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Story of a Sword King RAW novel - Chapter 95
혈투(血 關) (4)
고민은 일단 뒤로하고, 한빈 일행은 짐을 챙겼다.
더 이상 칼탄에 볼일은 없었다.
계속 이 위험한 곳에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돌아가기 전에 주섬주섬 아이템들도 챙겼다.
죽은 세 명의 이계인들은 꽤나 강력한 마도구들을 지니고 있었다.
두 드래곤도 홀랑 벗고 튀었으니 장비는 고스란히 남겼다.
나름 비싼 물건들이니 잘 챙겨 가야 한다.
하지만 막상 수거하려 드니 그리 쓸 만한 게 남지 않았다.
에피르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한빈 님이 다 박살 내버리셨네요……
이계인들이 쓰던 무기나 갑옷은 무사한 게 없었다.
류한빈의 크로스 임팩트에 휩쓸려 모조리 부서진 것이다.
그래도 크기가 작은 보조 장신구들은 멀쩡했다.
문제는 이 매직 아이템들이 죄다 레벨 제한 90 이상이라는 것이다.
장신구를 공간 배낭에 챙겨 넣으며 아티스와 에피르는 고개를 저었다.
“겨우 레벨 70 넘겨서 힐링 아이템들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이거 사용하려면 대체 레벨을 얼마나 더 올려야 하려나……
문득 류한빈이 아티스에게 물었다.
“저기, 아티스. 그 살투스란 놈그린 드래곤 맞지?”
“그렇지. 그게 왜‘?”
“인간일 때 머리색이 흑갈색이더라고. 원래 그린 드래곤이면 머리색도 녹색이어야 하는 거 아냐?”
레드 드래곤인 아티스는 적발이고 실버 드래곤 알마라는 백금발이었다.
그런데 왜 그린 드래곤만 생뚱맞게 흑갈색인가?
한빈의 질문에 아티스는 어이없어했다.
“넌 가끔 근거도 없는 이상한 상식을 믿고 있더라?”
물론 드래곤은 어지간해선 자신의 비늘 색에 맞춰 머리색을 정한다.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색이니까.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머리색을 택할 이유는 없잖아. 애초에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인간 의태를 하는 건데.”
라트나는 염색이 보편화된 세계가 아니다.
녹색 머리칼의 인간이 돌아다니면 엄청나게 눈길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블루 드래곤이나 그린 드래곤은 인간 의태 시엔 그냥 평범하게 제일 흔한 머리색을 택해.”
간혹 님프나 엘프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한다.
님프의 머리색은 청색 계열이고 엘프 중엔 녹색 계열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지간해선 요정족으로는 잘 의태하지 않는다.”
요정족은 드래곤만큼이나 눈에 띈다.
게다가 숫자가 적은 만큼 혈맥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대부분이다.
갑자기 전혀 모르는 님프나 엘프가 나타나면 신분을 증명하기 힘들다.
“숫자도 많고, 신분 감추기도 쉬운 인간이 제격이지. 게다가 오래 산다는 것 빼곤 딱히 요정족이 인간보다 나을 것도 없거드 ”
“그냥 실리적인 이유였구만.”
아이템 수거는 금방 끝났다.
생각보다 적들이 남긴 매직 아이템이 많지 않았다.
아니, 레벨에 비하면 극히 소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수로만 따지면, 다섯이서 들고 다닌 아이템 숫자가 알레한드로 한 명보다도 적다.
에피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들, 의외로 가난하네요.
레벨은 그렇게 높았는데.”
키비에가 무심히 대꾸했다.
“악타룬의 이계인들이잖니.”
그녀는 섀도 리딩을 통해 대강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같은 뇌제의 수하라도 알레한드로와 악타룬의 이계인들은 사정이 다르다.
알레한드로를 비롯한 가짜 그레이트 어스는 최강의 3인이 직접 수하로 부리는 이들이었고 그 숫자도 적었다.
그래서 풀 장비를 맞춰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악타룬의 이계인은 자그마치 수백 명에 달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르한이라도 저 인원다 챙겨 줄 자원은 없지.”
심지어 원래 배급품은 무기, 이동 수단, 공간 배낭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아서 일행은 지상 최강의 도시라는 세르칼탄에 투입된 인원이라, 특별히 보조 아이템하나씩 더 받았을 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류한빈은 무심코 검왕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봉분과 투박한 묘비, 그리고 그 앞에 꽂힌 거대한 양수검.
검왕의 애병, 기간트였다.
“이거, 굉장히 좋아 보이는 검인데?”
대검 기간트는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다.
단순한 회색빛 칼날에 형태도 흔해 빠진 양수검.
무슨 보석이나 장식 같은 게 붙어 있지도 않았다.
오직 실용성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무기였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선 무서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검이기도 했다.
500년 이상 묵은 고룡의 드래곤 본으로 만든 칼날에 온갖 희귀 금속을 섞어 연성과 경도를 높이고 날을 세웠다.
재료의 배합 비율을 절묘하게 맞춰 그립감이나 무게중심도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럼에도 검왕의 시종 게이브는 이 희대의 명검을 그냥 무덤에 놓고 가 버렸다.
이 대검을 쓸 수 있는 이가 세상에 바오톨트 말고는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크고 무겁다.
장점이라곤 그저 튼튼하고 휘두르기 편하다는 것뿐이다.
이 정도 성능이라면 굳이 온갖 비싼 재료를 퍼붓지 않아도 마법으로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다.
곧 죽어도 마도구는 안 쓰겠다는 발타라 전사 특유의 고집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 사실 다른 검사들에겐 하등 쓸모가 없다.
그러나 류한빈에겐 실로 매력적이었다.
그 역시 마도구를 못 쓰는 처지이긴 마찬가지니까.
“와, 내 칼이 정말 조잡하게 만든 게 맞구나.”
기간트를 허공에 휘둘러 보며 한빈은 새삼 감탄했다.
그의 흑색 대검도 이제껏 불만 없이 써 왔지만, 이 검은 손맛부터가 달랐다.
‘하긴, 그냥 마견 뼈를 칼 모양으로 박박 갈았을 뿐인데 무게중심 따위 맞겠냐마는.’
하지만 관련도 없는 검왕의 검을 함부로 들고 다니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겠지.
아쉬워하며 류한빈이 대검을 도로 무덤 앞에 꽂으려 할 때였다.
뭔가 고민하던 키비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오히려 네가 그 검을 써야 해.”
의아해하며 류한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바오톨트는 죽었어. 덕분에 내 계획도 엉망이 되었지.”
최선의 대책이 물거품이 되었다면, 차선책을 찾아야 하는 법.
키비에는 눈앞의 ‘차선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랍도록 강한 자였다.
최강의 3인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적어도 자질은 충분하다.
“류한빈!”
여신의 화신이, 마신에게서 벗어난 운명을 지닌 지구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네가 검왕이 되어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빈이 인상을 썼다.
“……뜬금없이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키비에가 원하는 ‘조력자’의 조건은 꽤나 까다롭다.
최강의 3인을 능가하는 무력의 소유자여야 하며, 대륙3강을 지배 하는 권 력 자들에 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강해도 단신으로 국가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바오톨트는 모든 면에서 완벽 했어. 무력도, 명성도, 영향력도.”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가로 가져가며 키비에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제 그가 없으니, 새로운 조력자를 찾아야겠지.”
현재 한빈 일행은 대미궁 칼탄을 빠져나와 세르칼탄의 한 여관에 묵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테이블 주위에 은밀하게 차음결계를 쳐 놓은지라 대화가 새어 나갈 염려는 없다.
키비에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강한 자는 한빈, 바로 너야.”
검왕 바오톨트와 비교하면 현재의 류한빈은 분명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
지금의 그로서는 결코 최강의 3인을 상대할 수 없다.
“다행히 내겐 지금의 널 보다 강하게 만들 대책이 있거든.”
키비에가 한빈의 등을 가리켰다.
원래 사용하던 흑색 대검, 그리고 그와 교차한 또 하나의 회색 양수검.
“기간트가 있으니까.”
기간트는 검왕 바오톨트가 평생 사용해 온 무기.
그리고 어둠의 화신에게는 잔존사념을 읽는 섀도 리딩 능력이 존재한다.
즉, 그녀는 검왕의 검술이며 오러 스킬, 비의 등을 거의 완벽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익히는 건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달린 문제겠지만.”
에피르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빈 님 말고 다른 사람은 아예 익힐 엄두도 못 내겠죠. 하필이면 검왕의 검술이잖아요‘?”
검왕의 검술은 발타라 일족의 검술이 근원이 된 것이라, 심각할 정도로 육체 능력 요구 조건이 높다.
일반인이 노력으로 어떻게 때울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류한빈이라면 가능하겠지.
그러니 바오톨트의 검과 검술을 이어 여신의 조력자가 되어 달라.
이것이 키비에가 말한 ‘검왕이 되어라’의 진짜 의미였다.
“그럼 좀 제대로 이야기를 해.”
후루룩 수프를 들어 마신 뒤 류한빈이 혀를 찼다.
“난 또, 나보고 가짜 검왕 행세라도 하라는 소린 줄 알았잖아.”
“실은 나도 말하고 나서 뭔가 뉘앙스가 좀 이상하구나 싶긴 했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에휴, 바오톨트만 무사했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진행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 게이브란 놈이 원망스럽다.
그놈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바오톨트도 아직 살아 있었을 것 아닌가?
그때 아티스가 표정을 굳혔다.
“실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응?”
“ 뭐가?”
키비에와 류한빈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아티스를 돌아보았다.
“좀 이상해, 그 게이브란 영술사.”
검왕의 죽음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였다.
마법사 특유의 감각으로 아티스는 어색함을 느꼈다.
그땐 그 어색함이 뭔지 몰라 그냥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실해진다.
“그는 검왕의 상처에 신수의 기운이 남아 있어 영술로 치유하지 못했다고 했지?”
이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상처의 잔존 기운 때문에 치유술의 효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라트나의 상식이니까.
“그렇지만 상대가 검왕이었잖아. 그것도 단신으로 신수의 숨통을 끊을 정도의 최강자.”
설령 검왕의 상처에 크루스머르그의 기운이 남았다 해도, 그 기운 중 대부분은 검왕의 오러와 상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벨 99의 영술사가 아무것도 못 했다고?”
아무리 계산해 봐도, 바오톨트의 상처에 그 정도로 강력한 신수의 기운이 남았을 리 없었다.
완치야 당연히 무리였겠지만…….
“응급처치도 못 했다는 건 수상하지 않아?”
요정왕국 알렌디아의 별궁.
눈앞에 부복한 두 남녀를 바라보며 홀리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되었단 말이지?”
살투스가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 그들은 신수의 죽음도, 검왕의 죽음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알마라가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홀리엔 님. 설마 어둠의 화신이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라서
“알았어. 이만 물러가.”
두 드래곤에게 축객령을 내린 뒤 홀리엔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나 원 참, 왜 굳이 대미궁 칼탄으로 향하나 했더니……
뭔가 따로 계획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검왕이 죽은 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바오톨트가 살아 있었다면 최강의 3인도 간단히 여신의 행적을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여신의 선택지랄게 뻔하니까.
‘악타룬의 이계인을 풀 필요도 없이, 그냥 세르칼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아 버리면 되는 문제였는데, 쳇.’
하지만 최강의 3인은 바오톨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무심코 여신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 대미궁으로 향할 거란 생각도 못 했다.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렸네.’
아쉽긴 하지만 홀리엔은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세상일이란 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작은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살투스가 바친 ‘어둠의 화신의 혈액’이었다.
강력한 영술사가 이 촉매를 사용한다면 상대가 라트나 어디에 있든 추적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라트나 최강의 영술사.
휘하에 쓸 만한 수하가 많다.
잠시 후, 영술사 한 명이 홀리 엔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게이브.”
그녀가 게이브라 불린 중년 사내에게 유리병을 건넸다.
“이 건은 네게 맡길게.”
정중히 병을 받아 들며 사내가 눈을 빛냈다.
“영광입니다, 홀리엔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