올림픽을 앞둔 그의 훈련 일정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저는 그런 것 따위가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너나 애새끼들이라면 딱 질색하는 거 알지.’
‘난 아이 같은 거 필요 없어. 정은채 너만 있으면 돼.’
문제는 천윤제였다. 천윤제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은채는 짐짓 두려웠다.
창백해진 얼굴로 욕실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곧장 윤제를 찾아 나섰다.
* * *
윤제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추리닝 하의만 입은 채 풀업 머신에 매달려 있었다. 힘줄이 바짝 솟은 팔을 힘차게 굽힐 때마다 커다란 덩치의 몸이 가뿐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잔뜩 성이 난 근육들 위로, 투명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 몇 번쯤 상하 운동을 했을까.
문간에 선 은채의 인기척을 귀신처럼 캐치한 그가 지체 없이 머신에서 튀어 내려왔다.
“자기야, 나 운동 다 했는데.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을까? 회사 앞에 자기 좋아하는 불고기전골….”
“나 할 말 있어요.”
“할 말? 뭐?”
윤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창백한 얼굴에 어쩐지 수심이 그득했다.
“뭔데? 무슨 일이야?”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그가 은채를 재촉했다. 그제야 그녀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테스트기를 불쑥 내밀어왔다. 고개를 내린 윤제의 눈썹이 깊숙이 들썩였다.
“이게 뭐야?”
“나 임신했어요.”
“……어?”
“우리 아이 생겼다고.”
잠시 멍해진 얼굴의 윤제가 새카만 눈동자만 깜빡이며 섰다.
“그러게 왜 콘돔도 없이 안에다, 하, 내가 하지 말라 그랬죠.”
은채는 그날을 확신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몇 번이나 콘돔 없이 사정해댔던 그날을.
천윤제는 두 줄이 선명하게 뜬 테스트기를 받아들며 그대로 얼음이 됐다.
그렇게 잠시간 바라보다 비로소 빨간색 두 줄의 의미를 인지했을 때였다. 불현듯 심장이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뛰어댔다.
정은채와 자신의 아이라니. 이 여자의 안에 제가 뿌린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다니….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건 약간의 걱정과 두근거림, 그리고 알 수 없는 희열이 섞인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저 머리가 멍했다. 꼭 아무 사고도 하지 못하는 돌덩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 윤제의 반응을 살피며, 은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쩐지 딱딱하게 굳은 천윤제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서러운 기분이었다. 아무리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막상 임신 사실을 알리면 그래도 한 번은 기뻐하는 내색은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나 그는 여전히 아이를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어떡해요? 나 다음 주에 당장 개강인데, 학교는 어떻게 다니고, 교수님한텐 뭐라고 말하냐고요.”
별안간 울컥한 마음이 훅, 치밀어 오른 그녀는 원망의 탄식을 쏟아 냈다.
“하……. 어떡해, 진짜….”
이마를 감싸 쥔 잇새에선 긴 탄식이 새어나갔고, 흥분해 발개진 두 뺨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달싹였다.
그러자 멍하니 굳어 그녀를 응시하던 윤제의 미간이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쩐지 묘하게 심사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제 아이를 가진 게 이렇게나 절망할 일인 건가 싶어서.
“너 왜 이렇게 싫어해?”
“싫은 게 아니라 당황스러운 거죠, 계획에 없던 임신이니까.”
“아이 갖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야?”
“하, 그거야….”
은채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던 남자의 매끈한 얼굴에 묘한 균열이 일었다. 그게 꼭 인상을 쓰는 것처럼 보여, 은채는 발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윤제 씨야말로 아이 필요 없다면서요. 평생 아이 낳지 말자면서? 그렇게 애 갖기 싫어하는 사람이 왜 임신을 하게 해선…!”
결국, 토끼 같은 눈망울에 물기가 그렁그렁 고이더니, 이내 투명한 물방울이 후드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은채.”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래요! 솔직히 난 계속 아이 갖고 싶었어요. 윤제 씨 닮은 예쁜 아이 낳아 기르고 싶었다고. 근데 윤제 씬 여전히 그게 그렇게 싫어요? 하,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내냐고, 이 나쁜 놈아!”
순간, 만감이 교차한 은채의 음성이 삐끗 갈라져 나갔다. 서러운 두 뺨이 파르르 떨려댔다.
사랑한다, 앞으로 우리 아이 잘 키워 보자, 그런 말은 못 해줄망정 이렇게 충격받은 얼굴을 할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난 이 아이 낳을 거고, 혼자라도 예쁘게 키울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싫어해도 어쩔 수…! 흐읏!”
그때, 불시에 팔을 뻗은 남자가 은채의 허리를 그대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그녀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받쳐 안고는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겹쳐왔다.
미끄덩한 혀와 함께 정제되지 않은 호흡이 사납게 닥쳐들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은채가 그의 가슴 근육에 손가락 끝을 세워 넣었다.
그럼에도 윤제가 입술을 떼어 낼 줄을 모르자 은채는 항의하듯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쳤다. 하지만 되레 옭아맨 남자의 팔뚝에 힘줄만 불거져 올랐을 따름이었다.
약이 바짝 오른 그녀는 결국 제 입속을 헤집는 그의 혀를 쿡, 이로 깨물어버렸다. 제법 따끔한 감각에 그의 콧등이 찡긋, 일그러졌다.
“하, 진짜…!”
“누구 맘대로 애를 혼자 낳아 키워?”
“왜요! 그것도 싫어요?!”
“나는 왜 빼놓냐고, 네 남편이 난데.”
“니가 싫다며? 애 낳기 싫댔잖아! 애 같은 거 딱 질색이라며!”
은채는 퍽 억울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윤제는 다시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와 안았다.
“아니. 마음이 바뀌었어. 나 애 좋아. 정은채 너 닮은 아이면 더 좋고.”
“하, 나쁜 놈이, 뭐라는 거야 진짜!”
황당해진 은채가 윤제의 가슴을 거세게 밀어내며 바둥거렸다. 물론 그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대충 이렇게 넘어갈 생각 하지 마요. 난 어떻게든 오늘 결판을…!”
“은채야.”
돌연 진지해진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멈칫한 은채는 그에게 손목이 쥐어 잡힌 채로 그렁그렁해진 눈망울을 치켜떴다.
짙은 색의 눈동자가 곧고 뜨겁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껏 진중하고 따뜻한 기색을 담아.
“정은채.”
급기야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는 손길에 덜컥 말문까지 막혀버렸다. 은채는 가쁜 호흡을 삼키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나 기분이 좀 이상해.”
“…….”
“우리 아이가 생겼다는 게, 내가 애 아빠가 된다는 게 잘 안 믿겨.”
천윤제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너 힘들 거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한데, 또 이상하게 설레는 거 같기도 하고…. 봐봐.”
그 말을 직접 확인이라도 시켜 주겠단 듯, 은채의 손을 맞잡은 그가 자신의 가슴 위에 그녀의 손바닥을 올려 쥐었다.
쿵쿵쿵.
확연, 남자의 심박이 여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이게…, 왜, 이렇게….”
“왜긴 왜야, 존나 좋다는 뜻이지.”
고개를 깊이 숙인 그가 하얀 살결에 입술을 내렸다. 은채는 홀린 듯 스르륵 눈꺼풀을 감았다.
이마와 눈두덩이, 그리고 입술을 따라 쪼듯이 뽀뽀를 해 내려가는 보드라운 감촉에 파르르, 몸이 떨렸다.
“나 안 싫어. 우리 아이 생긴 거, 너무 좋아, 정은채.”
가장 듣고 싶었던 그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남자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게, 벅찼다.
“얼른 병원 가자, 자기야. 가서 우리 애 어떤지 확인해야지.”
쪽, 그가 한 번 더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나직한 음성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은채는 젖은 뺨을 몇 번이고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