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ccessor of the Fallen World RAW novel - Chapter 207
205. 나를 기다리는 세상
광검제와 만남 이후 나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후방에서 전장을 관망했다. 1분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변이체들은 인간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교대로 전선을 사수하며 열심히 싸웠다. 하루, 이틀, 사흘째까지는 1차 방어선의 성벽에 도달한 변이체는 한마리도 없었다.
나흘째가 되자 변화가 생겼다. 조금 더 강한 변이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골포의 일제사격과 마법사들의 포화를 뚫고 성벽에 도달한 변이체가 나타났다.
물론 변이체는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곧바로 썰려 나갔지만, 전장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성벽에 도착하는 변이체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긴 쪽은 마법사였다. 아무리 교대로 싸운다고 한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피로감을 느끼는 마법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스테이시가 조금 더 힘을 내면 될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말렸다. 아직 스테이시가 힘을 써야 할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법사들의 화력이 약해지는 만큼 기사들의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마침내 처음으로 사상자가 생겼다. 근위 기사단 소속의 5성 기사 한명이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첫 번째 사상자가 나온 쪽은 의외로 제멜아크가 아니라 라이브러쉬였다. 그러나 제멜아크 방면에서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자칼이 손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명의 참전으로 전황이 달라질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초월급의 기사라면 가능하다. 자칼이 전투에 나서는 것은 몇분 남짓이었지만 초월급 기사에게 그 정도 시간이면 아직 강하지 않은 변이체 정도는 수천을 썰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전황은 점점 어렵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변이체는 점점 강해지는데 인간은 점점 약해진다. 전 대륙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해도 처음과 같을 수는 없다.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낮아진다.
7성 이상의 기사들이 전면에 나서 싸운다면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땐 악수다.
그래서 나는 미리 자칼에게 3차 방어선까지 무너진다면 제멜아크 진영을 버리라고 말을 해두었다. 제멜아크의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전멸을 하는 것보다 자칼 하나가 살아남는 게 인류가 승리하기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2주가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십 혹은 수백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럼에도 인류의 1차 방어선은 유지되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힘이 집중되고 있었다. 미처 합류하지 못했던 귀족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아직도 도착하고 있었고 각 왕국을 관통하는 보급선에선 끊임없이 천골포의 전쟁물자가 보급되고 있었다.
제멜아크쪽에서는 이미 두 개의 전투 비행선이 추락하는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10대가 넘는 비행선이 보급되었다. 양쪽 세계의 모든 것이 투입되는 물량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갈 때쯤 제멜아크 진영의 1차 방어선이 드디어 무너졌다. 그러나 이것은 제멜아크의 천재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전략적 후퇴이자 함정이었다. 전선이 뒤로 밀렸지만, 수십만이 넘는 변이체들을 손쉽게 전멸시켰다.
1차 방어선이 버티는 사이에 3차 방어선까지 밖에 없던 방어선은 4차를 넘어 5차까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대승에 취할 겨를은 없었다. 점점 강한 변이체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인류에게 점점 더 불리한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지켜봤다. 하루에 수백의 전사자가 나오던 것이 수천으로 바뀌고 눈앞에서 비행선이 추락하고 안면이 있던 기사들이 변이체의 바다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사기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포에 못 이겨 도망치는 탈영병이 생기고 그 와중에서도 물자를 빼돌리는 부패관리들이 적발되고 수송되고 있는 전쟁물자를 약탈하는 도적떼들이 나타났다.
라이브러쉬 왕국은 후방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왕세자가 직접 나서서 부패관리와 도적 떼를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목을 베여 효수하여 기강을 세웠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비슷한지라 제멜아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제멜아크의 왕세자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었다. 그 작은 차이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멜아크 진영의 2차 방어선이 뚫리며 남부의 창이라 불리던 에반트 후작이 전사했다. 큰 전력을 잃게 된 제멜아크 진영은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자칼이 출진 빈도를 늘렸지만, 그것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3차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2차 방어선이 버틴 시간보다 훨씬 짧았다.
변이체들의 수준이 제법 많이 올라왔다. 그러면서 쏟아지는 변이체들의 숫자 자체는 많이 줄어들었다. 저쪽이라도 무한하게 변이체들을 찍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쪽에서도 슬라이트가 출진 빈도를 늘리기 시작했다. 후방으로 빠져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스테이시도 다시 전선에 나섰다. 라이브러쉬 진영은 그렇게 유지가 되고 있었다.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어졌다. 모든 생산력을 전선에 집중하다 보니 전선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일반 백성들의 삶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전선에 가족을 보낸 사람들은 전사 통지서를 전달하는 집배원이 자기의 집에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집배원은 매일 수백곳의 집을 들르고 있었다. 대륙 전체가 매일 슬픔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러나 불평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도 잘 숨어있는 마신교도들이 나서서 마신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며 선동을 시도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어둠의 암살자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제멜아크 진영은 8차 방어선까지 밀려있었다. 이제 이쪽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총지휘관인 쿼런틴 공작이 잠을 줄여가며 오러홀이 터지도록 최전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다른 7성 이상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이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마법사들은 반 이상이 전사했고 거기에는 제멜아크의 탑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종 무기는 생산되어 전방으로 전달되고 있지만. 그것을 조종하거나 사용할 숙련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라이브러쉬 진영도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5차 방어선까지 밀려있었고 이쪽에서도 근위기사단장 지글러 후작이 전사했다.
사정은 이쪽이 조금 낫지만 한계에 닿았다는 것은 비슷했다. 그러나 통로에서 나오는 변이체들은 이제 상급에 가까워졌다. 이제 교주가 나올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알고 있겠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버틸 수 있을까?”
슬라이트와 나의 대화였다. 슬라이트의 얼굴도 많이 상해있었다. 이제는 초월급의 기사에게도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슬라이트가 이 정도이니 자칼의 상태는 더욱 좋지 않을 것이다.
천골포에 쓸려나가는 변이체는 이제 없다. 천골포 수십발을 집중적으로 맞아서야 겨우 하나를 잡아낼 수 있을 뿐이다. 마법사들의 집중 포격도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발을 묶을 수조차 없다. 그렇게 뚫고 들어온 변이체는 기사들이 몸을 던져 막아내고 있었다.
“있을까가 아니라 무조건 버텨야지.”
“그런데 너는 이길 수 있겠냐?”
어차피 모든 승부는 나와 교주의 싸움에서 끝이 난다.
“있겠냐가 아니라 이겨야지.”
내가 죽거나 교주가 죽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남을 뿐이다.
내 말대로 인류는 버티고 버텨냈다. 하루에 수천 명이 전사하는 혈투가 매일 이어졌다. 후방에서 보급되는 신병도 물자도 한계에 도달했다.
그 와중에 제멜아크 진영은 정말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최후의 보루로 남은 8차 방어선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격렬히 저항했다. 평소보다 몇 배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무너지면 눈앞의 저 괴물들이 가족과 친구들을 유린하게 될 것을 알기에 제멜아크의 병사들은 목숨을 아낌없이 던졌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원군이 나타났다. 엘프의 숲에 있어야 할 엘프들이 나타나 제멜아크 진영을 돕기 시작했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엘프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귀신같은 활 솜씨도 그렇지만, 그들이 부리는 정령술은 방어에 최적화된 것이었다. 그렇게 균형이 맞춰졌다.
전쟁이 시작되고 8개월과 며칠이 더 지났을 때의 새벽,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왔구나.”
드디어 저 통로에서 놈이 빠져나왔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8개월 동안 지켜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녀석은 아마 모를 것이다.
놈이 나타난 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내 말소리를 들었는지 같이 사용하는 막사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슬라이트가 일어났다.
“뭐냐?”
“놈이 왔다.”
초월자가 되었음에도 피곤이 덜 풀렸는지 잠이 덜 깨 있었던 슬라이트의 눈이 커졌다.
“전군 후퇴시켜라. 아주 멀리. 자칼에게도 알려주고.”
나는 그 말을 남기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직선으로 바로 가진 않았다. 전장에 있는 변이체 놈들을 남김없이 학살한 후에 놈에게 도착했다.
교주는 부상 없이 완전한 모습이었다. 어디 한군데 모자란 상태로 왔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평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평온해 보이는 눈빛 너머로 느껴지는 광기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빅터”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인데도 교주는 나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대했다.
“그렇군. 얼굴이 좋아졌네?”
나도 엄밀히 따지면 초면은 아닌지라 반갑게 인사를 해줬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딱히 도덕심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화가 필요해? 그럼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은데.”
“그렇군.”
양쪽 모두 어떤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아스트로퍼도 그렇고 아무리 슈바르거트라고 해도 이제는 나의 출력을 받아낼 수 없고 교주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인류의 생존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교주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두 번째 공격은 교주가 들어 올린 손에 의해 막혔다. 머리도 없는 놈이 잘도 공격을 막아냈다.
큰 동작도 아니었다. 나는 공격했고 교주는 공격을 막아냈을 뿐이지만, 그 여파는 그렇지 않았다. 충격파로 인해 땅이 뒤집어지고 하늘이 갈라졌다.
슬라이트에게 모두 후퇴하라는 말을 남긴 것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쪽 진영이 지금쯤 정신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교주의 머리가 재생되어 튀어나왔다.
“주먹이 꽤 맵군.”
교주의 말장난을 상대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생명이 너무 많다.
단지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내가 상대해본 그 어떤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껴지기에는 아임샤르의 강림체보다 몇 배는 강한 것 같았다.
거대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와 교주의 싸움은 대륙 어디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양쪽 전선은 수백킬로 밖으로 후퇴했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잡은 수치였다. 보통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충격파에 몸이 터져 죽는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이 그 경계에 머물며 싸움의 결과를 기다렸다.
싸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아임샤르에서도 한 달을 넘게 싸웠다. 싸움이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을 때 교주도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 거대한 뱀 형태의 괴물이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한 달이 넘어갔지만,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백중세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교주는 수십번이나 나를 회유하려 했지만, 내가 변이체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피체둘라의 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싸움이 시작된지 두 달이 넘어가기 시작할 때쯤 아주 미세한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마주한 벽을 넘어서게 된다면 광검제처럼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넘어선다면 교주를 쉽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인간으로서 싸우고 인간으로서 죽는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비록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 변이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이 시작된지 딱 100일이 되는 날, 승자가 정해졌다. 아직 누군가 땅에 쓰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교주 모두 결과를 알고 있었다.
털썩
나는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좋은 싸움이었다.”
대가리를 빳빳이 든 채로 교주가 말했다.
“그래, 여한 없이 싸웠다.”
정말 지겹도록 싸웠다. 인외의 싸움이었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 났다. 전생에 평생 도망치기만 했던 삶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정말 지겹게 싸웠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수백미터짜리 거대한 뱀이 웃었다. 그 모습이 꽤나 기괴했다.
“다음은 없어 이 새끼야.”
나는 팔을 휘둘렀고 거대한 뱀의 머리가 잘려서 땅에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했지, 마지막 일격을 날릴 힘이 없다고 하진 않았다.
세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끝났다.
그리고 나의 싸움도 끝났다.
*
50년 후
전쟁이 끝난 후 백년가약을 맺었던 나의 반려 아이브 공주가 곱게 늙은 할머니가 되어 누워있었다.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행복을 함께 했다.
장례식에는 두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모두 참석했다. 10명이 넘는 손주들도 있었다.
정말 많은 조문객이 찾아왔다. 무려 대륙을 구한 영웅이자 하네스 공국 왕비의 장례식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에는 나의 오랜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너도 이제 홀아비구나.”
슬라이트가 이죽거렸다. 녀석은 몇 년 전에 이미 반려를 먼저 보냈다. 슬라이트의 반려는 어느 후작가의 평범한 영애였다. 평범해서 좋았다나? 나중에는 그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불평하기도 했었다. 평범했던 영애인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보니 어찌나 대가 센 여인이었는지 슬라이트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또 싸우는 거야?”
30대까지만 해도 왜소했는데 성장이 끝이 없는 것인지 어느새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거대해진 자칼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자칼의 한쪽 팔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자칼은 전쟁 때 한쪽 팔을 잃었다. 그 이후로 내내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거 스테이시가 의수를 붙여준다고 하지 않았냐? 왜 아직도 너풀거려?”
“만들어주긴 했다. 그런데 영 불편하더라고.”
“지금 개량 중이에요.”
내 옆에서 갑자기 솟아난 스테이시가 말했다. 스테이시는 과거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처럼 온갖 아티팩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미 스테이시 시리즈가 200번 대까지 나왔다.
“너희들은 은퇴 안 하냐?”
나는 이미 은퇴해서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줬지만, 친구들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지, 아버지만큼은 해 먹어야지.”
슬라이트는 아버지인 에인프라흐 공작과 똑같이 전국을 방랑하는 것을 즐겼다. 덕분에 나이가 찼는데도 가문을 물려받지도 못한 장남이 고생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문의 전통이라고 봐야 할까?
“엘프들이 나 아니면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다.”
전쟁 후에 엘프는 부분적으로나마 인간과 교류를 시작했다. 전쟁에서 엘프들과 함께 싸운 전우였던 자칼은 그것을 독점했고 에르하트 영지는 예전처럼 엘프의 숲을 지키기만 하는 변두리가 아니었다.
“물려주고 싶은데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요.”
과거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그랬듯이 스테이시도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레이나 스테이시나 희대의 천재다. 그런 천재가 계속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치킨을 앞에 놓고 술을 한잔하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잘 지내라. 너라면 어디서도 잘 지내겠지만.”
슬라이트는 쿨하게 사라졌다.
“언제 어디서라도 너는 내 친구야.”
자칼은 그 거대한 덩치로 나를 으스러지듯이 껴안아 주고는 돌아섰다.
“이건 새로 만든 발명품들이에요.”
“안 사”
스테이시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다가 제지당했다. 마탑의 예산 부족을 이런 식으로 해결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100년 할부로 해줄게요.”
스테이시는 물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사라졌다. 100년 후에 살아있을 자신이 있는 건가? 나야 살아있겠지만, 스테이시는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자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눈치는 챈 것 같았다. 하기야 알고 지낸 지가 60년이 넘어가는데 눈치를 챘겠지.
*
장례식을 마치고 함께 가꾸었던 정원의 한켠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장남인 마르코가 다가왔다.
“아버지”
이 호칭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왜 그러냐?”
“떠나려 하십니까?”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눈치가 아주 빠르다. 어째 다른 것은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으면서 이런 것만 물려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래”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갈까? 떠나려고 했지만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다. 지구로 가면 광검제의 잔소리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아임샤르에서도 구원자니, 뭐니 하면서 나를 교주 취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피체둘라는 이런 미래를 내다보고 다시 보자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통로를 열었다. 교주의 시체에서 능력을 흡수하면서 통로 능력은 한단계 더 진화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이 저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세상”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