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84
세 르히스란(5)
키비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니었군……
그레이스는 그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을 과거의 정보로 저장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그 사실을 읽어 낸 키비에는 그레이스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최강의 3인은 단순히 지구인들을 마령석 캐는 광부로 써먹기 위해서만 악타룬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옴팔로스의 힘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장이기도 했겠지.”
어떻게 마신의 권능을 저 수준까지 구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허겁지겁 준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몇십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네.”
악타룬의 봉인 결계가 여태 깨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레이스가 붙잡혔을 때의 레벨은 61이었다.
10여 년 가까이 악타룬에 갇혀 무수히 마물을 사냥하며 현재의 레벨인 85까지 오른 것이다.
‘즉, 보다 오래 갇힌 지구인들 중엔 그보다 더 레벨이 높은 이들도 부지기수일 터.’
33년 전 프렐류를 노린 그레이트 어스는 대략 레벨 70 정도가 평균이었고, 수장이라도 레벨 100 정도였다.
그렇기에 최강의 4인이 나서자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레이스는 악타룬의 지구인들 중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기껏해야 중간 정도 수준이었다.
레벨 85 영술사씩이나 되는데도 중급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0여 년 전에 갇혔던 ‘당시의’ 그레이트 어스는 대체 얼마나 레벨이 높아졌을까?
레벨 100? 110? 120?
‘아니, 그 정도는 아니려나? 악타룬에 출몰하는 마물의 최고 레벨이 90 정도이니, 레벨 100을 넘긴 이후엔 레벨 상승이 극히 둔해졌겠군.’
그렇다 해도 평균 레벨 자체는 엄청나게 높을 것이 분명했다.
수십 년 동안 갇혀 살면서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졌을 테니까.
아무리 최강의 3인이 강하다 한들, 최고위 레벨의 지구인이 수백 명이나 되는데 뚫지도 못하는 결계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다른 수가 있어.’
분명 마신의 권능을 이용한 것일 터다.
라트나에 속한 능력이라면 키비에가 모를 리 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계인들의 정신을 제어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지.’
정황을 보건대 최강의 3인은 수백 명의 지구인들을 그냥 세상에 풀어놓지 않았다.
강력한 금제를 걸어 놓아, 만일의 경우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걸 방지했다.
‘이 여인은 그저 뇌제가 걸어 놓은 걸로만 인식하고 있지만……
실은 뇌제, 아크메이지, 생사초월자가 힘을 합친 결과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포스와 마나, 프라나가 동시에 느껴질 리가 있나?
한숨을 쉬며 키비에는 그레이스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일단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냈어.”
필요한 정보를 전부 캐냈으니 더 이상 볼일도 없다.
키비에가 한빈을 돌아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 지구인, 죽여도 될까?”
붙잡은 것은 류한빈이니, 아무리 그녀라도 그의 의사를 무시할 순 없다.
“상황을 보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만……
한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저항인 상대를 죽이는 건 영께름칙한데. 내가 너무 물러 터진 건가, 이거?”
키비에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사실, 그가 주저 없이 죽이라고 했다면 그 또한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충분히 정상이라는 의미지. 무르긴 무슨.”
하지만 현실적으로 살려 둘 방법이 없다.
이대로 그녀를 제압한 채 깨우면 ‘항복 상태’로 간주되어 금제가 발동한다.
그렇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연쇄살인마를 그냥 보내 줄 수도 없다.
“정신 제어를 풀 방법도 없고.”
그레이스에게 걸린 정신 제어는 단순한 라트나의 마법이나 영술이 아니다.
마신 음팔로스와 관련된 제3의 권능이 다.
화신 상태인 키비에로서는 손쓸방법이 없는 것이다.
문득 키비에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 여인은 이미 수많은 라트나 인들을 살해했어. 오직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죽인 이들도 수없이 많지.”
하지만 동시에, 마신에게 붙잡혀 세뇌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이 이계인을 고통 없이 죽여 줄 생각이야. 그것이 그녀가 받아야 할 처벌이자, 자비라고 생각하니까.”
차분한 시선으로 그녀가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한빈?”
류한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싶진 않아. 다른 지구인들처럼 되는 건 역시 두려워.”
아티스와 에피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죽이지 말자는 소리일까?
감정대로만 처리하기엔 현 상황이 녹록지 않다.
그때 한빈이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사람을 살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죄악이더군.
때로는.”
*
*
*
그레이스는 고통 없이 죽었다.
기절한 채, 마치 잠든 것처럼 숨이 끊어졌고, 이내 시체가 사라져 옷가지만을 남겼다.
옷가지를 치우며 에피르가 물었다.
“이제 어쩌죠? 원래는 세르히스란에서 사흘쯤 더 머무를 계획이었잖아요.”
아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이 도시를 떠야지.”
키비에의 위치가 들통났으니 계속 세르히스란에 머무르는 건 위험하다.
언제 다른 이계인이 습격해 올지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뇌제나 아크메이지, 생사초월자가 직접 움직일 가능성도 크지. 그들에겐 그만큼 중요한 일일 테니까.”
최강의 3인 정도 되는 고위층이라면 어지간해선 직접 나서지 않는다.
딸린 세력이 있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키비에를 붙잡는 것은 저들에게도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일일 터였다.
농담이 아니라, 셋이서 손잡고 한꺼번에 움직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 바로 세르칼탄으로 가나요? 하지만 저나 아티스 님은 아직 레벨이 모자란데요.”
류한빈이 의견을 냈다.
“일단 이 도시부터 벗어나고, 가는 도중에 모자란 레벨 마저 채우자. 다른 지역에도 던전은 있을 거 아냐? 다른 라트나 토종몬스터를 사냥해도 되고.”
어쨌건 당장이라도 자취를 감춰야 한다는 점은 틀림없다.
한빈 일행은 곧바로 여관을 떠났다.
기껏 늦은 밤에 새로 방 잡아 놓고 다시 떠난다는 소리에 여관 주인이 의아해하긴 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댔다.
동시에 슬쩍 엉뚱한 지명을 흘려, 혹여 있을 추적자에 대한 대비도 했다.
“네? 가신다고요?”
“예, 마스터스 지방에 일이 생겨서 요.”
“바스터스라면 여기서 사흘 거리인데. 먼 길을 가시는군요. 식량이라도 좀 싸 드릴까요?”
“이미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이후 허겁지겁 성문으로 향했다.
웃돈 쥐여 주고 성 밖으로 빠져나온 다음 마차도 찾았다.
달빛 아래 한참 동안 마차를 달리니 세르히스란이 아득히 멀어진다.
그제야 키비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추적은 피할 수 있겠지.”
아티스와 에피르도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다른 습격에도 대비해야 해.”
“키비에 언니를 노리는 다른 이계인들이 있다는 소리니까요.”
되도록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은 채, 최대한 빨리 바오톨트를 만나야 한다.
일단 검왕을 만나야 안전해진다.
‘그때까지 믿을 수 있는 건 이 남자뿐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키비에는 옆에 앉아 대검을 손질하는 류한빈을 돌아보았다.
“보호받는 공주님 포지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
듬직한 한빈의 거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녀가 눈웃음을 쳤다.
“소중한 지구행 편도 티켓, 잘 지켜.”
“당연하지. 네가 여신으로 돌아가야 날 집에도 보내 줄 수 있는 거잖아.”
애당초 그녀가 신성을 되찾지 못하면 한빈을 지구로 돌려보내 줄 수도 없다.
“내 목숨 빼곤 전부 바쳐서라도 지킬 테니까 걱정 말라고.”
키비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목숨 바쳐 지키겠다는 말보다는 그나마 믿음직하네, 그거.”
? *
마도왕국 룬의 수도, 타스마랄.
제노비아 여왕의 궁성 ‘레펠타데 크라드’에 한 무리의 대신들이 도열해 있었다.
저마다 차례가 오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안건을 건넨다.
옥좌에 앉은 금발의 흑인 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건을 확인 한다.
“올해 싱커즈의 예산안입니다, 폐하.”
“나쁘지 않군. 이대로 시행하도록.”
일견 평범해 보이는 정례 회의였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옥좌에 앉은 제노비아는 실체가 아니 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3차원적인 마법 영상이었다.
원거리에서 자신의 모습만을 투영한 채 집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은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폐하께서 또 뭔가 연구에 바쁘신 모양이군.’
라트나 최강의 마법사이기도 한 제노비아는 예전에도 마법 연구에 한창일 경우 이렇게 화상으로만 신하들을 만나는 일이 흔했다.
그렇게 한창 여왕의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허상이 허공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그러십니까, 여왕 폐하?”
신하 중 한 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바로 정례를 폐해 버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나머지는 그대들이 정리하고 후에 보고하도록.”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옥좌에서 사라졌다.
이 역시 흔히 있었던 일이다.
이미 텅 빈 옥좌를 향해 자연스럽게 신하들이 허리를 숙였다.
“예, 여왕 폐하.”
*
*
*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 칠흑의 공간.
어둠 속에 거대한 섬이 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위로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신전이 서 있다.
빛이 없음에도 사물이 스스로 윤곽과 색채를 드러내는 기이한 공간.
어둠의 여신 키브리엘의 성역이었다.
성역의 신전에서 제노비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굳건한 인상을 지닌 금발의 중년 사내였다.
‘가르한은 아직 집무 중인가?’
때마침 가르한도 눈을 떴다.
그가 제노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도 감지했나?”
“그래, 키브리엘을 찾았다. 세르히스란이더군.”
가르한이 쾌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빨랐군. 이계인들을 사방에 뿌려 놓은 보람이 있어.”
“하지만 여전히 화신의 생김새나 신분까진 알 수 없었어. 이것만으로 추적할 수 있을까?”
“키브리엘을 상대한 이계인들은 전투를 벌이고 죽었다. 그렇다면 세르히스란에 단서가 남아 있겠지.”
“좋아, 홀리엔에게 알릴게.”
제노비아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빛의 영상이 떠오르며 화려한 실크 잠옷을 걸친 님프 미녀의 모습을 비췄다.
푸른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님프 미녀가 인상을 썼다.
“이봐, 어지간히 급한 일 아니면 이런 한밤중에는 연락 좀 자제하지? 지금 옆에는 우리 자기도 있다고.”
가르한은 실소했다.
영상 너머로 비치는 우아한 왕실 침실, 그 침대 위에 잘생긴 님프 청년이 잠들어 있었다.
홀리엔의 부군, 요정왕 로플란 스트라우스 알렌디아였다.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그만큼 급한 일이다.”
님프 미녀, 홀리엔의 표정이 굳었다.
“……찾은 거야?”
제노비아와 가르한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세르히스란에서 키브리엘의 화신을 감지했어.”
“하지만 우린 이 성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당신이 처리해 줘야겠어.”
영상 속의 홀리엔이 안쓰럽다는 듯 둘을 보며 혀를 찼다.
“수명 짧은 인간들은 고생이군.
알았어. 내 쪽에서 해결하지.”
로플란은 멍하니 눈을 떴다.
잠결에 아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무슨 일이오, 왕비?”
홀리엔이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냥 잠시 잠이 깼어요, 나의 사랑하는 폐하.”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로플란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를 남긴다.
“좀 더 주무세요.”
기절하듯 요정왕은 다시 잠들었다.
이불을 고쳐 덮어 준 뒤 홀리엔 은침실을 나섰다.
응접실에 앉아 살짝 손가락을 튀긴 뒤 작게 중얼거린다.
“한창 자고 있을 텐데 부르려니 좀 미안하네.”
잠시 후 갈색 머리의 한 여인이 완전무장한 채 응접실에 들어섰다.
“부르셨나요, 왕비 전하?”
“그래, 레즐리.”
홀리엔이 작은 엠블럼을 휙 던졌다.
“늦은 밤인 건 알지만, 급하게 심부름 좀 다녀와야겠어.”
그레이트 어스의 엠블럼이었다.
재빨리 품에 챙기며 레즐리가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초승달이 떠오른 창밖의 밤하늘, 그 너머를 가리키며 홀리엔이 대꾸했다.
“어퍼 드래코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