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juniors RAW novel - Chapter 6
06
선하는 빠르게 회사를 나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집문서를 줘 버리고 그녀가 모든 관계를 끝내려는 건가. 그렇다면 서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로 가려는 걸까. 선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서윤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서윤이 알려 준 곳으로 향했다. 서윤이 기다릴까 빠르게 차를 몰았다. 가는 중에도 선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회의도 다 끝마치지 못하고 나왔다. 그런데도 그녀를 혹여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불안했다.
분명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그녀가 없었다. 혹시 방으로 올라간 건가 싶어 고시텔 관리인에게 물었지만 방이 비어 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녀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선하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옆 건물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혹시 여기서 기다리던 여자 못 봤습니까?”
“아까 서 있던 그 여자분 말하는 건가? 파란색 티셔츠 입은 아가씨. 어떤 할아버지가 오셔서 데리고 가셨어요.”
“할아버지요?”
“예. 여자분이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도 듣긴 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이 언성이 올라가는 게 분위기가 영…. 신고를 해야 하나 하는데 그분 차 타고 가더라구요. 그 밖의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선하는 아주머니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차로 달려갔다.
***
선하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선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 나섰지만 아는 곳이라곤 없었다. 짐작이 갈 만한 곳이라고는 그녀의 집뿐인데 거기에도 사람이 없으니 도무지 그녀를 수소문할 방법이 없었다.
서울에 연고가 있는 사람도 없다. 미림과 친구들 정도뿐. 닥치는 대로 전화를 해 봤지만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람도,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사람도 없었다.
– 서윤이 갈 만한 곳? 글쎄. 애들 아니면 없지 않아? 걔가 뭐 서울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서윤이 연락 안 돼?
이제 짐작 가는 곳은 한 군데였다. 서울이 아닌 곳.
그녀가 할아버지 차를 타고 갔다면, 서울이 아닌 곳도 가능성이 있다. 학창 시절 그녀와 함께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에서 뛰어놀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던 그곳.
정말 그녀가 거기 있을까.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은 그런 것들을 재고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차는 서울을 벗어났다. 거친 비포장도로를 지나고 밤나무를 지났다. 차를 주차하고 황토색 기와집을 향해 달렸다.
하늘에선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비의 영향으로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시커먼 먹구름이 황토색 기와집을 에워쌌다.
선하는 집을 향해 빠르게 달리다 말고 천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윤이 오리 먹이를 주고 시원한 수박을 잘라 주었던 그곳에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도 들지 않았고 얼굴이라곤 보여 주지 않았지만 선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그녀니까.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 따뜻한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서윤이니까. 도시보다 빛이 많지 않은 시골에서도 그녀가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찾아오던 그 순간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
조금 이르게 나가 문어귀에 기다리고 있으면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품 안 가득 바구니를 안고 나타났었다.
선하는 걸음을 옮겨 완전히 그녀에게로 붙어 섰다. 다가오는 소리에 인기척을 느꼈는지 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을 흘렸던 것인지 말라붙어 있는 눈물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빗방울이 조금씩 톡톡 서윤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선하는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긴장으로 여태 잔뜩 주먹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바닥을 펴 천천히 커다란 손으로 문질러 주었다.
서윤의 시선이 붙잡힌 손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마주하고 있는 두 눈이 오로지 서로만을 향해 있었다.
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눈물 한 줄기를 닦았다. 그녀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윤은 눈물 어린 침을 힘겹게 삼키며 그를 마주 봤다. 그녀가 가장 자존심을 내세운 남자지만 사실은, 사실은 가장 마음을, 아픔을 털어놓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가장 기대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가장 같이 있고 싶었던 남자였다.
“선하야…. 할아버지가 오셨어.”
“…….”
“사채업자들이 그 난리를 피우고, 할머니가 아프실 때도, 돌아가셨을 때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할아버지가 느닷없이 찾아오셨어.”
울컥거리는 눈물을 겨우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어떤 투정도 다 들어 줄 것처럼 그는 느티나무라도 되는 듯 그녀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비가 떨어지지 않는다 했더니 그가 정장 재킷으로 그녀의 머리 위를 막아 주고 있었다.
“다짜고짜 집문서를 내놓으라더라. 할머니 것이었으니까 이제 할아버지 거래, 나한테는 절대 줄 수 없는 거래. 없다고 했더니 도둑년이라며 뺨을 때리시고 주먹질에 발길질을 해 대셨어. 할머니랑 나한테 그렇게 큰 빚을 갚게 하셨으면서 또 돈이 필요하시대. 그래서 다시 사채업자한테 연락을 하셨나 봐. 네가 나 대신 돈 갚은 거 아시고 내가 있는 곳 알아내서 찾아오신 거였어.”
여태 한 번도 이렇게 밑바닥까지 속마음을 다 드러낸 적 없던 그녀가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꾸역꾸역 참아 왔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 집문서가 할머니랑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시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을까. 난 할아버지 원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아버지를 절대 탓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서윤은 말라 있는 입술을 움직여 벌릴 때마다 할아버지한테 맞을 때 찢어진 입술 끝이 아팠다.
서윤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선하의 눈을 보았다. 깊고 짙은, 걱정으로 잔뜩 상기된 그의 눈을.
“선하야.”
힘없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그는 가만히 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는 비를 여전히 막아 주면서.
“나 힘들어.”
서윤은 눈을 감았다 뜨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힘들어.”
‘힘들어’라고 말하는 서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처럼 보였다. 늘 또랑또랑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무기력하게 늘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서 그를 만날 때에도 그녀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밝게 웃었다. 이까짓 피로한 것쯤은 금방 나을 거라고 오히려 걱정하는 그를 위로했었다.
선하는 여전히 무릎을 굽히고 앉은 상태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 그렇게 혼자 울고 있으면 마음 미어져, 알아? 힘든 널 두고 아무것도 못 해 주는 나쁜 새끼가 된 기분이라고.”
그는 서윤을 향해 강하지만 결코 강압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서 안겨.”
안기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단숨에 손을 뻗어 서윤을 그의 품에 안았다. 온몸을 폭 감싸는 너른 가슴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맡아 왔던 익숙한 체향이 났다.
***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배는 안 고파? 너 좋아하는 분식집이라도 들러?”
“아니. 괜찮아.”
고소한 번데기를 먹고, 돗자리를 깔고 앉아 김밥과 과일이 담긴 도시락 뚜껑을 열고 있는 엄마에게로 달려갔던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하얬던 할머니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밥은 할머니가 직접 말아 단무지가 들어 있지 않았다.
단무지를 싫어하는 그녀를 위해 할머니는 단 한 번도 김밥에 단무지를 넣은 적이 없었다. 대신 햄이 두 개나 들어 있었다.
“서윤아, 한복 참 잘 어울린다. 우리 서윤이 대학 가면 기념으로 제일 좋은 걸로 한 벌 사 줄게.”
그렇게 말하며 웃는 할머니가 서윤의 뺨을 쓰다듬었다. 서윤은 햄이 두 개나 든 김밥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5학년 여학생들의 부채춤 순서가 있겠습니다.”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운동화에 잘근 밟힌 한복을 추켜세워 올렸다. 날개가 떨어진 부채를 들고 조그만 심장이 떨려 오는 것을 고스란히 느낀 채 서 있었다.
아아, 동작이 틀릴 뻔했어. 할머니가 보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고 운동화 끝에 밟히는 한복을 발로 살살 치워 냈다.
드디어 꽃봉오리를 만드는 순서였다. 서윤은 중앙에 서서 두 부채를 펴고 꽃봉오리를 만들어 냈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꽃봉오리를 접고 부채를 걷어 낸 서윤은 빠르게 눈으로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서윤은 들고 있던 부채를 떨어뜨렸다. 아직 춤이 끝난 것이 아닌데 부채를 놓쳐서 아이들이 우왕좌왕했다.
곁에 있던 미림이 놀라 멍하니 서 있는 서윤의 손에 부채를 쥐여 주었다. 서윤은 부채를 쥐면서 뒤늦게 나타난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싸우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머리채가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굳고 말았다. 할머니가 만든 김밥이 할아버지의 발에 차여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사정없이 발을 굴렀다. 그 와중에 김밥이 나뒹굴었다. 서윤은 미림이 손에 쥐여 준 부채를 떨어뜨리고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할머… 니.”
안 돼. 그러지 마.
“할머니….”
제발.
“할머니!”
눈을 번쩍 떴다. 순식간에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신 채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한동안 이런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젖어 있는 눈동자를 감았다 뜨며 떨고 있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입술 끝이 달달 떨려 왔다.
“정서윤.”
서윤은 그제야 공간에 낯선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선하의 차 조수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차창을 지나 조수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하의 집 앞이었다.
비스듬히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 주었다. 땀과 섞인 눈물이 묻어 나왔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아 와 허벅지 위로 앉혔다. 가냘프게 끌려오는 몸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서윤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서윤, 힘 풀고 편히 기대.”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서윤은 흐릿한 시야로 그의 어깨를 더듬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온도 높은 남자의 허벅지와 이 품은 낯설지 않았다. 헐렁한 바지가 내려갈까 허리춤을 부여잡는데 그가 그 손을 뗐다.
“몸에 힘 풀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단단하게 자리 잡은 남자의 두 허벅지가 벌어지며 그녀의 자세를 제대로 고쳐 잡았다.
“제대로 앉아. 안아 줄 테니까. 손 똑바로 허리 안고.”
그의 말대로 그의 허리를 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조용히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가 점점 열렬해졌을 때였다.
그가 그녀의 등을 너르게 쓸어 다독이기 시작했다. 맨가슴과 다름없이 얇은 그의 셔츠가 그녀의 젖가슴과 맞닿았다.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뭉개져 비벼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눈치챈 그녀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머릿속이 멍할 정도로 악몽을 꿨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가슴이 멍해져 온다. 그의 셔츠를 꾹꾹 쥐어뜯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나른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왜, 친구끼리 몸 겹치고 있으니까 안 되겠다 싶어? 가만히 있어. 대책 없이 벌리고 쑤시진 않으니까.”
“…야.”
비꼬는 건지, 농담을 하는 건지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귓속으로 들려오는 남자의 심장 소리는 요란한데 농담은 여유로웠다. 물론, 그가 참을 대로 참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했다. 느껴지는 숨소리가 전과 같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친구가 잘 만져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
놀리면서도 그는 더 이상 힘들게 홀로 울지 말라 다독여 주었다.
서윤은 그의 셔츠에 가만히 얼굴을 파묻고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
이틀 정도 선하네 집에 머물렀다. 머물렀다기보다 기절해 있다시피 잠을 잤다. 그간 누적되어 온 피로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에 잠에서 깬 서윤은 대충 몸을 씻어 정돈하곤 선하에게서 소식을 듣고 그의 집 앞까지 찾아온 미림과 친구들을 만나러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정서윤!”
“미림아.”
“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그날 선하가 너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할아버지가 찾아왔었다면서.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지.”
커피숍에 앉아 나란히 커피를 마시고 있던 친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아.”
“괜찮아. 내가 상할 게 뭐가 있어.”
“그래서 지금은 선하 집에 있는 거고?”
후우. 때아니게 터진 한숨에 친구들은 동시에 서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친구야, 뭐야?”
“뭐?”
난데없이 묻는 친구의 말에 서윤은 당황했다.
“솔직히 그렇잖아. 강선하한텐 너 절대 그냥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걔가 여자를 친구로 둘 성격이야? 솔직히 나나 얘들이나 선하한테 무슨 친구야. 네가 우리랑 친구니까 알고 지내는 거지. 안 그래?”
허를 찌르는 미림의 말에 서윤은 커피 잔만 말없이 쥐고 있었다.
“우리도 짐작만 하는 거지 너희 둘 사정을 어찌 알겠어. 근데 너 어디 있냐고, 네가 없어졌다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러는데 난 내 짐작이 맞는 것 같더라.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서윤아. 말해 봐. 여기 다 너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아는 네 친구들이야. 말 못 할 게 뭐야.”
서윤은 그렇게 자신을 편히 다독이는 미림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오랫동안 함께 알아 온 친구들이라 서윤의 마음을 다독이는 데는 도가 텄다.
“있지, 얘들아.”
“응.”
서윤은 다시 깊은 한숨을 하아, 하고 내쉬었다.
오래전부터 좋아했었지만 서윤은 집안 문제 때문에 서울을 떠나 그와는 완전히 멀어졌고, 그는 아버지 사업에 발을 담근 그의 업무 때문에 바빴다.
함께 붙어 지냈던 학창 시절보다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졌다고 하는 게 맞았지만 그래도 지난 시절 가슴이 뛰어 온 그를 잊고 지내 본 적은 없었다.
10대에 만나 이제 20대 중반. 적잖은 시간 동안 친구로 지내 와 그에게 연인으로서 함께하자고 말하기가 머뭇거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시간 지켜 왔던 벽을 허물 수 있을까.
“좋아해. 친구로서도 남자… 로서도.”
이 고백을 하기가 왜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미림은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별거 아닌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하지만 서윤은 전혀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 이런 건 처음이라. 남자한테, 그것도 친구였던 남자한테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둘이 의도치 않게 오래 친구로 지내 왔잖아. 그럴 만해. 우리가 네 입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근데 둘이 사흘 동안 같은 집에서 지낸 거 아냐?”
“어?”
어쩜 좋으냐고 친구들이 꺅꺅거렸다. 둘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지난 사흘 같은 집에서 지내는 동안 별일이 없었느냐고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은 별일도 아닌 서윤의 말에도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파드득거리고 박수를 쳤다.
그냥 내리 잠만 자다가 선하가 우롱차를 내려 준 일, 뒤척이는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준 일. 정말 별것 아닌 일상적인 에피소드일 뿐인데도 담임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처럼 꺅꺅댔다.
“야, 정서윤 그게 사실이야? 둘이 그간 어떻게 참고 지냈대?”
“어?”
“아니다. 너 그동안 할아버지 때문에 남자 근처에 가지도 않은 앤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몰랐던 우리가 바보였나 싶을 만큼 선하가 얘 얼마나 챙겼어.”
친구들은 침을 열심히 튀기며 서윤의 연애사에 집중했다.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봤던 친구들에겐 당연한 관심이었다.
한동네에서 학교를 다니고 어울리며 친구로만 생각하고 지내 온 줄 알았는데 썸을 타고 있었던 사이라니.
“어차피 내 마음도 이러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냥 그러다 말겠지 했거든.”
“선하 일 때문에 얼마나 바빴는지 알아? 근데 너는 자주 만나러 갔잖아.”
친구들은 어느샌가 조금씩 진정이 되어 가고 있는지 들썩거리던 엉덩이를 차분히 의자에 붙이고 앉았다.
“걔 사적인 자리에서 우리랑은 만난 적도 없어, 근데 너는 꼬박꼬박 찾으러 갔다. 여기서부터 게임 끝난 거 아냐? 어떤 남자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그렇게 찾아가. 그것도 꼬박꼬박.”
미림은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서윤을 똑바로 돌아보며 진지한 눈을 했다.
“너도 선하랑 계속 같이 있고 싶지? 친구가 됐든 남자가 됐든 말이야.”
“…응.”
“웬일이니. 그리고 이건 내 짐작이지만 선하는 너 많이 좋아해. 전화 통화할 때 선하 목소리에서 절실하게 느꼈어.”
어느새 바닥이 나 버린 커피 잔만 내려다보고 있는 서윤을 향해 미림이 말했다.
“근데 서윤아.”
“…….”
“우리도 옆에서 지켜봤잖아. 한 가지 확실한 건, 선하는 네 할아버지랑은 달라. 걘 한 사람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야.”
“아이고, 내 새끼, 언제 이렇게 커서 이런 고민도 다 해.”
미림이 다 늙은 사람처럼 웃고는 서윤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하여간 예쁘다니까, 우리 서윤이.’ 그렇게 타일렀다.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먹구름을 보아하니 금방 지나갈 비는 아닌 모양이었다.
서윤은 친구들과 헤어지고 선하의 회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비가 막 퍼붓기 전에 도착해 다행이었다. 사장실로 향한 그녀가 직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서윤이라고 전해 주세요.”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서윤은 곧 자신이 왔음을 다시 알려 달라고 청했다. 들어오라는 직원의 목소리는 경쾌했지만 서윤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예전에 표면적으로 친구였을 땐 이렇지 않았었는데. 친구들은 좋을 때라고 난리가 났지만 사실 웬만큼 서로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그와는 이 미묘한 관계 변화가 낯간지럽고 이상하기만 했다.
직원을 따라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풀어진 모습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늘 단정하게 단추를 채우고 흐트러짐 없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셔츠 앞섶이 조금 풀어진 채 노곤한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고개가 창밖으로 향했다, 다시 그녀에게로 맞춰졌다.
“이 비 오는 데 왔어? 따뜻한 거 좀 줘?”
서윤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선하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평소엔 그냥 뱉었던 말들도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아니. 괜찮아. 그것보다 선하야….”
할 말이 있냐는 듯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분명 하고자 턱 끝까지 맴돌았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미림이랑 애들 만났다가 그냥. 퇴근하는 거면 같이 들어가자고. 집엔 하루만 더 있다 갈게.”
서윤은 평소처럼 그를 대하려 무진장 노력했다. 우리가 늘 해 왔던 대로 친구처럼. 친구처럼. 친구, 친구.
표정 없이 그녀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그가 펜 뚜껑을 덮었다.
바쁜데 괜히 온 건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셔츠 소매를 단정히 접어 탄탄한 팔을 드러낸 선하가 허리춤에 한쪽 손을 짚은 채 사장실 바로 옆에 붙은 준비실로 걸어 들어갔다.
내내 바빴던 것인지 늘 깔끔했던 머리카락도, 유독 흰 그의 피부와 잘 어울리는 옅은 갈색의 머리칼도 어딘가 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물 한 잔을 쥔 채 다시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물컵을 탁자 위에 올리곤 그가 쓰던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왜 비를 맞고 다녀. 내가 아프면 안 된다 했지.”
그가 노련하게 수건을 펴 그녀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커다란 손이 몇 번이나 목덜미며 귀를 종횡했다.
그의 손가락이, 살갗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움찔움찔 떨리는 눈꺼풀을 감추려 서윤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만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눈에 묘하게 두근거려 헛기침이 나왔다.
“많이 바쁜가 보네. 오늘 나 먼저 집에 갈까?”
“나도 들어가야지. 피곤하네.”
그가 툭, 하고 그녀의 귓불을 건드렸다. 그의 눈을 보란 듯이.
서윤은 착하게도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 보았다.
“땅에 돈 떨어졌어?”
귀 끝을 문지르던 그가 스윽 목덜미를 손끝으로 훑었다.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가까스로 말을 돌렸다.
“같이 갈 거면 지금 바로?”
“그래.”
그는 단숨에 물을 비우고 곧장 잘 접어 두었던 셔츠 소매를 내려 커프스 버튼을 단정하게 채웠다. 그리고 슈트 재킷을 가볍게 들고서 사장실 문을 열었다.
평소엔 별 의미 없이 지나쳤던 그의 긴 다리로 괜히 시선이 갔다. 청바지가 잘 어울렸었다. 슬랙스나 세미 정장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다닐 땐 교복 바지도 또래 친구들에 비해 유난히 튀었었다. 교복 바지는 여느 교복과 별다를 거 없이 평범했지만 그는 평범하지 않았다. 다리가 길고 비율이 좋아 기본적으로 옷매가 난다.
“뭐 해?”
“응?”
서윤은 사장실 문을 열고서 그녀가 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선하를 뒤늦게 인지했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서윤은 괜히 제풀에 놀라 움찔거렸다.
“여기서 놀자고? 좁은 곳일수록 나야 좋긴 한데.”
“아, 아니?”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그가 열어 준 문으로 나갔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물보라를 만들어 낼 만큼 거세졌다.
선하는 우산을 펴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의 차 조수석에 태웠다. 그새 어깻죽지가 다시 축축하게 젖었다.
젖은 옷 때문에 찝찝하다가도 차창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서윤이 옆에 있는 선하를 힐끗 보았다.
운전에 집중하는 그의 눈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노곤해 보였다. 비의 영향인가.
말없이 운전 중인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던 서윤이 눈을 깜빡였다.
온 신경이 그에게로 쏠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엔 사태가 순조롭지 못하게 흘러가고 난 후였다.
“시선이 너무 야한데.”
“응?”
“밀당도 너다워서 노골적이라 좋긴 하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가, 말을 곱씹기도 전에 차는 그의 집 앞에 주차됐다.
“무슨 말이야?”
“좋아 죽겠다는 말이지 무슨 말이야. 들어가자.”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윤은 뜨거운 물에 피곤한 몸을 씻고 샤워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크다 싶었지만 선하의 티셔츠는 정말이지 대단히도 컸다. 팔 밑으로 내려오는 티셔츠를 살짝 걷어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원피스가 따로 없을 만큼 길게 내려와 서윤이 입은 제 스커트를 완전히 덮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 바람에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어떡하지.
고민을 해 봤자 사실 다른 방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신경 쓰이는 차림새인 것만은 분명했다.
서윤은 욕실 문을 열고 나와 선하의 향이 가득 나는 거실로 걸어갔다. 마침 좋은 향이 나는 차가 든 컵을 쥔 채 주방을 나오는 선하와 마주했다.
그의 향 못지않게 공중에 흩뿌려져 있는 이 좋은 향기의 차는 신경을 안정시키는 라벤더였다. 서윤은 커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덮고도 아래가 달랑거리는 선하의 티셔츠를 살짝 쥐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옷이 너무 커서… 그래도 따뜻하고 좋네.”
그의 시선이 뚫어져라 그녀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서윤은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에서 관심을 돌리고 선하가 쥐고 있는 두 개의 컵을 보았다. 하나는 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쥐고 있는 차를 물끄러미 보던 서윤이 말했다.
“혹시 이거 말고 맥주는 없어?”
주체할 수 없이 커 흘러내리는 티셔츠를 겨우 쥐고 맥주를 찾는 서윤은 너무나도 농염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서윤은 맥주만 찾고 있었다.
저 옷이 저렇게 야한 옷이었나. 선하의 시선이 하얗게 드러난 서윤의 목덜미로 박혔다. 아프도록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그제야 느낀 건지 그녀가 내려간 티셔츠를 끌어 올리며 목을 가려 보려 했지만 전혀 소득 없는 일이었다.
맥주 대신 저 목덜미를 핥아 내린다면 너무나도 달콤할 거란 생각에 선하는 아래가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인내해야 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그녀는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부여잡을 만큼 약해진 상태다.
선하는 느리게 그녀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향이 넘실거리는 라벤더 차를 개수대에 버리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캔 맥주를 꺼냈다.
그녀는 술주정이 없었다. 대신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입꼬리를 올려 배시시 웃는 그 얼굴이 느리게 보였다.
앉아 있는 러그 촉감이 마음에 드는지 손으로 벨벳을 쓸던 서윤이 다시 한 모금 맥주를 들이켰다.
“근데 너 그거 기억나? 우리 왜 고3 때 같이 야간 자율 학습 도망가다가 걸렸는데 네가 나 숨겼잖아. 내 가방 다 찢어져서 필통, 공책 다 튀어나오구.”
서윤은 단숨에 캔 하나를 뚝딱 비우고서 맥주가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나 그다음 날 가방 없이 등교했었잖아. 미림이가 얼마나 놀렸는지 알아?”
눈을 가물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는 서윤을 보고 있던 선하가 칼라를 더듬었다. 단추를 목까지 바짝 조여 놓지 않았는데도 숨이 가빠져 숨쉬기가 힘들었다.
“미림이가 뭐라고 했냐면….”
그녀가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깨물었다 놓을 때마다 입술이 빨갛게 익었다가 옅어지기를 반복했다.
분명 술기운은 돌고 있는데 선하의 시선 속에 찍힌 그 모습은 점점 선명해졌다. 무방비하게 내놓은 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아 그대로 빨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심장이 맥동했다.
이대로 저 거슬리기 짝이 없는 티셔츠를 찢어발겨 그대로 그녀를 맛보고 싶은 욕망에 계속해서 술기운이 옅어져 갔다.
“언제까지 지난 이야기만 할 건데.”
“아… 미안. 재미없었어?”
서윤은 새초롬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캔 맥주를 들이켰다. 다시 그녀의 입술에 맥주가 묻어났다. 그녀의 빨간 혀가 입술에 묻은 액체까지 꼼꼼히 핥았다.
“그럼 무슨 이야기 할까?”
그녀가 술에 취해 방긋 웃는다. 순식간에 러그에 손을 짚고 그녀에게로 확 상체를 쏟았다. 뒤로 넘어가는 그녀가 눈을 끔뻑거리며 당황으로 몸을 굳혔다.
“왜?”
“왤까.”
술에 젖은 입술만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의도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나, 나, 생리 중이야.”
“누가 뭐라고 했어?”
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서 그가 위험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자꾸 놀려.”
“왜, 내가 네 다리라도 벌릴까 봐 겁나?”
서윤은 때를 노리는 짐승처럼 숨을 죽이다 단숨에 넘어온 그의 그림자에 가슴 안쪽이 댐이라도 무너진 듯 파닥거렸다.
서윤은 고개를 치켜들고 조금도 겁먹지 않은 척했다. 이게 뭐라고 지고 싶지 않아서, 무섭지 않은 척을 했다.
“안 무섭거든? 그냥 난 생리 중이라서 그러는 거야.”
승부 근성이 강하고 뭐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가 핑계 뒤에 숨어 강한 척을 했다. 뭐, 진짜 생리 중인 건 맞으니까 변명은 아닌 거다.
아까 집으로 돌아올 때 잠깐 들른 슈퍼에서 생리대를 사는 걸 분명 그도 보았으니 변명만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 것이다.
피식거리는 이 웃음은 헛웃음이 분명했다. 아니면 조소거나. 다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웃음. 그게 또 기분이 나빠져 쏘아붙이려 했지만 말해 봤자 손해를 볼 것만 같아서 서윤은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딩동!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택밴가?”
시킨 적도 없는 택배가 왔다며 그녀가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등 뒤에서 쳐다보는 선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른 벌게진 얼굴을 숨겨야 했다. 그래서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