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143
지피지기(知被知己)(2) 키브리엘의 화신이자 발타라 여전사로 위장 중인 흑발의 미녀.
그녀는 홀리 퍼니셔의 준동을 틈타 수시로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홀리엔으로서는 당장 왕실을 나서서 직접 추적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여태 자리를 지켰다.
요정왕 로플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대가 나설 일이 아니오, 왕비.
이런 일까지 일국의 왕비가 일일이 나서면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다.
‘권력자가 솔선수범한다 해서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격언이 있지만,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력자가 앞서서 모든 일을 처리하면 분명 현명한 이들은 훌륭한 지도자라며 칭찬하겠지.
하지만 대다수는 지도자인 주제에 뭐 저리 나대냐며 오히려 욕을 하는 법이다.
평범한 민초에게까지 합리적인 사고를 바랄 수는 없다.
물론 저것이 단순한 국왕의 명령이었다면 무시했을지도 모르겠다.
지상 최강의 영술사이자 여신의 첫 번째 축복자인 홀리엔에겐 왕의 권위도 우습게 볼 힘과 명성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로플란은 국왕으로서 명령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왕비같이 귀한 몸이 저런 뜬소문에 휘둘리겠소? 부디 참아 주시구려.
사랑하는 남편의 만류까지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래서 얌전히 왕궁에 대기한 채 수하들만 움직여 화신을 쫓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서지 않는 쪽이 오히려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제 요정왕도, 알렌디아 왕실도 홀리엔이 직접 나서길 바란다.
홀리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러면 놓치거나 할 일은 없겠지? 찾는 게 힘든 거지, 잡는 게 힘든 건 아니니까.”
가르한도 동의하는 바였다.
“잘됐네. 후딱 처리해 버려. 이 귀찮은 상황도 곧 끝을 보겠군.”
반면 제노비아는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괜찮을까, 홀리엔? 일부러 여기까지 상황을 끌어왔다는 건 분명 믿는 바가 있어서일 텐데.”
상대가 함정 파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 걸려 주긴 역시 께름칙 하다.
“나도 그래서 대강 예상은 해봤는데……
키브리엘의 사도로 선택된 발타라 전사, 펠라드 빈.
그는 분명 강했다.
살아 돌아온 이계인이 없어 정확한 레벨은 알 수 없지만, 지금껏 보여 준 전과만 봐도 족히 젊은 시절의 바오톨트에 필적하는 기량이 었다.
세 번째 여신의 축복자, 영술권 사 레온하트 역시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어둠의 화신과 그녀의 동료들 역시 최소 레벨 90은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여섯 교단의 성전사장들과 하이 템플러가 동원되고, 교단의 총력을 기울여 함정을 판뒤 오로지 홀리엔 한 명만을 상대한다면?
“……그래도 내가 지긴 힘들 것 같거든?”
실로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진실이기도 했다.
그만큼 최강의 3인과 다른 이들의 격차는 크다.
그래도 제노비아는 기우가 남은 듯했다.
“그 발타라 전사는 키브리엘의 성물을 취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뭐가 달라져?”
분명 엄청나게 강해지기야 했겠지, 예전에 비하면.
그래 봤자 최강의 3인을 따라잡기는 요원하다.
검왕이라면 모를까, 다른 라트나인은 아무리 성물을 취해 봐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오톨트는 죽었지.”
저 성스러운 어둠의 성물조차도, 지금의 이들에겐 딱히 경계할 필요 없는 구닥다리 유물에 불과하다.
물론 최강의 3인이 성물을 취했다면 약간의 이득은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고. 화신이 움직이기 전엔 우리도 성물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잖아. 짐작만 했지.”
연신 대꾸하던 홀리엔이 문득 눈을 흘겼다.
“아, 그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두 사람도 같이 움직이지그래?”
분명 최강의 3인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면 저쪽이 뭔 수를 써도 소용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자 제노비아와 가르한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붙잡은 화신을 만나기 위해 성역을 떠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차피 끝난 상황이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내내 속세를 들쑤시며 화신을 찾아다닌다?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수명이 줄어든다!
“아니, 그건……
“굳이 그럴 것까진……
탐탁잖아하는 둘을 보며 홀리엔은 피식 웃었다.
“됐어. 바오톨트도 없는 지금 우리 셋이 한꺼번에 나서야 할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아마도 놈들은 검왕의 후계자를 믿고 있는 것일 터다.
현재로서는 변수가 그것뿐이니까.
그런데, 대체 그 발타라 전사가 얼마나 강해야 홀리엔이 위험에 처할 수 있을까?
“설령 그놈 대신 바오톨트 본인이 그 자리에 있다 해도 내가 당할 일은 없어. 다들 알잖아?”
혹여 검왕이 살아 있어 홀리엔을 상대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절대 내가 이기진 못하겠지.”
하지만 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뇌제나 아크메이지라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하지만 생사초월자는 다르다.
최소한, 죽거나 사로잡힐 일은 없다.
“나한텐 이게 있으니까.”
영상 속 홀리엔이 살짝 손가락을 들어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제야 제노비아의 표정도 풀렸다.
“맞아, 당신에겐 그 고유 영술이 있었지?”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꼰 채 홀리엔이 말을 이었다.
“둘 다 알고 있겠지만, 이걸 쓰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내한 몸 빼내는 건 문제가 없어.”
설령 홀리 퍼니셔의 함정이 상상을 초월해 오히려 홀리엔이 위험에 처한다 해도, 일단 후퇴한 다음 가르한이며 제노비아와 손잡고 다시 시도하면 된다.
굳이 벌써부터 얼마 남지 않은 두 사람의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단지 좀 께름칙한 건, 키브리 엘도 이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정말 함정을 파려는 게 맞냐는 것 정도?”
홀리엔의 의문에 가르한이 고개를 저었다.
“꼭 알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실제로 모르지 않을까?”
의아해하며 그녀가 되물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여신인데.”
지금이야 인간의 육신에 갇혔지만, 예전의 키브리엘은 라트나의 만물을 굽어살피는 지고의 존재였다.
그러자 제노비아와 가르한이 번갈아 대꾸했다.
“그거, 세상에 드러낸 적은 없잖아. 우리나 바오톨트 상대로 연습만 줄곧 했지.”
“우리 넷이 다 함께 모인 건 4대금역을 공략할 때뿐이고.”
“연습할 땐 항상 던전 내에서였으니, 여신이 모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홀리엔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던전 밖에서는 딱히 쓴 적이 없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여신의 눈을 속인 셈이 되었다.
술잔을 완전히 비운 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직접 나서지.”
? * *
지금껏 알렌디아 왕실은 홀리 퍼니셔의 주장을 무시로 일관해 왔다.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왕실의 권위와 왕비의 이름을 낮추는 행위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나 슬슬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요정왕국의 정규군에 이계인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은연중 퍼지면서, 점점 더 저들의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밤의 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이가 바로 생사초월자 홀리엔이라고.
그녀로 인해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고.
그러자 알렌디아 왕실도 생각을 바꿨다.
‘요정왕비가 직접 밤의 이변으로 생겨난 이계의 마물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런 헛소문도 순식간에 가라앉을 것이다.’
이에 요정왕국은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알렌디아의 국민들에게 고한다.
위대한 여신의 축복자이자 고귀한 요정왕국의 국모가 몸소 밤의 이변을 잠재울 것이니, 모두가 진실된 영웅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리라!
알렌디아 북부 외곽의 침엽수림, 라이헤나우.
한빈 일행은 이 숲속의 한 작은 산채에 은신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 일대의 영주인 드워프 귀족, 레투왈 남작의 사냥용 거 처 였다.
여름에만 쓰고 평소에는 비워두는 곳이라 한동안 숨어 있기엔 제격이었다.
영주에게 들킬 걱정도 없었다.
이 장소를 내준 게 바로 레투왈남작 본인인 것이다.
-얼마든지 써 주십시오! 여신의 뜻을 올바로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요정왕국의 전통 귀족인 레투왈남작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예센교단의 충실한 신도였다.
팔머 경과 오랜 친분도 있었다.
홀리 퍼니셔가 준동하자 제일 먼저 달려와 함께하기로 뜻을 세웠다.
뭐, 요정왕비 측 세력과 평소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도 있긴 했지만.
이것이 그간 홀리 퍼니셔가 요정왕국 곳곳을 들쑤시면서도 꼬리가 잡히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평민들은 물론이고 요정족 귀족 중에서도 협력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라이헤나우 산채 귀퉁이의 한 작은 방.
한빈 일행은 평소처럼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 중이었다.
그때 성전사장들이 그들을 찾았다.
기쁨을 감추지 않은 채 안젤리 카가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생사초월자가 움직였습니다!”
프렐류의 성전사장인 엘프 마검사, 메르딜 경도 흐뭇한 듯 말을 받았다.
“이걸로 2단계까지도 용케 끌어 왔군요.”
그러나 바로 3단계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제 생사초월자의 정확한 실력을 파악할 차례군요.”
레온하트의 말대로였다.
현재의 홀리엔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아야, 그게 걸맞은 함정을 팔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최강의 3인쯤 되는 절대 강자가 전력을 다할 일은 사실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네라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
류한빈을 돌아보며 레온하트가 빙그레 웃었다.
한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벨이 얼마인지만 확인하는 거라면야, 뭐.”
정말 간단하다.
그냥 눈으로 보면 된다.
“그럼 나 혼자 몰래 가서 레벨보고 오면 되나?”
“아니, 나도 간다.”
류한빈의 가이드라인이라면 홀리엔의 레벨 자체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 특유의 전투 방식이나 영술 운용 수법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경험이 많고 뛰어난 안목을 지닌 자의 관찰이 필요한데
“한빈 저 친구에게 그런 안목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슬프게도 반박할 수 없었다.
류한빈의 경험이나 안목은 어디까지나 적의 덩치가 20미터 이상일 때로 한정된다.
“그럼 둘이서 다녀와야겠군.”
그냥 상대의 레벨과 기량만 확인하는 건데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 정도의 기량이면 문제가 터져도 제 한 몸 정도는 중분히 빼낼 수 있다.
레온하트가 있으니 혹여 세상 물정 모르는 류한빈이 실수하더라도 수습이 가능하다.
그때 키비에가 손을 들었다.
“아, 나도 갈 거야.”
기겁하며 레온하트가 만류했다.
“그건 안 됩니다, 키비에!”
어둠의 화신이 최강의 3인 근처까지 다가간다?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한빈도 그녀를 말렸다.
“혹시 정보를 캐내려고 그러는 거야? 그럼 우리가 적당히 홀리 엔의 물품을 훔쳐 오거나 할게.
섀도 리딩은 본인에게 직접 걸 필요 없잖아.”
“그런 이유가 아니야.”
키비에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쯤은 알아. 그래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현재 최강의 3인은 키브리엘에게 빼앗은 어둠의 신성을 나누어 소유하고 있다.
“강탈당한 신성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해.”
어둠의 신성을 빼앗길 때 여신의 지혜에 봉인을 걸어 놓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애초에 신성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런데 봉인을 걸었다고 놈들이 절대 건드리지 못할 거란 장담을 어떻게 하겠어?”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 신성의 일부를 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불멸을 취했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랬다면 굳이 키비에를 찾아다닐 게 아니라, 벌써 상황 종료되었을 테니까.
“필멸자에게 주어져선 안 될 영역까지 손을 뻗었을 수는 있지.”
적에게 예상 밖의 능력이 숨어 있다면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우리에겐 두 번의 기회가 없을 테니까.”
다들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옳았다.
에피르와 아티스가 몸을 일으켰다.
“언니가 가면, 저도 따라가야겠네요.”
“나 역시.”
키비에까지 움직인다면 저 둘을 떼어 놓을 이유가 없다.
손발이 잘 맞는 동료가 함께하는 쪽이 보다 안전하다.
뭐, 진짜 안전하려면 다른 성전사장들도 우르르 몰려가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들마저 자리를 비우면 홀리 퍼니셔의 수뇌부가 텅비게 되는 셈이니 긴박한 경우 대응할 수가 없게 된다.
결론이 떨어지자 한빈 일행은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에피르와 아티스가 중얼거렸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변장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게 좋겠네요.”
“그래,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수상하면 확인이고 뭐고 도망이 최우선이고.”
부담스러운 듯 한숨을 쉰 뒤 레온하트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후우, 그럼 움직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