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oning Genius of the Necromancer School RAW novel - chapter (39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94화
까아아아앙!
채애애앵!
실라지와 시몬이 연신 검을 맞대며 격돌했다. 모래의 세계에 커다란 불똥을 튀기고, 두 사람이 딛고 있는 지면만 일그러졌다.
10격을 부딪힌 두 사람이 동시에 물러나는 것으로, 모래바닥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가라!”
시몬의 외침에, 미라 부대가 야수 떼처럼 실라지에게 달려들었다.
“군단장의 힘은 보고도 믿기 힘들군.”
실라지가 손에 쥔 블러드 소드를 해제하고는,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그것은 바닥으로 내려와 두 개의 거울로 변했다.
“블러드 좀비의 진짜 사용법을 보여주겠네.”
블러드 좀비들이 이 거울을 통과해 지나가자, 흐리멍덩한 눈빛에 안광이 생기고 전신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어!
좀비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돌파한 그들은, 미라들을 일격에 쓰러트리며 진형 깊숙이 파고들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몸이 시뻘게지던 블러드 좀비는 이내.
퍼어어엉!
시체폭발, 아니, 피폭발을 일으켰다.
휘말린 미라들은 붕대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거울을 통과해 일직선으로 쭉쭉 달려드는 블러드 좀비들이 연달아 폭발하자, 압도적인 수와 덩치의 미라 부대도 손 쓸 틈 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키젠 교수급 강자. 그래도.’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실라지의 모습을 보니, 그도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블러드 좀비를 이용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없긴 이쪽도 매한가지.’
헤르세바와의 사념과 연결된 시몬은 그녀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라지의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헤르세바의 던전이 먼저 해체된다.
그렇다면 이 몸을 불살라서라도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
블러드 좀비들과 미라가 맞붙는 전면. 시몬은 조용히 우회해서 모래언덕에 몸을 숨긴 채 실라지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소용없네.”
실라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백 년의 세월. 나는 자네보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쌓아왔네.”
시리고 서늘한 음색으로, 그는 말했다.
“운 좋게 군단장의 힘을 얻었다고 한들 이제 1학년인 자네가 나를 이길 확률은 없어.”
콰직!
시몬이 바닥을 강하게 주저앉히며 돌진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냐!”
공중에서 힘껏 대검을 휘둘렀다. 검푸른 검격이 정면의 검로상의 모든 것을 가르고 지나갔지만 실라지는 옆으로 움직여 피해냈다.
탓!
그사이 지면에 착지한 시몬은 실라지의 코앞까지 치닫는다. 젊은 발터의 얼굴을 하고 있는 늙은 여우의 모습이 바로 앞에서 보인다.
‘파멸의 대검으로 직접 벨 수만 있다면!’
즉시 대검을 내리치려던 시몬이 아쉬운 듯 눈에 힘을 주더니, 단번에 망설임을 지우고 발꿈치에 힘을 주어 물러났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피폭발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역시 감이 좋아.”
실라지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주위에는 더 작은 입자로 변한 핏방울들이 공중지뢰처럼 둥둥 뜬 채 대기하고 있었다.
“이만 죽게나.”
실라지가 바람을 일으켜 핏방울들을 날려 보냈다.
시몬이 바닥을 디딘 오른 다리에 힘을 꽉 주고는 이를 악물었다.
촤아아아아악!
정면으로 일어난 검격에, 핏방울들이 모조리 피폭발을 일으켰다. 실라지는 남아 있는 핏방울들을 능숙하게 조종해서 공중으로 올려 모이게 했다.
핏방울이 모여 지름 10M짜리의 묵직한 피의 구체가 시몬에게 떨어졌다.
시몬은 대검의 손잡이를 터질 듯 강하게 쥐었다.
‘한 번 더!’
쩌어어어엉!
날아오는 피의 구체가 반으로 갈라진다. 시몬이 허리를 뒤틀었다.
‘다시!’
무려 3연격의 공간 베기.
피의 구체가 십자 모양으로 그어지더니 피폭발을 일으켜 분쇄된다.
“전투 중에도 계속해서 배우는군. 학생의 자세는 훌륭하네.”
“교수니 학생이니. 헛소리!”
돌진하는 시몬이 눈에 광기가 일렁였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건 군단장이다!”
덜컥.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시몬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렇게 무리하는데 칠흑이 남아날 리가 있나.”
실라지가 뒤로 물러나며 손을 튕겼다. 모래에 숨겨 놓았던 핏방울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라 시몬의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었다.
“연륜의 차이일세.”
모든 방울이 폭발했다.
굉음.
그리고 밀려드는 후폭풍.
쿠구구구구구구―!
밤의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폭발의 향연을 보며 실라지가 눈을 감았다.
생존확률 0%.
시몬의 칠흑이 고갈됐다는 건 정확히 체크했다. 확실한 결론을 도출한 그가 마침내 등을 돌렸다.
“전력을 온존하라.”
혈류마법으로 신도들에게 통신을 보냈다.
“술사가 쓰러졌으니 곧 결계도 무너진다. 바로 사도 부활 계획을-”
푸우욱!
“……!”
그의 걸음이 덜컥거리며 멈췄다.
뇌리에 번지는 충격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표정에는 놀람과 의아가 뒤섞인다.
실라지의 등 뒤에 새하얀 창이 꽂혀 있었다.
“이…… 건……!”
주르르륵!
그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이내 콜록 하고 기침하자 멀건 핏덩이가 투툭 툭 쏟아졌다.
‘설마……!’
등을 돌렸다고 해도, 언제나 몸에 걸어두고 있던 방어마법인 피의 장막과 미트아머가 단번에 뚫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폭발이 바람에 걷혀 나가며 하얀 방어막에 몸을 숨긴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세월이 어쩌고, 경험이 어쩌고. 그런 사람들이 흔히 겪는 문제가 있어.”
이마에 피를 흥건하게 흘리면서도, 시몬은 이를 보이고 있었다.
“첫째는 쉽게 단정 짓는다는 거고.”
“네놈!”
“둘째는 상상력 부족이야.”
실라지의 눈이 황망함으로 흔들렸다.
“코어를 가진 네크로맨서가…… 신성을 쓴다고? 이 무슨 속임수를!”
“납득하기 힘든 건 알겠지만.”
시몬이 디바인 배리어를 걷어버리고는 아티팩트로 신성 아공간을 열었다.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그 안에서 튀어나온 건 곰의 형상을 한 신수, ‘아칼리온’이었다.
“가자! 아칼리온!”
-우어어엉!
시몬이 신성을 불어넣어 주자 아칼리온의 덩치가 급속도로 커지며 괴물곰처럼 변했다. 시몬이 그 위에 올라타고 파멸의 대검을 앞세운 채 돌진 명령을 내렸다.
실라지가 즉각 흑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계속 피가 쏟아지고 있다. 아까 그 공격에 신성이 전신으로 들어오며 코어가 쇼크를 일으킨 것이다.
“막아!!”
실라지가 외쳤다. 미라를 상대하던 폭주한 블러드 좀비들이 실라지의 앞으로 집결했다.
“아칼리온! 계속 가!”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붙잡고 신성을 불어넣은 다음, 휘두르기 시작했다.
쩌엉!
쩡!
쩌어어엉!
순백의 광채를 머금은 파멸의 대검이 번뜩일 때마다 언데드들이 무수히 갈라졌다.
피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블러드 좀비를 통째로 베어버렸고, 아칼리온은 블러드 좀비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영리하게 공격을 피해 다녔다. 직접 신성을 입힌 앞발로 휘두르거나, 몸통을 물어뜯어 폭발을 막기도 했다.
‘상상력 부족이라고?’
간신히 출혈을 멈춘 실라지가 헛웃음을 흘렸다.
키젠 1학년 꼬맹이가 뜬금없이 군단장이란다.
그리고 군단장이 지금 신성을 쓰고 있다.
무엇보다, 시몬이 입고 있는 본 아머 상태의 저 에이션트 언데드.
‘에이션트 언데드가 대체 어떻게 신성을!’
[크흐흐흐흐!]시몬이 신성을 쓴 뒤로, 피어의 전신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신성을 몸에 받아들인 채, 신성을 동력으로 시몬을 보조하고 있었다.
이딴 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이레귤러인 것도 정도가 있다!!”
실라지가 직접 아공간을 열고 본인의 블러드 좀비를 쏟아냈다. 시뻘건 개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비켜!”
시몬이 대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 보이는 건 매끈한 순백의 창 하나. 그 창의 주위로 여러 겹의 신성의 띠가 날아와 휘감기며 드릴의 형상을 갖춰 나갔다.
키이이이이잉!
신성의 창이 하얀 기둥처럼 쏘아져 나가며 블러드 좀비들을 풍압만으로 날려 보냈다. 실라지가 혈류마법을 일으켜 그것을 정면에서 막아 세웠다.
“뛰어!”
터엉!
그사이 아칼리온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시몬이 대검을 손에서 놓고 양손을 거칠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콰르르르릉!
하얀 번개가 실라지의 머리 위로 떨어졌으나, 실라지가 급히 혈류방패를 펼쳐 막아냈다.
그 또한 백전노장. 아까는 예상 불가능한 사태여서 당했지만, 상대를 프리스트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맞는 대프리스트 전술로 대처가 가능했다.
촤아악!
그리고 공중에서 내려온 아칼리온이 발톱으로 실라지의 가슴을 긁으며 내려왔다.
‘아깝다!’
시몬이 표정을 굳혔다.
실라지의 가슴에 핏물이 튀었지만 얕았고, 실라지가 바로 아칼리온을 복부를 강타해 날려 보냈다.
쿠구구궁!
아칼리온이 쓰러졌다. 시몬은 펜던트를 작동시켜 아칼리온을 불러들인 다음 손안으로 파멸의 대검도 불러왔다.
“큭!”
시몬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제 신성도 다 떨어져 간다.
특히 레테의 기술인 라 에스크림 두 발. 이거 보기보다 신성을 엄청 잡아먹는 기술이었다.
‘성녀가 되기 전에도 이런 걸 그렇게 막 날려댔던 거야? 레테.’
[꼬, 꼬마야!]그때 헤르세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들이 듣지 못하게 시몬의 사념으로만 직접 이야기하고 있었다.
[앞으로 길어도 10분! 10분 동안만 던전을 유지할 수 있어!]‘……오케이.’
실라지의 방심을 유도해 꽤 큰 치명상을 입혔지만, 여기까지.
칠흑도 신성도 부족하다.
그를 없애려면 결정적인 힘이 필요했다.
‘이젠 정말 마지막 수단밖에 없어!’
-가장 절망적인 순간, 목숨이 위험하고 모든 수단이 막혀서 이제는 하늘에 비는 것밖에 없을 만큼 참담한 상황일 때, 저를 믿고 콤펠로니아를 사용하십시오.
지금.
지금뿐이다.
최후까지 안배하고, 최후의 최후에 사용해야 하는 순간.
시몬은 신성을 몸에서 방출한 다음, 다시 코어를 작동시켜서 네크로맨서 모드로 돌아왔다.
“미라 부대!”
시몬에게 블러드 좀비를 보내느라 전력이 비었고, 그사이 다시 미라부대가 몰려들어 실라지를 공격했다.
실라지는 어쩔 수 없이 광범위 흑마법을 펑펑 쓸 수밖에 없었다.
미라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시몬은 착실하게 비장의 기술을 준비했다.
‘칠흑이 없어. 무조건 성공시킨다!’
먼저 4대 저주를 빠르게 그린 다음.
중앙에 4대 저주의 핵심 수식만 손가락으로 옮겨와 조립한다.
생태계의 일부를 꺼내 다른 생태계에 이어붙이는 작업, 그런데 자기들끼리 착착 완벽하게 맞물리는 것을 보며 제작자인 바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네 개의 수식을 모두 맞춘 다음, 저주를 완성했다.
시몬은 마법진을 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더는 망설일 틈이 없다.
과감하게 콤펠로니아 마법진을 자신을 상대로 발동시켰다.
화아아아아악!
“……!”
그것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일반적인 사고의 영역을 확연히 벗어나고 있다.
어마어마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온다. 머리가 무수한 숫자와 언어로 가득 찼다.
‘아.’
초 단위 만에, 시몬이 키젠에서 배운 정보량을 초월했으며.
분 단위 만에, 시몬이 살아오며 배운 정보들을 초월했다.
하지만 가질 수는 없었다.
바다처럼 흘러가는 어마어마한 정보량에 그저 입이 벌어질 뿐.
‘!’
시몬의 영혼은 순식간에 껍데기를 초월했다.
언데드들과 혈천교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광경이 점점 멀어진다.
시몬의 소중한 친구들과 1학년 전체가 ‘제물’이 된 광경도 멀어진다.
던전 밖, 교수와 조교들이 피의 고리를 해제하고 있는 모습이 멀어진다.
키젠의 모습이.
고향 레스힐의 모습이.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의 모습이.
대륙이.
이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시몬은 문을 넘어섰다.
“…….”
그것은 새까맣기만 한 심상.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대륙’이 속해 있던 행성은 이제는 먼지의 티끌처럼 보인다.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아?]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시몬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발버둥 쳐왔던 모든 게- 저런 작은 점 안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말야.]그리고 시몬의 옆에 있는 건, 새까맣기만 한 공간에 새까맣기만 한 존재였다.
[대답은?]“…….”
[아, 미안해.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힘들지?]존재가 뭔가를 바꿔주었다.
그제야 시몬은 머릿속에 꽂히는 그 정보들을 외면하고, 잠시 ‘딴청’을 피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눈으로 그 존재를 보았다.
머리와 팔다리가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지만,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간단히 알 수 있었다.
그저 친근감을 위해 시몬의 모습과 비슷하게 바꾼 것이리라.
“넌 누구지?”
시몬이 물었다.
[너희들은 꼭 그렇게 현상을 언어로 규정지으려고 하지. 좋아. 그럼 특별히 눈높이를 극도로 낮춰서-]존재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자,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존재야. 반가워!]“…….”
전혀 대답이 되지 않았다.
[문을 넘어서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여기 나 혼자 있으면 심심하거든.]시몬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주위는 끝없는 암흑.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셀 수도 없는 무수한 점들이 타닥타닥 박혀 있는 광경이었다.
“저기.”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을까?”
[굳이?]존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시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잘 봐.]그러고는 시몬의 한쪽 눈을 손가락으로 잡아 크게 벌렸다.
[그동안의 네가 뭐였는지.]그것은.
이 광활한 암흑공간에 티끌만큼 찍혀 있는 아주 작은 점.
그 점을 더, 더, 더, 더, 확대하고.
그 작은 점들의 집합에서도 구석 중의 구석으로 들어가 거기에 하나 놓여 있는 아주 작은 점을 보았을 때.
그곳에 대륙이 있었다.
[웃기지? 네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게, 사실은 먼지의 티끌만도 못 한 거였어.]“…….”
확실히.
이 스케일을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의 역사는 하찮아. 저렇게 구분하기도 힘든 작은 먼지 속의 알갱이 하나. 저 티끌 같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너희들이 흘린 피와 눈물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하지만 나는……!”
[마찬가지야. 저 알갱이 속에 포함된 알갱이의 알갱이를 구하려고 움직이는 네 모든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어? 무의미해. 아무것도 없어. 그게 바로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하지 않는 이유야.]시몬은 자신의 모든 사상과 마음이 빠르게 감화되는 것을 느꼈다. 존재가 두 팔을 벌렸다.
[관조하자.]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하지 않는 존재.
[나와 같이, 이곳에서, 관조하는 거야.]시몬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과열된 머리를 식혀가며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미안. 거절할게.”
[왜?]의외였다는 듯, 그 존재가 깜짝 놀란 목소리를 냈다.
[왜? 왜? 왜? 여기에 모든 게 다 있는데?]“그와 동시에, 모든 게 없기도 하겠지.”
[…….]존재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시몬이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 티끌이야.”
존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어째서? 이제 모든 걸 알게 됐잖아. 네가 원하는 그 무엇도 한없이 하찮다는 걸!]“네 말대로 인간은 하찮아. 그리고 단순하지.”
시몬이 말했다.
“단순한 만큼 단순하게 생각하는 건 축복이야. 길가에 널려 있는 자갈 하나도, 누군가엔 발에 채는 자갈일 수 있고, 누군가엔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는 물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연구 대상일 수도 있어. 크고 작은 건 중요하지 않아. 하찮고 하찮지 않은 건.”
시몬이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쿡 찔렀다.
“마음이 결정해.”
[하. 하하……!]존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들이 말하는 마음은 자율신경적 흥분이고 뇌에서 나오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해. 하찮음의 상징이야!]“나도 인간이야.”
[아니야! 너는 이제 나와 동등한 격을 누릴 수 있어!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는 그 ‘신’의 영역에……!]“내가 정말로 지금 그 신이라면.”
시몬이 냉정하게 말했다.
“기꺼이 날개를 꺾고 하찮은 지상으로 추락하겠어. 내 소중한 것들은 모두 거기에 있으니까.”
[…….]“도와줄 거지?”
흐흐.
흐흐흐흐흐.
존재가 웃음을 흘렸다.
[못 당하겠네. 아쉬워. 오랜만에 올라온 친구인데.]“…….”
[처음 문을 지나온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그러니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괜찮겠어?]“그래.”
시몬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
[좋아.]존재가 손바닥을 비볐다.
[미안하지만 이 정보들은 돌아가면 잊혀질 거야. 기억하고 있으면 뇌가 그대로 타버릴 테니까.]“응.”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선물은 쥐여주고 보내야겠지. 뭘 원해?]“힘.”
시몬이 눈에 힘을 주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난간을 타개할 힘.”
[알겠어.]그가 두 팔을 벌렸다.
[만나서 진심으로 반가웠다. 친구!]* * *
“……허억!”
시몬이 눈을 번쩍 떴다.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고 미친 듯이 숨을 헐떡였다. 두 눈은 방금 보고 온 모든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다.
[소년!!]쏟아지는 굉음, 목소리, 그리고 칼칼한 모래 냄새.
시몬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뭘 하는 게냐! 정신 차려라!]피어가 본 아머 상태에서 벗어나 직접 혈천교 신도들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피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어요?”
[몇 분! 이제 던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5분 정도 남았다!]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당장 승부를 봐야 했다.
“물러나세요. 피어.”
[그래, 다시 본 아머를……!]“아뇨, 멀찍이 물러나 주세요.”
아직 기억과 감각이, 몸과 뇌에 남아 있다.
시몬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자네, 꽤 힘들여 뭔가를 쓰는 것 같던데.”
실라지도 다가오는 시몬을 보았다.
“잘 안 됐나 보…….”
거기까지 말한 실라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심해에 가라앉은 눈처럼 먹먹하고 음침했다. 시몬은 말없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에는 칠흑.’
검은 힘이 손바닥 위로 거세게 피어올랐다.
‘왼손에는 신성.’
왼손에는 눈부신 신성이 일어났다.
두 개의 힘이 넘실거리며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실라지의 표정에 경계심이 어렸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할 셈이냐.”
“그야.”
시몬이 칠흑과 신성을 마주 보게 했다.
“이러려고.”
“?!”
그리고 칠흑과 신성을 충돌시켰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두 힘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실라지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인가!”
[소년! 두 힘을 그렇게 강제로 부딪…… 음?]두 상반된 힘은 서로 밀어내거나 싸우거나 폭발하는 게 아니라.
융합하고 있었다.
검은 힘과 하얀 힘이 중앙으로 모여들며 원을 형성해 나갔다.
“고마워, 친구.”
시몬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아아아아악!
이내 눈부신 광채와 함께, 칠흑과 신성이 합쳐진 어떤 무언가가 탄생했다.
“이건!”
그것은.
검은색과 청색이 섞인 흑청의 빛.
시몬의 칠흑색과 똑 닮아 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꿈틀대며, 주위의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하나의 구슬이 시몬의 손에 들렸다.
“보이드(Void).”
시몬이 구슬을 움켜쥐자 주위의 차원마저 비틀렸다.
“이 세상을 초월한 공허의 권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