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the Fox RAW novel - Chapter 43
43화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올해는 가뭄이 심하게 든다더니,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무더위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의 체력을 다 앗아가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본관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온몸을 휘감는 끈적임과 타오르는 햇볕에 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아! 진짜 쪄죽겠다, 쪄죽겠어. 백여우, 오늘도 바로 집에 가?”
“응, 그래야지.”
“밥 먹고 바로 독서실 가는 거야? 너도 참 극성이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하면 서울대 갔겠어.”
난 보일 듯 말 듯 피식 웃었다. 사실 요즘 원지호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책을 펴본 적도 없는 나였지만, 애리에게 자세한 내막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본의 아니게 비밀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손에 들린 아이스커피만 쭉쭉 들이켰다.
“서 준, 이 자식은 뒤늦게 사춘기 온 거야, 뭐야? 며칠째 계속 학교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받고…… 무슨 일 생겼나? 대출도 한두 번이지, 이러다가 F뜰 텐데. 가뜩이나 재수강이면서.”
“…….”
“너한테도 연락 없었어?”
대수롭지 않게 묻는 애리를 향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애리는 연신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서 준은 사라졌다. 그날, 정문에서 기자들과 작은 소동이 벌어졌던 날 이후로 준이를 본 적은 없었다.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염치가 없어 전화를 해본 적도 없었지만, 애리의 말을 들어보면 휴대폰도 내내 꺼져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현웅 선배도 안 보이네? 뭐 썩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지만.”
“강의 변경한 것 같더라.”
“갑자기 왜?”
나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날 원지호의 협박이 먹혀든 건지, 아니면 술이 깨고 제정신이 들자 창피해진 건지, 현웅 선배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얼핏 듣자하니 나와 겹치는 강의도 정정기간에 시간을 변경한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피차 마찬가지겠지만 얼굴 보기 거북하고 불편했는데.
“아~찬희도 고향 내려가니까 난 맨날 학교, 집. 학교, 집만 반복하는구나. 내 대학생활 마지막 여름방학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도 되는 거니?”
애리는 툴툴대며 연신 불만을 토로했다. 계절학기 시험이 끝나면 캐리비안 베이에 가자느니, 바다에 가자느니 눈에 쌍심지를 키고 휴가계획을 세우는 애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다 입을 열었다.
“애리야, 넌 언제 결혼할 거야?”
“잉? 결혼? 갑자기 웬 결혼?”
“아니, 그냥 궁금해서……. 찬희랑 결혼할 거야?”
“뭐, 그건 그때 가봐야 아는 거지. 서로 어느 정도 자리 잡고 능력이 돼야 결혼도 하는 거고.”
애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나이 스물다섯. 예전 같았으면 결혼적령기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요즘은 서른이 넘어 결혼하는 게 흔한 일이었기에, 지금부터 결혼을 생각한다는 건 꽤 이른 일이긴 했다.
“왜, 누가 너한테 결혼하재?”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설마…….”
짙은 의심어린 눈빛의 애리를 향해 난 손사래를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갑자기 결혼 얘기는 뭐고! 너 준이랑 그렇게 된 거야?”
“뭐?”
“아, 이제야 딱딱 맞아떨어지네. 그 자식이 너 임신시켜놓고 책임지라니까 지금 발 뺀 거야? 그런 거지?”
오, 마이 갓.
나는 누가 들을 새라 서둘러 애리의 입을 막고 그녀를 째려봤다. 그제야 유애리는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아니, 난 갑자기 네가 결혼 얘기를…… 하긴, 준이가 그런 쓰레기는 아니지.”
하여튼 무슨 말을 못하겠다, 말을 못하겠어.
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집에나 가야지. 그렇게 더운 날씨에 이마의 땀을 연신 닦으며, 애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문을 나서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정문에 서있는 누군가를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설마 또 기자들이 나타난 건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가운데, 갑자기 걸음을 멈춘 나를 뒤돌아본 유애리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야, 뭐해? 갑자기 멈춰 서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떼는 와중에도 복잡한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처럼 기자들이 달려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니라고 잡아떼야 하나, 증거라도 들이밀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걸까.
온갖 시나리오를 짜내며 가장 최선의 대처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던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정문을 지나가던 나의 손목을 누군가 잡았다.
“여우야.”
내 몸이 절로 돌려세워졌다.
“……원지호?”
원지호였다. 정문 앞에 서있던 남자. 까만 티셔츠와 적당히 피트되는 면바지의 평범한 옷차림. 캡모자와 새까만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특유의 아우라나 느낌만은 감출 수 없는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헐?”
잠시 잊고 있었다. 내 옆에 애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대박. 누구라고? 원지호?”
나는 서둘러 애리의 팔을 꼬집으며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눈짓을 해보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원지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지호라고 합니다.”
원지호가 애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 네, 안녕하세요. 여운이 친구예요. 유애리.”
지난 4년간 내 앞에서 ‘원지호 나쁜놈’을 구호처럼 외쳤던 과거는 까맣게 잊은 듯, 애리는 붉어진 얼굴로 녀석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네? 아, 저야말로. 아, 지금 너무 제가 당황스러워서…… 아무튼 정말 멋있고, 완전 팬이에요.”
놀랍고 상기된 얼굴의 애리는 한참을 횡설수설 수다스레 말을 늘어놓더니, 이내 바통을 내게로 넘겼다. 나를 향한 그녀의 눈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설명해보라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잘생긴 남자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던 애리는 지금 계속해서 원지호의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고, 4년 내내 원지호를 만나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천하무적 유애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원지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가련한 내 친구를 위해 이쯤에서 나서기로 했다.
“애리야,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할게.”
“어? 어.”
“나 그럼 먼저 가본다? 이따 전화할게.”
“어어, 그래…….”
끝까지 애리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서둘러 원지호를 이끌고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정도 정문에서 벗어나서 한적한 도로변에 나와서야 난 걸음을 멈춰 녀석을 올려다봤다.
“너 미쳤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
기자들이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긴 했지만, 아무리 모자와 썬글라스로 가린다고 해도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녀석이었다. 얼마나 심장이 쿵쿵거리는지 아직까지도 거친 심장박동이 그대로 느껴지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원지호는 태평하게 웃었다.
“차는 어디 세웠어?”
“안 끌고 왔는데.”
“뭐? 너 그럼 여기까지 버스 타고 왔다고?”
“어, 요즘 버스 되게 좋아졌더라.”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얘가 어제 뭘 잘못 먹었나?
아무리 종잡을 수 없고 가끔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오늘 녀석의 예측불허의 돌발행동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왜 이래? 너 어디 아파? 사람들이 알아보려면 어쩌…….”
“덥지? 자, 네 것도 챙겨왔어.”
나의 말을 끊고 녀석이 내게 내민 것은 선글라스였다. 고급스러운 선물포장이 되어있는 케이스를 뜯자, 명품로고가 박혀있는 까만색의 선글라스가 눈에 띄었다.
“너 이거…….”
“내가 지금 낀 거랑 똑같은 거다?”
“…….”
“빨리 껴. 눈주름 생긴다.”
내가 물끄러미 원지호를 쳐다보고 있자, 녀석이 손바닥을 펴 내 얼굴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얼굴에 그대로 내리쬐던 직사광선이 차단되고, 나는 머뭇거리다 케이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했다.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꼭 연예인이랑 사귀는 것 같다.”
“연예인보다 잘났지, 네 남자친구.”
원지호가 장난스레 피식 웃었다. 그리곤 선글라스를 낀 내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던 녀석이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쁘네.”
“…….”
“가자.”
녀석이 내 왼손을 잡아끌었다.
평소보다 잘 웃는다. 그리고 평소 같지 않은 행동들을 한다.
차를 두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선글라스와 모자로 무장하고 있지만 이렇게 길거리를 손잡고 걸어보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죄다 양산, 선글라스,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평소라면 생각도 못할 길거리데이트도 평범한 연인들처럼 즐겼다. 두 손 꼭 맞잡고 버스를 타기도 했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한편 보기도 했다.
그렇게 소소하지만, 내겐 더없이 특별한 데이트를 하는 내내,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면서도 점점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아, 이게 마지막이구나. 오늘이 지나면 너는 또 떠나는구나.
누구 한명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누구 한명 모르는 이도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 * *
해가 쨍쨍한 낮부터 거리를 배회하던 우리의 종착역은 오늘도 신월고 수영장이었다. 수영부가 단체로 전지훈련을 간 틈을 타 우린 며칠째 계속해서 신월고 수영장에 무단침입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밤이 다 되어 찾아온 수영장은 커다란 통유리창사이로 가로등과 달빛이 풀장에 반사돼 그리 어둡지 않고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늘 나는 온종일 걸어 다니느라 지쳐서 이렇게 진이 빠졌는데, 녀석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개인연습도 내팽개쳐둔 채 내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는 열의에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가대표 체력은 다른 모양이었다. 덕분에 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수영복을 입었는데, 도저히 그 차림으로 녀석의 앞에 나설 용기가 없어 그 위에 박스티로 몸매를 가까스로 가려야만 했다. 원지호는 내가 뭘 입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지만, 나는 물속에 들어가면서 티가 몸에 밀착되어 달라붙는 게 민망해져 괜스레 녀석의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였다.
“발을 더 뻗어봐.”
“이렇게?”
“어, 그렇게. 몸에 힘 더 빼고.”
“아, 나 진짜 못하겠어!”
그리고 난 정말 배영이 이렇게 어려운 건 줄 꿈에도 몰랐었다. 원지호는 침대에 누워있는 것처럼 물 위에서도 잘만 누워있기에 그게 썩 쉬워 보여 무턱대고 배영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것이 아무래도 잘못인 듯하다. 똑같은 수심에 똑같은 수온. 다른 것이라곤 그저 시야가 다르고, 방향만 바꾼 것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어렵고 두려움이 느껴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나 나름대로 4년 동안 수영 열심히 배운다고 배웠는데…….”
속이 상했다. 녀석이 없는 지난 4년간,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꾸준히 동네 수영장 문턱을 드나들었던 나였다. 처음엔 물속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뻣뻣이 굳어있던 내가 이젠 대충 어설픈 프로 흉내까지 내는 데에까지 성공한 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으나, 배영은 여태껏 한 번도 도전해보지 못한 영법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고 충분히 숨을 들이마셔도, 귀가 물에 잠기고, 내 등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녀석이 손을 빼면 물속에 가라앉는 내 몸이 느껴져 덜컥 겁이 났다.
더군다나 물위에 뜨지 못하는 나의 등을 받쳐주는지라 원지호가 바로 내 옆에 붙어있다는 사실과 눈을 뜨면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인다는 것도 수영에 집중할 수 없는 이유에 한몫 가담했다.
“포기야, 포기. 그냥 안 배울래. 어차피 배영은 딱히 써먹을 일도 없고.”
그래도 여태껏 다른 영법에서는 이렇게 헤매는 일없이 곧잘 따라했던 나였는데, 배영만큼은 아예 물위에 뜨질 못하고 있었다.
“한번만 더 해보자. 거의 다 됐거든.”
하지만 원지호가 나를 저렇게 내려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 나는 마치 마법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하면 숨 깊이 들이마시고 팔을 위로 뻗어.”
“응.”
“자, 준비하고…… 하나, 둘, 셋! 숨 크게 들이마셔.”
눈을 질끈 감고 녀석이 하라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발을 뗐다. 귀에 물이 차는 게 느껴지고, 몸이 가라앉는 그 느낌에 본능적으로 바닥에 발을 대려는데, 내 등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녀석의 손힘이 느껴지면서 낮고 단호한 그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왔다.
“나 믿어.”
“…….”
“믿고, 몸에 힘 빼.”
그 말에 불안정하게 쿵쿵거리던 심장박동이 페이스를 찾았다. 물이 무섭고 꼭 감은 두 눈에 까만 시야도 편안하게만 느껴지고, 짧고 가쁘게 내쉬어지던 호흡도 길어지면서 거짓말처럼 물위에 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스르르 눈을 떴다.
“어어? 나……나 지금 물에 뜬 거야?”
그 말을 하면서 다시 가라앉긴 했지만, 분명 잠깐이지만 물에 떠있었다. 난 계속해서 녀석이 내 등 뒤를 받치고 있어서 몸이 떠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짧은 순간이지만 온전히 나 혼자서 물에 떠있던 것이다. 2, 3초? 아니 한 5초쯤 되었을까. 엉겁결에 허둥대느라 이미 코와 입으로 물이 다 들어가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지만,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봤어? 나 아까 물에 뜬 거 맞지? 그치!”
신나서 호들갑을 떨며 발까지 동동 굴리는 나를 원지호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봤냐구! 나 아까 물에 떴다니까? 진짜 신기해!”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이 내게 입을 맞췄다.
숨이, 멎은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키스에 눈을 감아야할지, 떠야할지 녀석의 가슴팍을 밀어내야하는 건지도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네가 너무 좋다. 어떡하지.”
녀석과의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원지호가 장난스레 웃었다. 사방이 어둡긴 했지만, 창가로 들어오는 저 달빛과 물위에 반사되는 저 멀리 가로등 불빛에 나는 내 새빨개진 얼굴이 녀석에게 보일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웃을까?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서 미친 듯이 심장만 쿵쿵 뛰는 가운데, 원지호가 피식 웃었다.
“부끄러워?”
엄마야, 얘는 진짜 부끄럼이 없나봐! 뭐래, 진짜!
짓궂은 녀석의 물음에 난 아까보다 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되어 그를 쏘아봤고, 녀석은 그저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부끄러운 말은 원지호가 다 했는데, 왜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인지…….
나는 뭔가 억울하면서도, 민망해서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진 못하고 애꿎은 녀석의 가슴팍만 노려봤다. 물에 젖은지라 흰 반팔티가 몸 위에 달라붙어 탄탄한 몸의 잔근육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만져보든가.”
“……뭐, 뭐?! 뭘 만져!”
“아니, 만져보고 싶다는 표정이길래.”
세상에, 어머니!
“아님 말고.”
할 말을 못 찾고 완전히 벙찐 표정으로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는 날 향해 킥킥대는 원지호였다. 그제야 녀석이 날 완전히 놀려먹은 사실을 알아챈 나는 차오르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못 참고 소릴 질렀고, 그 뒤로 녀석은 내게 등짝을 몇 대 후려 맞아야 했다.
* * *
달밤의 즐거운 물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허기짐에 우린 비빔밥을 해먹었다. 영화도 다운받아 봤고, 늦은 밤 동네 한 바퀴를 산책삼아 돌기도 했다. 어느덧 자정이 지나 날짜상으로는 어느덧 다음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누구 한명 잠자리에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할 것도 없는데, 가는 밤이 아쉬운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쇼파에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나…… 이제 올라갈게.”
시침이 새벽두시를 가리킬 때, 내가 적막함을 깨고 먼저 일어섰다. 원지호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아까까지 그렇게 재밌게 웃고 떠들던 사람과 동일인물들이 맞는지, 우리 사이엔 감출 수 없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 그래. 잘 자.”
아마, 내일 아침이면 원지호는 없으리라. 나는 원지호가 날 쳐다보는 것처럼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입 밖으로 내는 마지막 인사를 하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아서 난 끝까지 입을 다물고 2층 내방으로 올라섰다. 뒷모습에 닿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지면서, 침대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예고되었던 헤어짐이라 해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헤어짐이라 해도, 헤어짐이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행여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고, 이불을 끝까지 올려 흐느꼈다.
이렇게 힘들게 돌아왔는데, 이렇게 어렵게 시작했는데 다시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아픔. 예고했었던, 준비해왔던 이별이지만 그렇다고 아픔이나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창밖에선 여름밤의 매미우는 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고, 그에 맞춰 밤에 우는 귀뚜라미 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정원에 가득 핀 아카시아 꽃향기와 쏟아지는 보름달의 환한 빛도 그대로인데, 아마 내일도 그대로일 텐데. 단 한사람의 부재만으로도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아파왔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 만큼.
“또 혼자 울고 있지.”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이불 밖으로 낮은 한숨소리와 섞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울음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야 이불을 살짝 걷어냈다.
“어? 왜……?”
목을 가다듬는다고 가다듬었는데, 울음 섞인 갈라진 목소리가 그대로 나가자 방문에 기대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녀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불도 켜지 않은 방안, 오직 달빛에 의존해서 내 옆까지 다가온 녀석이 이불을 걷어내고 내 눈가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일로 와봐.”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그 낮고도 따뜻한 목소리에 참아왔던 서러움이 복받쳐서 커다란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마치 4년 전 그날처럼. 이혜준의 바람현장을 목격하고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원지호의 한마디에 울음이 터져버린, 네가 나에게 특별해지기 시작한 그날처럼.
“오래 안 걸려.”
“…….”
“약속할게.”
꾹 참고, 억눌렀던 울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나는 숨까지 몰아쉬며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원지호는 나를 꼭 안은 채로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날 달래고 있었다. 녀석이 무어라 말을 하는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이미 내 온 감각은 마비되어 있었다.
“돌아올게.”
“…….”
“너를 위해서.”
한참 동안 원지호는 그 말을 중얼거렸다.
돌아올게. 너를 위해.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그렇게 우린, 여전히 익숙지 않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두 번째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다. 헤어짐은 여전히 서툴렀고, 아팠다. 하지만 이렇게 잔인한 헤어짐도 때때로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다시 돌아올 거라는, 그리고 나 역시 널 믿고 기다릴 거라는 믿음이 전제된다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 다른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 우린 이제 그걸 알만큼 성숙해졌고, 헤어짐이 더 이상 헤어짐으로만 그치진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나는 원지호를 다시 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