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128
여신의 신탁(神託)(1) 서류를 차근차근 훑어본 뒤 홀리엔은 승인 도장을 찍었다.
“자, 다음.”
시녀장 메리다가 기다렸다는 듯 다른 서류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왕비님.”
“아직도 이만큼이야? 요새 일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환절기잖아요. 이래저래 궁성에 손볼 곳이 많죠.”
생사초월자라 불리며 라트나 최강의 영술사로 군림하는 홀리엔이지만, 그녀의 공식적인 지위는 어디까지나 요정왕국의 왕비다.
왕비에겐 왕비의 책무가 있는 것이다.
평민들은 일국의 왕비가 마냥 무위도식하며 고상하게 다과회를 열든가 우아하게 무도회에서 춤이나 추면서 하루를 보내는 줄 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왕비는 왕실의 안주인, 즉 왕궁의 모든 살림을 총괄하는 책임자다.
본인이 직접 손을 쓰지 않는다 뿐이지, 수많은 왕실 하인과 시녀를 다스리고 물자의 출납을 관리하는 등 온갖 행정 업무를 도맡아 한다.
다과회나 무도회 역시 귀족들을 다스리고 정치적인 사교의 장을 여는 중요한 자리의 하나이니, 노는 것이 아니라 일의 연장선이다.
평민들이 가진 왕비의 이미지는 실제론 국왕의 총희나 후궁의 삶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르한이나 제 노비아에 비하면 내가 한가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한창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밖에서 시종 한 명이 보고를 올렸다.
“왕비 전하, 아트란사스 대공자가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
잘생긴 금발의 엘프 청년이 집 무실로 들어왔다.
홀리엔이 메리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머지는 이따 처리할게.”
“예, 왕비님.”
둘만 남자 홀리엔이 대뜸 물었다.
“어떻게 됐니, 로아셀?”
아트란사스 가문의 제1공자이자 엘프족의 왕위 계승자, 로아셀엘리 아트란사스가 정중히 대답했다.
“다섯 교단의 신관들이 스코타스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럼 레온하트는?”
로아셀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선 파악된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스코타 스키아로 귀환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화신의 행적에 대해서도 모르겠네?”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요.”
“역시 그렇게 나오나……
홀리엔은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최강의 3인쯤 되는 권력자라면 대륙 전역에 자신의 눈이 있는 법이다.
당연히 어둠의 교단에도 정보원을 심어 놓았다.
덕분에 레온하트가 한 무리의 헌터 일행과 함께 스코타 스키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바로 화신 일행이란 것도 확인이 끝났다.
위치를 알았으니 홀리엔이 직접 나서면 간단히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레온하트와 화신 일행이 도로 본산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것도 대놓고, 하산하는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며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보았고, 그중엔 홀리엔의 정보원도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런 메시지를 최강의 3인 측에 보낸 셈이다.
-우리 여기 없다! 괜히 여기 건드리지 마!
로아셀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쪽 입장이라면 당연한 행보겠죠. 종적이 발각되면 위험해진다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요. 문제는 정말 떠난 것인지, 아니면 떠난 척하고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인데……
“정말 떠났다고 봐야겠지? 굳이 떠난 척하고 본산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잖아.”
화신 일행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위치를 고수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따듯한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그딴 건 돈만 있으면 대륙 어디서든 가능하다.
교단의 든든한 경비 병력?
생사초월자 앞에선 그 어떤 강자라도 어차피 약자다.
“건질 것도 없는데 어둠의 교단을 이유 없이 핍박할 순 없지.”
대외적으로 그녀는 여전히 라트나의 영웅 중 한 명이다.
이제껏 쌓아 온 명예와 평판이 있는데 대뜸 어둠의 교단 찾아가서 다 죽여 가며 ‘화신의 위치를 고해라!’라고 날뛸 순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확실히 어둠의 화신을 처리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뭐, 해도 되겠지.
일단 신위를 얻고 나면 세계가 뭐라 하건 그녀를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화신의 행적을 모르는 이상은 경거망동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는 대신 레벨 높은 이계인 몇 명만 몰래 보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만약 본단에 어둠의 화신이 몰래 머물러 있어 그녀를 생포할 수 있다면 만사형통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사악한 이계인 이 날뛸 뿐이니 홀리엔에겐 별피해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조차도 상황이 영 여의치 않았다.
어둠의 교단이 이미 방어를 굳혀 버린 것이다.
레온하트를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교단 각지의 강자들이 스코타스키아로 결집했다.
각자의 레벨은 기껏해야 60?70정도지만 숫자가 워낙 많았다.
저 정도 전력이면 굳이 이계인을 풀어 봐야 교단 내부까지 파고들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전에 가로막힐 테니까.
“괜히 쓸모없는 일에 아까운 이계인들을 소모할 필요는 없잖아.”
악타룬의 이계인은 수백 명이 넘으니 딱히 귀한 전력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의미 없이 소모시킬 정도로 가치 없는 자원도 아니다.
홀리엔이 툴툴거렸다.
“알고 한 건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대비를 잘해 놓았단 말이야.”
“우연은 아니겠죠. 어둠의 교단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어쨌건 이런 이유로 그동안은 어둠의 교단에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한 것이다.
“다섯 교단의 사절들이 스코타스키아로 모인 지금이라면, 어둠의 화신도 본산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증명해야 할 테니까요.”
사실 사절들과 어둠의 화신이 반드시 본산 내에서 만날 필요는 없다.
안전을 생각하면 아예 비밀 장소에서 따로 만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죠.”
화신의 진위를 의심하는 타 교단의 신관들이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이라면 홀리엔 님이 직접 움직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탐탁잖은 표정이었다.
“화신 일행이 언제 돌아올 줄어떻게 알고?”
“네? 그야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그동안 난 내내 모습 숨기고 산골짜기에서 노숙이나 하고 있고? 스코타 스키아 인근엔 변변한 마을도 없단 말이야.”
“그, 그건 그렇군요.”
험한 산속에서 야인처럼 지내는 건, 일국의 왕비로 평생을 살아온 그녀에겐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닐 터다.
홀리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화신을 붙잡을 가능성이 있다면 참을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아니잖아.”
분명 어둠의 화신이 한 번은 스코타 스키아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몰래 돌아와서 몰래 사절들 만나 볼일 후다닥 처리하고 다시 자취를 감춰 버리면, 외부의 내가 그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채겠어?”
교단의 정보원도 저런 최고위수뇌부의 은밀한 행사까지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로아셀의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홀리엔이 빙그레웃었다.
“일단 기다려 보자.”
고작 동료 몇 명만을 대동한 채 숨어 다니던 어둠의 화신이 교단의 신뢰를 얻었다.
겨우 최강의 3인과 대적할 속세의 세력이 생긴 셈이다.
“그렇다면 분명 움직임을 보이겠지?”
이 상황에서 화신의 선택은 둘중 하나다.
최강의 3인을 여신의 적으로 규정하고 성전(聖戰)을 일으켜 정면 승부를 걸거나…….
“아니면 혼란을 피해 몰래 우리를 암살하려 들겠지.”
어느 쪽이 되었건 홀리엔이 손해 볼 일은 없다.
전면전을 걸어온다면 그냥 군사력으로 짓눌러 버리면 된다.
대륙3강의 일원인 알렌디아와 여섯 교단의 전력엔 그 정도로 절대적인 격차가 있다.
암살을 노린다 해도 문제없긴 마찬가지 였다.
“단서가 제 발로 찾아오는 셈이잖니?”
붙잡아서 적당히 정보 불게 만들면 된다.
이쪽에서 찾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그녀는 생사초월자, 라트나의 절대자 중 한 명이다.
약자가 무슨 짓을 하건 전부 받아칠 만한 힘이 있는 것이다.
홀리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때,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일이 풀리지?”
로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하지만 그녀와 달리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왜 그러니?”
의아해하는 홀리엔을 응시하며 로아셀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저도 저런 결과가 나올 거란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마 교단 쪽에서 그걸 모를까요?”
*
이미 키비에는 어둠의 교단에 자신이 화신임을 증명했다.
상대가 다른 교단이라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스코타 스키아의 중앙 홀, 별의 전당.
흑발의 미녀 앞에 다섯 교단의 사절들이 무릎을 꿇었다.
이미 증거를 보았기에, 그녀가 진정 여신의 화신임을 확인했기에 이들의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알티아의 첫 번째 검, 사빈 아실이 키브리엘의 화신을 배알합니다.”
“소론디의 성전사장, 프레드릭카텔 메르카츠입니다.”
“예센의 첫 번째 망치, 팔머 롬버스트입니다, 섬김받아 마땅한 분이시여.”
“람니아나의 템플러 로드, 안젤리카 헤이드 한이 화신께 인사드립니다.”
“프렐류의 삭풍, 메르딜 케네스브라우트입니다.”
저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직위는 전부 같다.
전원이 각 교단의 성전사장이었다.
다섯 교단의 최강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이곳에 모인 것이다.
딱히 우연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필연에 가깝다.
화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닌 것이다.
교단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대사건이니 아무 성직자나 보내 확인할 수는 없다.
교황급의 최고위 성직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단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직접 움직이기는 힘들다.
워낙 평소 업무도 바쁘고 행보에도 무게가 실리니까.
성녀는 사실 별로 바쁜 입장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움직일 수 없었다.
수많은 이계인들이 지금도 여섯여신의 성녀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갑자기 고위레벨 이계인이 대규모로 출몰하는 사태도 터졌다.
평소보다 더욱 엄중하게 성녀의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판국이었으니, 본산을 벗어나는 건 지나치게 위험하다.
결국 화신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이들은 각 교단의 성전사장 들뿐이 었다.
애초에 대륙 곳곳을 활보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고, 스스로를 지킬 충분한 힘이 있으며, 교단의 행보를 결정할 정도의 최고위성직자들이니까.
부복한 다섯 명의 성전사장들을 내려다보며 키비에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신실한 여신의 신도들이여, 몸을 일으키도록.”
그리고 등 뒤의 일행을 가리켰다.
“소개하겠다. 나를 돕는 이들이다.”
은발의 미소녀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에피르 베니스터입니다. 아까도 소개했지만요.”
이미 그녀는 화신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와이번으로 돌아가 자신의 지성을 보인 바 있다.
붉은 머리의 잘생긴 마법사 청년이 뒤를 이었다.
“화룡의 말예, 아티스 앰피티어 라그나워커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아티스 베니스터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요.”
이번엔 성전사장들도 살짝 놀랐다.
U
인간이 아니었나?”
“드래곤?”
라트나 대륙에 전해지는 드래곤의 악명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오랜 세월 쌓여 온 진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다들 침착했다.
키브리엘은 용족의 창조주이니, 그녀가 택한 드래곤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소개만큼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검을 짊어진 흑발의 거한이 자신을 가리키며 당당히 말한 것이다.
“지구에서 온 류한빈이다. 이 세계에서는 펠라드 빈이란 이름의 발타라 전사로 행세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