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star From Age 0 RAW - Chapter (1059)
0살부터 슈퍼스타 1059화
서준은 그때를 떠올렸다.
운전하고 있던 서준에게 아픈 엄마를 구해달라고 미약한 신호를 보냈던 아기와 몸이 아파도 배 속의 아기부터 챙기던 엄마. 그리고 거의 울듯 다급하게 통화하던 아빠까지.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서로를 똑 닮은 아빠와 엄마와 아기가 웃으며 찍은 사진.
무사히 태어난 아기는 운동에 재능이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렇게 행복한, 미래가 눈부신 가족이 첫 생의 세계에서는 이런 결말을 맺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한숨이 겹겹이 쌓였다.
‘나비효과라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그저 ‘이서준’이 없는 세계가 궁금했을 뿐인데, 이렇게 상상도 못 한 이야기들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준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아 있는 사람들, 크나큰 슬픔을 겪었을 [화]팀이 걱정됐다.
“기록석.”
“응?”
서준이 기록석을 불렀다.
서준에게 건네줄 만한 페이지가 없었는지, 종이 사냥은 잠시 멈춰 있는 상태였다.
천마와 리치왕은 어디로 간 건지 집필실 안에 없었고, 파르비타와 제루엘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준의 무릎 위에 있던 미밍은 전생들이 새 페이지를 사냥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화 팀에 관한 이야기가 적힌 페이지를 찾아줄 수 있을까?”
“어렵지 않은 일이지.”
기록석이 능력을 발휘했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페이지 중 하나가 반짝 빛났다.
파르비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한때 최전선에서 전쟁을 이끌었던 천사 출신 신답게 제루엘이 창을 날려 그 페이지를 사냥했다.
“미밍!”
페이지를 건네받은 미밍이 폴짝폴짝 뛰며 서준에게 그 페이지를 건네주었다.
서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 페이지를 받아 들었다.
‘제발 좋은 소식이기를.’
아니, 무난하고 평범한 소식이라도 괜찮았다.
‘설마 지금보다 더 나빠지진 않겠지.’
서준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P.6XX】
『한준서는 문득문득 황도윤과 황지윤 남매를 떠올렸다. 터널 사고로 죽은 날로부터 1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당시의 기억은 생생했다.
[화] 오디션으로 서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을 준비한 건 몇 개월도 채 되지 않는데, 왜 이렇게 그리운지 잘 모르겠다.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배우와 감독이라서 그런가.
평생 잊지 못할 두 사람을 떠올리며 한준서는 걸음을 옮겼다.
의식하지 않고 걸으니 다리가 절뚝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행과 함께 팸플릿을 보느라 한준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독립영화제가 열리는 곳.
만약 재작년 11월에 [화]가 촬영되었다면 작년 4월 한국독립영화제에 출품했었을 거다.
이제는 결코 완성되지 못할 [화]가 오르지 못했던 무대를 둘러보는 한준서의 표정이 안타까워졌다.
‘화가 출품작이었으면 분명 좋은 성적을 냈을 텐데…….’
어쩌면 개막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출연하게 되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황지윤 감독과 이제는 해산한 [화] 팀이 정성껏 준비했던, 있는 힘을 다해 촬영할 예정이었던 독립영화 [화]는 그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지금은 해산한 [화] 팀.
한준서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팀원들을 떠올렸다.
커다란 슬픔을 겪은 [화] 팀은 남매의 장례식이 끝난 후 해산했다.
학교에서 빌린 장비와 제작비 그리고 준비했던 소품들과 의상들도 다 정리했는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만든 것들인 데다가 황지윤과 황도윤의 의견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어 한바탕 눈물바다를 만들고야 말았다.
황지윤의 친구, 영화과 김세연이 황지윤을 대신에 [화]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나왔었지만, 김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힘들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남매의 죽음은 팀원 중 몇몇은 휴학을 할 정도로 영향을 줬지만, 다행히도 진로를 바꾸거나 이제 영화는 안 하겠다는 팀원은 없었다.
[화] 팀은 때때로 슬퍼하면서도, 각자의 속도로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긴급수술을 했던 박우진도 큰 후유증 없이 회복한 후.
한자리에 모인 [화] 팀은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 다시 모여 [화]를 찍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다들 이야기했다.
한준서에게도 힘든 1년이었다.
배우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엑스트라로 촬영 현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황지윤과 황도윤이 떠올랐다.
‘분명 멋진 감독과 배우가 됐을 텐데.’
게다가 외할아버지의 건강도 나빠졌다.
한준서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크게 걱정한 탓에 몸까지 안 좋아진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다.
“하아…….”
연기하는 손자가 가장 멋있다던 외할아버지는 한준서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씀하셨다. 행복해야 한다면서. 행복한 게 최고라면서.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좋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준서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에도 한준서는 연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엑스트라밖에 못 했지만.
또 이런저런 영화제에 다니며 작품들을 관람했다. 배울 점은 있는지, 눈여겨볼 만한 감독이나 배우는 있는지.
오늘도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었다.
한국독립영화제의 개막식은 이틀 전이었고 오늘은 선정된 출품작들을 상영하는 날이었다.
개막작과 폐막작이 아닌 만큼 그렇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선정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찮은 작품이라는 걸 증명했다.
물론 출품작 안에서도 사람들의 평가는 나뉘었다.
“잘못 골랐나?”
한준서가 볼을 긁적였다.
관객석의 좌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걸 보니 그다지 평이 좋은 작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 취향은 다르니 자신에게는 재미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제목이 끌렸다.
같은 소재라도 감독과 작가에 따라서 다르게 쓰인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한준서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저기 계시는……!”
“오성태 감독님이 한예대 영화과 출신…….”
앞쪽이 시끌벅적했다.
들려오는 내용이 [무명 화가]의 감독 오성태가 온 것 같았다.
관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오성태 감독이 자리에 앉고, 곧 상영관이 어두워지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
시작부터 기시감이 들었다.
밭길 사이로 달려오는 마차, 그리고 거기서 내리는 남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꼬마.
머릿속에서 저절로 마차가 자동차로, 꼬마가 성인으로 바뀌었다.
한준서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그건 황지윤과 황도윤, 그리고 [화]팀 몇 번이고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던 [화]의 첫 장면이었다. 관객들에게 보여줄 첫 장면이었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준비했었다.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한준서의 얼굴과 몸이 굳어버렸다.
무어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이후 장면들도 그랬다.
‘민한’을 꼬마로 설정하는 바람에 바뀌어버린 장면들과 소소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그건 누가 봐도 [화]였다.
[吾等(오등)은 玆(자)에…….]기미독립선언문을 읽는 것도,
[여기에도 꽃이 피었어…….]눈 위에 피로 꽃을 그리는 것도,
[8월.] [한양에서 편지가 도착했다.]시간이 지난 어느 날 들려오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민한’의 내레이션도.
‘이건……!’
이건 황지윤 감독이 중학생 때부터 구상해왔다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황지윤과 황도윤, 그리고 슬픔에 잠겼던 [화]팀과 한준서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우리의 [화]가 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멈췄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목에 핏줄이 섰다. 한준서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좌석의 팔걸이를 부서뜨릴 듯이 꽉 쥐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냐고, 누가 감히 이걸 영화로 만들었냐고 고함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한준서는 그러지 못했다.
“……허.”
영화가 끝나고 나타난 문장 때문이었다.
[고(故) 황지윤 감독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X발.”
(중략)
만의 하나를 위해, 한준서는 김세연에게 연락했다.
혹시 오성태를 아는지, 황지윤이 오성태와 친한 사이였는지, 둘이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는지.
그에 김세연은 대답했다.
아는 사이기는커녕 원수 사이가 따로 없다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김세연에 한준서는 [무명 화가]에 대해 알려주었다. 잠시 어이없다는 듯 듣고 있다가 펄펄 날뛰는 김세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X끼가 표절한 걸 거예요!
증거를 찾아보겠다는 김세연과의 전화를 끊은 한준서는 걸음을 옮겼다. 아까 오성태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봐두었다.
한준서도 안다.
이쪽 세계에서 자신의 작품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조작가는 메인작가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문장을 빼앗기고 설정을 빼앗긴다.
공동 연출이라는 명목하에 시나리오를 통째로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
이름이 남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나도 똑같은 이야기를 떠올렸다면서. 내가 더 빨리 떠올렸다면서.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죽은 사람의 작품을 표절하고, 보란 듯이 황지윤의 이름을 가져다 쓴 건 도를 넘었다.
분명 화제성을 위한 것이리라.
같은 학교 후배가 영화 촬영을 하러 가다 죽었고, 그 영화를 이어 만들었다는 건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하, 제가요?”
이를 갈듯 이야기하는 한준서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던 오성태가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꼬았다. 오성태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김세연과 [화] 팀의 연락일 터였다.
“그럴 리가요.”
오성태는 그 연락들을 무시하며 말했다.
“무명 화가는 지윤이가 저한테 맡긴 영화입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보고 만들어달라고 했었죠.”
곧 죽을 날을 받아둔 노인도 아니고, 겨우 대학생에 불과한 황지윤이 언제 자신이 죽을지 알고 그런 부탁을 한다는 건가. 그것도 친하기는커녕 사이가 좋지 않은 오성태에게.
뻔뻔한 오성태의 태도에 한준서는 이를 뿌득 갈았다.
“그걸 믿으라고……!”
“뭐, 그쪽이 믿든 안 믿든 상관은 없죠. 대본 원본도 있으니까요. 지윤이가 저한테 준 게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대본을 구했겠습니까?”
황지윤의 노트북을 뒤졌던 2년 전의 일을 떠올린 오성태가 비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2년이면 모든 증거가 사라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죽은 황지윤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누가 그걸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한준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 영화, 좋은 후기 남겨주세요. 전 지금 인터뷰하러 가야 해서요.”
누가 들을까 싶어 철두철미하게 존댓말을 쓰던 오성태가 떠나고.
“지윤아…… 도윤아…….”
밀려오는 무력감에 한준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물기가 섞인 목소리로 돌아오지 못할 남매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하.”
[무명 화가]라는 글자가 나올 때부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글을 읽던 서준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야 겨우 한마디를 토해냈다.“X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