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the Fox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오랜만이다.”
대략 한 달 만에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서 준은 예전같이 웃고 있었다. 따뜻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 웃음이 너무 똑같아서 나는 우리 사이에 한 달이라는 공백이 실감나지 않았다. 짧아진 머리카락이나, 살이 빠진 듯 전보다 조금 마른 듯한 몸이 아니면 나는 또 한 여름밤의 꿈을 꾼 건 아닐까,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잘 지냈어?”
“잘 지냈겠어?”
피식 웃으며 받아치는 서 준의 말에 난 민망해졌다. 우리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한 달 만에 준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의 말대로 카페에 나왔다.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서 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앞에 놓인 아이스 음료만 간간히 마실 뿐.
“원지호…… 다시 미국 갔더라?”
아이스 음료의 얼음을 빨대로 저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 준의 말대로, 원지호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비행기가 결항돼서 조금이라도 더 내 옆에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은 그저 내 바람으로만 끝났고, 원지호는 그렇게 다시 떠났다. 자신이 여태까지 땄던 금메달 두 개만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남겨놓은 채.
“둘이 만났지?”
준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는 채로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좋아하고…….”
“…….”
“맞지?”
“응.”
내 대답에 잠깐이지만 준의 얼굴에 낭패어린 기색이 비췄다가 사라졌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이제 여름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늦더위가 한창인 만큼,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무더위는 여전했지만 제법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티가 나고 있었다. 나는 푸르른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4년 동안이나 못 잊은 걸 보면 보통 놈은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어.”
“…….”
“길 가다가도 원지호가 나오는 뉴스나 광고만 봐도 멈춰 서선 눈을 못 떼는 널 보면서 혹시나, 하면서도 에이 설마 싶었고.”
“…….”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내가 피우는 담배 하나에 무너지는 널 보면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은 했지. 그러면서도 자꾸 기대하게 된 건 사실이야.”
준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진짜 원지호였다니.”
녀석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거였는데. 아, 이러면 내가 너무 비참한 거지.”
“그런 거 아니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원지호와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혼자 작아지는 그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녀석의 말대로 준이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내 말을 기다리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네가 밉더라.”
“…….”
“애초부터 내가 아니었던 거라면 그렇게 웃지 말지.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지 말지. 조금 더 못되게 굴고, 조금 더 질리게 만들고, 조금 더 나쁜 여자였으면 좋았잖아, 백여운.”
서 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난 속으로 하염없이 되뇌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준아.
“그래서 네가 미웠는데…… 생각해보니까, 넌 나한테 한 번도 기대를 심어준 적이 없더라고.”
“…….”
“좋아한 것도 나 멋대로였고, 기다리겠다고 말한 것도 나였고…… 넌 한 번도 날 봐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근데 이게 왜 이렇게 비참한 건지.”
고개를 숙이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 준이 피식 웃어버렸다.
“깨끗하게 포기야.”
“…….”
“내가 널 놓은 거지, 너한테 버림받은 거 아니다. 확실하게 하자.”
장난기어린 농담을 건네는 준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서 준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왠지 서글퍼지면서 쓸쓸해졌다. 결코 다른 의미로였지만, 그는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 중 한명이었기에.
“4년이나 죽도록 매달린 여자한테 차마 행복하라는 말은 못 하겠다.”
“……그래.”
“네가 날 놓친 걸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
“그리고 난 너 보란 듯이 너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날 거고, 잘 살 거야.”
“응.”
“아무튼 난 그래. 거의 한달 가까이 방황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여기까지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동안 잠적했던 녀석은 그 사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정리를 하고 온 듯했다. 원지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내내 준이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었다. 언젠가 끝을 내야했고, 그에게 상처를 주고, 또 내가 상처받아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왔다 해도, 이제 내 인생에서 과거의 사람으로 분류될 그의 마지막을 보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네가 울었으면 좋겠고,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네가 아프길 바라.”
“…….”
“그래서 이렇게 모질게 말하는 건데…….”
마음 단단히 먹고 준비해온 듯 한참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쓰게 웃었다.
“그래도 행복해라.”
“…….”
“꼭 행복해라, 백여운.”
서 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는 의미로 커피 값은 네가 내고.”
장난스레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던 서 준이 뒤를 돌았다. 여태껏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나는 엉겁결에 그를 불렀다. 준아, 하고. 내 부름에 뒤를 돌진 않았지만, 녀석은 걸음을 멈췄다.
“고마워.”
“…….”
“너 정말 괜찮은 남자야.”
그리고 좋은 사람이야.
“너도 행복해져. 나보다 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어쩌면 그게 널 더 비참하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고마웠어.
“고마웠어, 서 준.”
잠깐이지만, 널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만큼 넌 나에게 의지되고, 믿을 수 있는 존재였고,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하지만 친구로라도 내 곁에 남아달라고 널 잡진 않을게. 네 말대로 너로 인해 아프고, 너를 잃음으로써 허전하고 힘든 시간도 보내볼게. 너를 아프게 한 벌이라고 생각하고 달게 받을게, 준아. 그러니까 꼭 행복해져.
그는 끝까지 뒤돌지 않았지만, 낮게 웃는 듯 어깨가 움직였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에 비로소 혼자 남은 난 그 카페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사랑, 그리고 엇갈림. 본의 아니게 주고받는 상처.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헤어짐. 준이와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면서 난 풀리지 않는 오랜 수수께끼에 직면하게 됐다.
마치 큐피트의 화살에 쏘인 듯 엇갈리는 이런 짓궂은 감정은. 그러니까 사랑은, 과연 언제 끝나는 걸까.
* * *
“여운 씨, 오늘도 야근? 미안해서 어떡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수고해요~”
“네, 먼저 들어가세요. 팀장님.”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예의상 수고의 인사를 남기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녁도 먹지 못해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고, 끝이 보이지 않은 서류더미에 한숨 돌릴 겸 화장실로 향했다. 몇 시간 째 하얀색의 모니터만 보고 있던 탓인지,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보랏빛으로 보이는 착시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힘내자. 이제 곧 월급날이고, 내일은 토요일이잖아.”
나는 스스로에게 힘을 실어주며 찬물로 가볍게 얼굴을 두드렸다. 화장실의 벽에 기대 잠깐 눈을 감고 있으면, 역시 야근으로 남는 듯 나와 같은 처지의 입사동기들이 한두 명씩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다가 나는 건물 옥상의 하늘공원으로 자리를 피했다.
입사 3개월 차. 아주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기어이 원하는 곳에 입사한 나를 보며 주위에선 독한 년이라며 혀를 찼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컸다. 지난 3개월 동안, 정시에 퇴근해본 적은 한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줄어들지 않은 업무량에 주말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나온 적도 허다했다. 우리 신입, 우리 신입. 말로는 힘들지, 잘 하고 있어. 다독이면서도 잘하면 당연한 거고, 못하면 순식간에 역적이 되는 회사분위기에 퇴근길 사가는 맥주 한 캔이 유일한 낙이 되는 시기.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다. 어느 바닥이든 다 마찬가지일 테니.
별도 보이지 않는 서울의 깜깜한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001로 시작되는 번호의 조합이 떠있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어디긴, 회사지.”
깜깜한 밤하늘, 아무도 없는 옥상 하늘정원.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과 코끝을 스치는 풀냄새. 그리고 원지호의 목소리까지.
어느새 우울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넌 어디야?”
알면서도 물어봤다. 역시나 말문이 막힌 듯, 휴대폰너머에선 침묵이 이어졌다.
“LA 지금 새벽 아닌가? 일찍 일어났네.”
-야.
“응? 왜? 미국 날씨는 좀 어때? 여긴 요즘 난리도 아니야. 너무 더워서.”
나의 계속되는 장난에 휴대폰너머에선 한숨소리가 건너왔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아냐?
“응? 내일? 무슨 날이더라.”
모를 수가 없었다. 굳이 원지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언론이나 매스컴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데. 더군다나 요즘 TV만 켜도 계속해서 중계되는, 혹은 재방송되는 올림픽 경기가 한창인데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야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매일같이 치킨에 족발, 보쌈에 야식을 잔뜩 쌓아놓고 우리나라 응원을 하는 재신, 희수, 훈이만 봐도 그렇고, 오늘 팀장님이 일찍 퇴근한 것도 올림픽 중계를 보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요즘 대한민국은 올림픽으로 떠들썩했다. 그리고 내일은 금메달의 영광을 안겨줄 거라 국민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원지호의 본선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그리고 원지호의 여자친구로서 어떻게 잊고 있을 수 있을까.
다만, 오랜만에 전화가 온 원지호가 미워 괜히 투정부리듯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나의 투정어린 장난에 원지호가 피식 웃었다. 난 그제야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나 까먹은 줄 알았지.”
-계속 코치랑 붙어있고, 기자회견에 운동에 다른 선수들 눈도 있어서 연락 못했어. 저번에 나 경기했는데…… 봤어?
“응, 1등 했다길래 재방송으로 봤지. 잘하던데?”
잔뜩 기대하는 목소리가 마치 칭찬해달라는 것 같아서 난 기어코 웃고 말았다.
-왜. 본방으로 보라니까.
본방이 아닌 재방으로 자신의 경기를 본 게 못마땅한지, 녀석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가라앉아있었다.
“생방으론 진짜 못 보겠어. 너무 떨려.”
다른 종목들, 아니 수영에서도 원지호가 출전하는 경기가 아니면 잘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원지호가 출전하는 경기는 생방으로 볼 수가 없다. 잘할까? 혹시나 실수하는 건 아닐까? 성적이 나쁘진 않을까, 그래서 녀석이 실망하진 않을까. 너무 떨려서 내 눈으로 그의 생방송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경기가 끝나고 인터넷으로 기사가 뜰 때쯤에야 안심하고 그의 경기를 찾아보곤 했다.
전화기너머에선 말이 없었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것인데 그가 섭섭할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봐. 꼭 생방송으로.
“응…?”
-내 옆에 없어도 그 순간, 네가 보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가 날 더 강하게 만드니까.
단호한 원지호의 목소리. 그 말에 미안해지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그래, 알았어.”
-…….
“내일 경기는 꼭 생방으로 볼게. 그러니까 잘해. 알았지?”
-…….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까지 못 가서 미안해. 중계방송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직접 가서 응원해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치?”
미안함과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말끝을 흐리면, 원지호가 피식 웃었다. 내 눈앞에 있진 않지만, 그의 목소리, 웃음소리 하나만으로도 지금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됐다.
-됐으니까 약속이나 지켜.
“응, 꼭 생방으로 볼게.”
-아니, 그 약속 말고.
“응?”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걸까.
-1년 전 신월고 수영장에서 했던 약속.
“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1년 전, 신월고 수영장에서 했던 약속이라면 ‘결혼’과 관련된 그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속이라니? 난 분명 그때 확답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그런 게 어딨어? 약속이라니! 메달 따오면 생각해보겠다고 그랬잖아.”
-무조건 금 따간다니까.
“하, 참…… 뭐 그렇게 자신만만해? 그러다가 못 따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너…… 그러다가 금메달 못 따면 나랑 결혼 안 하려고?
이 말은 애써 삼켰다. 수화기너머로 그가 낮게 웃었다.
-약속했잖아. 돌아간다고.
“……응?”
-금메달 따서 돌아갈 테니까.
“…….”
-나 한국 돌아가는 날. 생각 말고, 대답 가지고 공항에 나와 있어라.
“…….”
-참고로, 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응, 그래, 좋아 세 개 중에 하나야. 아, 예스까지 하나 추가해줄게.
장난 섞인 그의 말에 난 기어코 웃고 말았다.
농담으로 치부하며 웃어넘겼지만, 난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원지호의 말처럼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가 응, 그래, 좋아. 혹은 예스. 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다시는 헤어지는 일 없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지금 이 순간, 간절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