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instinct RAW novel - Chapter 229
드라니엘은 그런 말을 하고는 승기를 응시했다. 상위 차원에 대한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승기의 생각은 달랐다. 드래건과 엘로힘이 얽혀 있는 상위 차원, 우주의 대변혁 어쩌고저쩌고 하는 부분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부분은 반 알테인 제국 세력과 아밀리, 엘리스, 큐를 납치된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돌리지 마. 반 알테인 제국 연합 세력? 마계와 서브가든, 드래건, 엘로힘, 아스가르드가 모여서 만들어졌다? 그래. 믿기지 않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치자. 그 정도의 세력이라면 알테인 제국을 직접 공격할 수도 있겠지. 렙탈리안도 더하면 아주 환상적이야. 알테인 제국만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냥 날 공격하면 되는 일이지. 엘리스, 아밀리, 큐를 납치할 이유가 없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지?”
라고 말했다.
-생각이 다르지. 원하는 것도 다르고. 게다가 각 세력들은 그들의 세력에서 소수파다. 엘로힘, 마계, 서브가든, 드래건, 아스가르드 중 다수는 공식적으로 알테인 제국을 지지한다. 그들이 힘을 합쳐 알테인 제국을 공격하게 되면, 우리들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단 말이지. 다들 그런 사태는 피하고 싶은 거다. 실제로 그들이 처음부터 그대의 여자들을 블랙홀로 넣은 것이 아니야. 마신 아스타로트와 알테인 제국의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 마계의 일부 세력이 엘리스를 납치했다. 그대의 여자 둘이 엘리스를 구하려다가 사로 잡혔다. 마신 아스타로트가 대노하여 손을 써왔고, 사태가 불리해진 놈들은 그대의 여자들을 미끼로 우리들의 일부에게 보호를 요청했지. 나는 그 사실을 듣자마자 아스타로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들은 그대가 오기 전까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이었지만, 도리어 사태가 커져버렸어. 우리들 중 일부가 저쪽에 붙어버렸다. 우리의 결정사항을 말해버렸지. 이야기가 복잡해졌어.
드라니엘은 이런 상황 본의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승기는
“도와줄 거지?”
하고 화제를 돌렸다. 보아하니 드래건의 도움이 없이는 상황을 풀어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였다. 마신이나 엘로힘, 아스가르드, 서브가든은 인류의 마음을 휘둘러 처리하면 되지만 드래건과 드래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드래건과 드래곤은 철저하게 개인주의다. 드래건이 용신으로써 드래곤을 돌보고 있긴 하지만, 드래건이 지시를 내린다고 드래곤이 말을 듣지는 않아. 호되게 두들겨 패면 듣는 시늉이나 할까. 더구나 이렇게 된 것을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다들 성질이 급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 우리들이 돕기를 원한다면 아이를 만들어라. 결혼은 하지 않아도 돼. 아이만 만들어. 아이만 만들면 우리는 움직인다.
드라니엘의 이야기는 어딘가 묘했다.
“아이를 만들라? 육아나 결혼은?”
승기가 의문을 표했다. 이에 드라니엘이 눈을 치켜떴다.
-건방떨지 마라. 인간. 우리가 원하는 것은 드래곤과 그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다. 이는 우리들이 그 아이의 후손을 통해 태어나기 위해서다. 알테인 제국과는 별개의 세력으로써 존재할 것이다. 우리들이 거기에 편입되는 일은 없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 드래곤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이만 만들어라. 그리하면 너는 우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알테인 제국과 우리들의 제국이 우주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게 될 것이다. 드래건들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승기는 자신도 모르게 역겹다는 얼굴로
“강간이라도 허락한다는 뜻이냐?”
라고 물었다.
-그렇군. 허락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대로는 어림도 없는 일. 내 손으로 마검 이그펠트를 강화시킬 때가 올 줄이야. 한때 이그펠트는 드래곤 슬레이어로 악명이 높았다. 불쾌한 검이야. 인간의 마음이 모여서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되다니. 참으로 같잖아.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드라니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승기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이 갈리지는 것 같은 고통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수욱.
승기의 가슴에서 마검 이그펠트가 솟아올랐다. 승기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있던 이그
펠트가 강제로 분리된 것이다. 드라니엘은 잠시 살펴보더니.
-이미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 힘… 그래. 이 힘이 있었기에 인류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었겠지. 드라니엘이 말을 쏟아냈다.
팟.
마검 이그펠트의 몸체에서 오색의 섬광이 차례대로 토해졌다. 승기와 라샤가 눈을 감았다. 동시에 마검 이그펠트가 승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악!”
승기가 절규를 토했다.
-개조는 끝났다. 그대의 영혼과 마검 이그펠트는 하나가 되겠지. 혈손 대대로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 드래곤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여성 드래곤은 반드시 제압할 수 있는 힘. 보통의 인간 여성처럼 무력화되겠지. 하지만 너와 인간 사이의 아이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드라니엘이 설명을 마쳤다. 지면에 떨어진 승기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통이 등골을 타고 전신의 감각 세포를 뒤흔들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보고 있던 라샤가 검을 뽑았다. 승기의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팟.
섬광이 있었다. 라샤는 검을 뽑은 자세 그대로 크리스탈 속에 넣어졌다. 호박 같은 모양새였다. 드라니엘이 손을 쓴 것이다.
“거절한다.”
승기가 말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정신을 흔들어 놓았지만 드라니엘이 원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식.
드래건과 드래곤은 우주의 일각을 지배하는 생명체로, 어떤 형식으로든 승기의 자식에게 풍요로움을 선물할 테지만 승기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부분도 우리들에게는 걱정이었다. 드래곤은 우리들이 원해서 도달한 퇴화 생명체. 너는 인류의 소망이 만들어낸 생명체. 둘이 만나서 생긴 자손이 어디에 속하느냐
는 우리들이 결정해야만 하는 문제다. 너와 드래곤의 아이는 절대로 알테인 제국에 속할 수 없다. 아이를 낳는 모체도 그렇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 한시적으로 너의 기억을 닫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네가 드래곤 여성과 관계를 가져 후손을 만든다면, 기억을 되찾을 것이다. 우리들은 알테인 제국에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와 알테인 제국 사이의 동맹을 위한 것.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라. 그때까지 너의 모든 것은 우리들이 돌보아 주겠다.
드라니엘은 그런 말을 하고는 승기의 정신에 손을 썼다.
“이…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승기가 괴성을 토했다. 정신을 헤집는 드래건의 막강한 정신능력에 맞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생존 본능 DNA인자에 소리쳤다.
이런 일을 절대 납득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황금빛 기운이 승기의 몸속 깊은 곳에서 흘러 넘쳤다.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힘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드라니엘의 정신간섭을 밀어내고 있었다. 동시에 보고 있던 금발, 금안의 여자가 움직였다. 승기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퍽.
승기의 등이 기억자로 꺾였다. 황금빛 서기가 만들어내는 방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커헉.”
짧게 신음을 토한 승기의 몸이 쓰러졌다. 이에 금안, 금발의 여자가 드라니엘을 보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알테인 제국. 맛있어 보이잖아. 강자가 황제의 자리를 잇는다면 드래곤의 혈손이 황제가 될 거야.”
라고 말했다.
-나한테 따지지 마라. 우리는 인질이 잡혀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이 위험해.
드라니엘이 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드래건으로 남아 있을 걸 그랬어. 그랬다면 그 멍청이들 블랙홀에 넣고 갈아버릴 수 있는데 말야.”
여자가 말했다.
-성질 좀 죽여. 아이들의 자잘한 멍청한 짓에 일일이 대응 하니까, 금색의 망나니라고 불리는 거 아니냐. 드라니엘이 핀잔을 주었다.
“시끄러. 고주망태. 술만 처먹으면 난동 부리는 너보다 나아. 난 적어도 이유가 있단 말이야. 이유가.”
여자가 눈을 치켜떴다.
-끙.
드라니엘이 신음을 흘렸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방출할 수는 없잖아. 정말로 여자애들 강간하게 만들거라면 내가 용서 안 해.”
여자가 물었다.
-당분간은 네가 데리고 살아라.
드라니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여성은 안색을 굳히며
“무슨 의미야? 내 성질 알잖아. 시시껄렁한 농담 하지 마.”
라고 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드래곤이 되어 일을 끝내고 싶지만, 너도 내 입장 알거다. 알테인 제국이 위험해. 녀석들 중에는 이 자가 여기에 있는 동안 알테인 제국을 없애자는 놈도 있어. 그럼 문제가 복잡해진다.
드라니엘이 말했다.
“내가 없어도 되겠어? 호른이 공격 받을 수도 있어.”
여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라. 다 방법이 있다. 나는 술수를 부리는 것에 있어선 드래건들 중 최고다. 어린놈들의 잔머리에 당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야. 문제가 되는 것은 알테인 제국이다.
드라니엘은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내가 이 남자의 아이를 가지면? 알테인 제국에 드래곤의 후손을 넘겨주면 곤란한 거 아냐?”
여성이 반론을 폈다.
-그때는 내가 태어나주지. 너를 믿는다. 트리엘.
드라니엘이 답했다. 여성, 트리엘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너를 낳아서 키우라고? 미친 소리 작작해. 너 같은 자식을 키우다가는 홧병 걸려 죽어.”
라고 말한 뒤 발을 돌렸다. 엎어져 있는 승기를 안아서는 사라졌다. 드라니엘은 라샤를 함선 루비 나이트로 옮긴 후, 함선 루비 나이트 자체를 결계로 감쌌다.
대상의 시간 흐름을 동결시키는 드래건의 능력.
영원의 고요.
드라니엘은 함선 루비 나이트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드래건과 인간, 우주의 운명을 건 머리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승기가 눈을 떴다. 천장의 무늬, 매일 보았던 풍경이지만 어쩐지 낯설었다. 일어나 창가에 서서 시선을 던졌다.
맞은편에 보이는 고층 빌딩.
매일 보았던 풍경이라고 생각했지만 낯설었다. 뭔가 잊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일까? 이름은 떠올랐다. 나이도 떠올랐다. 성별도 알 수 있었고, 상식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외의 것들은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거나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달칵.
“일어났어?”
금발의 미인이 인사를 건넸다. 파자마 차림이었다. 이에 승기는 여인의 이름과 어젯밤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트리엘.
인간이 아닌 드래곤.
드래곤 가운데서도 최강에 속하는 여인.
며칠 전, 여자 친구와 헤어져 처음 보는 바(Bar)에 갔는데 트리엘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몇 잔의 술에 취기가 돌아 말을 걸었다. 그리고 서로 푸념을 늘어놓다가 마음이 통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근처 호텔에 갔다.
그리고 지금.
아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승기는 뭔가 아닌 것 같아서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얼떨떨한 얼굴로
“응. 언제 일어났어?”
하고 질문을 건넸다.
“1시간 정도. 생각할 것이 있어서 거실에 있었어.”
트리엘이 답했다.
“생각할 것?”
승기가 물었다.
“우리 관계.”
트리엘은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는
“나는 드래곤, 그쪽은 인간. 나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야. 그쪽은 순수하게 인간이지만. 맺어져도 자식을 낳을 수는 없어.”
라며 말을 쏟아냈다. 승기는 거의 반사적으로
“내가 싫어?”
하고 물었다.
“싫지는 않아. 싫지 않아. 하지만… 즉흥적이야. 이런 일은 좀더… 시간을 들여서 감동을 나누고. 그래야 해.”
라고 답했다.
“달리 좋아하는 사람 있어?”
승기가 화제를 돌렸다.
“없어. 있었으면 이때까지 혼자 살지 않지. 이렇게 보여도 아득히 오래전에 1만 살이 넘었어. 고룡 중의 고룡. 할머니 같은 존재지.”
트리엘이 말했다.
“내 눈에는 젊고 예뻐. 최고야.”
승기는 그런 말을 하고 트리엘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트리엘의 허리를 두르고 트리엘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승기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트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술 마실래?”
하고 물었다.
“아침부터? 이제 막 일어났잖아.”
승기가 의문을 표했다.
“괜찮아. 출근할 필요 없어졌거든. 애초부터 취미 같은 것이라서… 곤란한 것은 없어. 그쪽은 어때?”
트리엘이 화제를 돌렸다.
“승기. 그쪽이라 부르지 마. 이름이 있어.”
승기 역시 화제를 돌렸다.
“알아. 그래서 어떻게 할래?”
트리엘이 화제를 바꾸었다. 승기는 반사적으로
“나는… 나는… 음.”
까지 말한 뒤 머리 속을 뒤적였다.
직장은? 가족은? 학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잔 줘. 괜찮겠지.”
라고 답했다.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뭔가를 잊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잊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트리엘과의 만남에 관한 것 말고는 모든 것이 흐렸다.
“따라와.”
트리엘은 그런 말을 하며 승기의 품을 벗어났다. 승기가 뒤를 따랐다. 방을 빠져나가, 거실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바(Bar)와 같은 시설이 있었다.
트리엘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근처에 놓여 있는 벨을 눌렀다. 그러고는 승기에게 자리를 권하고
“잠시 기다려. 사람 올 거야. 여기 메뉴판.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둬.”
하고 말했다.
승기는 떨떠름한 얼굴로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메뉴판에 적힌 이름들은 하나 같이 낯설었다. 어째서 일까? 생각하고 있으니 트리엘은
“부담 갖지 말고 아무거나 시켜. 술은 술이야. 뭐든 마시면 취하지.”
라고 말했다. 승기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앉았다. 앉아서 5분 정도 망설이고 있으니 바텐더 복장을 입은 여자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