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177
알렌디아 내전(3)
아트란사스 최강의 기사, 모데 투스 경이 바닥에 쓰러져 게거품을 피운다.
기절한 그를 뒤로한 채 거구의 검사가 발걸음을 옮긴다.
뚜벅, 뚜벅, 뚜벅.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제히 뒷걸음질을 쳤다.
“마, 맙소사……
“저자가 이곳에?”
어둠의 키브리엘에게 선택된 여신의 사도이자 검왕 바오톨트의 유일한 후계자.
발타라 전사, 펠라드 빈.
여섯 교단이 지닌 최강의 전력이 하필이면 이 미로스 요새에 나타난 것이다.
세간의 풍문에 의하면, 생사초월자조차도 저자의 일 검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런 괴물을 우리가 무슨 수로 상대해?’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했다.
몰려온 교단군이 곧바로 그들을 쫓았다.
“어딜 도망가?”
“놓아줄 것 같으냐!”
기세등등한 아군의 모습에 류한 빈은 피식 웃었다.
“적당히들 하라고. 어차피 저들도 나중엔 우리 전력으로 써먹어야 하는데.”
그리고 눈앞의 성채 내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지휘관만 붙잡으면 이 요새도 함락이네.”
남쪽 성벽에서 은발의 소녀가 뛰어내렸다.
“펠라드 님! 이쪽은 끝났어요!”
“수고했어, 에피르.”
한빈 옆으로 다가오며 그녀가 내성의 정문을 노려보았다.
강력한 방어 마법이 걸린 강철성문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남았는지 쌍검을 쥐며 호기롭게 묻는다.
“제가 부술까요?”
류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한다.”
지금의 에피르라면 이런 성문정도는 간단히 부술 수 있다.
하지만 되도록 한빈 본인이 무위를 떨쳐 줄 필요가 있었다.
“레온하트가 그러는데……
기간트가 타오르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얼굴도장 확실히 찍고 다니라고 하더라고.”
붉은 섬광이 내성에 작렬했다.
?
가공할 폭음이 울리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 린다.
벽에 금이 쩍쩍 가고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진다.
미로스 요새 내부의 지휘실에 엘프 청년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트란사스의 제3공자, 라온델엘리 아트란사스였다.
석벽 너머로 연신 창칼이 부딪치고 비명이 들려온다.
라온델은 한탄을 흘렸다.
“아아, 위대한 아트란사스 가문이 이대로 패하고 마는가……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어차피 감내해야 할 운명이라면 고귀하게 저물어야겠지.”
이내 지휘실 문이 박살 나며 교단군이 몰려왔다.
라온델을 발견하자마자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며 소리를 질렀다.
“지휘관이다!”
“라온델 공자를 찾았다!”
“당장 붙잡아!”
눈을 부라리며 라온델이 위엄있는 음성을 떨쳤다.
“물렀거라! 비천한 놈들!”
병사들이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권위를 한껏 담아 호통을 이어간다.
“네놈들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아느냐? 아트란사스의 정통한 후 계자 앞에 이 무슨 무례함이더냐!”
쳐들어온 교단군 병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트란사스 가문은 요정왕국의 고귀한 왕족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흥, 미천한 것들.”
코웃음을 치며 라온델은 기다렸다.
이런 천한 자들이 아닌, 고귀한 혈통의 항복을 받기에 합당한 권위를 지닌 교단군의 수장을.
‘내 비록 패배했다곤 하나 당당히 왕족다운 모습을 보이리라!’
잠시 후 거구의 야만족 사내가 지휘실로 들어섰다.
“그대가 검왕의 후계자인가? 과연 대단한 무위였도다.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신위, 아트란사스의 항복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더구나.”
어깨를 펴고 항복 선언을 마친다.
“자, 이제 이 몸의 패배를 취해 그대의 명예를 드높이도록 하라!”
말을 마치며 라온델은 스스로 뿌듯해했다.
실로 귀족다운,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아닌가!
……듣는 쪽은 전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았지만.
“야, 저거 아직도 저러고 사네?”
라온델은 흠칫 놀랐다. 어째 불길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다, 당신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다.
확실히 기억에 있었다.
저 우락부락한 육체에 흉흉한 눈동자!
“으헉!”
재회한 이 ‘엘프 왕자님’을 향해 한빈은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랜만이야, 잘 살고 있었나?”
그딴 것도 인연이라고 이렇게 다시 만나니 은근 반갑긴 했다.
물론 라온델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저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주먹으로 바뀌면, 오랜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으어??????
이내 그는 꼬르륵하고 혼절해 버렸다.
황당해진 한빈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엔 패지도 않았는데 왜 혼자 기절해? 네가 무슨 파블로프의 개냐?”
뒤늦게 지휘실로 들어서며 에피르와 아티스가 물었다.
“지휘관은요?”
“제대로 제압했어? 설마 죽이진 않았지?”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이며 류한빈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일단은?”
류한빈이 이끄는 교단군은 큰 피해 없이 미로스 요새를 점령하고 아트란사스 공작군을 제압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항복 절차를 밟고 이들을 교단의 군세로 흡수하는 일뿐이었다.
문제는…….
“항복 선언을 해야 할 놈이 기절해 버렸으니, 원.”
혼절한 라온델을 보며 한빈은 혀를 찼다.
지휘관 본인이 항복이라고 말만 한다고 끝이 아니다.
아직 요새 곳곳에서 항전 중인 공작군 측에 정식으로 전투가 끝났음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내심 혹한다는 듯 에피르가 의견을 냈다.
“이 엘프 왕자님 모가지 잘라서 성벽에 걸어도 효과는 같지 않을까요?”
“……너무 살벌한 거 아니니, 그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찾으면 된다.
제압한 알렌디아의 기사 한 명을 끌고 와 물었다.
“누가 쟤 다음으로 높냐?”
“아트란사스 최강의 기사, 모데 투스 경입니다.”
“기각. 그 드워프 아저씨 이미 뻗었어.”
류한빈의 ‘가로 베기’ 한 방에 일어난 참사였다.
“그렇다면 2인자이신 마검사 루페튼 경이
“그분도 기절했는데요.”
에피르가 작신작신 밟아 놓았다고 한다.
“그럼 공작가 마법사이신 랄디온 공께서
“그 실프 양반, 탈진해서 실려 갔는데?”
아티스의 화염 마법에 버티고 버티다가, 동료 마법사와 함께 깔끔히 쓸려 갔다는 모양이다.
“그, 그러면……
질문을 받은 기사는 난처해했다.
지상 최강의 영술사였던 홀리엔이 스트라우스 가문 출신이다 보니, 알렌디아의 고위 영술사들도 대부분 그 가문에 속해 있었다.
아트란사스 가문 최강의 검사, 마검사, 마법사가 전부 부재 상태라면 급격히 지위가 낮아지는 것이다.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영술부대의 부대장이 그나마 제일 높은 지위일 겁니다.”
“누구건 상관없어. 항복 선언만 제대로 하면 되니까.”
손을 저으며 류한빈이 손짓을 했다.
“어서 찾아서 데려와.”
?
*
*
요새 탑에 아트란사스 공작가의 깃발과 백기가 걸렸다.
전통적인 항복 신호였다.
하지만 공작군 입장에선 정말 항복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성 안쪽으로 몰래 침투해 슬쩍 백기 거는 전략이 예전에 하도 유행을 하다 보니, 현 라트나 대륙에선 백기 걸린 정도로는 신뢰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 대리를 맡을 정도의 고위직이 직접 나서서 항복을 선언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나 지금처럼 누가 봐도 패배 직전일 경우엔.
“아트란사스 공작군이여, 우리는 패했습니다. 무기를 내리고 항복하도록 하세요.”
연청색 머리칼의 님프 미녀가 성채 위쪽에 모습을 드러내고 모두에게 패배를 알리니 비로소 모든 전투가 끝났다.
여인이 성루에서 내려와 류한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명하신 대로 아트란사스 공작군은 모두 항복했습니다.”
한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에피르도 방싯 웃었다.
“수고하셨어요, 언니.”
항복을 강요한 자와 굴욕적으로 항복한 자의 관계라기엔,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들과 구면이었던 것이다.
아티스가 님프 여인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참 인연이란 건 모를 일이군요.”
그녀는 과거 라온델 공자의 수하 영술사였던 세이라 로엘 시아란이 었다.
알렌디아의 서부 관문도시 티아론에서 한빈 일행에게 블러드 서 커 퇴치 의뢰를 부탁했던 이이기도 하다.
워낙 성품이 좋은 여인이었기에 당시 류한빈도 꽤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옆에 저런 게 붙어 있어서 더 괜찮아 보이는 효과도 있긴 했지만, 뭐.’
물론 여기서 ‘저런 거’는 라온델공자를 의미한다.
“그때도 보통 분들은 아니었지만……
모두를 돌아보며 세이라가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예전에 뵈었을 때와는 너무 달라지셨더군요.”
한빈 일행과 달리 세이라는 언젠가 이들과 만나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다.
홀리 퍼니셔의 활약을 통해 워낙 명성이 퍼졌으니까.
“검왕의 후계자가 나란 걸 알고 있었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발타라 전사이고, 이름이 펠라드빈인데.”
라온델을 떠올리며 한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걘 모르던데?”
“라온델 공자님이 요정족도 아닌 인간을,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말하다 말고 세이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이젠 더 이상 존칭을 할 필요도 없네요? 아트란 사스 가문은 몰락했으니까!”
바로 호칭이 격하되었다.
“어휴, 라온델 저놈, 혼자서 비운에 찬 망국의 왕자 흉내 내는데 꼴 보기 싫어 혼났네.”
보아하니 아트란사스 가문이 패한 것이 매우 기쁜 눈치였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여러분을 응원했거든요.”
자유롭게 세상을 활보하며 실력을 키우고 명성을 쌓아, 끝내 대륙 전역에 위명을 떨치는 영웅이 되어 간다.
한 가문에 묶인 처지로서 어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류한빈, 아티스, 에피르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묶은 놈이 저런 놈이었으니.’
문득 세이라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저흰 이제 어떻게 되나요?”
아무리 개인적으로야 좋은 일이라지만 그녀는 아트란사스 영술부대의 지휘관이었고 패장 중 한 명 이 었다.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신세인 것이다.
“상황 봐서 믿을 만한 자는 아군으로 거둬들이고 아니면 포로로 압송하라고 했는데……
류한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이라가 눈을 빛냈다.
“허락해 주신다면 진정한 여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 한 몸바치겠어요!”
보통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위장항복이 아닌지 의심하는 쪽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경우엔……
‘참으로 신뢰가 가죠?’
아티스와 에피르가 서로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한빈이 허락했다.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이겠다.”
세이라가 기쁜 듯 고개를 숙였다.
“저를 비롯한 미로스 요새 소속영술부대 43인, 펠라드 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니, 나한테 바치지 말고 교단에 바쳐야지? 왜 나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