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as a bartender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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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루의 최상층 방에 들어선 후 난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무슨 이런 풍경이···’
다 있을까. 들어서자 보이는 건 서호(西湖)를 아득히 내려다보는 높은 경치와 서호에 비친 진홍색 노을이 그리는 기다란 빛의 길.
거기에 서호 주변에 자리한 다른 전각과 동산들이 하나의 장식이 되어 창을 수놓으니, 가히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라.
난 좀처럼 닫히지 않는 입을 열고는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호를 타고 들어오는 진홍빛이 눈동자마저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경치가 봐 줄 만한가?”
감상을 깨는 건 익숙한 목소리, 석가장의 장주 석두원의 목소리다. 그는 슬쩍 몸을 돌려 재밌다는 듯 날 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제야.
“시, 실례했습니다. 항주는 초행이라 초복 집사께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와 걸음이 늦었습니다.”
자리에 늦었음을 알고는 곧바로 사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중원식과는 조금 다른, 바텐더의 방식으로 인사를 올린 나였다.
“아직 식전이니 앉으시게나. 저기, 빈자리로 가시면 되네.”
예법에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그런 모습을 보고는 석두원은 이번에도 밝게 웃었다. 늦은 것도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고 자리를 안내하는 그.
방안은 그를 중심으로 나란히 앉은 이들이 자리를 채워 연회와 같은 모습이다. 군데군데 빈자리는 있었지만, 식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몇 자리는 원래 비워두는 것처럼 보였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주변인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옆으로는 긴 머리를 내려뜨린 미녀 한 명과 풍채가 좋아 연신 땀이 주룩 흐르는 학사가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호객과 이호객이겠군.’
맞은 편에는 날 데리러 왔던 총관 공석용을 비롯해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석가장의 중책을 맡은 가신들로 보였다.
“자. 이제 시작해도 되겠구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으니. 다들 이참에 안면을 텄으면 하는 바람으로 모두를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소. 객들께서는 이쪽에 앉은 이들을 오가며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거요. 우리 석가장을 지탱해주는 훌륭한 이들이외다.”
자리에 앉자 석두원이 자연스레 자리를 주도했다. 제일 처음은 가신들을 소개하는 말.
“총관 공석용이라 합니다. 본가의 내적인 사무와 대외적인 일을 총괄해서 맡아보고 있지요. 다들 안면은 있으나, 이렇게 자리를 함께하는 건 처음인 듯합니다. 영광입니다.”
그의 거창한 소개가 끝나자, 공총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며 객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흰머리가 성성한 그는 일전에 오두막으로 날 데리러 왔던 노인이었다.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그의 옆에 있던 가신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이어지는 가신단의 소개.
“석가장의 상단을 책임지는 단주, 구동해입니다. 상행이나 물자는 모두 제가 맡아보고 있습니다. 혹여 타지에서 들여올 물건이 있으시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전장을 담당하는 단주, 염항이라 합니다. 석가장의 재정 역시 제가 보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표국에서 일을 보는 행수 장초립입니다. 표단의 단주께서 자리를 비우셨기에 이리 대신 참석했습니다.”
“선단을 관리하는 단주 손목건입니다. 혹, 배편이 필요하시거든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공방···”
“시전 상점을 관리하는···”
“호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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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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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들의 소개는 한참을 더 이어진 후에야 끝을 볼 수 있었다. 저마다 절도 있고 눈빛이 살아 있어 과연 석가장의 인물이란 말들이 아깝지 않은 이들이다.
“오늘 자리를 비운 이들도 있소만, 차차 만날 수 있을 터이니 아쉬워들 하지 맙시다. 자. 이제 석가장에서 어렵게 모신 인재들을 소개해 볼까 하오.”
가신들의 소개가 끝나자 석두원은 장포를 휘날리며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러자 마치 짠 것처럼 풍채 좋은 학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소생은 호남에서 온 유생 두영해라 합니다. 우연히 기회가 닿아 항주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석가장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호걸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학사의 명성이 항주 유생들 사이에서도 자자하기에 내 손수 석가장으로 모셨소. 다들 두루 교류하며 학식을 나누면 좋을 것이오.”
석두원의 덧붙이는 말이 끝나자 학사의 옆에 앉아 있던 아리따운 여성이 말을 받는다.
“소녀는 북경에서 금을 타는 매초현이라 합니다. 북경의 금향루라는 작은 주점에서 금을 타고 있답니다. 우연히 석장주님과 연이 닿아 이렇게 머물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설마, 금향루라면?”
“하하. 공총관께서 생각하시는 그 금향루가 맞소. 황궁에서도 매년 찾아 칠현금 소리 듣기를 청한다는 그곳이오. 내 방랑하던 시절 북경에서 쌓은 연으로 매소저가 항주에 머무는 동안 모시게 되었소이다. 다들 모쪼록 편의를 봐주시길 바라오.”
대답은 매초현이 아닌 석두원에게서 나온다. 매초현의 배경을 풀어가는 그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배경이 뛰어난 이를 식객으로 들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주인에게 자랑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자. 다음은 다들 초면일 것이오. 일주일 전부터 석가장에 머물고 있는 이공자. 이정환 공자시오.”
매초현에 관해 한바탕 떠들썩한 반응이 오고 간 후 석두원의 말이 날 향해 다가왔다. 조금은 소박하게 시작하는 소개지만, 조심히 몸을 일으켜 주변에 인사를 전했다.
“이정환입니다. 우연히 연이 닿아 석가장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딱히 뭐라 소개를 하겠나. 아직은 멋들어지게 붙일 말이 없는 난 그저 이름만 툭 던지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게 다냐는 눈빛이 일시에 날 향했다. 앞에 나왔던 매초현의 배경에 비하자면 소박함을 넘어 초라한 소개였다.
“크흡. 이공자께서 겸손이 과한 것 같으니, 이 석모가 살짝 말을 늘여보고자 하오. 여기 계신 이정환 공자께서는 얼마 전 가짜 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이오.”
!
아마 노린 거라. 처음부터 이런 소개를 다 하지 않았던 건 지금을 위해서 일터.
석두원은 내 초라한 소개에 덧붙여 앞서 있었던 인연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다들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이라면 모르지 않는 가신들이기에 놀라는 표정들이 일품이다.
“객잔에서 가짜 술로 죽어가던 이를 구하고 또 가짜 술을 단박에 알아봤다던 그 귀인이 이분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허어. 겸손이 과하신 분이었군요. 허허. 시전 상인을 관리하는 단주로서 그 일에 감사를 표합니다. 허허.”
반응은 다양했다. 몇 명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복기하기 바빴고 몇 명은 잘 안다는 듯 치고 나오며 감사를 전하기까지.
석두원은 이런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웃고는 날 따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보니 식객으로 머물 수 있는 날이 한 달 정도는 연장된 기분이다.
석두원은 그런 눈빛의 끝에 무언가를 하나 더 묻는 눈빛을 보태본다. 마치 내게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다. 난 예상가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오. 여기 이공자께서는 무려 서역과 왜에도 다녀오신 인재라 하더이다.”
!
“서, 서역과 왜에 말씀입니까?”
“허어.”
아주 신이 났다. 자신이 수집한 수집품을 자랑하는 이의 표정이 딱 저럴 터. 이게 식객을 모으는 가주들의 용도 중 하나다.
수많은 반응이 오가는 중에 유독 한 명의 가신이 날 뚫어지게 바라본다.
상단을 책임지는 단주라던 구동해가 그 눈빛의 주인공.
“허허. 서역을 다녀온 젊은 공자라?”
그는 다른 단주들보다 훨씬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인지 앞에서 들려오는 그의 웃음이 비웃음처럼 들려올 때.
“그 자체만으로 굉장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서역이라니! 상단에 몸담은 지 어언 20년이 넘은 이 구모도 못 다녀온 곳을! 실로 굉장합니다!”
일순간 그의 표정이 팍! 하며 풀리더니 이내 목소리가 높아진다. 조금 전의 비릿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친근해진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그. 그는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콧김을 조금 뿜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서역에 관심이 큰 사람처럼 보였다.
“허면, 이공자께서는 서역 말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왜어도 할 줄 아시고요?”
“서역은 넓지요. 제가 있던 지역에서 통하던 말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왜어도 가능합니다.”
“허허. 겸손이 과하신 분이셨군요! 서역과 왜국이라. 이 구모, 두 지역 모두에 관심이 깊습니다. 어찌하면 상행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혹, 고견이 있다면 언제든 들려주십시오.”
그는 이제 몸까지 내 쪽으로 기울고는 말을 뱉어가기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이 자리에 그와 나밖에 없는 줄 알 정도로 몸을 당겨오는 모습이다.
“자자. 구 단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허허. 이 공자야 늘 석가장에 머물고 있을 터이니 나중에 따로 찾아가 배움을 청하면 될 일이 아니오? 오늘은 다른 분들도 있으니, 차차 합시다.”
“크흡.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서역과 왜라는 말에 그만···.”
“허허. 구단주께서 서역에 관심이 깊은 건 모르는 이가 없지요. 장주께서도, 이공자께서도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다행히 석두원과 공총관이 나서며 분위기가 깊어지기 전에 그를 잘라낸다.
오늘은 적어도 내가 주인공은 아닌 자리. 구동해 단주는 조금 아쉬워하고는 훗날을 기약했다.
“자자. 다들 잔부터 듭시다. 우선은 한잔하고, 이야기를 더 나누도록 합시다. 그려.”
“예, 장주.”
석두원이 잔을 채울 것을 명하자 빠르게 잔들이 색을 가져간다. 잔 안을 채우는 건 조금 진한 갈색빛을 가진 황주.
황주는 보통 연한 갈색빛을 가지는 게 보통인데, 이렇게 진한 갈색은 오래도록 묵혀 제대로 맛을 들인 황주란 뜻이다.
못해도 10년은 묵힌 술이 분명했다.
‘석가장이 황주로 유명하다더니···.’
석가장은 백주보다는 황주가 유명한 곳이다. 비싼 주루에 간다기에 독한 백주를 기대한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석가장의 석황주라면 석 달 만에 목을 축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술이다.
“혹, 술을 못 하는 사람은 없으시오? 두 학사는 괜찮으시오?”
석두원은 모두의 잔이 들어차자 잔을 높게 들고는 식객이 앉은 쪽을 바라봤다.
그와 잠시 눈을 마주쳤던 풍채 좋은 학사 두영해는 서둘러 잔을 맞들고는 입을 열었다.
“옛말에 청주는 현인과 같고 탁주는 성인과 같다 하지 않습니까? 현인도 성인도 모두 되고자 책을 읽는 이가 학사이니, 제가 어찌 잔을 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드시지요.”
학사답게 옛말을 인용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두영해. 허나, 그의 말이 내게는 살짝 다르게 들려왔다.
그가 인용한 옛말이, 나도 아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청주가 성인이고 탁주가 현인이다. 이는 청성탁현(淸聖濁賢)이란 고사가 있을 정도로 술을 다루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
유생들 역시 이 말을 모르지 않을 것이기에 그가 정말 유생이라면, 이를 헷갈릴 순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자, 석두원의 표정이 빠르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표정을 얼른 고치고는.
“음. 매소저는 어떻소?”
하며 이를 넘어간다.
왜인지 두영해가 틀린 걸 알면서도 넘어가는 것만 같은 그였다.
“본디 악공은 한 잔 술에 모든 현을 끊고 두 잔술부터 다시 한 현씩 이어간다고 했습니다. 소녀 아직 실력이 부족해 현이 모자란 금을 탈 줄 모르니 오늘 모든 현을 이어보려 합니다. 장주께서는 이런 모습에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어요.”
“하하하! 내 어찌 매 소저께 노여워한단 말이오? 내 부디 모든 현이 이어져 매소저의 연주를 들을 수 있길 바랄 뿐이오. 허허허.”
변하던 그의 표정이 매초현의 말에 빠르게 밝아진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이건 중원에서 흔한 풍경.
중원은 언제나 술자리 전에 이렇게 시구와 비슷한 말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이런 역할은 주로, 식객들의 몫이었고.
“허면, 이공자께서는?”
역시나. 다음으로 찾아온 건 내 차례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여기가 다른 자리였다면 몰라도 지금 술자리가 한창일 때. 바텐더가 어찌 술자리에서 약하겠나. 여긴 내게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난 가볍게 숨만 골라 쉬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