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190
구출과 납치 사이(1)
라온델의 하루는 실로 고달팠다.
우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이라의 방 청소를 하고, 식사를 가져 다준다.
“공녀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
이후 점심 식사를 대령한다.
“공녀님, 식사를 준비……
이후 자질구레한 심부름 등으로 거리를 오간 뒤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공녀님, 식사를……
이후 뒷정리를 한 뒤 조금 쉬었다가 취침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잠깐! 하는 게 없잖아요?”
당연하게도, 라온델의 스케줄을 들은 에피르는 어이없어했다.
“저게 무슨 시종이에요? 그냥 무위도식이지!”
그녀가 변경에서 류한빈과 아티스를 따라다녔을 땐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옷이며 마차 수선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딱히 한빈이 그녀를 마구 부려 먹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레벨문제로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꾸준히 마검술도 연습했으니 쉬는 시간 따윈 거의 없었다.
그나마 조금 쉴 때도 이렇게 놀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 불안해했었는데?
“와, 사람이 저렇게 아무것도안 하고 살 수도 있는 거예요?”
황당해하는 에피르를 마주하며 세이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건 아는데, 저 이상 뭔가 시켜 봐야 사고만 쳐서 말이 죠.”
평생 남이 챙겨 주는 것만 누리며 살아온 라온델에겐 제 한 몸건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픈 하루인 것이다.
“지금도 남들은 제가 그동안 당했던 복수를 톡톡히 하고 있는 줄 알던데요?”
실제로 라온델의 표정만 보면 거의 갤리선 노 젓는 노예 수준이었다.
고작 저거 시키는데도 하루하루 애가 피폐해져 간다.
사정 모르는 사람 눈에는 하루종일 가혹한 학대에 시달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는, 칼드리스 왕국의 특작 부대 아인스테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멀리 알렌디아의 왕궁이 어렴풋이 보이는 한 2층집.
목조 가옥에 십여 명의 장정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놀랍도록 평범한 인상이었다.
당장 바로 옆을 지나쳐도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개성이 없었다.
그야말로 잠입 및 첩보 작전에 특화된 인상이라 하겠다.
이들, 아인스테일의 수장인 호른스가 명단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트란사스 제3공자, 라온델이라..
요정왕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의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서류였다.
“지금은 세이라 공녀의 시종이란 말이지? 원래는 공녀가 라온 델의 직속 수하였고?”
“세상이 바뀌었으니까요.”
“적절한 인선이군.”
호른스가 서류를 툭 쳤다.
“별궁 책임자의 시종이라면 충분히 파고들 수 있겠지.”
전(前) 요정왕 로플란과 요정왕비 홀리엔이 유폐된 별궁.
이곳은 그 중요도에 걸맞게 강력한 전력이 투입되어 엄중한 감시를 펼치고 있었다.
알렌디아 제1군단과 2군단마저 가볍게 패퇴시킨, 명실공히 요정왕국 최강의 부대.
공식 명칭은 어둠의 교단 소속제1성전군이지만 모두가 검왕군이라 부르는 이들이었다.
“사실 이건 부대 자체가 강하다 기보다는 순전히 펠라드 빈과 그 일당에게 의존한 바가 크긴 합니다만.”
수하의 발언에 호른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현실적으로 최강인 것은 사실이지 않나? 파고들 틈이 없는 것도 틀림없고.”
요정왕국 수도에 도착한 뒤 아인스테일은 곧바로 침투 작업에 착수했다.
별궁을 경비하는 검왕군의 빈틈을 노리고 매수나 협박이 먹힐만한 상대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영 쉽지 않았다.
검왕군의 충성심이 워낙 강한 탓이었다.
단순히 왕국이나 교단에 대한 충성심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펠라드 빈, 개인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았다.
정보를 입수해 온 수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새로운 검왕이 얼마나 엄청난 실력자인지 직접 두 눈으로 본 이들뿐이니까요. 어지간해선 배신할 엄두도 못 내더군요.”
그렇다.
이젠 적도 아군도, 더 이상 펠라드 빈을 ‘검왕의 후계자’라 칭하지 않았다.
여섯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검왕바오톨트의 사망을 알린 후부터였다–위대한 무인, 검왕 바오톨트는 마신과 결탁하려는 최강의 3인을 막으려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맞이했다! 저들은 세계와 여신에게 죄를 지은 것으로 모자라 오랜 친우였던 이마저 배신한 것이다!
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 아닌가!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 죽어도 죽지 않을 것 같던 검왕이 사망했다고?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무려 어둠의 화신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 것이다.
물론 어둠의 화신을 진짜라 믿지 않는다면 저 말도 믿을 필요가 없긴 했다.
하지만 그의 사망 소식을 신뢰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 봐. 검왕께서 살아 계셨다면 저걸 그냥 두고 보셨겠어?”
“하긴, 그 성깔에 자기 죽음 멋대로 위장한 여섯 교단을 그냥 뇌”^’ 리그]’.
“당장 칼 들고 나타나서 초토화시켰겠지.”
“그런데 벌써 몇 달째 아무 반응이 없잖아.”
“게다가 제자란 양반도 스승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고.”
“그렇다면……
“맙소사, 정말 죽었구나!”
사람들은 놀라고, 또 분노했다.
그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직 검 한 자루만으로 대륙을 웅비하던 바오톨트는 수많은 헌터들의 우상이었다.
대륙 곳곳의 헌터 길드는 물론이고, 대미궁 칼탄이 위치한 세르칼탄마저 칼드리스와 마도왕국룬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헌터 세력이 대거 이탈하자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는지 두 왕국도 성명을 발표했다.
-거짓 화신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어 진실을 알린다. 검왕 바오톨트는 신수 크루스머르그를 사냥하며 동귀어진했다. 최강의 3인은 오랜 친우이자 동료로서 그의 유품을 수거했을 뿐이다.
그 유품이자 증거가 바로 싱커즈가 보관 중인 신수 크루스머르그의 마령석이었다.
-바오톨트의 후계자여, 그대는 속고 있다. 애초에 그대의 스승이 누가 죽이려 한다고 죽을 자였던가? 우리의 오랜 친우는 평생 꿈꾸던 절대 강자와 검을 나누고 후회 없이 죽었다. 어찌 그의 죽음을 이토록 더럽힐 수 있단 말인가!
이것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사실, 어느 정도 진실이긴 했으니까.
양쪽 주장이 모두 그럴듯하다면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덕분에 라트나의 헌터들도 둘로 갈라졌다.
일부는 대륙2강 쪽에, 일부는 여섯 교단 쪽에.
아쉽게도 헌터 세력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는 실패한 셈이었다.
딱히 세력 구도에 큰 변화는 없었다.
변한 것이라면 류한빈의 칭호 뿐.
“검왕의 행적을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야. 정면으로 부딪치면 승산 따윈 전무할 테니까.”
고민하는 호른스를 보며 다른 부하들이 번갈아 말했다.
“검왕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최강의 4인이 또 있지 않습니까?”
“영술권사도 종종 별궁에 모습을 드러낸다더군요.”
최강의 4인은 현시대에 새롭게 생긴 칭호가 아니다.
대대로 라트나에선, 당대의 가장 강력한 오러 유저, 마검사, 영술사, 마법사를 한데 묶어 저리 칭해 왔다.
그런데 바오톨트가 죽었다.
생사초월자는 힘을 잃고 평범한 님프 여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최강의 오러유저와 영술사는?
‘검왕 펠라드 빈’과 함께 ‘영술권사 레온하트’ 역시 새로운 최강의 4인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물론 레벨만 보면 세이지니스의 길드장, 레벨 121의 플라테르 카베인이 레온하트보다 조금 더 높긴 하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학자 타입인 데다가 전투 경험도 전무하고 나이도 70이 넘어 골골대는 노인이었다.
누가 봐도 둘이 붙으면 영술권 사의 압승. 최고일진 몰라도 최강은 아니다.
현재 라트나 최강의 영술사는 틀림없이 레온하트였다.
“비록 영술권사가 다른 3인과 격차가 좀 심하긴 하지만……
호른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봤자 우리 입장에선 똑같지.”
토끼 입장에서 상대가 표범이건 호랑이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조우하는 순간 한입에 잡아먹히긴 마찬가지일 텐데.
“결국 파고들 만한 상대라면 이 라온델 공자뿐인가? 하지만 이자가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저도 그래서 좀 더 알아봤는 데, 충분히 상황이 납득이 가더군요.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이를 시종으로 부리는 것만큼 유쾌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특히, 그 주인이 시건방진 일국의 왕족이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애초에 함정을 팔 만큼의 능력도 안 되는 이입니다. 제법 유용하다고 봅니다만.”
호른스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이자와 접촉하도록.”
라온델은 오늘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토록 아끼고 보살펴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옛 주인을 턱끝으로 부리는 배은망덕한 년’의 심부름을 위해서였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왕도 남쪽 거리에 맛있는 빵집이 새로 생겼으니 몇 개 사오라는 것이다.
‘이런 시종들이나 할 법한 하찮은 심부름을 감히 나에게 시켜?’
물론 현재 세이라의 공식 시종이 바로 라온델이니, 아주 적절하게 업무를 시켰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다운 점이지.
“제기랄……
그렇게 이를 득득 갈며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덮쳤다.
“읍!”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입이 막히고 두 팔이 결박되어 골목으로 질질 끌려간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나가던 다른 이들은 채 눈치도 못 챌 정도였다.
‘무, 무슨 일이지?’
공포에 질려 라온델이 어깨를 후들거릴 때였다.
“그대가 라온델인가?”
그를 제압한 이는 건장한 체구의 두 사내였다.
“ 당신들은?”
평범한 복장이라 신분을 확인할 순 없지만, 명색이 레벨 30대 마검사인 라온델이 꼼짝도 못 하는 걸로 보아 범상치 않은 이들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과연, 두 사내가 은밀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우린 가르한 섭정공에게 충성하는 이들이오.”
“요정왕 로플란과 홀리엔 왕비를 구하기 위해, 그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내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라온델의 가슴이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다.
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구나!
그럼 그렇지! 위대한 여섯 여신이 세상을 가호하는데 어찌 천한 아랫것이 고귀한 혈통을 지배하는 이 불합리한 세상을 그냥 지켜보실 수 있단 말인가!
설명을 마친 사내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그대의 형님인 로아셀 공자께선 현재 섭정공에게 신변을 의탁하고 계시지.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라온델 공자라면 분명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큰 몫을 하리라 하셨소.”
가슴을 치며 라온델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대들은 아트란사스의 저력을 그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오!”
기쁜 듯 골목길을 벗어나는 엘프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두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저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적절한 인선인데요?”
그날 저녁, 별궁 외곽에 위치한 다이닝 룸.
평소처럼 세이라는 별궁 감시담당과 함께 저녁을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감시 담당은 바로 류한빈.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 앞에 라온델이 우아한 태도로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펠라드 님, 세이라 공녀님. 두분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 고마워.”
별생각 없이 세이라가 감사를 표했다.
라온델이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제 본분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윽한 눈으로 세이라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전 전쟁터로 끌려가 목숨을 잃게 되겠지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실로 훌륭한 시종의 자세로 식탁을 차린 뒤, 라온델은 정중히 인사하며 물러났다.
“그럼 즐거운 식사가 되시길.”
방을 나서는 그를 보며 세이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라온델이 변했어요!”
“그러게.”
류한빈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왔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