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110
설산의 전투(3)
한창 발타라 전사를 몰아붙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붉은 섬광이 시야를 절 반으로 갈랐다.
-세로 베기!
기겁하며 피트는 방어 자세를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적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핏물이 튀었다.
“으윽!”
욱신거리는 어깨의 통증을 느끼며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간신히 비껴 흘리긴 했지만, 한 치만 더 허용했다면 잘리는 건 어깨가 아니라 목이었을 것이다.
‘위, 위험했다……
아무리 이쪽이 수적으로 우세하다 해도 개인의 실력은 저 발타라 전사가 훨씬 우위다.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이어진다.
어둠의 화신 일행을 상대하는 게이브 쪽을 보며 피트는 입술을 비틀었다.
‘치사한 라트나 놈들.’
게이브는 이런저런 명분을 달아가면서 이계인 전원을 발타라 전사에게 붙였다.
확실히 이유만 들어 보면 꽤나 그럴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트는 또 다른 진실을 알고 있었다.
‘뻔하지. 자신들만 안전한 길을 가겠다는 거잖아?’
설마 이 정도의 수적 우위가 있는데 게이브 일행이 패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희생자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리고 그 희생자가 자신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전투에서 승리해 봐야 자신이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당연히 죽어도 아무 상관 없는 이계인들을 이 괴물 발타라 전사에게 붙이고, 자신들은 안전하게 레벨 낮은 쪽만 상대해 소중한 생명을 보우하겠다는 것이 진짜 속마음이 다.
‘알고는 있지만, 복종해야 하는 처지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군.’
어차피 이계인들도 손발 맞는 자신들끼리 싸우는 게 더 나았다.
괜히 모르는 인간이 끼는 쪽이 오히려 전술에 혼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반발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게이브의 저 명분은 웃기는 소리다.
‘우리가 혹시라도 화신을 살해 할지도 모른다고?’
저들은 아직도 이계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신을 죽이겠다는 목적의식 따위, 이미 흐릿해진 지 오래인데 말이야.’
수십 년 전,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를 떠올리며 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류한빈은 6인의 이계인을 보며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인종 참 다양하네. 미국인들인가?
여러 인종이 주?조연으로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응당 할 법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들 중 진짜 미국인은 하나도 없다.
피트는 이탈리아계 캐나다인,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 무슬림이었고, 30대의 흑인인 아크와시는 아프리카 콩고인이었다.
앨리스는 서양식 이름이지만 홍콩 출신이었고, 제프리는 누가 봐도 동양인이지만 국적은 영국인이다.
오히려 금발의 서양 여성으로 보이는 린 스옌이 중국인이었다.
중국 소수민족 중엔 러시아 쪽 피가 섞인 이들도 꽤 있으니까.
마신 옴팔로스는 자질이 있는 지구인이라면 무작위로 뽑아서 소환해 버린다.
당연히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가 출신이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씩 살아남은 자들에겐 더 이상 출신국 개념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20대, 혹은 30대 초반에 라트나에 떨어져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이미 고향에서 산 시간보다 이 세계에서 살아온 기간이 훨씬 길다.
그런 만큼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도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그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지만.’
유사 세계를 벗어나 라트나에 처음 떨어졌을 땐 피트 역시 꽤나 흥분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 손에 넣은 강력한 능력.
레벨을 올려 점점 강해지는 자신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약한 자들이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는 건 지구에선 쉽게 얻기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까놓고, 이 세계가 지구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는가?
일단 사람들의 사고방식부터가 너무 달라 적응하기만도 벅차다.
기껏 적응한다 해도 생활 자체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춥고 음식은 심심하며, 귀족이 걸친 고급 의복이 지구의 싸구려 옷가지만 못했다.
신발조차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지구에선 단순한 운동화 하나에도 수많은 기능적인 연구가 집결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심심한 건 음식뿐만이 아니 었다.
삶은 더더욱 심심하다.
현대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즐거움’ 하나에 매진해 문화를 발전시켜 왔던가?
음악은? 노래는? 영화는?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놀이란, 고작 축제 열고 자기들끼리 어울려 춤을 추거나 가끔 찾아오는 극단의 연극이나 묘기를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이 세계에도 지구에선 얻을 수 없는 쾌락이 존재하긴 했다.
‘재수 없는 사내새끼 퍽퍽 쳐 죽일 수 있다는 거랑, 아무 계집이나 마음대로 펑펑 덮칠 수 있다는 거 말이지.’
초반엔 꽤나 유쾌한 경험이었다.
금기를 어긴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진 못했다.
역지사지는 딱히 엄청난 공감능력이 있어야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단순히 처지만 바뀌어도 간단히 느낄 수 있다.
저 말은 곧 이계인 자신이 재수없는 사내새끼가 되어 퍽퍽 처맞아 죽을 수도, 라트나인에게 사로잡혀 무참하게 강간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대다수의 이계인들이 처음 라트나에 떨어져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 했다.
그리고 대부분 비참하게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오직 지구로 돌아가려는 꿈만 꾸었다.
마신 추종자가 되어 어떻게든 여신 살해에만 열을 올렸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면?
도로 지구로 귀환하고픈 생각이 옅어져 버린다.
분명 라트나는 지구에 비해 여러모로 불편한 세계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레벨이 낮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 세계엔 마법이 실존한다.
귀족의 의복이 지구의 싸구려 옷가지만도 못하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급 귀족만 보고 다녔기 때문이다.
진짜 고위 귀족이나 왕족은 온갖 마법이 걸린 근사한 의복을 입고 다닌다.
신발도 알고 보니 충분히 편했다.
당장 지구에서도 제대로 만든 중세 시대 수제 가죽 부츠는 어지간한 운동화보다 안락한 것이다.
그저 너무 비쌀 뿐이지.
음식도 마찬가지.
고위 레벨이 되면 온갖 맛있는 음식을 접할 수 있다.
역시나 너무 비쌀 뿐.
라트나라고 지구에 비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편의성을 지구처럼 모든 대중이 향유할 수 없을 뿐이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돈이 많아질수록 삶도 편해졌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현대인 특유의 심심함뿐인데, 이는 레벨 50부터 주어지는 쾌락 보상이 해결해 주었다.
레벨 50이 넘은 이계인은 라트나의 원주민을 죽여 강렬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
그 쾌락은 지구의 마약과 비견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마약과 달리 육체적인 부작용도 없다.
수십 년을 살아남아 충분히 적응한 이계인에게 라트나 대륙은 영원히 늙지 않고, 지속적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으며, 딱히 큰 불편함도 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지구로 돌려보내 준다고?
‘하긴, 이 능력을 고스란히 지닌 채 지구로 돌아가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피트는 비웃음을 흘렸다.
지구엔 라트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지구인을 죽여 봐야 쾌락 보상을 얻을 수 없다는 소리다.
‘과연 이 보상을 포기할 이가 몇이나 있을까?’
악타룬의 이계인들이 뇌제 가르한의 제의에 환호성을 터트린 것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악타룬을 벗어나 다시 라트나인을 죽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
피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함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최강의 3인이 신이 되건 말건 관심 밖이다.
중요한 건 눈앞의 쾌락 보상뿐!
눈앞의 발타라 전사, 추정 레벨 110 이상인 이 강력한 ‘라트나 인’을 향해 여섯 이계인은 더더욱 열을 올려 덤벼들었다.
“아, 진짜 이제 좀 죽어라! 더럽게 잘 버티네!”
“좋잖아? 강하면 강한 만큼 보상도 크겠지!”
“물론 레벨 5로 측정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헛짓하는 것은 아니니까.”
설령 쾌락 보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직 이들에겐 ‘디저트’가 남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분지의 한 거목 사이에 숨어 있는 저 금발의 청년.
세 번째 여신의 축복자, 레온하트.
발타라 전사와 달리 그는 레벨이 명확히 측정된다.
r종족 : 인간 영술사 1V 112j확실하게 고위 레벨이며, 확실하게 쾌락 보상을 줄 존재였다.
심지어 먹기 좋게 잘 포장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 녀석을 죽여서 보상이 들어오면 좋고……
“아니더라도 저 녀석이 남아 있으니 문제없어!”
자기들끼리 떠들며 이계인들은 계속해 류한빈에게 공세를 퍼부었다.
앨리스가 흥분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뻗었다.
“관통하는 비전의 섬광, 아케인 스트라이크!”
눈부신 빛의 기둥이 작렬했다.
웅장한 폭발이 설산을 뒤흔들었다.
콰아아앙!
* * *
거목 뒤에 숨어 레온하트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위험하군……
거리가 너무 멀어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프라나가 봉인된 지금의 그는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여섯 명은 이계인들이다.
저들의 전투법이며 사용하는 기술 등을 보면 틀림없었다.
반면 게이브는 확실하게 라트나 인이었다.
함께 싸우는 저 이름 모를 두남녀 역시 라트나인다운 전투 방식을 보이는 중이었다.
‘……진짜 위험해.’
긴장하며 레온하트는 안색을 굳혔다.
‘생사초월자의 심복이 이계인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다고? 그것도 아무리 봐도 레벨 90은 넘어 보이는 초강자들을?’
한빈 일행은 레온하트 앞에서 굳이 대화를 조심하지 않았다.
류한빈이 지구인이라는 사실만 감췄지, 나머지는 대놓고 떠들어 댔다(실은 들으라고 일부러 떠든 면도 없지는 않았다).
덕분에 엿들은 것만으로도 상당히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점점 더 정황적으로 저들의 말이 그럴싸해지지 않는가?’
라트나 전역에서 일어난, 고위레벨 이계인들의 대거 출몰 사건.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밤의 이 변.
게이브가 이계인을 수하로 부리는 저 괴상한 광경까지.
한빈 일행의 주장대로 최강의 3인이 배후라면 모든 것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저들이 패할 경우 나도 무사하진 않겠군.’
이계인과 손잡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저 발타라 전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레온하트 자신이라도 저 6인의 이계인을 한꺼번에 상대하라면 결과는 필패였다.
도주조차도 성공률이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치자니, 프라나가 봉인된 몸으로는 설산 어딘가에서 객사하기 십상.
레온하트는 초조해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였다.
‘젠장,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