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85
추적자(1)
라트나 대륙 남부의 소국, 나인 델의 항구도시 프랄.
화창한 남부의 하늘 아래 피가 솟구친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끝으로 마지막 헌터마저 쓰러졌다.
이미 주위엔 네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피 묻은 칼날을 닦으며 장 아타나시오는 히죽 웃었다.
“레벨은 낮아도 다섯 명쯤 죽이니 약발이 오는구만.”
라트나인 살해에 따른 쾌락 보상은 상대의 레벨이 높을수록 커진다.
장이 죽인 헌터들은 기껏해야 레벨 30대 초중반.
당연히 1인당 보상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여섯 명쯤은 죽여야 겨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나도 대륙 중앙으로 가서 더 레벨 높은 인간들을 사냥하고 싶지만……
시체를 수거하며 장은 혀를 찼다.
‘뇌제의 목소리 때문에 이 도시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 원.’
그는 레벨 62 마검사였다.
악타룬에선 최하위 레벨에 불과했지만, 세상에 나온 지금은 그 럭저럭 4대금역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실력자다.
그럼에도 장은 이 항구도시 프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뇌제가 걸어 놓은 금제 탓이었다.
1. 라트나인에게 들키지 않고 지정된 도시로 향할 것 2.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 도시에 머무르며 여신의 화신을 탐색할 것 3. 여신의 화신을 찾을 때까지 도시를 벗어나지 말 것 아무리 최강의 3인이라 할지라도 능력에 한계가 있기에 생긴 룰이다.
수백 명의 지구인, 그것도 하나 같이 고위 레벨이다.
개중엔 레벨 80이나 90을 넘는 이들조차 있다.
이런 다수의 강자들을 제어하는 것이 쉬울 리 없는 것이다.
이들을 풀어놓는다고 할 때 홀리엔이 기겁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명령이 간단한 만큼 강제성도 컸다.
일단 금제에 걸리고 나면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도 악타룬의 다른 지구인들처럼, 지정된 이 항구도시프랄에서 내내 머물며 살육을 이어 가고 있었다.
‘쩝,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사는 게 최선이긴 한데.’
시체들을 전부 처리한 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이대로 계속 살인을 이어 가면 꼬리가 밟힐 거란 건 장도 잘 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다.
이미 그는 살인의 쾌락에 중독될 대로 중독된 후였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으리라.
몇십 년이나 악타룬에 갇혀 살며 살인을 저지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장은 그리하지 않았다.
아마 다른 지구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살인을 포기하고, 하기 싫은 불살을 억지로 고수하면 과연 내가 더 행복해질까?’
이대로라면 점점 더 위험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질 못한다.
당장 눈앞에 놓인 살인의 쾌락이 너무 달콤하니까.
‘그럼 슬슬 내빼야지.’
핏자국마저 깔끔히 지운 뒤 장은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아무리 흔적을 잘 지워도 너무 단기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면 결국은 들통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며 도시 곳곳에서 헌터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단순히 일부 도시의 일만이 아니었다.
각국의 수도나 4대금역 도시는 물론이고 변경 소국의 도시들까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지역이라면 전부 해당되었다.
사람들은 알아챘다.
라트나 대륙 곳곳에서 대규모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계인의 짓이다!’
‘이 사악한 마신의 주구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단순히 이계인에 대한 편견만으로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헌터들, 그것도 상당한 고위 레벨이었다.
그런 이들이 무차별 살인에 휘말렸다면 라트나인이 저지른 짓일 가능성은 적었다.
물론 라트나인 중에도 악인은 얼마든지 많다.
뚜렷한 목적을 지닌, 예를 들면 강도질이나 강간, 기타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무차별 쾌락 살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통 연쇄살인마는 사회적 약자를 노리기 마련이다.
일부러 고위 레벨을 노리진 않는다.
그런데 그런 연쇄살인의 대상이 고위 레벨 헌터라면?
이계인의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요 몇 년간 조용했는데.’
‘게다가 한두 명의 짓이 아니야!’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고위 레벨 이계인들이 누군가 쏟아 낸 것처럼 등장했고, 대륙 각지에서 줄줄이 대규모 살인을 이어 간다.
흉흉한 분위기가 대륙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서로를 의심했다.
이계인은 죽이기 전까지 라트나 인과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흉흉한 분위기가 대륙 전역에 퍼졌다.
이는 얼음불꽃 숲의 금역 도시, 세르히스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서 검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요 근래 이계인의 무차별 살인 이 이어진 탓이었다.
다행히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계인들은 발타라 전사 펠라드 빈이 해치웠지만, 그래도 다른 이계인 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즉, 그 발타라 전사 일행 중에 여신의 화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습니다, 알마라. 소문이 많이 퍼져서 정보를 캐내긴 별로 어렵지 않겠군요.”
20대로 보이는 젊은 미녀가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에게 반말을 건네고, 남자는 꽤나 정중한 태도로 말을 받고 있었다.
백금발에 회색 눈동자를 지닌 훤칠한 여인과, 흑갈색 머리칼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젊은 남자.
둘 다 겉보기론 딱히 특이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 었다.
올해로 650살이 된 실버 드래곤, 알마라 발라우르 글라키에스.
올해로 530살이 된 그린 드래곤, 살투스 린트부름 라펠트라스.
둘 다 어퍼 드래코니움에 속한 강력한 고룡들인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한 채 알마라와 살투스는 계속 세르히스란의 거리를 걸었다.
혹여 강해 보이는 헌터들과 눈을 마주치면 먼저 눈을 피하며 최대한 시비를 피한다.
드래곤이 레벨 상승이 더디다곤 하지만 수백 년씩 살아온 고룡쯤되면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얌전히 정체를 숨기고 인간인 척하고 있었다.
“괜히 소란 일으키면 곤란하지.”
“홀리엔 님의 명령이 우선이니까요.”
최강의 3인은 어둠의 여신을 찾기 위해 대륙 전역에 이계인을 깔아 놓았다.
말하자면 덫을 설치해 놓은 셈이다.
덫에 목표물이 바로 걸려 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설령 상대가 도주해도 덫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통해 목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남긴 흔적을 통해 정체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이 맡은 임무가 그것이었다.
목표가 남긴 자취를 통해 어둠의 화신의 정보를 입수하고, 지속적으로 추적해 가능하면 화신을 생포할 것.
홀리엔의 명령을 전달했던 그레이트 어스의 새 연락원 레즐리를 떠올리며, 알마라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 렸다.
“그런데 알레한드로는 어떻게 된 거지? 원래 그가 연락 담당아니었어?”
“뭔 일 당했나 보지요. 우리가 뭐, 그놈이 무서워서 머리 조아렸습니까? 유니크 아이템이 무서워서 그랬지.”
“하긴 그렇지.”
대화를 나누며 드래곤들은 세르히스란 곳곳을 누볐다.
평범한 인간처럼 수소문을 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한다.
사흘이란 시간을 허비한 덕에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르히스란의 이계인들과 싸운 이들은 총 4인.
발타라 전사와 여전사, 적발의 마법사 청년과 은발의 마검사 소녀로 이루어진 헌터 팀이었다.
헌터 길드를 통해 그들의 이름도 파악했다.
“아티스 베니스터, 에피르 베니 스터, 펠라드 빈, 키비에 비에른이었지?”
살투스가 중얼거렸다.
“그들 중 누가 어둠의 여신일까요?”
모든 용족을 창조한 어둠의 여신, 키브리엘.
이 두 드래곤에게도 그녀는 자신들의 창조주나 다름없다.
하지만 둘 다 경외의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 언제부터 부모 신경썼다고. 그치?”
“그렇죠. 키브리엘이 부모 대접받고 싶었으면 애초에 우리를 이렇게 만들지도 말았어야지.”
불경한 대화를 나누며 두 고룡은 고민에 빠졌다.
“가장 의심이 가는 건 역시 이 발타라 여전사인데……
일단 이름부터가 키비에, 키브리엘과 흡사하다.
게다가 머리색도 까맣고 여성이 기까지 하다.
화신의 이미지에 가장 잘 들어 맞는다.
하지만 알마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뻔하잖아. 설마 그렇게 단순하게 위장했으려고?”
게다가 정체를 숨겨야 하는데 굳이 눈에 팍팍 띄는 발타라 여전사의 신분을 택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둠의 여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 정도로 멍청할 리는 없지.”
마찬가지로 거구의 발타라 전사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적발의 마법사나, 은발의 마검사 소녀 중 한 명이겠군.”
적발의 마법사일 가능성은 그리 없다.
여신이라 해도 스스로의 정체성은 되도록 유지했을 테니까.
사실 드래곤도 인간이나 요정족으로 의태할 때 자신의 성별을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영혼과 육체의 괴리가 너무 심해져 본신의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물론 드물게 생물학적 성별과 심리적 성별이 다른 경우엔 오히려 성별을 바꾸는 경우 능력이 더 오르기도 하지만…….
“키브리엘의 화신은 항상 여성이었지. 그럴 리는 없어.”
소거법에 의해 추론을 마친 뒤 드래곤들은 확신했다.
은발의 마검사 소녀가 바로 어둠의 화신이다!
“문제는 추적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군요.”
살투스가 난감해하며 말했다.
“머리카락이고 핏자국이고, 하나도 흘린 게 없어요.”
“그야 습격을 받은 시점에서 쫓긴다는 걸 알았을 텐데, 당연히 칼같이 챙겼겠지.”
“그럼 여기서 어떻게 추적합니까? 마스터스 지방으로 갔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눈속임같고.”
“추적 영술 때문에 요새 다들 너무 편해졌는데 말이야……
알마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누군가를 쫓을 땐 정보 찾아가며 발로 뛰는 게 상식이었어, 나 어릴 때만 해도.”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일단은 고룡입니다만‘?”
투덜대긴 했지만 살투스도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상대가 신체 일부를 남기지 않았다 해도 추적할 방법은 많다.
세르히스란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물품들을 구입했고 평소 어떤 언행을 흘렸는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단서가 되는 것이다.
“서두르자고.”
살투스를 독려하며 알마라가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서 그 은발 마검사를 붙잡아야지.”
“……웅?”
마부석에 앉아 졸고 있던 에피르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곁에 앉아 있던 키비에가 물었다.
“왜 그러니, 에피르?”
“기분 탓인가, 왠지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뺨을 긁으며 에피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마차를 따라 걷고 있던 류한빈이 실소했다.
“뭐야, 뜬금없이? 잠 덜 깼냐?”
묘한 표정으로 키비에가 에피르를 바라보았다.
“실은 나도 어째 억울하게 바보 취급당한 기분이 들긴 했다만……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겠죠.”
둘 다 깔끔히 신경 꺼 버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정경을 살펴보았다.
마차는 거대한 광야를 지나고 있었다.
사방이 붉은 대지.
동물도 식물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흙과 바위, 기암괴석만이 가득하다.
드문드문 마른 검불이 종종 보이긴 했지만 그게 오히려 이곳의 황량함을 더욱 드러나게 할 뿐이다.
류한빈이 중얼거렸다.
“일단 여기까지 아무 일 없이 왔군.”
최강의 3인은 대륙의 모든 주요 도시에 죄다 이계인을 풀어놓았다.
교역이 많은 길목을 모조리 차지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확인하게 한 것이다.
그레이스의 과거를 읽어 알아낸 사실이었다.
즉, 사람 없는 시골만 골라 다니면 이계인의 탐색을 피할 수 있다.
세르히스란을 떠난 이래 한빈일행은 한 번도 도시에 진입한 적이 없었다.
아예 작정하고 인적 드문 길만 이용했다.
“세르칼탄이야 어쩔 수 없이 들렀지만, 그 외엔 되도록 사람 눈에 뜨이지 않았으니까……
한빈이 마차를 돌아보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 아티스?”
마차 뒤에 걸터앉아 있던 아티스가 지도를 펼쳤다.
“반나절만 더 가면 돼. 그럼 대미궁의 동쪽 입구, 라이온 게이 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