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juniors RAW novel - Chapter 2
02
서윤은 영안실 앞,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 온 탓에 할머니는 버릇처럼 삶을 정리하는 듯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근래 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서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면 잘 빤 옷들은 어디에 정리했는지 메모로 남겨 두고, 서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가득 해 냉장고를 채워 놓았다.
앞날을 예감한 할머니의 행보에 그동안 혼자 남겨진 삶을 생각해 본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만이었다.
우려가 현실이 된 상황, 서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력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그녀는 바닥에 내려놓은 할머니의 겉옷을 할머니라도 되는 양 꼬옥 끌어안았다.
손녀를 향한 사랑이 유별났던 할머니였다. 사고로 자식 내외를 잃은 할머니는 손녀에게 모든 사랑을 쏟았다.
마지막까지도 할머니는 옥수수를 삶아 주겠다고 성치 않은 몸으로 횡설수설하셨다. 그것이 그저 손녀딸을 위한 마음인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교 후 집에 오면 할머니는 푹 삶겨 탱글탱글한 알맹이가 드러난 옥수수를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당신은 알이 영 시원치 못한 옥수수를 차지하고선 그게 더 맛있다 하며 미소를 짓곤 하셨다.
할머니는 당신이 키워 낸 자식과 손녀만큼은 잘 익은 옥수수 알맹이처럼 튼실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서방 복 없어도 자식 손녀 농사만큼은 풍년’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자신의 행복보다 손녀딸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던 할머니, 그래서 서윤은 아픈 할머니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아낌없이 주는 할머니의 존재는 남들이 생각하는 가족 그 이상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나 남은 모든 것을 잃은 슬픔이 감정의 소용돌이가 되어 점점 그녀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움찔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영혼까지 무기력해진 서윤은 그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더 밀어 넣을 뿐이었다. 뒷덜미까지 느른하게 문지르는 손은 크고, 단단하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서서히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아니, 사실은 어디라도 기대어 울고 싶은 마음에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머리를 쓰다듬던 사람이 바닥에 무릎 한쪽을 꿇고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 바람에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할머니의 겉옷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이 손은, 이 품은, 이 향기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만나 함께 지내 온 친구.
강선하.
“선하야.”
“그래.”
선하의 한마디 대답만으로도 서윤은 울컥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알아.”
“우리 할머니가….”
그가 그녀의 등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울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다짐했는데, 차라리 울어 버리라고 내미는 그 손길에 벽처럼 쌓여 있던 것이 와르르 무너졌다.
결국 눈물이 흘렀다. 참고 있던 것이 한 번에 터져 눈물이 턱 끝에 모여 대롱대롱 고였다. 한참을 그는 그녀의 울음이 가실 때까지 말없이 품어 주기만 했다.
훌쩍임이 잦아들고 있었지만 쉬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가 천천히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였다.
“정서윤.”
“…….”
“나 안 볼 거야?”
조금씩 드는 얼굴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눈 주위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녀는 숨을 가다듬는 데도 다소 시간이 걸렸다. 선하는 계속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진정이 되도록.
“우리 할머니….”
“그래.”
말을 잇지도 못하고 다시 그녀의 눈가를 따라 눈물방울이 흘렀다. 그가 그녀를 찾는 사이 대체 얼마나 울음을 참고 있었던 건지 손끝에서 느껴지는 눈꺼풀이 뜨끈뜨끈할 정도였다.
말없이 그녀를 당겨 와 다시 품에 안았다. 그녀의 뺨을 그의 가슴팍에 붙이고 그 반대쪽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놓아 달라는 듯 밀어내는 미약한 힘이 느껴졌지만 이내 손이 힘없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일단 너 눕기라도 하자. 할머니 곁엔 내가 있을 테니까. 이러다 쓰러져.”
“여기 있어야 돼. 내가 있어야 해. 아, 안 가. 못 가, 흑.”
“이리 와.”
눈에 띄게 떨고 있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차츰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선하는 그녀를 안아 들고 장례식장 안에 딸린 방으로 향했다.
“너 좀 쉬어야 해.”
“난….”
“할머니 잘 보내 드려야 하잖아. 일단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말 들어.”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이불 위에 눕혔지만 불편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선하는 한참을 그녀의 등과 허리를 어루만져 긴장을 풀어 주는 데 집중했다.
비로소 진정이 된 서윤이 부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구원을 바라는 연약한 짐승의 눈빛과 같은 그것에 매료된 그는 문득 서윤을 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다리를 벌리고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자신을 묻는 상상. 씨발, 남자 트라우마로 쓰러진 적도 있는 그녀를 상대로, 욕지거리가 절로 나온다.
미친 새끼. 하긴 정신을 뺏긴 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면서 왜 고집을 피우는 거야.”
“…….”
“영정 사진 앞에서 쓰러질래?”
“…….”
“정신 차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란 건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잖아.”
어젯밤처럼 창 너머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례는 사흘 동안 치러졌다. 선하는 사흘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켰다.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고, 지낼 곳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올라가라고 한사코 거절했다.
“곧 따라 올라갈게. 정리할 게 좀 있어서 그래.”
결국 선하는 회사 일 때문에 더 지체할 수 없어 먼저 떠났다. 사람을 따로 보내 차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마저도 서윤은 극구 사양했다. 혼자 기차 여행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고 설득해 겨우겨우 그를 서울로 돌려보냈다.
선하가 떠나고 그 자리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덩치가 크고 머리를 바짝 깎은 사내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수금일인 건 알지?”
“네. 여기요. 나머지는 내일 중으로 드릴게요. 돈 받을 곳이 있어서요.”
말없이 봉투를 받아 든 남자가 서윤을 보며 물었다.
“서울로 갈 생각이야?”
“네.”
“그래. 돈벌이는 서울이 낫지. 나 너무 원망하지 마라. 돈 빌리고 도망간 네 할아비가 죄지, 너나 나나 무슨 죄냐. 너 성실하니 곧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서윤은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게 된 지도 꽤 됐다. 탓한들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엔 법망을 피해 자행되는 불법적인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뭔가를 직접 보증하고 빌린 적이 없더라도 억울하게 갚아야만 비로소 해방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서울 가는 거면 가자. 데려다줄 테니까.”
“아뇨. 괜찮아요.”
“왜, 내가 널 어떻게 할까 봐?”
“…….”
“내가 가방끈이 짧아도 사람이기를 포기하진 않아. 그럴 거였으면 진작 어떻게 해 봤겠지. 그러니까 같이 가. 어차피 지금 올라가는 길이야. 가는 곳까지는 몰라도 서울까진 데려다줄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서윤은 짐을 챙겨 남자와 함께 서울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늘 다시 가고 싶었던 서울인데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서윤은 꿈에 부풀어 서울행 기차를 타고 대학에 갔던 그 시절이 새삼 떠올랐다. 이제는 아득하고 오래된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차창 너머로 펄럭이는 모래바람이 불었다. 이제 곧 여름인데 바람은 가을처럼 많이 불었다.
서울 강남에 도착하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구내식당에서 일했던 아주머니였다. 그때 친해진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아주머니!”
“왔어?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일할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주머니가 조건이 좋은 곳이 있다고 연락을 해 왔다.
“그런데 옆엔 누구?”
“아.”
지혁. 할아버지가 돈을 빌린 사채업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남자였다. 상부의 명령으로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그 빚을 갚게 하고 있었는데 회수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서윤의 본가로 내려와 다달이 그녀에게 돈을 받으러 오는 남자기도 했다.
“그럼 난 간다. 다음에 보자.”
지혁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려 했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선하였다. 서윤은 이제껏 혹여 선하가 지혁과 마주칠까 늘 불안했다. 지금은 선하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해서 주머니에 다시 넣어 버렸다.
아주머니는 서윤에게 집 주소가 적힌 돈 봉투를 내밀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는 남자의 집인데 일이 바빠 거의 집엔 들어오지 않으니 가서 가사도우미로 일만 하고 나오면 된다고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특별히 집주인 남자에게 그녀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고 한 달 치 월급을 선불로 받아 그녀에게 주었다. 꽤 높은 금액인 데다 당장 구멍 난 빚을 메꿔야 하니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조건이었다.
“오늘부터라고 했으니까 어서 가 봐. 특별히 얻어 준 자리니까 잘하고.”
“그런데 집이 비어 있으면 낮에 일을 해도 되는데 왜 저녁 타임에 와서 해 달라는 걸까요?”
서윤은 마음에 걸리는 하나를 물었다. 집은 낮에 비는데 왜 저녁 타임에 사람을 쓰는 걸까.
“그 집 사정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시간대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니 맞추는 거지.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리고 이것저것 다 따지면 좋은 자리 못 가.”
“…네.”
“진짜 요새 이만한 자리 없다. 힘내, 서윤아.”
아주머니 말대로 모든 게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다. 어딜 가서 당장에 구하기 힘든 조건이란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감사하다고 아주머니께 고개 숙여 인사한 서윤은 그길로 종이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다. 흔히들 말하는 부촌이었다. 아주머니에게 받은 카드 키로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집이 상당히 넓어 청소하는 데 애를 좀 먹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라면 아이가 없는 집이라 뒤따라 다니며 치울 것은 없었다. 혼자 사는 집인데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렇게 깔끔하지 않은 남자로 판단했다.
주인이 없는 집은 조용했다. 서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바닥이 매끄러웠다. 부엌으로 향한 서윤은 식탁 위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이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에 적힌 일거리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선하였다. 받을 수 없었다. 장소도 장소지만 지금 그와 전화 통화를 했다간 간신히 긍정의 힘으로 이겨 내고 있는데 코앞에 마주한 현실을 확 직면한 기분이 들까 봐서였다.
서윤은 울리는 핸드폰 전원을 끄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없어 북적거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집을 비운 데다 전혀 집안일을 하지 않았는지 주방 안엔 설거짓거리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서윤은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고무장갑을 꼈다. 씻어도 씻어도 줄어들지 않는 설거짓거리와 청소로 쉴 틈 없이 바빴다.
원래 서윤의 집안은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오히려 동네에선 꽤나 잘사는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시며 받은 보험금과 그간 아빠가 사업으로 벌어 놓은 돈만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학 학비를 비롯해 생활비, 할머니의 오랜 간병으로 돈을 쓰고 나중엔 할아버지가 진 빚까지 보태어져 생활이 급격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진 막대한 빚이 결정적이었다.
낮에 간병을 하고 밤에 할머니가 주무시면 일을 나가 번 돈을 모아 빚을 갚아 나갔다. 이제 남은 돈만 해결하면 이 생활도 끝낼 수 있다.
그래도 그녀는 황금 돼지 위에 앉아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던 살아생전 엄마의 태몽을 믿었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니까. 여태까진 좋은 친구들도 만났고, 할머니 곁에서 사랑도 듬뿍듬뿍 받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 이번 일은 그저 인생에 있어 하나의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분명 더 좋은 일들이 있으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힘을 내기로 했다. 웃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긍정의 힘, 그것을 믿었다.
서윤은 남은 집안일을 끝내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잠시 은행에 들러 지혁에게 송금한 후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시텔로 가 방 하나를 얻었다.
보증금 없이 싼 방을 찾다 보니 술집과 식당들이 빽빽한 골목과 가깝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 지내기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직 낯선 고시텔 침대에 앉아 매트리스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데 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보낸 돈을 잘 받았다는 연락이었다.
사채업자의 명령으로 수금을 하러 다니긴 하지만 아주 뼛속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윽박지르며 돈을 갚으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었다.
할머니가 평생 목숨처럼 지켜 온 집을 팔아 단번에 갚아 빚을 청산해 버리라 했지만, 한 번에 빚을 갚는 대신 이자를 더 내고 다달이 갚는 쪽으로 해 집을 지킬 수 있게 잘 말해 준 것도 지혁이었다.
서윤은 미리 봐 놓은 문화 센터에 강사 이력서를 넣었다. 저녁 타임에 가사도우미 일을 하게 되었으니 낮 시간엔 은공예 자격증을 이용해 강사를 할 생각이었다.
어릴 때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를 좇아 읍내에서 하는 은공예 강의를 들었었다. 강사가 재능이 보인다고 해서 특별히 그녀에게 심화 클래스까지 강의를 했고, 덕분에 자격증까지 따 놓았는데 꽤 유용하게 쓰였다.
손으로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해 할머니께도 만들어 드리고 친구들에게도 만들어 주곤 했다. 남은 빚을 다 해결하면 좋아하는 공예 강의에 더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금방 갚겠지. 그럴 거야. 그럴 것이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친구들과도 더 많이 만나고 선하와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서윤은 선하가 준 졸업 앨범을 꺼냈다. 처음 전학 와서 소각장에서 몰래 담배를 피울 때도 그러더니, 사진에서도 여전히 참 잘생겼다.
선하에게 졸업 앨범을 부탁했을 때 그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선하는 어떤 모습으로 졸업을 했을까. 참 많이 궁금했다. 서윤은 사진 속의 선하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러다 금세 웃음이 걷혔다.
때가 되면 당당하게 네 앞에 나설 수 있을까. 나도.
다음 날 점심이 되자마자 서윤은 공예 교실이 있는 문화 센터로 향했다. 바로 방문을 해 달라는 담당자의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서윤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문화 센터에서 선하가 있는 사무실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회사 일로 바쁜 선하와 부딪칠 일이 있을까 싶어 괘념치 않기로 했다.
“사실 실력 좋은 분들이 많이 지원하시긴 해요. 이력서만 가지고는 조금 고민이 되기는 했지만 직접 만드셨다는 작품 사진을 보니 더 믿음이 가더군요. 큰 작품들은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작품을 만들어서 사진까지 보내시는 분은 처음 봤거든요. 꽤 오래전부터 만드신 것 같기도 하고, 잘하실 거라는 생각도 들고 금방 적응하실 것 같아요. 시간대는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이에요. 괜찮으세요?”
“네.”
가사도우미 일과 상충되는 부분이 없어서 서윤은 흔쾌히 대답했다.
문화 센터를 나오자마자 전화가 왔다. 어제 그렇게 오는 전화를 무시했는데도 선하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락을 해 왔다.
더 이상 피했다가는 오히려 더 의심만 살뿐더러, 선하 성격에 직접 그녀를 찾으러 강원도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선하의 목소리가 조금 지친 것처럼 들렸다.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그놈이랑 같이 있느라 그래?
“그놈?”
– 네가 좋아한다는 그 남자 말이야.
뭐가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는지 선하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장님’ 하고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선 사무실인 것 같았다.
– 너 지금 어디야.
“나 여기 문화 센터야. 공예 클래스에 강사 이력서 넣었거든. 근데 너 이 시간에 안 바빠? 여보세요? 선하야?”
잠깐 수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몇 번이고 핸드폰을 귀에서 떼 액정을 보았지만 여전히 통화 중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바쁜가 싶어 전화를 끊고 뒤돌았을 때였다.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남자는 분명 강선하였다.
“너 여기 어떻게….”
“점심이나 먹으러 가.”
“내가 점심 안 먹은 건 어떻게 알고?”
“안 먹었으면 다행이고. 먹었어도 나 먹을 때 옆에 있어.”
미간을 좁힌 그가 걸려 오는 다른 전화를 대충 받고서 앞장섰다.
그가 데려간 곳은 꽤 괜찮은 한식당이었다. 창문을 통해 보는 정원도 서울 한복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고즈넉하고 좋았다.
자리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무색하지 않게 그럴듯한 식사가 차려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감추고 싶은 것이 생기니 그와 함께 수없이 했던 식사 자리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이 자리가 어색했다.
딱히 즐거운 말이 오가지 않는 식사 시간은 불편했지만 서윤은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다. 지금 순간에 자연스레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기계처럼 음식물을 씹어 대며 선하를 힐끔 바라봤다. 그는 일이 바쁜 건지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오는 전화를 받았다.
“많이 바쁜가 보네.”
“너 집 어디에 구했는데.”
그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핸드폰을 옆으로 던지고 질문을 했다. 잠시 고민하다 주소를 알려 주었다. 둘러대 봤자 집 정도는 쉽게 그에게 들킬 거라 생각했다.
솔직하게 알려 줘야 별다른 의심을 안 할 것도 같았다. 술집 근처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많은 원룸과 고시텔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다른 의심은 하지 않을 거라는 순진한 확신이 들었다.
집 주소를 알려 주자 살짝 인상을 쓰며 그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생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일단 더 알아보고 나중에 좋은 곳으로 옮길 거야.”
“당장 옮겨. 더 좋은 곳 구해 줄 테니까.”
“아냐. 지금은 거기에 있고 싶어. 그렇게 지내기 불편하지도 않고. 월세도 이미 다 줬어.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할래.”
때마침 직원이 다가와 새로운 음식을 놓아 주었다. 서윤은 그쪽에 관심이 있는 척 멋스럽게 접시에 담겨 나온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집 알아봐 주기로 한 건 아니고?”
“그런 거 아냐. 먹자. 식겠다.”
“그 남자, 너 서울로 간 건 알아?”
말을 돌리려 했지만 선하는 집요했다. 원래 집요하고 끈질긴 건 알고 있었지만 유독 오늘은 더 그랬다.
차라리 인정해 버리고 나면 좀 덜 그러겠지 싶었다.
“그래. 서울로 온 거 알아.”
“어떡하냐. 둘이 좋아 못 살다가 이제 떨어져서.”
차게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서윤은 곧장 말을 돌렸다.
“그러는 넌 좋아하는 여자 없어? 그래서 이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나랑 밥 먹어?”
“있어.”
“…어?”
“좋아하는 여자, 있다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선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서윤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 있겠지. 당연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고, 그녀와 달리 그는 자유를 억압당한 몸도 아니었다.
한 회사의 CEO이기도 하고, 직원들도 많고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당연한 건데 왜 충격으로 와닿는 걸까. 선하는 친구로서 그녀의 곁에 영영 남아 있어 줄 거라고,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을 했을까.
“회사… 사람이야?”
“아니.”
대답은 칼 같았다. 확실했다.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그의 감정은 확고한 것이었다. 회사 사람이 아니라면 회사 밖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건데.
“대학 동기?”
“어.”
“아….”
대학 동기였구나. 누굴까. 미림이? 성미? 희정이? 떠오르는 아는 얼굴은 많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어울려 지냈던 친구가 아닐 수도 있다. 교양 수업을 듣다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녀가 학교를 나온 후 입학한 후배일 수도 있다.
음식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선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메인 음식으로 나온 소고기는 분명 부드럽고 혀에 닿기만 해도 육즙이 흐르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그랬구나.”
콜록!
서윤은 고기를 씹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자리도, 강선하도 불편한 데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마음까지 들었으니 이 자리가 편할 리가 없었다. 콜록거리며 목을 더듬자 선하가 냅킨을 내밀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지. 빚을 다 갚고 떳떳하게 세상에 나올 때까지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선하가 그때까지 혼자로 지내진 않을 테니까.
음식은 분명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맛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돌던 입맛이 달아났다.
“그럼 이제 문화 센터에서 일하는 거야?”
“응. 출근하래.”
“잘됐네.”
음식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더 먹지 않느냐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식욕이 없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아직 서울 적응이 잘 되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어색한 변명도 덧붙였다.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아니. 지하철 타면 금방이야.”
“데려다줄 테니까 있어.”
“괜찮….”
말도 끝내기 전에 그가 사라졌다. 정말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선하가 차를 끌고 나타났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조수석에 올라탔다.
다소 어두컴컴한 골목 안까지 차가 진입했다. 기어이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선하는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들어가 볼게.”
“정서윤.”
쥐고 있는 핸들을 툭툭 두드리며 그가 서윤을 불렀다.
“응.”
“누군지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말을 하다 말고 멈춘 그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내내 정면만 보고 있던 그가 서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그에게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그런데 서윤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만큼 비참한 게 어디 있을까. 선하도 마음이 불편해질 게 분명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에 서로가 불편해지는 건 싫다. 그가 알아선 안 된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나도 네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안 물어보잖아. 그냥 서로 모른 척하면 안 돼?”
“걱정되니까 그렇지. 여태 그런 놈 없었어? 학교 다닐 때도 너 어떻게 하려는 나쁜 새끼가 얼마나 많았어. 집까지 쫓아와서는 너한테 만나 달라고 지랄했어, 안 했어.”
“…넌 나 말고 너 좋아한다는 그 여자나 신경….”
“그러다가 대학 때처럼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대학 때 술자리를 빙자해 그녀에게 손을 뻗쳐 온 질 나쁜 선배 하나가 있었는데 그녀를 끌고 모텔로 들어가려고 했었던 것을 선하가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선하는 처음부터 질 나쁜 놈이니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를 했지만 고작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얼마나 남자에 대해 많이 알았겠는가. 더구나 선배니 다짜고짜 멀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쁜 놈이긴 했지만.
그때 모텔로 그녀를 끌고 가려는 남자를 사정없이 패고 엉엉 우는 그녀를 달래 준 것도 선하였다.
서럽게 우는 그녀를 달래면서도 아주 남자란 것은 좆을 달고 있는 한 절대 믿어선 안 된다고 못이 박히도록 말을 했었다.
선하는 그 선배를 들먹이며 자주 남자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주곤 했었다. 한눈팔다간 저런 질 나쁜 놈에게 당한다고 아주 심심하면 잔소리를 늘어놓았었다.
“…그런 질 나쁜 선배랑은 달라. 그러니까 신경 쓰지….”
“그걸 그렇게 확신해?”
하아, 그가 한숨을 쉬며 핸들 위로 올려 두었던 손을 내렸다.
“설마 그 새끼가 너 만지기라도 했어?”
“어?”
“넌 나 아니면 다른 남자가 건드리기만 해도 힘들어하잖아. 그 남자는 괜찮았어?”
자꾸 이상한 걸 묻는 그는 답을 듣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눈을 무섭게 떴다.
선하와 스킨십 아닌 스킨십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대놓고 뭔가를 한 적은 없지만 체육 시간에 자주 몸을 부딪치기도 했고 그녀가 아프면 배를 만져 주거나 이마를 만져 주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위경련으로 아파할 때 그를 업고 보건소로 향한 것부터가 스킨십이었다. 아주 급박한 상황이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그리 흘러서 그 사실은 잊고 있었다.
“좋았어.”
“뭐?”
“떨리기도 하고, 포근하기도 하고. 남자라서 그런가, 든든하기도 하고….”
“잤어?”
사람 하나 잡아 죽일 듯 노려보는 그의 눈을 피해 서윤이 입을 닫았다.
“너… 잤어? 그 새끼랑?”
그가 전에 없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면서, 친구랍시고 신경 써 주는 건가. 예전 학창 시절처럼 질 나쁜 남자라도 만날까 봐서? 그래서 안 되는 건 알지만 괜한 심술에 부드럽지 못한 말이 나갔다.
“안 잤지만 자고 싶어. 그게 뭐, 어때.”
“…후, 그 남자가 네 다리를 벌리는데 가만히 있겠다고? 나 아니곤 남자가 조금만 몸에 손대도 경기를 하는 애가 지금, 네 다리를 벌리겠다는데 가만히 있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너도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랑 자고 싶잖아. 나는 그러면 안 돼?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까 너도 네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나 챙겨.”
서윤은 조수석 문을 열고 나와 방으로 올라왔다.
질투라도 하는 건가. 내가 그 여자를? 이제 와 질투를 해 봤자 뭐, 어쩌겠다고. 서윤은 단단히 마음을 고쳐먹으려 애썼다.
강선하.
선하는 전학을 오자마자 다른 남자들과는 좀 다른 희한한 면이 있었다. 반상회에서 그와 만나 친해지기 전까진 둘은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학교와는 담을 쌓은 듯 다녔고, 서로 야간 자율 학습 땡땡이를 치다 여러 번 마주쳤다.
그런데 그는 또 공부도 곧잘 했다. 집도 근방이라 하교하다 마주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다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았고 자연스레 친해졌다. 그래도 그뿐이었다. 서윤은 그를 믿지 않았다. 남자라는 것들은 다 똑같으니까.
아마 그날, 소각장에서 그가 친구들과 하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 그리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가 전학을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어가던 때였다. 주번이었던 서윤이 쓰레기통을 들고 소각장으로 향하다 그곳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학생들을 목격했다.
그중엔 강선하도 섞여 있었다. 불량 학생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담배를 물고 있는 폼은 제법 익숙해 보였다. 그의 주위에 있는 시시껄렁한 남자들이 농담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야, 나 유현정, 김나리한테 동시에 고백받았다. 부럽지? 얘도 좋고 쟤도 좋은데 어쩌냐. 씨발, 한 년은 젖통이 죽이고, 한 년은 히프 봤냐? 골반이 끝내주잖아. 아, 같이 사귀고 번갈아 잘까? 둘 다 날 좋다고 하는데 씨발. 둘 중 하나를 어떻게 버려.”
쓰레기통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쁜 놈. 소각장에서 쓰레기들이 타는 매연에 코가 매웠다. 콜록, 기침을 속으로 삼키느라 코끝이 빨개졌다.
따악!
“악! 씨발!”
무언가가 둔탁하게 얻어맞는 소리가 났다. 뒤통수를 가격당했는지, 젖통이 어쩌고, 입에 담기도 싫은 말을 하던 남자가 뒷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그리고 선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씨발, 미쳤냐? 왜 때려.”
“네 진심은 그렇게 싸구려야? 상대방 마음이 걸레짝이냐고. 네 좆대로 취급하게. 상대 마음을 한번이라도 생각은 해 봤냐? 하긴 그럴 만한 정신머리가 있었으면 이렇게 살지도 않지. 걸레도 너보단 깨끗하겠다. 그건 빨면 깨끗해지기라도 하지.”
“뭐? 저 새끼가….”
“가까이 오지 마. 더러워서 냄새나.”
선하는 야간 자율 학습을 땡땡이치던 그때처럼 어슬렁어슬렁 소각장을 벗어났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고 싶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가슴 어딘가가 먹먹해지고 두통이 몰려오는 것처럼 머리가 조여들었다.
할머니가 찐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 동네에 나눠 주라고 하시면 선하네도 그 코스에 넣어서 들렀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친해지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친해졌다. 지금, 오늘까지도.
서윤은 고시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었다. 맞은편 골목에서 그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선하가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면서 왜 자꾸 친구인 나를 신경 써. 그 여자를 신경 써야지. 너 좋아하는 여자 있잖아. 너도 그 여자랑 자고 싶잖아. 네 말대로 너도 그 여자 다리 벌리고 싶….
서윤은 하던 생각을 멈췄다. 더 이상 생각 말자. 서윤은 얼른 가라는 식으로 선하에게 손을 내젓고선 창문을 다시 닫고 이불 위로 누웠다. 조금이라도 쉬어야 일해 주기로 한 집에 가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윤은 너른 집 안의 걸레질을 끝내자마자 빨아야 할 이불들을 꺼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이불들을 빨고, 세탁기에 넣을 수 없는 옷감들은 손빨래를 했다. 그리고 비싼 옷들은 전부 세탁소에 맡겼다. 내내 빨래를 하다가 서윤은 꺼 둔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한번 켜 볼까 하다 접었다.
“정서윤 씨?”
낯선 목소리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서 있는 베란다 유리 너머로 회색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보였다. 서윤은 재빨리 나와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요. 황길호입니다. 내 이야긴 들어서 아시겠죠. 일 꼼꼼하게 부탁드립니다.”
“네.”
남자는 상당히 딱딱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첫손에 꼽을 만큼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래도 선하는 친구들과 있을 때는 눈매가 풀어지는데.
시원한 물을 마시려 주방으로 향하는 그를 뒤따라 서윤이 걸어갔다.
“저,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드릴게요.”
“그럼 시원한 물 한 컵 부탁해요.”
“네.”
서윤은 빠르게 냉수 한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짧은 대답과 함께 그가 냉수를 받아 들었다. 이 물컵도 상당히 비싼 거겠지. 서윤은 조심조심히 잔을 다뤘다.
그는 냉수 한 컵을 비우고 서재 쪽으로 향했다. 서윤은 받아 든 컵을 씻고서 남은 빨래를 마저 끝내려 베란다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남자가 불러 세웠다.
“냉장고에 과일 있어요. 복숭아 좀 깎아서 서재로 부탁해요.”
“네. 아 참.”
서재로 향하는 그를 서윤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선불… 감사해요. 사정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감사 인사에 그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이내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서윤은 서둘러 주방으로 가 복숭아를 깎았다.
그간 주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운 것이 있어 서윤은 과일 껍질을 깎는 건 자신이 있었다. 토끼 모양으로 복숭아를 깎아 접시에 담아 들고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었다. 일을 하던 남자가 과일을 가지고 들어온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과일, 두고 가겠습니다.”
접시를 놓고 서윤이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정서윤 씨.”
“네?”
“돈, 필요합니까?”
“네?”
남자가 뜬금없이, 정말로 대뜸 물었다. 서윤은 난데없는 것을 묻는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
선불에 대한 이유를 듣고 싶은 건가. 그녀의 사정을 봐주었으니 물어보는 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고마운 남자기도 했으니까.
“아… 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말하세요. 일만 열심히 하면 선불은 언제든 가능하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호의를 베풀어 주는 남자를 향해 서윤은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서재를 나왔다.
남은 빨래를 모두 마치고 베란다를 나온 서윤은 부들거리는 팔목을 붙잡았다. 무리한 노역으로 관절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비단 손목만이 아니었다. 허리도, 어깨도, 다리도 온몸이 쑤셔 댔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서윤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돌렸다.
일을 끝내고 그녀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원래 내리는 정류장보다 한 정거장 앞선 곳에서 내렸다. 약국에서 파스 하나를 사 갈 생각이었다.
유흥업소가 지천에 깔린 골목을 걸어 약국으로 향했다. 서윤은 걸어가면서 어둠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장 어둡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두운 곳이 있었다.
내내 서서 일을 했더니 발목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서윤은 가다 말고 다리 한쪽을 뻗어 발목을 돌려 보았다.
발목이 얼얼해 발가락까지 뻐근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파스를 붙이고 며칠만 지나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약국 안으로 들어가 파스를 사서 나왔다. 파스를 손목이며 발목, 허리까지 붙이자 시원한 향이 확 퍼졌다.
먹거리 골목엔 술집뿐만 아니라 고기를 먹으러 온 사람들, 호프집에 온 사람들, 회식하러 온 회사원들까지 더해져 복작거렸다.
서윤은 이제 정말 집으로 향해 걸었다. 걸을수록 몸이 무겁게 축축 늘어졌다.
“사장님, 이번 출장은 저희 걱정 그만하시고 편히 다녀오세요. 저희가 잘할게요.”
“아무리 일이 바쁘셔도 건강은 챙기시구요. 요새 너무 무리하셔서.”
“네, 그럴게요.”
서윤은 고막을 통과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홱 돌았다. 회식을 하러 온 건지 직원들과 함께 거리를 걷는 남자는 선하였다.
서윤은 재빨리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인파 속에 숨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빚을 갚기 위해 가사도우미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돈을 대신 갚아 주겠다며 그녀를 동정하고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그런 비참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앞에선 늘 당당한 정서윤이고 싶었다. 밝게 웃고 힘들어도 울지 않는 친구이고 싶다.
“근데 사장님 오늘은 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우리 회식 주 무대는 여기가 아니잖아요.”
서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골목을 걸었다. 좀 더 멀어지고, 선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머니 속에 넣어 놓은 핸드폰은 여전히 꺼 놓은 상태였다.
회사 사람들 중에 있지는 않다고 했으니까 함께 회식을 하러 가는 여자들 중엔 그가 좋아한다는 여자가 없다.
서윤은 불현듯 드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가 좋아한다는 여자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이렇게 누구에게 얽매이지도 않은… 그와 어울리는 여자겠지.
하지만 울지 않기로 했다. 나도 너만큼이나 좋은 여자가 돼서 더 좋은 남자 만날 거야. 그러면 된 거지. 세상에 좋은 남자가 어디 너뿐이게? 분명 아직 찾지 못해서 그렇지 찾아보면 좋은 남자가 분명 어딘가 한 사람쯤은 있겠지.
서윤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기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골목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친구 미림은 속이 상하고 아플 때마다 술을 마신다던데, 그럼 조금 나아진다던데 그게 그녀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우동 한 그릇 주세요.”
서윤은 우동 한 그릇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술잔을 비웠다. 술은 정말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앞으로 녹록지 않을 일상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 가야 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들 일에 지쳐 힘든 거겠지.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하던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 말고도 일에 지친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윤은 저 혼자 힘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상한 위로를 받으며 소주 한 병을 몽땅 비웠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나서야 계산을 하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손목이며, 발목이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고시텔로 돌아왔을 때 집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회식을 마치고 온 것으로 보이는 선하였다. 취한 것 같진 않은데 그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아니, 자신에게서 나는 술 냄새인가. 누구의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새벽 날씨가 쌀쌀했다.
“술 마셨으면 곧장 집으로 가지 왜 왔어?”
“술 마셨어?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친구들 좀 만나고 오는 길이야.”
벽에 기대어 섰던 그가 천천히 서윤의 앞으로 걸어왔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집에서 본 남자도 상당히 키가 컸는데 선하는 그 남자보다 더 키가 컸다. 서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랑 잤어?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오는 거야?”
“…….”
“왜 대답을 안 해.”
아닌 거 알면서도 저렇게 묻는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선하는 그 남자가 강원도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저렇게 묻는 건 심술이었다.
“친구들이랑 만났다 오는 거라고 했잖아.”
비틀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그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목에 붙여진 파스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이 곧장 파스가 붙여진 발목으로 향했다.
“어디, 다쳤어?”
“설거지하다가 삐끗했어.”
“설거지?”
“그래.”
“이렇게 손목이 아플 만큼 설거짓거리가 많아?”
‘이 작은 살림에?’ 그가 가진 말의 의도는 그랬다.
“발목은 또 왜 이런데.”
“응. 청소하다가 그렇게 됐네.”
서윤은 그에게서 손목을 빼냈다. 혹시 눈치챈 걸까. 아니지, 고작 이런 걸로 눈치챌 리는 없다. 그러길 바랐다.
그가 그녀의 티셔츠를 휙 걷어 올렸다. 허리며 등에 붙여 놓은 파스를 발견한 그가 눈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너 이거 왜 이래.”
“그래도 새집이라 오랜만에 집 안 대청소를 했으니까 그런 거지. 이 정돈 아무것도 아냐, 바보야.”
서윤은 빠르게 올라간 티셔츠를 내리고서 말을 돌렸다.
“왜 안 가고 이러고 있어. 어서 가. 나 좀 자다가 출근해야 해. 택시 불러 줄까?”
“친구 누구. 내가 아는 친구들밖에 없잖아, 너.”
정말 술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서윤의 말을 물고 늘어지며 그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너 모르는 친구도 있어.”
“새벽까지 노는 거 싫어하는 너를 내가 몰라?”
“너 취했어. 어서 가. 나 너무 피곤해서 잘래.”
서윤은 휘청거리는 그를 두고 빠르게 고시텔 출입구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으로 올라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이제 옛 친구는 멀리하고 그 친구에게 잘해 줘야지. 왜 마음 이상하게 이 시간에 여기서 기다리는 거야.
서윤은 피곤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신발을 벗었다.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의 밤은 춥고 외로웠다. 그래도 서윤은 힘내서 내일 출근할 준비를 했다. 힘들다고 정말 무너져 버리면 이대로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