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oning Genius of the Necromancer School RAW novel - chapter (945)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45화
쏴아아아아아—
뿌연 수증기가 가득한 에프넬 내부 목욕탕. 푹 젖은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멍한 표정으로 머리에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은 어깨를 지나 몸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심장의 박동 소리는 무거운 목욕탕의 정적에 발맞추듯 느리게 뛴다.
한동안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가 손을 뻗어 물이 나오던 밸브를 끼릭끼릭 잠근 뒤, 참방참방 젖은 바닥을 디디며 걸어갔다.
호화롭고 거대한 에프넬의 목욕탕이지만,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탕으로 들어온 그녀는 계속 걸어서 탕의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한 번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꼬르르르륵—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며 고요한 물의 세계에 들어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떤 모략도, 가십도, 관심도 없는 물 안의 세계. 잠시나마 외부의 모든 일과 단절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숨을 참은 채 잠자코 멍하니 있었다.
-너무 기대되지 않아요? 자매님.
-그럼요, 그럼요.
그런데 물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직 일과 시간이니 자신만의 세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레테와 비슷한 또래의 소녀 두 명이 수다를 떨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서 새로 들어올 1학년 형제 자매들이 보고 싶어요! 얼마나 훌륭한 신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특기는 뭘까요?”
“저는 올해 선발 1번이 누굴지 기대돼요!”
“저도 그게 가장 궁금해서 이번 ‘신인 예배회’에 자원했다니까요.”
재잘재잘 떠들던 두 사람이 탕으로 들어오려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뜨거운 탕 가운데에서 레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들은 놀란 소리를 내며 굳어 있다가, 레테를 알아보고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cíbĭlis)!”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을 뵙습니다!”
레테는 만사 피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동기들끼리 격식은 됐다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목욕이나 하십쇼.”
“아, 감사합니다!”
레테는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며 탕을 걸어 나갔다. 선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학생들이 숨죽인 채 꺄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을 맞잡았다.
“신인 예배회.”
앞서 걸어 나가던 레테가 문득 내뱉었다.
“기대하고 계심까.”
동기들이 위아래로 휙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특히 올해 예배회는 레테 성녀님께서 직접 주관하신다고 들었어요!”
“저희도 새로운 여신의 형제 자매님들을 정성을 다해 맞이하려고요! 예배회가 끝나는 날에는 파티도 열어줄 거예요!”
“…….”
레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몸을 가볍게 헹군 뒤,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입었다.
신입생 땐 입는 데 한참 시간이 걸리는 에프넬 교복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손이 알아서 척척 움직인다. 교복을 모두 입고 마지막엔 성녀를 상징하는 성의(聖衣)를 가볍게 두른 뒤 밖으로 나갔다.
“오셨습니까, 성녀님!”
여자 목욕탕 앞에서 쩔쩔매며 부복하고 있던 팔라딘들이 바로 외쳤다. 그 모습을 본 레테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박아.”
팔라딘들이 즉각 ‘머리 박아!’ 하고 복창하며 뒷짐을 쥔 채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레테가 쓱쓱 이마를 문지르며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분명히 목욕탕 건물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슴까. 우락부락한 사내놈들이 여탕 앞에서 죽치고 있는데 자매들이 잘도 편한 마음으로 들어오겠다.”
“죄송합니다! 호위 임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에프넬에서 수족으로 부리라고 붙여둔 호위 담당 팔라딘들,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쩜 최측근이 이런 꼴통들뿐일까. 자신을 견제하려는 다른 성녀들이 수작을 부려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그런 재미없는 생각들을 하며 레테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
“일어나!”
땀을 뻘뻘 흘리던 팔라딘 두 명이 즉각 기립하여 열중쉬어했다. 레테는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걸어갔고, 그들이 잽싸게 뒤에 따라붙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성녀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에프넬 본부.”
그렇게 대답하는 레테의 동공에 별모양의 빛이 선명히 번뜩였다.
“아무래도 담판을 지어야겠슴다.”
두 팔라딘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
“대체 왜 안 된다는 검까!”
타앙!
레테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씩씩거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 깍지를 끼고 앉아 있는 건 에프넬 정복 차림의 큰 키의 여성. 신성연방의 총무주교이자, 이번 사태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사람이 죽었잖아! 지금 뭐 하자는 거냐고! 신인 예배회는 당장 취소하고 수사관들을 투입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 아냐?”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레테 성녀님.”
총무주교가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여신께서 직접 굽어살피는 거룩한 하늘섬에서는 결코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단들의 수작으로 혼란스러운 이때, 높은 분들께서 성좌의 권위에 우려를 표하고 계십니다.”
에프넬의 권위와 직결된 문제니 신성한 하늘섬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없던 것으로 할 거라는 일방적인 통보.
레테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계속 피해자가 발생하면? 그때도 덮기만 할 거야?”
“그런 꼴을 볼 수 없으니 보다 못한 레테 성녀님께서 직접 나선 게 아니신지요.”
총무주교가 일말의 감정의 고저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냥 아랫것들에게 맡겨두면, 적당히 한 명이 책임지고 옷 벗고 나가는 것으로 사태는 묻힐 텐데. 오지랖이 넓으십니다.”
“내! 형제 자매들! 그리고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야!”
레테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총무주교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외부에 이 일을 알릴 수는 없습니다. 하늘섬의 일이니 이단심문관도 관여할 수 없지요. 지금 성녀님께서 가진 여력만으로 사건을 해결하셔야 합니다. 저도 일이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니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레테의 눈매가 경멸로 일그러졌다.
“미친 새끼.”
총무주교도 웃었다.
“못 하는 말씀이 없으시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신입생 시절에 더 버릇을 잡아둘 걸 그랬습니다.”
“내가 여길 졸업해서 정식 성녀가 되면 당신부터 십자가에 매달 줄 알아.”
“저야 가장 가까운 딸의 명령이라면 언제든 매달려야겠지만…… 다른 성녀님이 가만히 내버려 두실지 모르겠군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이 오간 끝에, 레테가 성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X발, 감정싸움은 이만하면 됐어. 방금 당신 입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죠?”
“물론입니다, 성녀님.”
“내일 다시 오겠슴다.”
쾅!
그녀는 문을 거칠게 닫고는 성큼성큼 총무주교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기다리고 있던 팔라딘들이 얼른 뒤로 따라붙었다.
“다시 현장으로 가겠어요.”
레테가 말했다.
“서, 성녀님……!”
한 팔라딘이 주춤거리며 말을 이었다.
“주, 주제넘은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내부에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 겠습니까?”
“누굴 적으로 둘지는 제가 결정해요. 형제님.”
레테가 딱딱하게 말했다.
“두 분은 지금 바로 목격자 조사를 실시하십쇼. 다른 가용한 인력은 모두 동원해도 좋아요.”
“하지만 그러면 성녀님의 경호에 공백이…….”
레테가 뒤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처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추, 출발하겠습니다!”
팔라딘들이 헐레벌떡 달려 나갔다. 레테는 현장이 있는 에프넬 거리로 걸어가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바람도 후덥지근하다.
답답한 하루하루.
피곤에 찌들고 힘들다.
주위를 조금 더 좋게 바꾸려 노력할수록, 무수한 갈등과 저항에 직면한다.
휴식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레테 성녀님은 신기하다니까요. 만인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 성녀의 삶! 누구나 꿈꾸는 생활을 하면서도, 정작 성녀님이 행복감을 느끼는 건…… 섬 아래에서 오는 편지! 그리고 방학 때 시골에 놀러 갈 생각뿐!
리리넷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성녀가 되어서 나는 행복한 걸까?
신성연방에서 태어난 모든 소녀들의 꿈을 누리고 있다는데, 잘 모르겠다.
사실 전부 배부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성녀가 되어서 내 개인적인 행복은 중요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저.
“안나 선생님 보고 싶다.”
오늘도 그렇게 버릇처럼 맥없이 중얼거린 레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힘들어도 멘탈을 붙잡아야 한다.
언젠가 다시 안나 선생님을 만나서, 떳떳하게 안나 선생님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대륙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을 그 녀석을 만날 체면이 선다.
뿌우우우우우우-!
상념에 빠져 있던 레테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늘섬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입구, ‘천국의 문’을 통과한 신성열차가 막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내리고 있다. 역에 마중 나온 사람들과,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서로 얼싸안거나 인사를 주고받고 있다.
신성열차가 들어오는 광경이야 에프넬에 다니면서 늘 지겹도록 보던 광경인데.
어쩐지 오늘은 새롭다.
“실례지만, 에프넬 학교 기숙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레테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멀리 로브를 눌러쓴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질문을 받은 중년 남자가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보인다.
‘길을 따라 쭉 나가서 큰 공원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틀면 되는데.’
가서 알려줄까 생각이 들었지만 또 무슨 오지랖을. 성녀 신분으로 저기 가봐야 사람들이 그라툴라가 어쩌고 가까운 딸이 저쩌고 난리가 날 게 뻔하다. 역이 마비될 것이다.
“실례합니다!”
이번엔 그 사람이 에프넬 학생에게 걸어가 싹싹하게 묻는 모습이 보인다. 학생이 답변을 해주는 걸 본 레테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발걸음을 돌렸다.
***
현장에 도착했다.
수사의 ‘수’ 자도 모르는, 머릿속에는 오로지 신앙과 근육 단련 같은 화제뿐인 젊은 팔라딘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흩어져 있었다.
레테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설렁거리며 등장하자 모두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라툴……!”
“닥쳐요.”
“예!”
레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든 뭔가 알아낸 점 있으심까.”
팔라딘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다가왔다.
이내 레테에게 여러 보고가 이어졌지만, 그녀를 만족시킬 만한 대답은 없었다.
단순히 이런저런 명령을 수행했다 하는 형식적 보고에 불과할 뿐,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하며 단서를 확보한 사람은 없다.
‘그래도 수확이 아주 없는 건 아냐. 신입생들 숙소에서 살해 사건이 벌어진 당시, 외부인이 없었다는 사실은 확실시됐어. 범인은 역시 그 아이들 중에 있을 확률이…….’
“성녀님!”
한 팔라딘이 걸어 들어왔다.
“한 형제가 성녀님을 뵙고자 합니다.”
“뭐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수사 중이라 바쁜 거 안 보임까. 고해성사 같은 건 나중에 해요.”
“그게, 이번 사건에 대해 제보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하늘섬 주민임까?”
“신분증을 확인해 보니 외부인인 것 같습니다.”
레테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변명거리를 대고 성녀인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나봤다.
“당신이 적당히 이야기만 들어보고, 영양가가 없는 것 같으면…….”
“실례합니다.”
그 순간.
귓가에 꽂히는 듯한 목소리에 레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 했더니 방금 역에서 본, 길을 묻던 그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저 하얀 로브.
아까는 멀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옷이었다.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남자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며 미소 짓는 순간, 레테는 시간이 멈추고 광명이 내리쬐는 것만 같았다.
인상이 살짝 바뀐 것 같기도 하지만 레테는 확신할 수 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눈앞에.
시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