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as a bartender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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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갑작스럽습니다.”
최대한 당황하지 않고.
또,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삼황자의 갑작스러운 말을 받아치며 차분히 눈빛을 가다듬었다.
이미 삼황자라는 이가 날 찾아왔을 때부터 이건 각오한 일. 다만, 이렇게 빠르게 나올 줄은 몰랐던 말이다.
“허허. 그랬소? 갑작스러웠다면 내 사과하겠소. 내 탐나는 인재를 보아 마음이 성급했나보오.”
“말씀드렸듯 제게는 술을 다루는 미천한 재주가 전부입니다. 출사(出仕)를 명하시는 거라면, 제 자리가 아닌 줄 아옵니다.”
“내 그런 의미로 말을 꺼낸 건 아니오. 그저, 내게는 그대가 필요할 뿐.”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연유라. 흐음.”
시치미를 잔뜩 떼어가며 왜 날 필요로 하냐는 물음을 전했다.
알고는 있다. 아무래도 황권 다툼 때문이겠지.
예로부터 정치와 술은 유고하게 엮여왔지 않나. 특히나 이런 후계 구도를 두고 싸우는 때에는 꼭 필요한 게 세력 싸움.
그런 세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술을 휘두르며 사람을 포섭하는 게 최선일 거다.
삼황자가 정확히 날 원하는 이유 정도야 알 수는 없다. 언뜻 추측만 하기로는 앞서 말한 이유 정도가 전부.
다만, 거기에서 난 조금 더 나아가 무언갈 알 수도 있었는데. 그건 삼황자의 앞에 놓인 빈 잔 덕분이었다.
‘술이···’
앉았던 시간에 비해 너무도 적다. 빈 잔이라고는 기다란 기포주가 담겼던 잔이 하나가 전부.
반면 그의 옆에 앉은 석주선의 앞에는 이미 과하석황주가 담겼던 병이 두 홉이나 비어 있다.
바텐더는 손님의 전작으로 많은 걸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삼황자가 술을 즐기지 않거나 약하다는 것일 터.
어쩌면, 그게 날 찾아온 이유와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추측을 점점 쌓아갈 때.
“그대도 들려온 말이 있으니, 알고는 있을 것이오. 그대가 만든 황찬주를 황상께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저, 아끼시는 분들에게 하사하신 거로만 알고 있습니다.”
삼황자는 제법 직접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본론을 가져왔다.
“정말, 그렇게만 알고 있소?”
“감히 제 입으로···.”
“오늘은 편안히 대해도 좋다고 했소. 거리낌 없이, 말을 꺼내도 좋소.”
입에 잘못 담았다가는 경을 치고도 남을 이야기가 나오려 하자 몸을 사렸다.
그러자, 떨어지는 건 어떤 말도 꺼내도 좋다는 허락. 이걸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을 떠올리기도 잠시.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난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를 지르기로 했다.
“후계···문제와 관련지어 쓰이고 있다고만 들었습니다.”
!
너무 직접적이었을까.
슬쩍 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적시려던 석주선의 손이 멈추고 만다.
삼황자는 반대로 밝게 웃더니.
“하하하. 정확하오.”
하며, 스스럼없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뱉었던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다.
“황상께서는 내 여덟 형제 중 넷에게만 천하명주라 불리는 그 황찬주를 건네셨소. 이건, 다음 보위를 넘길 이를 추리겠다는 말일 터. 그로 인해 지금 북경의 상황이 어떤지는 그대로 아실 거요.”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들려오는 말만 한 귀로 담고 있을 뿐입니다.”
“혼란 그 자체외다.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세력을 만들어가기 바쁜 와중이란 게 딱 맞는 말일 거요. 나 역시. 거기에 힘을 쓰는 중이고. 그리고 그런 세력이란 걸 만들 때면 말이오. 언제나 필요한 게 있소. 무엇인지 아시겠소?”
“술자리···겠지요.”
“정확하오. 그래서 그대가 필요한 것이오. 난 술을 잘 마시지 못하오. 정확히는 백주라 불리는 독주. 이들을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이라오. 반면, 그대가 만든 술은 달랐소. 황찬주도 그랬고, 이 기포주라는 녀석도. 허허. 신기할 따름이었소. 해서, 내게는 그대의 재주가 필요하오. 답이 되었소?”
“······.”
그는 제법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날 찾아온 이유에 대해 풀어줬다.
정치인에게 있어서 술이란 언제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술을 배우고 술을 다루는 바텐더로서 이를 모르진 않았다. 언제나 술이란 그런 역할을 해왔으니까.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는 변하지 않는 술과 정치의 역학이었다.
은밀한 장소, 많지 않은 사람, 그리고 솔직히 나오는 감정까지.
술자리라는 게 가져다주는 게 그런 것들이기에 정치와 엮이기에는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보다야 술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에 더 힘이 실리는 게 정치의 본모습이다.
술자리가 주는 요소들 덕에 서로가 서로에 가지는 유대감이 짙어지기 때문.
그렇기에 정치인들은 애써가며 주량을 억지로 늘리기도 했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브랜디 타임에 정치적 밀담을 나누며 후계를 논하기도 했다고 했으니.
황위 쟁탈전에 참전한 삼황자로서는 자신을 지지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런 약점을 채울 이가 필요했던 거다.
‘역시인가···.’
답을 물었고 답을 들었기에 이제는 내가 답을 해야 할 차례다. 북경으로 가자라.
사실 연유를 묻기는 했다지만, 답이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문제였다.
가기 싫다.
황실이니 뭐니 하는 일에 얽히는 것도 사양이고, 딱히 누구 한 사람만을 위해 술을 타는 게 유쾌하지도 않으니까.
솔직히 찾아온 삼황자라는 이를 봤을 때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란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고작 술을 타는 사람이 아닌가. 이 낭만과 야만의 시대에 철저한 계급을 나눈다면 아래에 해당할.
그런 이를 하나 얻어보겠다고 이곳까지 직접 내려온 사람이다. 황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만 본다면야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라, 그를 그렇게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란 게 문제일 뿐.
난 쓰임 자체를 원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난 충분히 답을 한 것 같은데, 그대의 답을 들을 수 있겠소?”
“제게 북경으로 갈 수 있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역시 무리입니다.”
“무리···란 말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유를 들어봐도 이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언가 다른 특별함이 있다면야 모르지만, 들어보니 딱 예상한 그 이유였지 않나.
그렇다면 답은 더욱 정해져 있다. 난 항주를 떠나 황궁이니 북경이니 하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서만 술을 타는 것. 그건 내 성향과는 전혀 맞지 않은 일이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이유는 많습니다. 그저, 제게 선택권을 주신 듯 물으셨기에 속에 든 마음을 편안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를 들려달라는 삼황자의 말에는 제법 당당하게 맞섰다. 어차피 결과는 둘 중의 하나지 않나.
거절이 받아들여지는 경우와 거절을 거절당하는 경우. 그렇다면, 내 입장이야 확실히 전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삼황자는 이제 이유를 물어온다.
“혹, 내게 대의가 따르지 않을까, 걱정이라도···?”
이유야 많았다.
삼황자가 택한 건 완전한 헛발.
대의라.
삼황자가 말하는 대의라는 건 아마 자신이 황위에 오르지 못할 것 같냐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내게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사람이 황위에 얼마나 가까운지. 또 어떤 뜻과 포부를 가지고 있어 따를만한 사람인지.
그런 걸 가늠할 생각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건 누군가를 따를 생각을 가진 이들이나 따지는 게 아닌가.
난 그저 항주라는 지방의 도시에서 술이나 말아주고 양조장에서 술을 담아 팔아먹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황궁이니 북경이니, 나라니 백성이니, 만민이니 대의니 하는 그런 것들은.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내게는 무가치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이를 거절함에 그런 요소는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고.
지금의 삼황자가 어떤 위치고 어떤 사람이며 어떤 뜻을 가지고 황위를 노리는지, 또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는.
내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제게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의가 아니라? 허면, 왜?”
“그저, 한 사람만을 위해 술을 섞는 건 제가 바라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 공자. 지금 대의를 앞에 두고 그런 소소한···!”
오히려 마음을 정하고 거절을 전하고 나니, 뒤이어 나오는 말들이 가벼워졌다.
그래, 애초에 마주한 이상 끝은 정해져 있었던 게 이들과의 만남.
난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답을 술술 뱉어가니, 이번에는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석주선이 나섰다.
편안하던 내 시선이 찬찬히 그에게 향했다.
“중원의 9할에 이르는 이들은 그런 소소한 뜻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큰 뜻. 대의. 좋지요. 다만, 모두가 그걸 바라며 살아가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그만. 석 학사. 괜찮소.”
석주선이 무언가 잔뜩 유생다운 표정을 지어가며 내게 반박을 전하려 할 때.
삼황자는 손을 뻗어 그를 말리고는 내 시선을 다시금 가져갔다. 조금은 무거워진 그의 표정.
생각처럼 쉽게 일이 풀리지 않아 당황한 모습이다. 거창한 뜻이라도 가진 사내인 줄 알았던 걸까.
생각보다 소시민적인 발언이 계속되자, 둘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다.
어쩔 수 없다. 난 현대라는 곳에 절여진, 소시민 그 자체였으니까.
“허면, 이렇게 하면 어떻소? 내 북경에 석호루 같은 주루를 지어주겠소이다. 필요하다면, 양조장도. 거기서. 거기에서 지금처럼 생활하는 건 어떻겠소?”
“대신, 전하께서 들르실 때면 그곳을 비워야겠지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과분한 제안이지요. 다만, 그 역시. 싫습니다.”
!!
“······.”
“······.”
너무 단호하게 말한 걸까.
그래도 일국의 황자나 되는 사람인데.
하지만, 이러지 않는다면, 단호한 내 뜻은 전해지지 않을 거다.
“싫다···?”
“전 항주에 남고 싶습니다.”
“그대를 위한 모든 조건을 맞춰 주어도 말이오?”
“예. 전하.”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소만···.”
“전 항주가 좋습니다. 제가 터를 잡은 곳이고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게 있어 대의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대의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허면, 그대의 대의는 무엇이오?”
“제게 대의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저 한 잔의 술을 처음 보는 사람, 또 다시 찾은 사람에게 건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그 술을 즐기는 걸 바라보는 것. 그게 제 대의입니다. 무언가 거창한 뜻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 북경이 아닌 항주에 남고 싶습니다. 그런 일을 시작한 곳이 이곳 항주기 때문이고, 북경의 여러 복잡한 일에 휘말려 제 대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애써 피운 연막을 뚫어보고 항주까지 온 사람이다. 이미 내 마음이 북경에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확실히 말해줘야 한다. 내가 북경이니 황실이니 하는 곳에 애써 가지 않는 이유를 말이다.
목숨.
아깝다.
정치판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르는 곳이니 이 역시 챙겨야 하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게 내 이유.
이건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잔을 건넨 이름 모를 손님 하나하나가 묻은 첫 가게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
그건 바텐더로서 어쩔 수 없는 숙명일 뿐이다.
석호루란 곳이 내게 가지는 의미가 그랬다.
중원이라는 낯선 땅에 와 처음으로 술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술을 통해 사람과 연을 맺은 곳.
그게 항주며 석호루며, 내게는 석가장이다.
“그럼에도, 전하께서 절 쓰셔야만 하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겠나이다.”
마지막 말을 전하며 고개를 깊게 숙이며 삼황자 쪽을 바라보며 반절을 올렸다.
이를 말 없이 바라만 보는 삼황자.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말이 불충하게 들릴 수는 있다. 허나, 어쩌겠나.
애초에 충심이 없는걸. 이를 에둘러 표현할 길이 이것밖에는 없었다.
“······.”
– 호르르륵.
그는 무거워진 표정으로 술잔이 아닌 찻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천천히 한 모금 들이켠 차를 모두 삼키고 난 다음에야 잔을 내려두는 그.
“···어쩔 수 없이라. 허허.”
“전하···. 소생이···본가에라도···”
“아니.”
내가 전한 말을 곱씹으며 한번을 허탈하게 웃은 그에게 석주선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그가 이번에도 손을 내저었다.
한동안 내게서 멀어졌던 그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 닿았다.
“내 아무래도 석가장에서 이미 사람을 한 명 뺏어 온 것이 발목을 잡는 모양이오. 과욕인 게가. 둘이나 데려가는 것은. 허허.”
!
“그 말씀은···?”
“애초에 그대에게 의사를 묻질 않았소? 물은 말에 돌아온 답은 거절이니. 방법은 없는 것이겠지. 억지로라. 내 덕망이 넓지 않아 품은 사람이 많지는 않소. 다만, 그 누구도 억지로 품은 적은 없는 게 유일한 자랑이오. 또, 그게. 다른 이들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고. 헌데, 그대를 품자고 어찌 그 자랑을 깨버리겠소?”
“전하···.”
“애초에 품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던 거라. 내 그리 생각하겠소. 허허. 아니면, 연막을 피웠을 때부터 모른 척을 해야 했던 건가? 머리로는 품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끝까지 탐이나니 이게 참···. 허허허.”
“미천한 재주를 알아봐 주신 것은 평생 영광으로 알겠나이다.”
“영광이라.”
나오는 말은 내게 반가운 말들.
직접적으로 풀어준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는 말이 내게 닿았다.
난 그제야 표정을 더 풀고는 편안한 자세로 그의 앞에 다시금 고쳐 앉을 수 있었다.
삼황자는 그제야 풀어진 내 표정을 보고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 남았던 욕망을 모두 놓아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였다.
– 스윽.
“그대의 뜻은 잘 알겠소. 다만, 내 여기까지 왔으니, 거마비(車馬費)는 챙겨가리다. 내게도 그대의 대의를 누릴 기회를 주시겠소?”
삼황자는 앞에 놓였던 기다란 잔을 내 쪽으로 살짝 밀며 이전과는 다른 웃음을 보여준다.
이전에 보였던 웃음이 무언가 여유로움과 은근함이 가득했던 웃음이라면.
이번에 그의 얼굴을 채운 건 초탈의 표정이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거마비라며 한잔을 달라는 그를 위해 한 잔의 술을 만들 준비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나가 사람을 시켜 재료를 챙겨오게 하고 기다리던 잠시.
문득, 삼황자의 고민에 꼭 내가 필요한가. 하는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독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거야 술을 적절히 바꾸기만 하면 끝.
반대로 술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 그때는 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적절히 바뀐 술을 보고 그 맛을 잡아줄 사람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때 또 스치는 생각은.
‘그걸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하는 단순하지만, 내가 아니면 떠올릴 수 없는 생각.
– 드르르륵.
딱, 그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칠 즈음.
객방의 문이 열리고는 앳되어 보이는 인상의 점소이가 한 명 재료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반이라는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