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282
다가오는 종말 (3)
반가워하는 키비에와 달리 갈색 머리 소녀는 퉁명스러웠다.
“웃음이 나와, 키비? 우리가 저 위에서 무슨 고생 했는지 모르지?”
키비에도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잔소리는 알티에게도 충분히 들었거든? 이쪽은 진짜 반가워서 그런 건데.”
“알았으니까 어서 준비나 해.”
대충 손을 내저으며 소녀, 소론디의 화신은 성큼성큼 공동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류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인상이 전혀 다르군.’
‘저쪽’에서 만난 소론디는 그야말로 자애로운 여신이었다. 말한마디, 태도 하나에도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했다.
반면 저 작은 소녀는 뭐랄까, 세상에 온갖 불만이 가득한 사춘기 애송이 같다.
‘이게 여신과 화신의 차이구만.’
이젠 그도 화신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이해한다.
예를 들어, 40살의 류한빈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15살의 기억으로 돌아간다면?
40살이건 15살이건 류한빈은 류한빈이다. 그가 다른 사람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40살의 한빈과 15살의 한빈이 과연 같은 인격일까?
동일한 존재이면서도, 지식과 지혜가 제한되어 전혀 다른 인격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이다.
소론디가 바닥에 눕혀진 거대한 붉은 수정체에 손을 얹었다.
이미 아무 힘도 남지 않은 부유도 아발타의 중심핵.
“하아, 이런 미친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깊은 한숨과 함께, 대지의 여신이 짊어지던 책무에서 손을 놓았다.
?
별이 흔들린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세상이 요동친다.
“또 이 짓거리야?”
옴팔로스는 입을 삐죽였다.
“처음 당했을 때나 놀랍지, 재탕하면 아무 감흥도 없다고.”
요동은 금방 멈췄다. 소론디가 내려놓은 세계의 유지, 그 막대한 책무를 그가 대신 짊어진 것이다.
덕분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방대한 정보 처리의 임무 역시 마신에게 쏟아졌지만…….
“그래 봐야 아프긴커녕 가렵지도 않다.”
대신 제노비아는 죽어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보아하니 영혼이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지옥조차 감미로울 지경인 것 같다만, 그거야 그가 알바 아니고.
소리 없는 비명 따위 신경 딱 꺼 버리고 마신은 상황을 살폈다.
“이걸로 여신들의 절반이 책무를 떠넘겼나?”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여신들 전원이
손을 놓아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옴팔로스는 히죽 웃었다.
“그땐 무릎 꿇고 감사 인사라도 올려야지.”
여신들이 알아서 라트나를 갖다 바치는 셈인 것이다. 더 바랄 나위가 없다.
하지만 저쪽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으니 그러진 않을 것이다.
“만일의 경우, 한 명 정도 더 손을 놓는 것이 한계이겠군.”
설령 그렇게 해도 가이드라인을 99.9%까지 모은 ‘공허의 제노비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궁금한 건 왜 이 시점에서 또 책무를 떠넘겼느냐는 것인데 알티아가 손 놓은 건 옴팔로스가 부담하는 신의 지혜를 갉아먹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알면서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터.
“대지의 여신이 잠깐 신성을 되찾은 걸로 대체 뭘 할 수 있지?”
고민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주 잠시 힘을 되찾을 뿐이고, 심지어 완전히 되찾지도 못한다.
알티아도 고작 몇 초 동안 여신의 성물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소론디가 손을 놓아 봐야 마신에게 타격을 줄 방법은 없다.
“의미도 없이 헛짓을 하진 않았을 텐데……
고뇌 끝에 옴팔로스는 해답을 얻었다.
“그 지구인에게 뭐라도 하나 더 얹어 줄 속셈인가 보군.”
승산은 아무리 높아도 모자란 법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밀릴 대로 밀리는 상황에선 더더욱.
저들이 지극히 희박한 승률을 조금이라도 올려 보려고 발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뭐, 좋아.”
신의 옥좌에 몸을 누인 채 그는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어디 해봐라.”
이제 와서 상대가 뭔 수를 쓰건 상관없다.
“충분히 대비해 놓았으니까.”
*
*
*
물론 여신들도 잘 알고 있다.
현 상황에서 신성을 잠시 되찾는다 한들 자신들에겐 마신을 공격할 별다른 무기가 없다는 것을.
“그래, 분명 우리에겐 없지.”
수정체에 권능을 불어 넣으며 소론디는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옴팔로스, 네놈에겐 있거든?”
붉은 수정체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아발타 전역에 깔려 있는 마신의 부유 시스템이 여신의 힘으로 재가동된다.
“일어나라, 칼테라의 권세여!”
신성한 언령과 함께 붉은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류한빈과 키비에, 소론디가 서 있는 공동 역시 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초대륙 라트나의 중앙에 위치한 지중해 메티스.
그 드넓은 바다가 요동친다. 사방에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거친 해류가 흘러넘친다.
약동하는 해수면 위로 대지가 몸을 일으켰다.
동서로 4.5킬로미터, 남북으로 7.5 킬로미터.
총질량이 얼마나 엄청난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하늘로 떠오른다. 구름이 찢어지며 사나운 폭풍과 회오리가 미친 듯이 날뛴다.
웅웅웅웅!
옴팔로스가 라트나에 심은, 죽어 버린 세계의 파편.
부유도 아발타가 여신의 권능으로 다시 한번 눈을 뜬 것이다.
계속 상승하는 거대한 섬의 중심, 그곳에서 소론디는 눈을 감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으으으.”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지금도 빠르게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몇 초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 전에 마지막 쐐기를 박아야 한다.
“ 이동하라……
대지의 여신이, 대지를 움직였다.
“더럽혀진 거짓의 땅이여.”
지중해 메티스의 상공까지 솟구친 부유도.
그것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아발타를 라트나에 쑤셔 넣은 옴팔로스의 공간 이동 시스템의 권능이 었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재차 나타난다.
알렌디아와 칼드리스의 국경에 위치한 데류 분지, 그로부터 40킬로미터 상공.
무려 성층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에 거대한 섬이 떠 있는 것이다.
“ 휴우??????
소론디는 한숨을 쉬었다.
마침내 천상천하유아독존이 그녀의 신성을 완전히 억눌렀다.
잠시 가동되었던 마신의 권능도 다시 침묵했다.
“성공이다……
부유도를 떠받치던 모든 힘이 사라졌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
키비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떨어져야지, 별수 있어?”
중력이 아발타를 움켜쥐었다.
대지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데류 분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찬란한 황금의 궁전을 향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옴팔로스는 멍한 음성을 흘렸다.
어머, 시발?”
그리고 이내 안면을 한껏 구겼다.
“이 미친 여신들이!”
직경 수 킬로미터의 막대한 질량체가, 무려 40킬로미터나 되는 아득한 상공에서 낙하하고 있었다.
저게 라트나와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일단 지표면은 싹 다 쓸려 나갈 것이고 내핵까지 그 충격이 닿을 것이며 끔찍한 지진과 화산활동이 이어지겠지. 이것만으로도 라트나의 생명체 절반은 죽어 나갈 것이다.
그뿐인가?
폭발과 함께 일어 오른 흙먼지가 해를 가려 향후 수백 년간 끔찍한 겨울이 오겠지. 그걸로 또 남은 생명체 절반도 죽어 나갈 것이다.
저것만으로도 라트나의 모든 생명체가 깔끔히 몰살당한다!
“아니, 자기 세계를 지켜야 할 여신이 지 세상에 저런 초대형 폭탄을 떨궈?”
마신은 분통을 터트렸다.
“야! 나도 이렇게까진 안 했어!”
추락하는 아발타 내부의 공동.
류한빈과 키비에, 소론디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자유낙하 하는 대지의 내부이다 보니 무중력상태가 된 것이다.
“어쩐지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 한빈은 혀를 찼다.
어차피 옴팔로스가 대신 짊어질걸 뻔히 안다. 그러니 책무에서 손 떼는 정도로 미친 짓이라 할 순 없다.
하지만 이건 진짜 미친 짓이다!
‘여신들도 보면 은근히 무대포란 말이지?’ 키비에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어둠의 성역으로 이어지는 공간 포탈이 다시금 열렸다.
“자, 그럼 난 도로 간다.”
그곳으로 쏙 들어가며 소론디가 한마디를 더 남겼다.
“제발 이번엔 제대로 좀 해!”
“미안하다니까! 참, 나.”
다시 공동 속에 류한빈과 키비에, 둘만 남았다.
이제 곧 끔찍한 충돌이 예정되어 있다. 그 전에 최대한 몸을 보호해야 한다.
둘은 재빨리 오러를 끌어 올렸다.
오러 실드, 오러 디펜더, 오러아머, 오러 가드…….
가능한 모든 방어 기술로 육신을 감싸며 한빈이 물었다.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을까?”
키비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아무리 류한빈이라 해도 이대로 아발타가 라트나를 직격하면 무사할 가능성은 없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옴팔로스의 저력에 달렸지.”
?
위성 궤도에서의 초거대 질량탄 낙하.
이 수법 자체는 옴팔로스도 떠올린 적이 있었다. 여신들의 가호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뚫을 수가 없으니까.
물론 떠올리기만 하고 바로 포기했다.
약탈자가 창고를 습격하는 것은 곡식을 얻으려 함이 목적이다.
그런데 그 창고를 홀랑 불태워버리면 어쩌자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나간 창고 주인이 자기 곡식을 몽땅 불살라 버리려고 한다. 그렇다면 약탈자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 불을 끌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옴팔로스는 자신의 신성을 최대한 끌어냈다.
“0아아아|”
동서남북, 사방의 보석탑에서 신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다이아몬드 타워가 백색 섬광을 쏘아 낸다.
루비 타워가 붉은 뇌광을 터트린다.
에메랄드 타워가 신록의 기류를 뻗어 낸다.
사파이어 타워에서 청의 광채가 솟구친다.
-방어 결계, 최대 가동!
차원궁 전체가 황금의 광휘를 발했다.
전역을 뒤덮고 있던 마신의 방어막이 더더욱 응집되어 상공의 한 점으로 뭉치며 방패의 형상으로 화했다.
이 세계, 라트나를 종말로부터 구원할 신의 방패였다.
이윽고 구름을 찢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굉음이 하늘 끝에서 끝까지 울렸다.
고오오오…….
잠시 전투가 멈췄다.
마신의 사도와 천사도, 화신 일행과 라트나 해방군도 그저 두려움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걸 음팔로스가 막지 못하면?
전원 사망이다.
여기 있는 이들뿐 아니라 라트나의 모든 생명체가 죽어 버린다!
마침내 아발타가 빛의 방패와 충돌했다.
쿠우우웅!
대지가 수직으로 차원궁 위에 꽂혔다.
방어막이 간단히 찢겨 나가며 무자비한 열 폭풍이 일었다. 그리고 다시 한 점으로 모이고 모여 하늘로 솟구쳤다.
옴팔로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파괴가 일어나고, 중화된다.
제노비아의 비명도 더욱 거세졌다.
‘으아아아!’
파괴가 일어나고, 중화된다.
너무나도 거대한 두 힘의 격돌.
그 순간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힘내라, 옴팔로스!
이 세계의 주인들로부터!
소중한 라트나를 지켜라!
한없이 신성을 발하며 마신은 이를 득득 갈았다.
“이게 무슨 촌극이냐고,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