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144
지피지기 (知被知己)(3) 갑자기 나타나 홀리 퍼니셔를 상대한 정체불명의 이계인들.
그들에 대해 알렌디아 왕국은 이렇게 해명했다.
저들은 최근 대륙 곳곳에서 일어난 ‘고위 레벨 이계인 출몰 사건’의 당사자들!
요정왕비, 생사초월자 홀리엔이 직접 그들을 제압해 노예로 삼았으니, 이는 대륙의 안정을 꾀함과 동시에 죄인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요정왕국군 휘하에 이계인들이 등장할 때와, 대륙 곳곳의 이계인 출몰 빈도수가 줄어든 시기가 엇비슷한 것이다.
물론 개중엔 ‘여신의 신탁대로라면, 저 이계인들이 처음부터 생사초월자의 부하일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심을 하는 이들도 있긴 했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어쨌건 고위 레벨 이계인 출몰사태가 상당히 가라앉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반면, 밤의 이변은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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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변이 일어난 초기에, 라트나 인들은 전혀 예상 못 한 사태에 당황해 마냥 몰리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달랐다.
마법사 길드의 총본산 싱커즈에서 전력을 다해 밤의 이변에 대해 연구했고, 제법 성과도 내놓은 것이다.
싱커즈의 가설은 이랬다.
밤의 이변은 이 세계를 수호하는 여섯 여신, 그중 어둠의 키브리엘이 관장하는 밤의 장막에 금이 가며 일어난 현상이다.
그 빈틈을 통해 마신 옴팔로스가 관장하는 이계의 차원이 겹치며 마물들이 스며들어 온다.
던전처럼 확실하게 이계의 차원이 라트나에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던전 마력핵이나 최심부의 중심핵 같은 것은 없다.
아침 해가 뜨고 알티아의 가호가 세상에 드리워지면 더 이상 마물은 나타나지 않고, 이미 나타난 놈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말하자면 일종의 시간제한이 걸린 임시 던전이 생겼다 사라지는식.
여기까지 파악하고 나니 어느 정도 대책도 보였다.
기존의 던전이 어디서 출몰할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던전은 라트나에 드리워진 여신의 가호를 강제로 부수며 출몰하는 옴팔로스의 전초기지다.
무슨 기준으로 던전의 출몰 위치를 정하는지 모르니 예측할 수도 없다.
반면 밤의 이변은 미리 알 수 있다.
어둠의 가호가 유독 약해진 부분을 확인하면 된다.
출몰 시기까진 몰라도, 출몰 장소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다들 미리 병력을 모아 놓고 밤의 이변에 대비하게 되었다.
요정왕국 알렌디아 남부의 튜리 콘 평야.
교역 도시 루지에 인근에 위치한 이 초원은 요정왕국에서 가장 어둠의 가호가 옅은 지역으로, 방대한 숫자의 마물들이 수시로 출몰하고 있었다.
그 탓에 교역 도시로 이름 높았던 루지에는 현재 몰락 직전.
실의와 공포에 빠진 루지에의 시민들에게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요정왕비 홀리엔께서 튜리콘의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직접 이 땅에 행차하시는도다!
시민들은 열광했다.
“요정왕비님께서 이곳에 오신 대!”
“맙소사! 생사초월자께서 직접‘?”
“역시 전부 헛소문이었어! 빌어먹을 홀리 퍼니셔 같으니!”
“왕비님 만세!”
교역 도시 루지에의 남쪽 거리.
한 무리의 상인 일행이 길을 가고 있었다.
몰래 변장하고 이 도시를 찾은 한빈 일행이었다.
갈색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인 두 명이 앞장선다.
가발을 쓰고 수염을 달아 인상을 완전히 바꾼 레온하트와 아티스였다.
그 뒤를 키비에와 에피르가 따라 걷는다.
둘 다 수수한 시골 아낙처럼 분장한 모습이었다.
키비에의 흑발은 일부러 푸석푸석하게 만든 뒤 질끈 묶었고, 에피르는 아예 가발을 써 특유의 은발을 완전히 가렸다.
무장을 감추기 위해 폭이 넓은 여행용 로브를 위에 덧입고 무기는 전부 상품으로 위장해 등에 짊어졌으니, 누가 봐도 지금의 이들은 평범한 상인 그 자체였다.
반면 류한빈은 여전히 무장한 채였다.
물론 발타라 전사의 차림은 아니었다.
싸구려 갑옷과 망토를 걸치고 평범한 장검을 허리에 찬, 흔해 빠진 검사의 모습이었다.
다른 일행과 달리 그는 덩치가 너무 큰 것이다.
대륙3강쯤 되면 변경보다 평균신장이 높아 190센티미터가 넘는 한빈조차도 눈에 확 띌 정도의 거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개 상인이라기엔 지나치게 건장하다.
그래서 기간트는 다른 일행의 등짐에 숨겨 놓고 평범한 상인 일행의 호위 무사로 위장했다.
험준한 라트나의 교역로를 다니는 상인들이라면 호위 무사의 존재는 필수이니, 이쪽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주위 반응을 힐끔거리며 류한빈이 중얼거렸다.
“변장이 잘됐나 보군. 아무도 우리에게 눈길을 안 준다.”
아티스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고생 해 가면서 직접 변장했잖아. 어휴, 사실 마법 쓰면 간단한데.”
마법 중엔 외모를 바꿔 주는 주문도 있다.
별로 레벨이 높지 않아 아티스도 쓸 수 있는 마법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수작업으로 변장을 했다.
마법 위장은 시전자보다 상위마법사일 경우 눈치챌 수도 있는 것이다.
레벨조차 무시하는 완전한 형태변환술은 현재로선 드래곤의 ‘인간 의태’ 외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인간 형태를 풀순 없고. 기껏 이 육체에 맞춰서 여기까지 레벨을 올렸는데 말이지.”
아티스보다 고위 레벨의 마법사는 라트나에서도 그 수가 극히 적겠지만, 상대가 생사초월자이 니만큼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휘하에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가 있을지 모르니까.
류한빈은 이 방식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든 듯했다.
‘당연하잖아? 오랜만에 사람다운 행색을 갖췄는데.’
더벅머리도 말끔히 빗었고, 피부도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예전엔 발타라 전사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피부를 태워야 했다.
혹여 어설프게 분칠만 했다가지워지기라도 하면 낭패니까.
하지만 이제 어둠의 교단이 구해 준 특수 염료가 있다.
땀이나 빗물로는 지워지지 않아, 전투 시에만 슥 바르면 되는 편한 물건이었다.
“덕분에 선탠 안 하게 되어서 안심이지. 어휴, 솔직히 피부암걸릴까 봐 무섭더라.”
한빈의 너스레에 아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구의 치유술도 제법 발달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암도 극복못한 거야?”
라트나에선 암이 그리 두려운 병이 아니었다.
그냥 암 걸린 부위를 투시술로 확인한 뒤, 그 부분 슥 도려내고 치유술 걸어 버리면 간단히 나아버리니까.
확인도 적출도 너무 쉽다.
영술이라는 사기적인 이능력이 있는 시점에, 외과적 수법은 지구가 감히 라트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상당한 고위 레벨 영술사에게나 가능한 일이라 지위 낮고 돈 없는 이들은 얄짤없이 죽는 병이었지만.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아티스가 지구 문물을 무시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빈이 입을 삐죽였다.
“아, 그래. 라트나 잘났다.”
그런데 의외로 영술사인 레온하트가 지구 의학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구는 각종 질병에 대한 치유술이 굉장히 발달했다고 들었으니까. 듣자 하니 지구인은 이질이나 폐렴 같은 골치 아픈 질병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던데, 맞나?”
페니실린 같은 의약품을 떠올리며 한빈이 대답했다.
“그야, 항생제가 있으니까.”
레온하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 그거. 그런 약은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지?”
세상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영술이라는 이능이 발달한 만큼, 라트나의 약학은 상대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편이었다.
그런데 영술로는 오히려 저런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성 질병은 치유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환자에게 치유술을 퍼부어 본인의 저항력으로 직접 극복하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안다면 알려 주었으면 좋겠군.
여태 만난 이계인들은 이런 걸 물어볼 만한 사이가 아니었거드 ”
지구인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배척당하는 라트나이지만, 그럼에도 쓸 만한 지식은 슬쩍 수용하곤 한다.
은근히 기대하는 레온하트를 보며 류한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페니실린을 어떻게 만드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가 아는 거라곤 푸른곰팡이를 어찌어찌하면 짠 하고 페니실린이 되더라? 정도가 전부다.
“내가 무슨 의학계 종사자도 아닌데, 그런 전문 지식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가? 아쉽군.”
“그런데 레온하트, 나 말고도 항생제 만든 지구인이 또 없었나?”
“없으니까 물은 것 아닌가? 있었다면 라트나에도 이미 퍼졌겠지.”
한빈은 어색함을 느꼈다.
‘지구인이 이 땅에 그렇게 많이 떨어졌는데 의학 관련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이것도 좀 이상한 이야기 아닌가?’
대체 마신 옴팔로스가 적합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이기에?
‘아니면, 있긴 있었는데 전부 죽었을 뿐인 걸지도?’
그러는 동안에도 거리는 점점 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인파의 숫자가 상당히 많다.
모두가 한빈 일행과 비슷한 목적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이제 곧 이 거리에, 알렌디아의 요정왕비 홀리엔께서 행차하시는 것이다!
“왕비님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당연하지! 우리 같은 이들이 그런 고귀한 분을 직접 뵐 일이 어디 있겠어?”
“허허,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영광스러운 경험이구나.”
“홍! 정말 영광스러울지 어떨지 모르는 일이잖나? 신탁에 따르면……
“쉿! 입조심하게. 자넨 뭐 목이 두 갠가?”
여신의 신탁으로 홀리엔의 평판이 많이 떨어진 탓일까?
드문드문 불경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보였다.
그래도 대부분은 홀리엔을 경외하며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빈 일행도 인파에 섞여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한 무리의 군대가 거리 저편에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먼저 달려오며 두 명의 시종이 고함을 질러 댄다.
“모두 머리를 조아리시오!”
“홀리엔 왕비님의 행차시오!”
그 뒤를 중무장한 병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행진한다.
마차를 탄 영술사와 마법사의 모습도 보인다.
한빈 일행은 재빨리 인파에서 벗어나 뒷골목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거리 저편의 군세를 살폈다.
“요정왕비는 아직인가?”
“대열 후미에 있겠지. 그게 전통 의전이니까.”
류한빈의 속삭임에 역시 귓속말로 답한 뒤, 레온하트는 왕실기사들의 기량부터 확인했다.
“나쁘지 않군. 몸도 제법 단련되어 있고. 움직임을 보니 평균레벨 60은 넘겠어.”
병사들도 모두 정규군이라 레벨 40대 중후반은 족히 되어 보였다.
영술사와 마법사 역시 레벨 60언저리는 되는 것 같았다.
기감을 통해 어림짐작한 사실이었다.
레온하트는 의아해했다.
‘생각보다 수준이 높지 않은데?’
충분히 정규군 수준이긴 하지만, 홀리엔의 위명을 생각해 보면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았다.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일부러 최정예는 배제한 건가?’
이건 좋은 징조다.
생사초월자의 진짜 힘을 엿볼수 있을 테니까 한편 키비에는 레온하트와 좀 다른 관점에서 살피고 있었다.
“드래곤은 없네.”
용족의 창조주인 그녀는 어퍼드래코니움의 고룡이 인간 형태를 취하고 있어도 바로 알아볼수 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살펴봤는데, 어째 이번엔 대동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굳이 데리고 올 필요도 없나?’
홀리엔이 직접 나섰는데 굳이 고룡까지 데리고 와서 평판을 더 떨어트릴 이유가 없겠지.
설령 있다 해도 별문제는 아니다.
폴리모프 네크리스라는 사기 아이템이 있으니까.
에피르가 한빈을 돌아보며 물었다.
“악타룬의 이계인들도 있나요?”
딱히 놈들 특유의 무장을 한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겉모습은 얼마든지 위장이 가능하니 단언할 수도 없었다.
확실하게 파악하려면 역시 류한 빈의 가이드라인으로 봐야 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
손짓을 하며 한빈은 계속 시선을 집중했다.
계속해 요정왕국의 군세가 거리를 행진해 간다.
잠시 후 사두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박으로 세공한 무늬를 넣은 차체와 정교한 장식을 새겨 넣은 화려한 바퀴, 그럼에도 치장이 과하지 않아 천박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마차 창문 안쪽에서는 푸른 머리칼의 아름다운 님프 여인이 거리의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류한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 나타났다.’
지상 최강의 영술사, 생사초월자 홀리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