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as a bartender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21
***
넓은 초원의 풀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효풍은 불어오는 바람이 싫지 않아 감았던 눈을 떴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갑자기 웬 초원이란 말인가. 분명 주루에서 관리인이 만든 술을 마시고 있던 게 조금 전.
제대로 맛을 보려 눈을 감았던 진효풍은 자신도 모르는 곳에 닿고 말았다.
알 수 없는 공간에 그가 고개를 갸웃할 때.
– 다다다다다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귀를 때려왔다.
낯선 풍경에 들릴 리 없는 소리.
그리고 전해지는 낯선 오감까지.
효풍은 잠시 몸을 살피더니, 이내 여기가 어디인지. 또 이게 무슨 조화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상···인가.’
심상(心想).
경지의 벽을 부술 때면 찾아오곤 했던 게 바로 이 심상이었다.
이미 일류에서 절정으로 한 번의 심상을 겪었던 효풍은 이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 건 조금 더 생생하군.’
초절정의 벽 앞에서 멈춘 지는 이미 10년 전.
이제는 무리라 여겼던 벽 너머의 경지가 이제야 눈앞에 펼쳐진다.
‘헌데, 갑자기 왜?’
경지의 벽을 넘은 소감은 단순했다. 우선 느껴지는 건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
본인은 그저 주루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지 않았나.
아. 조금 특별했던 건 있다. 젊은 관리인과 간단한 내기를 했던 것. 아마. 어쩌면. 그래. 그게.
‘맛있었던 건가.’
‘절대’라 함부로 단언했다. 절대 맛있을 수 없을 거라고. 그 편견이란 게 깨어지니, 이렇게 벽도 함께 날아간다.
‘내기는 완패로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초원을 가르는 강한, 그리고 날카로운 바람.
그런 바람에서, 효풍은 잔잔히 풍겨오는 익숙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매화향?’
매화향.
잔잔하지만 선명하게. 그리고 또 자욱하게. 느껴지는 매화향에 효풍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그곳을 향했다.
멀리서 보이던 초원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보이는 건 스무여 마리의 말 떼. 말들이 발굽으로 먼지를 일으키자, 거기서 매화향이 일어났다.
아. 먼지가 아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니 선명히 보이는 먼지 같은 것의 정체.
이건 먼지가 아닌. 그래. 매화.
흩날리는 매화잎이 분명했다. 효풍은 바람에 떠다니는 하나의 매화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솨아.
매화잎은 효풍의 손에 잡히지 않고 그대로 흩날렸다. 그러자, 효풍의 머리에는.
‘아, 매화빈분(梅花頻紛)-.’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한 초식이 스쳤다. 지난날 죽을힘을 다해 휘둘렀던, 그 검법의 초식이.
효풍의 주변에서 바스러진 매화는 이제 바람을 타고 달려 초원의 중심으로 날아갔다.
효풍도 그곳으로 옮긴 지 오래.
바람을 탄 매화들은 효풍을 타고 한 바퀴 원을 그리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어지기 시작했다.
‘매화난만(梅花爛漫)-!’
매화가 점점 멀어져 갔다. 이게 끝인가. 아쉬움이 뼈에 사무치려하자.
이번에는 매화가 사라지고, 그 향기만이 그의 몸을 감쌌다. 효풍은 아쉬운 표정을 풀고.
‘매향성류(梅香成流)-. 그리고 매향침골(梅香浸骨)-!’
아직 심상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껴갔다. 어쩌면, 이번 깨달음은 생각보다 깊을지도 모른다.
점점 구체적인 초식들이 떠올랐다. 어느새 검까지 잡고 초식을 펼쳐보는 그.
검이 손에 꽉 들렸지만, 이토록 가볍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초원에는 바람을 일으키던 말들도, 또 바람을 타던 매화도 모두 사라진 지금.
다만, 검만을 예리하게 빛내는 한 명의 도사가 바람을 일으키려 춤추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잔잔한 바람결만을 일으키며.
‘마지막. 마지막···!’
무언가 막힌 것 같다. 춤을 추던 도사의 걸음이 느려진다. 마지막 초식 앞에서 번번이 앞으로 돌아가던 도사의 춤.
어디냐. 어디? 어디를 봐야 하는 거냐. 도사는 계속해서 물으며 매화를 찾아갔다.
매화를 본다면. 매화향을 맡는다면. 그렇다면. 이 초식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그런 믿음으로.
하지만.
그가 매화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매화는 그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향도, 매화도. 모두.
아아.
아련함만이 깊어지는 순간. 효풍은 매화를 놓아주기로 한다. 매화가 없이, 그저 담백하기만 쇳덩이 그 자체인 검을 그가 조용히 아래로 그었다.
그러자.
– 구오오오!
하는 거친 검풍이 불더니, 검이 닿은 땅이 갈라졌다. 작은 떨림을 울린 후 갈라진 초원에서 솟아나는 한그루의 나무.
그리 높지도, 또 두껍지도 않은 나무는 홀로 우뚝 솟아 제자리에서 앙상한 가지를 뽐냈다.
효풍은 저 나무 역시, 모르지 않았다.
‘매화나무?’
하늘에도, 또 초원에도. 나풀거리며 내려앉은 매화가 있거늘, 나무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저 나무는 분명한 매화나무.
꽃이 지기로서니, 나무의 이름이 변하는 건 아니지 않나. 효풍은 그 나무에 조심히 다가섰다.
한 발. 그리고 한 발.
머지않아 닿은 나무는 주변에 매화잎도, 떨어진 매실 열매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홀로 앙상하게 팔을 벌린 나무.
효풍이 그 나무에 손을 올리자.
–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는 사라지고 자리에는 매화향만이 진하게 남는다.
그제야 효풍은.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마지막 초식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팔을 올릴 수 있었다.
매화가 없음에도 매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짙은 매화향을 흩날린다.
그게 마지막 초식의 정수.
효풍은 이를 깨닫고는 검을 한 번 내리쳐 그대로 매화향을 일으켰다.
검풍을 타고는 진득한 향이 퍼지니, 족히 만리는 갈 향이다.
‘그래, 매화는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것이오, 나는 그 가지를 품은 나무일지니.’
아아.
효풍은 심상에 빠져 처음부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
– 철푸덕!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으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다시금 보는 거지만, 본 걸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이 공중에 뜨다니! 또 저런 광채를 머금다니!
현대인의 눈으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대협을 둘러싸라! 어서!”
철환의 다급한 외침에 밖에서 번을 서던 무사들이 모두 달려왔다.
어깨를 잡고 흔드는 철환의 말에 겨우 정신을 부여잡았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이공자!”
“이게 다···뭡니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혹, 잘못될 수도 있는 일인가요?”
“심상에 들어간 거로 보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경지를 넘어설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 겁니다.”
!
주화입마란 말에 표정이 굳어 버렸다. 무공이니 무림이니 이런 건 몰라도 주화입마는 안다.
제정신은 물론이고 어쩌면 목숨까지 위험한 게 주화입마다.
“혹, 제가 만든 술 때문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심상이란 건···?”
“지금 진대협의 경지만 해도 저는 발끝도 못 미치는 정도입니다. 헌데, 어찌 제가 그 이후의 깨달음을 알겠습니까? 그저 부럽고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심각함보다 부러움이 가득 실린 철환의 말에 고개를 절레 저었다. 무인이란 그런 것부터가 떠오르는 이들인가.
저마다 속한 위치에 따라 느끼는 게 다르다.
“저기, 저거 공중에 뜬 게 아닌가?”
“쉿! 경을 치려고!”
“조용히들 있게!”
“아니, 방금 분명···!”
주변이 어수선하다. 모두의 이목이 쏠려있던 중 생긴 사건이니 당연한 일.
서둘러 철환의 호위대가 2층 난관과 1층 중앙을 둘러쌌다지만, 볼 건 모두가 봐 버린 지금.
들려오는 말들이 계속되자,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움직이자. 놀라고만 있어선 안 돼.’
여긴 주루고, 지금 저 관심을 받는 사람은 손님이다. 그렇다면, 바텐더가. 또 주루의 관리인이 해야 할 일은 뻔하지 않나.
손님을 보호한다.
내 본분을 곧바로 떠올렸다.
바텐더란 말 속에 숨은 뜻은, 파수꾼이요. 이는 공간과 손님, 술의 보호자란 뜻이다.
“홍 부장!”
“예, 예?”
옆에서 함께 입을 쩍 벌리던 홍악을 불렀다. 홍악 역시 눈에 들어온 걸 모두 믿지 못하는 표정이다.
“4층에 화산의 무인들이 들어와 있습니까?”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오늘이 예약한 날이고 아까 분명···. 예.”
“당장 불러오세요! 지금 사태를 설명하고!”
“예? 오히려 안 불러야···”
“모든 책임은 내가 집니다. 얼른!”
오히려 묵히고 조용히 넘어가야 하지 않겠나. 홍악의 그런 의도에도 서둘러 그를 올려보냈다.
이건 묵히기엔 일이 너무 크고, 이미 본 눈이 많았다. 홍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4층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사, 사숙조!”
라고 외치며 1층에 닿는 젊은 도인들.
몇 명은 도관이 비뚤어졌고 진한 주향(酒香)이 묻어 나왔으나, 그들 역시 지금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게 무슨···?”
제자리에 멈춰선 화산의 도사들이 저마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이런 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보다.
“화산의 도사분들이십니까?”
“그, 그렇습니다. 이대 제자 위천상입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석호루를 관리하는 이정환입니다. 일의 선후보단 대처를 먼저 하시지요. 어떻게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
위천상이라 자신을 소개한 도사는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눈빛을 되찾는다.
그리곤 뒤를 돌더니.
“다들 운기하여 얼른 주독을 몰아내라! 반 각 이상이 걸리는 놈들은 죄다 사과애에 처박아 버리겠다!”
“예! 사형!”
사제들을 호령하며 대처에 나섰다. 그는 다시금 돌아 내게 말했다.
“반 각이면 됩니다. 반 각만 버텨주십시오. 이후에는 화산이 호법을 서겠습니다.”
“주변에 눈이 많습니다만, 주변을 물리진 않아도 되겠습니까?”
“가, 가능하다면 꼭 좀 물려주십시오. 무인에게 이런 일은 본디 은밀해야···그래야···.”
하는데. 깜빡거리는 그의 눈이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운기에 들어가십시오.”
아직 해시하고도 이(二) 각을 넘지 않은 시간이다. 주루로 본다면 한창 장사를 이어나가고 있어야 하는 게 지금 시간.
이런 시간에 주루를 통으로 비우려면, 이건 손해가 막심한 정도를 넘어 자리 보존이 위험할 정도다.
하지만 어쩌겠나. 당장에 사람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데.
울며, 아니. 대성통곡하며 겨자 먹는 수밖에 없다.
– 짝짝짝!
“홍부장! 서둘러 사람들을 내보내세요! 얼른! 돈은 받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책임집니다. 모든 점소이들은 얼른 손님들을 밖으로 모시는 것에 집중하세요!”
서둘러 점소이들을 모으고 곧바로 일을 지시했다. 저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돈을 안 받는다니 그제야 발을 움직이는 손님들.
몇 명은 나가지 않겠다고 뻗대다가도 화산파 도인과 철환이 슬쩍 눈빛을 흘리자 재빨리 밖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어수선함이 조금 사라지던 무렵.
“어어어! 어? 저거!”
운기를 마친 화산 제자 사이에서 불경한 소리가 들려온다. 선명히 가리키는 건 사숙조를 향한 명확한 삿대질.
이게 그 사람 쳐죽인다는 기사멸조인가. 하길 잠시, 모두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러자.
!!!
다섯 개.
정확히 다섯 개의 고리가 진효풍의 등에 봉긋이 솟아난 게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오기조원(五氣朝元)···!”
신기한 걸 본 듯 한발을 자신도 몰래 뒤로 빼는 철환.
오기조원인지 뭔지가 뭔지는 몰라도 또 일이 터진 것만 같던 때.
철환의 시선이 휙! 돌며 날 향했다.
“이공자···. 도대체 뭘 하신 겁니까?”
난들 아나.
밤이 유난히도 길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