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47
한여름 밤의 악령(2)
멍하니 서 있는 한빈에게 아티스가 몰래 속삭였다.
“말했잖아? 쉬운 일인데, 귀찮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건 뭐 긴장감도 없고 전투도 아니고……
그 모습을 달리 해석했는지 에밀이 미안해했다.
“제가 펠라드 님을 잊었군요.”
곧바로 흑색 대검에 영술을 슥건다.
후딱 거는 걸 보니 별로 높은 수준의 영술도 아닌 듯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한빈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충 휘둘렀는데도 일 검에 유령 대여섯 마리가 펑펑 날아갔다.
에밀이 감탄을 터트렸다.
“과연 발타라 전사, 굉장한 위력이군요!”
그의 영술은 그저 영체를 타격할 수만 있게 해 줄 뿐이고, 위력 자체는 전사의 무력에 달린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한 1분 정도 유령들을 해치우고 나니 더 이상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에밀 신관이 대수롭잖게 말했다.
“이 근처 유령은 전부 처리한 것 같군요. 그럼 다음 구역으로 이동할까요?”
앞장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류한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왜 그리 태연하나 했더니……
이제 확실히 이해가 갔다.
악령 청소는 3시간 만에 끝났다.
그렇다.
더도 덜도 말고 그냥 ‘청소’였다.
퇴치니 제령이니 하는 근사한 단어를 붙이기엔, 지나치게 쉽고 단순한 일이었다.
‘나 참, 기껏 시간 투자해서 한 일이 고작 이건가?’
그래도 헛수고는 아니었다.
교단의 평판 점수는 이걸로 상당히 올라갔으니까.
흑색 대검을 도로 등에 찬 뒤 한빈이 물었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에밀 신관이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까, 오늘 밤은 이곳에 머물며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악령은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아 있어도 사기(邪氣)를 흡수해 다시 불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완벽하게 박멸해야 한단다.
저택 2층의 한 응접실을 골라 불을 피웠다.
바닥에 모포를 깔아 잠자리도 마련했다.
이제 남은 건 동틀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뿐.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멍하니 불을 쬐고 있을 때였다.
지루함을 참기 힘든지 에피르가 입을 열었다.
“한여름 밤, 버려진 저택이라…… 괴담의 소재로 딱이네요‘?”
에밀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도 때울 겸 무서운 이야기나 해 볼까요?”
“헤, 재밌겠다.”
둘의 대화에 한빈은 내심 어이 없어했다.
‘이 세계에도 괴담이 있어? 방금 엄청 허무하게 유령들 싹 쓸었잖아? 애당초 괴담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세계관이 아닌 것 같은데?’
에밀 신관이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아직 제가 견습일 때의 일입니다. 초급 헌터 팀과 함께 마물 퇴치를 하던 중이었지 *
*
*
평소처럼 마물 퇴치를 하고 돌아가던 중의 일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지지 뭡니까? 그래서다들 급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았지요.”
그곳은 숲속에 버려진 거대한 귀족 저택이었다.
사방이 죽은 나무와 검불로 가득한, 음산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비를 피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적당히 불을 피우고 몸을 말리고 있는데, 웬 희끄무레한 인간의 형상이 복도 저편에 나타나더군요.”
아티스와 에피르가 맞장구를 쳤다.
“버려진 저택에 유령이 나오는 건 흔한 일이지요.”
“해에, 그래서요?”
아무래도 유령 출몰 자체는 괴담의 소재가 아닌 모양이다.
에밀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도 당연히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퇴치하려고 했는데……
잠시 말을 끊더니, 조용히 덧붙인다.
“……그 유령이 문을 열고 복도의 한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에피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히 익!”
한빈은 눈을 껌뻑 거 렸다.
‘뭔데? 왜 거기서 놀라는 건데?’
어쨌건 이 세계 사람들에겐 저게 굉장히 섬뜩한 일인 듯했다.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에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놀란 우리는 무장을 갖추고 바로 유령을 쫓아갔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라 다들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요. 그런데!”
갑자기 에밀이 목소리를 높였다.
“복도에 걸려 있던 촛대에 일제히 불이 붙었습니다!”
“음!”
아티스가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에피르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안색이 굳은 채였다.
둘 다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 모양이 었다.
물론 한빈은 멀뚱멀뚱.
입에서 불을 뿜고 온갖 마법도 쓸 수 있는 드래곤이, 고작 버려진 촛대에 불 좀 붙었다고 놀라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때 려죽여도 이해가 안 간다.
“다들 용맹한 헌터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되니 더 이상 허세를 떨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놀란 우리는 바로 저택에서 도망치기로 했지요.”
그래서 허겁지겁 저택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도 이미 그 정체 불명의 유령이 서 있었다.
“퇴로가 막힌 이상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영술을 준비했고, 마법사분도 유령에게 잘 먹히는 화염계 마법을 날렸습니다. 그렇게 영술과 마법이 유령을 강타하는 순간!”
말을 하다 말고 에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대로 영술과 마법이 유령을 통과해 버렸습니다……
인간으로 변신한 드래곤 총각과 와이번 소녀가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 으음.”
“아이, 참. 너무 겁주지 마요오.”
반면 야만족 전사로 위장한 한국인, 류한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뿐.
‘모르겠어. 전혀 공감이 안돼…
절망스럽다.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에밀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놀란 우리는 다시 도망 다녔습니다.”
그 후엔 뭐, 흔해 빠진 괴담이었다.
유령이 열심히 일행을 쫓아다녔고, 일행도 열심히 도망 다녔고, 그 와중에 유령이 노크도 하고 문도 열어젖히고 그랬단다.
한빈 입장에선 영 웃기는 이야기 같은데도 에피르와 아티스는 착실히 무서워해 주고 있다.
“유령이 일부러 문을 열었단 말이에요?”
“얼마든지 벽을 통과할 수 있는데도?”
“히이익, 무섭다.”
되도록 라트나의 상식을 모른다는 티는 내고 싶지 않지만, 이쯤 되니 정말 미칠 듯이 궁금하다.
한빈이 일부러 무뚝뚝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유령이 문을 여는 게 뭐가 무섭다는 거지?”
에피르가 이유를 알려 주었다.
“유령이 굳이 문을 열고 찾아다니면, 그건 유령이 아니라 정말 죽은 자의 영혼이란 거잖아요!”
아티스도 설명을 덧붙였다.
“생전의 습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라트나에서는 ‘유령’과 ‘죽은 자의 영혼’을 전혀 다른 의미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빠져나갈 수도 없는 저택에서, 손쓸 도리 없는 존재를 상대로 열심히 도망만 다니다가 아침이 되어 겨우 탈출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날 만난 유령의 정체는 모릅니다. 그냥 한여름 밤의 악몽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말로 죽은 자의 영혼이었을까요?”
잔잔한 어조로 에밀이 이야기를 마쳤다.
“진실은 지금도 어둠 속에 묻혀 있지요. 이걸로 제 이야기는 끝입니다. 지루하진 않았나 모르겠군요.”
그리고 모포를 정리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럼 슬슬 눈을 좀 붙이죠. 밤은 아직 기니까 말입니다.”
*
*
*
따로 불침번을 서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아티스의 마법이 있으니까.
“흐르고 흩날려라. 샌드 오브드림.”
이걸로 벽난로의 빛이나 열기, 냄새 등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추가로 알람 결계 역시 둘러놓았으니 혹여 적이 접근한다 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한빈 일행은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지만 바로 잠들진 않았다.
에밀 신관도 아티스도 에피르도, 모포를 두른 채 이리저리 뒤척거 린다.
다들 별로 피곤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류한빈은 피식 웃었다.
실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뭘 한 게 있어야 피곤하건 말건 하지?’
그렇게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문득 복도 쪽에서 희미하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으으으…”
어둠 속을 음산하게 울리는 섬뜩한 신음 소리…….
모골이 송연해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빈 일행은 오히려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들은 저런 귀곡성을 지겹게 들어온 것이다.
아까 유령 청소할 때.
에밀 신관이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역시 몇 마리 남아 있었군요.”
에피르도 쌍검을 뽑았다.
“마침 잠도 안 왔는데 잘됐네요.”
일행은 우르르 복도로 나갔다.
과연 어둠 저편에 인간 형태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제까지 처치했던 백색 유령들과 다르게 새까만 악령이었다.
너무나 진한 묵빛이라, 심지어 어둠 속에서도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짙은 암흑.
의아해하며 아티스가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색이 다르군.”
“달라 봤자 어차피 유령일 뿐이지요.”
태연하게 에밀은 영술의 빛을 발했다.
“마저 처리합시다.”
유령이라면 자연히 이 빛에 이끌려 다가오게 되리라.
검은 악령은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괴성을 터트리며 어둠을 떨쳤다.
“키에에에에엑!”
그림자의 형태가 인간에서 기묘한 괴물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왜 더미 라이트에 낚이질 않지?”
살짝 당황하며 에밀이 다른 영술을 준비했다.
“알티아의 빛이여, 내 적을 치소서!”
성광이 한 자루 창이 되어 악령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 앗‘?”
에밀이 채 놀라기도 전에 검은 악령이 움직였다.
그림자가 순식간에 부풀더니 이 내 칠흑의 칼날로 변해 쏘아졌다.
콰콰콰쾅!
마루를 부수며 칼날의 파도가 일행에게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아티스가 마법 장벽을 펼쳤다.
“아케인 실드!”
반투명한 방패가 칠흑의 칼날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헉!’
이번에도 그냥 통과한다!
칠흑이 무방비 상태의 아티스를 덮쳤다.
에피르가 재빨리 몸을 던져 그를 옆으로 밀었다.
“아티스 님!”
아슬아슬하게 칠흑의 칼날이 비껴 나가며 복도 벽을 강타했다.
우렁찬 폭음이 터지며 벽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우르릉!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경악한 아티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법 장벽을 무시했다고?”
에피르가 겁먹은 눈으로 에밀을 바라보았다.
“잠깐, 이거 뭐예요? 그거 정말 실화였어요?”
조금 전 그가 떠든 괴담과 흡사한 상황인 것이다.
“아니, 서, 설마,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밀신관은 재차 영술을 발동했다.
“키브리엘의 눈물이 어둠을 찢을지어 다.”
아티스도 당황한 목소리로 마법을 이었다.
“파이어 크래시!”
여전히 아무 소용 없었다.
모든 공격이 그대로 통과해 저택 벽을 때렸다.
에밀 신관이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돼! 정말 사자(死者)의 영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