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as a bartender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12
***
“식겁했군···.”
화산의 장로답지 않은.
초절정의 검수답지 않은.
그런 나지막한 진효풍의 반응에 오히려 내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술을 가득 담은 잔을 비석 앞에 놓인 작은 단에 올려두자 그대로 굉음을 내며 열린 석관.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 열린 석관은 고인(故人)이 자리한 석관이 아닌 조금 앞의 자그마한 비밀 석관이다.
안에든 검과 서책 등의 물건이 옅은 빛을 머금고 있다.
“이건···? 진 대협도 모르시는 겁니까?”
“뭔가, 그건···? 모르네. 그리고 무섭네만.”
“···도사란 분이···.”
“퇴마령이라도 외워야 하나? 급급여율령?”
“그럼 스승님도···.”
사라지지 않을까.
슬쩍 품을 더듬으며 부적을 찾는 그를 애써 만류할 수 있었다.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진효풍을 뒤로 하고는 앞으로 나서서 석관 안을 살폈다.
절을 올린 후 물건을 꺼내오니, 서책으로 보였던 종이에는 익숙한 단어가 적혀 있다.
– 괴상한 매화돌이 보거라.
누가 보아도 전 중원에서 딱 한 명.
진효풍을 일컫는 것만 같은 말.
난 그를 조심히 들고는 여전히 품을 더듬는 진효풍을 바라봤다.
이를 그에게 건네니, 진효풍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이건?”
“진 대협께 보내는 편지 같습니다.”
“내게?”
상대가 정해진 편지치고는 제법 늦게 도착한 편지일 것이다. 스승이 명을 달리한 건 못해도 15년이 넘었다는 지금.
진효풍은 이를 조심히 들고는 편지에 적힌 서체를 파악해 갔다. 15년이란 시간이 지났어도 친우의 서체를 잊지 않은 그였다.
“이건, 취운의 서체가 확실하군.”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아직 읽지는 않았네. 괴상한 매화돌이라. 허허. 이 친구 끝까지.”
진효풍은 힘겹게, 또 기쁘게.
다음 장을 넘기며 친우의 편지를 읽어갔다. 난 조심히 옆에서 이를 함께 눈으로 따라갔다.
– 효풍. 네가 이 편지를 받았다는 건 제자를 구했다는 소리겠군. 적어도 자네라면 내 비석 앞에 놓인 단에 술을 올릴 정상적인 인물은 아닐 테니까.
전해진 편지는 첫 문장부터 한 인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함께하고 있다.
스승님은 무척이나 총명했던 사람으로 보였다.
‘역시···.’
그런 점도 닮았으려나.
어느새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스승과 정이 든 기분이다.
– 병에 걸린 후 어떻게 자네를 놀라게 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했었네. 어찌, 조금 놀랐나? 유독 겁이 많았지, 자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겁이 많기는···.”
– 어쨌든, 정말로 약속을 지켜줬군. 어떤가? 내 제자는. 개봉에 사는 빙과 장수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술 장수네! 술!”
– 또 어디서 술 한 잔 얻어먹고 아무나 앉힌 건 아니길 바랄 뿐이네.
“···뭐. 그건···.”
어. 왜 거기서 멈칫하는 건데.
감동스럽게 바라보던 진효풍의 반응 중 하나가 유독 마음에 걸려 온다.
술 한 잔 덕분에 연을 맺은 게 아니진 않았기에. 스승의 통찰력이 예리하기 그지없다.
– 뭐, 어떻겠나. 자네의 안목이라면 그래도 내 믿어는 봄세. 이건, 그때. 자네가 내 제자를 데려왔을 때를 위한 작은 선물일세. 내가 쓰던 한은검(寒隱劍)과 빙정, 현천한빙심법의 마지막 장을 여기에 두네.
“음.”
– 제자에게도 말을 전해 주겠나?
“자네도 함께 봐야겠군.”
서신을 잘 읽어가던 진효풍이 내게 완전히 서신을 내밀고는 이를 함께 읽자고 말해왔다.
난 고개를 꾸벅하고는 흘깃거리며 보던 서신을 그대로 마주했다.
“감사히.”
– 얼굴도 모르는 제자에게 남기네. 부디, 효풍을 잘 부탁하네. 외로운 사람일세. 또한, 남들과 다른 길이지만 옳게 가는 사람이고. 괴상해도 스승처럼 대해주게나. 이건, 그 부탁을 위한 선물들이네.
정면으로 바라본 서신에는 마지막까지 남은 이를 걱정하는 말만이 가득 적혀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느껴가며 꾹꾹 눌러쓴 남은 이에 대한 걱정.
서체가 흔들린 것만 같다. 어떤 감정이었을까. 아직은 모두 알 수가 없어 서글플 뿐이다.
– 또한, 무공에 연연하지 말고 삶에 연연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스승의 유일한 말일세. 남긴 검과 무공은 자네의 손에 달린 것이네. 혹, 그 검으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와도, 그 역시 자네의 몫이네. 아무것도 그대를 얽매게 하는 건 없을 터이니, 부디 자유롭게 사시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스승은 담담하게 또 건조하게 제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인사를 마무리했다.
무언가를 끊어내듯 잘 절제된 그의 어조 속에도 깊은 정이 묻은 기분이다.
난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금 고개를 숙여갔다. 서신의 끝은 다시금 진효풍을 향한다.
– 효풍. 이걸 언제 읽을지는 내 알 수 없네. 다만, 모든 것이 고맙네. 모든 걸 피해 숨어 살던 이가, 자네 덕에 더는 잊히지 않게 되었겠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내 가겠네. 이 풍진 세상 마음껏 누리다가, 마음껏 고생하다가 오시게! 매화향이 흩날리면, 내 마중 나가겠네. 그럼, 이만. 자네의 친우, 은룡(隱龍) 곽가 취운.
진효풍은 마지막 장을 읽고는 한참이나 눈을 깊게 만들었다. 제아무리 바텐더라도 앞에 선 사람의 감정은 힘들다.
특히나 상실의 감정은 더한 법. 나이든 바텐더가 부러울 때가 이럴 때다.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다른 조언을 건넬 수 있을까. 난 그걸 알 수가 없어 그저 가만히 그에게 시간을 내어줬다.
진효풍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감정을 추스른 모습이다. 그의 하이얀 도포가 조금은 짙게 물들었다.
“미안하네.”
“무슨 말씀을요. 서신은 진 대협께서 보관해 주시지요. 그게 더 큰 의미를 가질 겁니다.”
“흠. 그럼, 감사히.”
진효풍은 돌돌 말아 서신을 품에 넣고는 석관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안에 든 다른 물건을 모두 꺼내오는 그.
“한은검(寒隱劍)이라. 이게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 숨겨뒀던 모양이군.”
“아시는 검입니까?”
“빙룡, 아니. 은룡이 늘 가지고 다니던 검이네. 한기를 갈무리해 검에 머금을 수 있게 해주는 명검이네. 한기를 다루지 못한다면 다룰 수도 없는 검이지.”
“그런 게 가능한지요?”
“그러니, 명검이고 신물이지. 들은 적은 없네만, 북해 쪽의 물건으로 보이네.”
“역시, 스승님께서는 빙궁···?”
“그에 대해서는 끝까지 아무런 말이 없군. 허허. 이 친구도 참.”
서신에는 그저 검과 관련해 언제고 선택이 올 수 있다는 말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게 살생(殺生)에 관한 말인지, 다른 뜻인지는 아직 알 수 없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은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법. 이를 파헤치는 건 굳이 좋은 일은 아니다.
“받게나.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검이군.”
진효풍은 한은검을 잠시 쓰다듬고는 그대로 내게 건넸다. 멋들어진 양식의 보검을 손에 쥐니, 한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스승의 흔적이 여전히 자리한 검이다.
“한기가···.”
“느껴지나? 내게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네. 아무래도 검을 잡은 이들만 느낄 수 있는 모양이네.”
“좋은 검입니다. 날도 여전하고 익숙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취운의 기운일 걸세. 심법 덕분이겠지. 허허. 또한, 빙정이 함께 들어있었으니.”
진효풍은 한은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며 손에 작은 돌을 들어, 내게 보여왔다.
한기를 가득 품은 신비한 돌의 이름은 빙정(氷晶).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빙궁의 물건으로 보였다.
“이 역시, 자네의 것이네. 빙정을 쥐고 수련하면 평소보다 몇 배는 효과가 좋을 걸세.”
“귀한 선물을 받았군요.”
“암. 뭐, 한 번에 물을 얼릴 때 써도 좋고. 빙정을 담궈둔 물은 금방 얼어버리니.”
“딱 필요한 물건입니다.”
– 씨익.
본 적이 없음에도 스승은 내게 딱 필요한 물건을 전해줬다. 석호루는 이미 얼음이 무지막지하게 필요한 곳이다.
홀로 이를 얼려가는 것도 문제가 있던 참에 이제는 얼음마저 대량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주루가 아니라 얼음 장사를 해야 하나. 편지에서 봤던 빙과 장수가 그냥 나온 농담이 아니다.
“허허허. 봤나, 취운? 한은검도 현천한빙심공의 마지막 장도. 얼음 앞에서 이 친구에게는 무용이라네! 이러니, 내 이 자를 데려왔지!”
진효풍은 그런 반응을 보고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에 기뻐한다.
스승도 웃는 걸까.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웃음소리와 닮아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말일세. 내 이 친구에게 말했네. 이건···”
오늘은 잔뜩 신이 난 진효풍이 동굴에 앉아 한참이나 스승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싫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가져간 브랜디를 한 병이나 모두 비운 후에야 우린 동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
“음~! 으으으으음!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검을 찬 후 항주를 걸으니 느껴지는 건 그런 감정.
이상하게 걸음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진효풍의 말처럼 심법의 영향인지 검에서 이상하게 정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오? 이 공자? 뭐요? 검이 다른 거 같은데?”
“멋진 검입니다. 명검, 그 이상이려나요?”
역시나 무인들은 곧장 검이 달라진 걸 알아본다.
석호루를 향해 걷던 중 마주한 개방 거지 둘이 이를 알아보고 시선을 줬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은 거지들이지만, 둘은 항주 개방에서도 제일 높은 사람들이다.
한 명은 홍구고, 다른 한 명은 개방의 항주 분타주였다.
“흐음. 신기하게 생긴 검이로세? 금색 손잡이라.”
“중원 양식이 아니려나요?”
“나만 그렇게 본 건 아닌 모양이구나. 허허. 이 공자. 이건 어디서 난 거요?”
“스승님께 받은 겁니다. 어찌, 태가 조금 납니까?”
“스승님? 보자아. 이 공자의 스승이면···, 누구더라?”
“글쎄요. 저도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걸 모르는군요.”
내 스승이 누구인지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한공을 쓴다지만, 내 주변에 한공을 쓰는 이들도 없고.
그저 진효풍이 어떻게 연을 대어준 거라. 딱 거기까지만 알려져 있기에 이를 대놓고 밝힌 적은 없다.
고인의 뜻이 숨는 것에 있었기에, 그걸 따르기 위해 밝히지 않는 것도 있었다.
딱히 숨기는 건 아니지만, 먼저 밝히지도 않는. 그런 상황이 지금에 딱 맞을 거다.
“아주 현명하고 뛰어난 분입니다.”
“이거, 개방 거지의 근성을 자극하는군? 한 번 파봐?”
“형님. 그러다가 또 술 끊깁니다.”
“농담이지. 내 이 공자의 뒤를 파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잖나!”
“암요. 과연, 개방의 차기 방주십니다.”
“내 처세는 좀 하지! 껄껄껄!”
얼버무리는 말을 들려주니 곧장 홍구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보다 감이 좋은 건 개방의 분타주.
그는 단 한마디의 말로 홍구의 날카로움을 그대로 숨겨버리고 만다.
항주 개방은 완연히 접수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늘은 별다른 소식은 없는지요?”
“암. 없소. 뭐, 과하후아주가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그 정도?”
“좋은 소식이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거지들을 지나쳐 석호루에 닿으니, 또 다른 무인이 검을 알아보고 날 멈춰 세운다.
석호루의 호위 부장, 철환이다.
“호오. 이런 검이?”
“딱 봐도 좋아 보이지 않는지요?”
“명검입니다. 과연. 혹, 제가 한 번 봐도 되겠는지요?”
“보시죠. 허허.”
도객(刀客)이지만, 날붙이에 관심을 주지 않을 수는 없다. 철환은 내게서 검을 건네받고는 그대로 이를 뽑아본다.
날카로운 예기가 섬뜩하게 빛을 발하더니, 철환이.
“윽!”
– 쩌렁!
짧은 신음과 함께 검을 놓치고 만다. 제법 무위가 고강한 무인이 병기를 놓치는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괜찮으십니까? 어찌?”
“하, 한기가?”
“예?”
“검이 제가 손에 쥐는 걸 거부하는 기분입니다. 허허. 톡 쏘는 한기가 손으로 그대로 들어오더군요. 모르셨습니까?”
“···한기를 다루지 못하면 쓸 수 없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냥 만지는 것도 힘들 줄은···.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허허. 신물(神物)을 손에 넣으신 모양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어디서 뭘 구해와도 놀라는 눈치는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저 신물을 구해왔구나. 하고 넘어가는 철환. 그에게 나도 몰랐다는 짧은 사과만을 전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한, 그리고 효능이 많은 검일지도 모른다.
‘진 대협도···.’
전부 아는 건 아닌 눈치던데.
하나씩, 기를 넣어가며 다루는 법을 익혀야만 할 거 같다.
석호루에 들어선 후에는 검을 내려두고 일을 시작했다. 안에서야 내가 검을 쓸 일이 있나.
그저 이제 꺼내 보는 건.
‘빙정이라고 했지?’
작은 돌덩이 하나.
석호루에는 백 개의 명검보다야 이 작은 돌덩이가 더욱 큰 역할을 할 것이다.
– 수련에 도움이 될 걸세.
빙정을 보고 진효풍은 수련에 쓰는 물건이라 말했다. 다만, 그 후.
– 얼음을 얼릴 수도 있고.
이어진 이 돌로 얼음을 얼릴 수 있다는 말. 이건 생각보다 획기적인 말이다.
나야 손에서 한기를 뿜어대는 게 어렵지 않은 몸이지만, 홀로 석호루에서 쓰는 모든 얼음을 책임질 수는 없지 않나.
기포주라 불리는 하이볼을 판매하는 석호루는 항주에서도 제일 많은 얼음을 써대는 곳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또 자동화가 된. 제빙기가 이곳에 들어섰다.
“홍 부장님.”
“예. 이 공자님.”
“지하 주고(酒庫) 끝에 빈 창고가 있지 않습니까?”
“있지요.”
“그곳을 앞으로 얼음을 두는 곳으로 쓰려 합니다. 물을 커다란 단지에 퍼서 모두 그곳에 채워두게 해주십시오.”
“얼음을 두는 방이요? 빙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직 날씨가···?”
빙고는 한기가 도는 곳에 자리해 항주 내에도 몇 곳이 없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제아무리 지하라도 얼음을 보관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홍악은 전해진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본다.
그래도 내가 연달아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주니, 이번에도 믿어 보이는 그다.
이미 손에서 얼음을 얼리는 거야,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점소이들이 재빠르게 준비한 간이 빙고에 물과 함께 빙정을 몰래 넣고는 문을 잘 닫아뒀다.
원리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 빙정이 제법 비싼 물건이라지 않나.
여기에 있다는 걸 광고할 필요는 없을 거다. 이건 내가 직접 관리하면 그만이다.
‘이걸로···’
한동안은 석호루도 양조장도 딱히 바쁘게 흘러갈 게 없다. 얼음도 술도 모두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
이제 마주하고 상대해야 할 건 술의 최대 적인 시간이다.
석 달이 지나야 오크통의 맛과 색이 조금이라도 브랜디에 묻어나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석 달이나 흘렀고, 어느새 오크통에 숙성한 브랜디를 출하하는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