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273
신성의 그릇 (2)
지성을 지닌 이들은 지식을 쌓고 지혜를 발현했다.
그리고 그 지식과 지혜 때문에 멸망해 갔다.
탐욕, 나태, 음욕, 분노, 시기, 인색, 교만의 지혜를 지닌 자들.
이들은 서로 싸우다 죽고, 서로의 것을 빼앗다 죽고, 서로를 믿지 못하여 사회를 붕괴시켰다.
무수한 문명이 사라져 갔다. 무수한 지성종이 멸종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지혜는 죄악이면서 동시에 원동력이기도 했다.
탐욕을 아는 자만이 절제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나태를 아는 자만이 근면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순결, 인내, 친절, 자선, 겸손.
절제할 줄 아는 탐욕은 진보가 되고, 근면할 줄 아는 나태는 휴식이 된다.
순결을 아는 음욕은 번성이요, 인내를 아는 분노는 활력인 법.
멸망을 피한 수백의 지성종은 저 지혜와 죄악의 균형을 찾고 더욱 높은 곳으로 향했다. 싸우고 죽어 가고 반성하고 다시 고치며 계속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또다시 벽에 부딪혔다.
별이라는 세상의 한계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지성체는 이 시점에서 발전을 멈췄다. 별과 우주 사이에는 실로 크나큰 간격이 있었다.
그럼에도 벗어나고자 하는 생명은 존재했다.
수십의 지성종이 별이란 한계를 벗어나 그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지혜와 지성의 힘으로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로 또 도구를 만들어 세계의 바깥으로 향했다.
우주는 혹독한 곳이었다.
도구를 이용하고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이 끝없는 공허에서 그저 살아남기만도 벅찼다. 대다수의 지성종이 이 위치에서 머무르거나 도태되었다.
또 억겁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생명은 그 본질을 잃지 않았다.
주변 환경을 이용해, 보다 널리 퍼져 번성하는 것.
미생물에겐 물 한 방울이 유일한 세계이고, 개미에겐 개미굴이 유일한 세상이다.
모든 생명체에겐 저마다 자신의 정해진 영역이 있다. 그것이 곧 저들의 ‘온 세상’이다.
그렇다면 무수한 별들이 모인 은하 자체를 자신의 세상으로 삼는 생명체가 과연 없을까?
마침내, 도구의 한계조차 극복한 지성종이 탄생했다.
물질로 이루어진 도구가 아닌 에너지 그 자체를 이용해 주변 환경, 곧 별과 별을 재단하는 자들.
육체와 물질의 한계를 벗어나 에너지의 흐름, 그리고 의식으로 살아가는 존재.
별과 별 사이로 번성하는, 생명의 또 다른 형태.
이는 아득한 과거, 저들의 선조가 상상했던 초월자의 개념과 흡사했다.
우주적 생명체, 신(神)이었다.
무한의 별이 모인 거대한 은하에서 수많은 문명이 창궐하고 사라지는 가운데, 오직 두 지성종만이 이 위치에 도달했다.
은하 한쪽 구석에 위치한, 두개의 태양과 일곱 행성이 계를 이루었던 신의 요람, 칼테란에서 비롯된 이들.
근원된 별의 이름에 따라 이들은 칼테라 신족이라 불리었다.
은하 반대쪽 구석, 하나의 태양과 여덟 행성이 계를 이루었던, 한때 지구라 불리던 곳에서 비롯된 이들.
이들 역시 근원의 이름에 따라 어스 신족이라 불리었다.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 육체와 정신의 제약을 초월해, 마침내 신의 위치까지 오른 이들이었다.
*
?
*
고통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류한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구인이었단 말이야? 아니, 지구신? 이것도 좀 이상한데.”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상과 너무 다르다.
“그러니까…… 여신들이 지구인의 오랜 후손이라고? 그럼 여기 있는 난 뭔데?”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귓가에 여신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구는 신이 없는 세계.”
“라트나는 신이 존재하는 세계.”
“지구는 신을 잉태한 요람이자 모든 것의 시작.”
“이 드넓은 우주에서 처음으로 존재한 생명은 아닙니다.”
“최초의 지성체도, 최초의 문명도, 최초로 우주에 발을 디딘 이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최초로 모든 벽을 넘어섰다는 것.”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류한빈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뭐야, 지구인이 궁극적으로 진화하면 어스 신족이 된다는 거야?”
여신들이 차례로 대꾸했다.
“맞습니다.”
“틀리기도 하지만요.”
“우리는 궁극이 아닙니다.”
“신의 한계는 별과 별, 이 거대한 은하라는 하나의 차원뿐.”
“보다 더 상위의 초월자, 은하와 은하 사이를 넘나들며 번성하는 생명이 존재치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이조차도 끝없는 진화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류한빈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전혀 감당이 안 되는데요……
여신들의 친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기에 이 과정이 필요한 거 랍니다.”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어스 신족은 창조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조상, 인류가 나무를 깎아 집을 짓고 돌을 깎아 탑을 올리듯.
별을 다듬어 자신의 종족이 더욱 번성할 토대를 만든다.
별은 곧 둥지요 거처이며 요람.
그렇게 별을 다듬고 나면 아득한 과거를 반복한다.
생명을 탄생시키고, 이를 진화로 이끌며, 마침내 별과 별 너머로까지 닿게 한다.
단세포생물에서 척추 생물로,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란 형태가 되기까지 몇십억 년에 걸쳐 진행되는 진화의 과정이 어미의 자궁안에서는 몇 개월 만에 끝나 버리는 것처럼.
지성종을 창조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저 아득한 세월을 수십만 년으로 줄이며 새로운 신을 탄생시킨다.
이것이 어스 신족의 번성 방식이었다.
반면 칼테라 신족은 좀 달랐다.
이들은 약탈하는 자들이었다.
주위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을 이용하는 다른 생물을 이용해 진화한 지성종.
포식자로 시작해, 빼앗기 위한 도구를 만들고, 싸우기 위한 지성을 키우며, 마침내 범우주적 존재로까지 오른 그 끝.
다른 별을 먹어 치우고, 다른 지식을 먹어 치우고, 다른 지혜를 빼앗아 종국에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는 것이 칼테라 신족의 방식 이 었다.
은하라는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어스 신족과 칼테라 신족은 번성했다. 그 무엇도 이들에게 범접할 수 없었다.
은하와 은하 사이를 넘나드는 보다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는 이들도 물론 모른다. 저것은 두 신족에게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인식하에선 자신들보다 상위의 존재가 없었다.
가장 널리 퍼진,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두 초월 종족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다.
자신의 별을 가꾸어 새로운 신을 낳으려는 어스 신족.
저들의 별에 기생해 먹어 치우며 새로운 신을 잉태하는 요람으로 만들려는 칼테라 신족.
우주는 이들의 생존경쟁의 장이었다.
류한빈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헉헉??????
왜 이런 걸 보여 주는 건지 이해가 간다.
신의 지식과 지혜를 여과 없이 투입해 버리면 너무나 방대하니, 선별하고 간추려 초월자의 감각에 적응케 하는 것이다.
과연, 고통이 점점 가라앉는다.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너무 아프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여신들을 원망할 수도 없고.’ 그는 더더욱 눈앞의 환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이 고통도 줄어들 테니까.
*
*
*
아득히 오랜 과거의 한 시점.
은하의 한 별에서 어스 신족의 성과가 나타났다.
10만 년에 걸친 세월 속에서 새로운 여섯 여신들이 자신들의 요람을 벗어나 우주로 향했다.
적당한 별을 찾아 정착하고, 별을 다듬고 가꾸며, 환경을 조절해 생명을 뿌린다.
황량한 광야였을 뿐인 곳이 세상이 되었다. 충분히 안정화된 세 계 였다.
여섯 여신들은 이곳을 라트나라 칭하고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새로운 어스 신족의 모태가 될 지성종의 창조였다.
빛의 여신, 알티아.
그녀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의 반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결과를 이룬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인류를 창조했다.
어스 신족의 근원이었던 지구인과 완전히 동일한, 그렇기에 가장 확실하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종족이 었다.
어둠의 여신, 키브리엘.
그녀는 알티아와 좀 달랐다. 과거를 토대로 하는 것은 좋으나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올바르다 믿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지성종을 창조하려 했다.
강력한 육체와 놀라울 정도로긴 수명, 그리고 권능을 지닌 이들은 지구의 고대 신화에서 등장하는 환상수의 이름을 따 드래곤이라 불렸다.
실패였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했다. 그녀가 창조한 드래곤 중 대부분이 지성을 부여받았음에도 제대로 발현하지 못했다.
극히 소수의 드래곤만이 간신히 이성을 움켜쥐고 있을 뿐 대부분이 히드라며 드레이크, 와이번, 서펀트 등의 괴물로 전락해 버렸다.
실수를 인정하고 키브리엘은 드래곤을 조금 조정했다.
의태 능력을 부여해 서로 섞여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고, 괴물로 전락한 이들의 수명을 대폭 줄임으로써 균형을 찾았다. 그리하여 겨우 용족도 라트나의 지성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키브리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다른 여신들은 욕심을 줄였다. 하지만 알티아처럼 완전히 욕심을 버리진 못했다.
자신의 아이가 더 나은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욕망.
이들 역시 지구인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지만 있는 것을 조금 바꾸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법이다.
어스 신족의 근원이 되었던 지구의 인류, 그들이 믿었던 신화에서 이미지를 따오는 것은 이들에겐 벗어나기 힘든 숙명이었다.
불의 예센이 드워프를 창조했다.
물의 람니아나가 님프를 창조했다.
바람의 프렐류가 실프를 창조했다.
대지의 소론디가 엘프를 창조했다.
인류에 비해 보다 긴 수명, 보다 아름다운 외모, 보다 강인한 신체를 지닌 요정족이었다.
인류와 용족, 요정족은 라트나를 거닐며 서로 경쟁하고 발전해 갔다.
가장 번성한 것은 역시 인류였다.
스탠더드 타입, 수십억 년이라는 시간 그 자체가 탄생시킨 확률의 결과물이다. 조금씩 변화를 주는 정도론 그 완성도를 이기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지성종들도 결코 밀리지는 않았다. 저마다 다른 문화와 역사 속에서 개성을 발현해 문명을 이어 갔다.
번성하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보며 여섯 여신들은 기뻐했다.
이대로 저들이 계속 문명을 발전시키면 마침내 새로운 ‘신’이 탄생할 것이고, 이는 새로운 어스 신족의 일원이 되리라. 바로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랜 숙적, 칼테라 신족의 옴팔로스가 이 세계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옴팔로스는 자신의 시작을 기억하지 못한다.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는 끝없이 먹어 치우는 자였다. 별과 별을 넘나들며 사냥과 약탈을 반복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우주에는 여전히 자연 발생한 생명들이 많았고 스스로 일어선 지성종들이 즐비했으며 무수한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초월자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신이 존재치 않는 세계였다.
연약한 지성종들을 먹어 치우며 성장하고 또 성장했다. 아득한 세월 속에서 수많은 문명이 사멸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옴팔로스는 깨달았다.
자신의 성장이 끝났으며, 후세를 준비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으신을 탄생시키기 위해선 역시 신성이 필요하다. 이제껏 자신이 먹어 치운 세상에는 극히 부족한 영양분이기도 하다.
끝없이 목표를 찾아 헤맸고, 결국 찾았다.
강제로 범하고, 자신의 씨를 뿌려 칼테라 신족을 잉태시킬, 신이 존재하는 세계.
어스 신족의 여섯 여신이 가호하는 라트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