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as a bartender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90
***
“천인(天人)이시여!”
천인이라.
아멘 하고 경건하게 나온 다음 말에, 난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역시나 무언가 깊은 오해가 생긴 모양.
이쪽 종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게 제법 말이 되긴 한다.
언제나 천주(天主)란 이는 시련을 내리고 구원을 내린다지 않나.
갑열에게 안나의 지병은 시련이요, 날 만난 건 하나의 구원이 되는 셈이다.
그의 눈이 경건해진 까닭은 이 때문이다.
“아아. 갑열이! 기도하세!”
“말구 형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는 무릎을 꿇은 채 경교(景敎) 십자가 앞에서 기도에 들어갔다.
이를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길 잠시.
“자네, 경교인이었나?”
“예? 아닙니다.”
진효풍이 내 쪽으로 슬쩍 다가오며 말을 물었다.
“흠. 뭐, 그래도 서역 출신이라 제법 말이 통하는 것 같긴 하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서역은 매우 넓습니다. 쓰이는 언어도 전부 다르지요. 말이 쉽게 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가? 해서, 이제 어쩔 생각인가?”
“당문으로 옮겨야죠! 우선, 그게 최선이에요!”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쩔 거냐는 그의 말에 당소정이 곧장 끼어든다. 당문으로 안나를 데려가겠다는 말.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내 목적이 갑열을 항주로 데려가는 거라면, 안나의 치료는 우선 과제임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당문에는 형님도 있고, 독존도 계시는 판이니. 그게 나을 거 같군.”
“할아버님은 지금 남만에 가셔서 안 계셔요. 그래도! 당문에는 실력 좋은 의원들이 많으니까요! 이것도 인연이니 제가 책임지고 치료에 나설게요!”
“든든합니다.”
당소정이 치료에만 나서준다면, 중원의 다른 의원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다.
그녀가 환자를 어찌 대하는지는 내 눈으로 보지 않았나. 그녀는 환자를 쉽사리 포기할 의원이 아니다.
“허면, 저 모인. 아니, 갑우리?에게 말을 해야겠네만···.”
“그, 잠시 기다리시죠···.”
치료를 위해 당문으로 가야 한다. 그 말을 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너무도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 중인 갑열과 말구의 모습 때문.
두 사람은 한참이나 고개 숙여 기도를 끝마친 후에야 우리 앞으로 돌아왔다.
“저어, 가브리엘?”
“예, 천인이시여.”
“우선, 천인은 아닙니다···. 그저 우연한 만남이었을 뿐이지요. 그렇게 부르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그대가 내게 오심이 우연의 산물일 리 없으니! 이 모든 게 그분이 정하심···”
“일단! 갑시다.”
“어디로?”
“당문으로.”
!
“당문으로 가서 안나의 상태를 제대로 살필 겁니다. 차후의 일은 거기서 논의하시죠.”
“······.”
당문으로 가자는 말은 산을 떠나 중원인이 가득한 성도로 가자는 말이 된다.
그 말에 조금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갑열. 역시 이건 무리인 걸까.
중원인이 가득한 곳은 그에게 곧 위험처럼 느껴질 거다.
어떻게든 안나를 들어 설득하려 할 때.
“천인께서···, 그렇게 하자고 하신다면 하겠습니다.”
!
갑열은 의외로 쉽게.
순응하는 말을 들려준다.
“조금···힘들겠지만, 버텨보겠습니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안나를 위해서도 그게 나을 겁니다.”
“예···.”
“너무 걱정하지 마요! 당문이 책임지고 두 분을 보호할 테니까요! 감히 누가 당문의 손님을 건드려요? 확!”
의외로 날 천인이라 여기는 그의 오해가 여기서는 도움이 된다.
그 거칠던 모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온순해진 그였다.
‘이대로···’
잠시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천인 보다야 사탄 쪽에 가까운 생각이지만, 편하긴 하니. 우선, 이들을 산 밖으로 데려가는 건 성공이다.
“그럼, 짐을 챙기시죠.”
당소정이 당문의 이름을 들어 보호까지 약속했고, 진효풍까지 함께 한다.
모인과 안나를 산에서 내려가도 모자라지 않은 환경. 난 그대로 갑열에게 짐을 꾸릴 걸 권하고는 하산을 준비했다.
단출한 세간 덕분에 봇짐 몇 개를 둘러매니 끝인 그들의 짐이다.
“소정 아가씨. 안나는 누가 좀 안아줘야 할 겁니다. 산길이 험하니···.”
“진 아저씨!”
“응? 내가?”
“그럼, 여기서 기운이 제일 남아도는 게 아저씨 말고 누가 있어요? 거, 이럴 때 힘 좀 씁시다!”
봇짐과 몇 개의 세간을 조장과 모인, 말구가 나눠 들었다. 그리고 남은 건 안나.
당소정은 당당한 어투로 진효풍에게 안나를 맡겨버린다. 산길이 험하지 않나.
실은 진효풍과 함께라면 무엇보다 안전한 걸 아는 당소정의 배려일 거다.
“아, 안나는···!”
“믿으셔도 됩니다. 저분 역시 수도자입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천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갑열이 조금 난색을 보였지만, 또 내가 나서니 그는 만사가 형통이다.
천인이란 오해를 잠시만 더 즐겨야 할 것만 같다.
“···허, 내 이러려고···”
“아저씨랑 가는 거예요? 우와! 아저씨도 키가 크네요! 아빠만큼 커요!”
또 슬쩍 빼려는 진효풍의 도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안나가 말아쥐니, 진효풍의 얼굴에 당황이 아린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다정함이 가득한 그.
“으응? 그, 그래. 아, 아저씨랑 가자 꾸나. 싫으냐?”
“아뇨! 동굴 밖은 좋아요! 아빠랑 산을 돌아다닐 때면 붕붕! 날아서 재밌었어요!”
“재, 재밌어? 붕붕?”
“네! 아빠는 산을 잘 타요! 절벽도 오르고! 나무도 올라요! 멋져요!”
“머, 멋져?”
“네에! 완전 멋져요-!”
“크흡! 내, 더 재밌고 멋진 걸 보여주마! 이리 오거라.”
진효풍은 아이를 번쩍 들어 자신의 목에 태우고는 동굴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이럴 때는 또 아이들에게 약한 그의 모습이다.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니까.
괴협이어도, 협은 역시나 협이다.
“가시지요.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말구는 가져온 짐을 그대로 챙기며 다시금 길을 나설 준비를 마친다.
이 깊은 산골까지 매주 오가며 갑열이 살 곳까지 마련한 그가 최적의 길잡이.
그를 따라 길을 나서기 시작하니.
“와아아아아아! 하늘을 날고 있어요!”
“재밌느냐? 응? 재밌어? 이렇게도 해볼까?”
– 붕! 붕! 붕!
걸어가는 우리의 머리 위로 진효풍의 곡예가 펼쳐진다. 공중제비까지 돌며 안나를 즐겁게 해주는 그.
안나가 소리를 지를수록 진효풍은 더욱 신이나 나무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안나는 자신을 무동 태운 이가 누군지도 모르고는 그저 꺄르륵 넘어갈 뿐이다.
아래로 떨어지는 매화향이 쓸데없이 진득했다.
‘허···.’
정들겠네. 정들겠어.
초절정 고수가 아이와 놀아주는 건 또 모습이 새롭다.
“그, 형제께서는 어쩌다가 경교를 나오신 겁니까? 역시 안나 때문입니까?”
즐거운 안나와 달리 아래쪽에는 가는 길이 조금은 지루했다.
그렇다면, 이때 필요한 건 분위기를 깨줄 약간의 대화.
알고 싶은 점도 몇 개 있어, 난 조심히 갑열에게 말을 붙여갔다.
“···예.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천주보다 더. 어쩌면, 그래서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르지요.”
“사랑이라. 안나의 어머니시겠군요. 그분께서는···?”
“안나를 낳고는 그대로 소천(召天)했습니다. 모두···, 배교자의 업보지요.”
나오는 건 역시나 무거운 이야기다.
아이와 아빠는 보여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기에 당연한 말. 하지만, 직접 들으니 이제야 더욱 무겁게만 다가온다. 문득, 밝은 안나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게만 보였다.
“혹, 그분도···?”
“색목인이냐는 말씀이시지요? 아닙니다. 중원인이었습니다. 안나와 제 외모 때문에 물으시는 거라면···. 저도 제가 왜 이런지 사정은 모릅니다. 저야 태어난 곳이 중원 땅이었고···, 아버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외모는···. 글쎄요. 아버님은 저랑 달랐습니다. 코나 인상은 비슷했지만, 적어도 푸른 눈에 노란 털은 아니셨지요. 어머님도 중원인이셨고.”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건 하나였다.
격세유전(隔世遺傳).
대를 건너뛰어 발현된다는 그 유전 형질이 갑열에게 보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더더욱 큰 비극이다.
보고 자란 부모의 모습에서도 볼 수 없었던 푸른 눈이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어쩌면, 안나에게 그것까지는 발현되지 않은 게 그로서는 더욱 다행일지도 모른다.
“대대로, 성직자. 그러니까, 대진사의 승려셨던 겁니까?”
“예. 그랬습니다. 듣기로는 가소갈 교구에서 파견되어온 게 몇 대전 조상님의 첫 정착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소갈···. 카슈가르를 말하는군요.”
“어떻게···? 역시! 맞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곳을 그런 식으로도 부르셨었습니다. 중원에서는 가소갈, 또는 소륵(疏勒)이라고도 하지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카슈가르면 현대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던 제법 중요한 도시였다.
이건 술에서도 마찬가지. 동방 와인이라 불리는 술의 역사를 담은 곳이 그곳이다.
술을 다루는 이라면 한 번쯤은 배우는 동방 와인 이야기를 책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었다.
실크로드를 타고 동양으로 흘러든 대부분의 와인은 카슈가르가 산지였다고 한다.
동방 포교의 중심지였던 덕에 수도사들의 와인이 정착한 것. 이게, 이제는 여기까지 닿는다.
“후아주는 거기서부터 시작이군요, 그럼.”
“예. 아시다시피, 경교의 의식에는 홍주가 쓰입니다. 대진사의 승려에게만 대대로 내려온 비법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쓰는 건···.”
“어떻게든, 살기 위해 익힌 기술이 아닌지요? 조상님들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안나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 나온다. 아이를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다는 아비의 말.
거기에 간접적으로 들려온 말로 후아주의 정체가 와인이 맞다는 말까지 있다.
이걸 이용하려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나.
결과만 좋다면야.
그를 항주로 데려가는 게 더욱 쉬울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이지만, 물론.
안나의 치료가 우선이고.
그렇게 걸음을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떠올랐다. 거칠게 자란 모인의 밝은 털을 비추는 눈 부신 햇살.
이들의 앞길에도 그럴 수만 있길. 간절한 바람과 함께 우리는 당가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흐음.”
“허어?”
“으응?”
백발이 가득한 허리 굽은 노인들의 고개가 연신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의 손이 닿은 곳에는 작은 체구의 귀여운 아이가 맑게 웃으며 몸을 눕히고 있다.
천양지체를 데려왔다는 말에, 당문의 의왕당(醫王黨)을 맡은 장로들이 총출동했다.
“어때요? 장로님들? 조금 아시겠어요?”
“천양지체라. 이걸 실제로 보는 건 우리도 처음이라···.”
“에이. 그러지들 좀 마시고!”
의원으로 반백 년이 넘게 살았던 이들도 천양지체는 처음 본다. 그만큼 흔하지 않은 것.
웬만한 무협지의 주인공들은 죄다 저런 지체(之體)니 뭐니 절맥이니 하던데.
실제는 그리 흔하지 않은 모양이다.
“음. 그래도.”
“방법이···있죠?”
“한기. 한기를 주입해주니, 확실히 양문이 닫히며 평범한 몸처럼 된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하구나.”
“에이, 그게 뭐예요···. 아님, 한기를 확! 불어넣으면?”
“얼어 죽겠지. 소정아. 넌 의원이라는 애가···.”
“아, 아님! 한공을 익히면요?”
“그건 또 무슨 신박한 논리더냐? 지금도 저 공자의 공력이 40년을 넘기니 이 정도로 효과를 보는 것이다. 기초부터 토납(吐納)으로 익히는 한기는 어림도 없음이야. 한기가 단전에 자리 잡기도 전에 모두 말라버리고 말 거다.”
“어휴···. 그럼 어떡해요? 방법이 없을까요?”
“흐음···.”
모인 의원 중 가장 배분이 높은 당문의 장로가 입을 비틀며 표정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안나의 몸을 고칠 방법은 없는 걸까. 다들 그의 입에 주목할 때.
“치료는 불가능하다.”
!
“아, 안 돼!”
“이런, 제기랄!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
의원의 입에서는 부정적인 말이 나왔다.
곧장 터지는 건 모인의 절규와 진효풍의 노성.
나 역시 한숨을 푹! 내어 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쯧. 내 언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지, 아이가 무조건 죽는다고 했소? 진 도장은 내 늘 말하지 않았소. 그 화병부터 좀 죽여야 할 거요.”
!!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당숙!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사는 거라면. 가능하다. 천양지체를 치료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의원의 입에서는 곧 그 반응을 뒤집어줄 말도 연달아 튀어나왔다.
당문 장로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네. 이 공자라고 했나?”
“예. 어르신.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손을 내밀어 보시게.”
“예?”
“얼른!”
– 스윽.
조금은 괴팍한 말에 살며시 손을 내미니, 당문의 장로가 곧장 기운을 펼쳐 내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거칠지 않게 안을 파고든 후 슬쩍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당문의 장로.
“호오. 이건, 대환단이로다. 허허, 한기가 가득 들어찼구나. 빙궁 쪽이려나? 중원의 색도 묻었구나.”
귀신이다.
그런 말이 딱 맞게 내력을 모두 알아보는 그. 그는 내 속을 두 바퀴나 훑어본 후에야 손을 떼었다.
“되겠구나.”
“뭐가요? 당숙! 얼른 말해주세요!”
“천양지체는 너도 읽어서 알겠지만, 양기가 몸을 태워죽이는 병이니라. 몸이 자랄 때까지, 그 양기를 다스려줄 수만 있다면 살 수가 있다는 말이지.”
“그걸 어떻게 하냐는 말이죠!”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허면요?”
“저자가 있지 않으냐?”
!!
“예? 저, 저 말씀입니까?”
“그래, 자네! 자네가 저 아이에게 계속해서 강한 한기를 불어넣어 줘야 하네. 그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이니.”
“제가 한기를 넣어주기만 하면, 확실히 살 수 있는 겁니까?”
“진맥한 결과는 그러하네. 그대의 공력이 제법 강하니, 몇 년만 불어넣으면 아이의 몸이 강한 한기를 축적할 터. 그때는 적당한 무공을 몇 개 가르치면 양기를 발산할 수도 있을 거네. 지금으로서는 방법은 그뿐이네.”
“그 말씀은?”
“확실히 살 수 있다는 말이지.”
!!
다행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런 말.
이건 복합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안나가 살 수 있어서 다행이란 뜻으로.
또, 다른 의미로도. 아이가 살 수 있어 기쁘다. 다만, 다른 기쁨도 찾아오고 있었는데.
즉, 저 말이라면 갑열과 안나는 내 곁에서 안나가 양기를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자랄 때까지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음흉한, 그리고 기쁜. 미소가 절로 지어져 갔다.
‘일이···’
이렇게도 풀리는구나.
한 번에 두 가지가 모두 해결되는 상황.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잘 됐어요! 진짜! 와. 이 공자. 하실 거죠?”
“무, 물론입니다. 와인···. 아니, 안나를 위해서라면!”
“방금 무언가, 아주 사적인 감정이 나온 거 같은데?”
“제, 제가요? 아뇨! 전 대의적으로 아이를 위해···!”
“쓰읍. 무언가 마귀 같은 미소였는데?”
이럴 때만 예리하다. 나름 도사라 마귀 같은 건 귀신같이 감지하는 진효풍의 눈치.
갑열은 밝은 미소로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 사이로 문맥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 그렇다면 안나가?”
“예! 살 수 있어요! 여기, 이 공자 곁에만 머문다면!”
“아아! 역시!”
– 쿵!
“천인이시여!”
그는 당소정이 요약해서 들려주는 말에 또 한 번 쿵! 하고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천인이란 말이 익숙해지려 해, 위험한 지금이다.
“처, 천인은 아닙니다. 그저 우연이지요.”
“운명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신실함이 빛을 발하는 갑열.
난 그런 갑열을 일으키며 조금 전부터 하고 싶던 말을 전했다.
“제가 안나가 나을 수 있게 돕겠습니다. 다만, 전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제가 사는 곳으로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그곳에서 살아갈 길은 제가 열겠습니다.”
안나를 위해서라면 항주로 함께 가자는 말.
당연한 말이지만, 간다면 일자리도 찾아야 할 거고, 난 좋은 일자리 역시 제공할 생각이 있다.
대석양조장이라는, 아주 좋은 일자리 말이다.
“가, 가겠습니다! 가시밭길이라도! 불지옥이라도!”
“가시밭길도 불지옥도 아닙니다. 아마, 여기보다 형제께는 살기 좋은 곳일 겁니다. 석가장의 이름으로 형제와 안나를 보호할 겁니다. 허면, 차별도 덜할 거고.”
“아멘!”
“그, 그것 좀 그만!”
수시로 튀어나오는 기도와 천인이란 말부터 금지해야겠다. 제일 먼저 드는 건 그런 생각.
이제부터는 저이도 항주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항주는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으로 차별 역시 덜할 거다.
저 이를 데려간다면, 지금 머리에 떠올리는 그 술을 증류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거고.
절로 잘 풀려가는 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사악하게 새어 나오는 것만 같은 지금.
다시 말하지만, 안나가 살 수 있게 되어서 이렇게 웃는 거다.
정말이다.
“예, 참 잘된 일입니다. 참요.”
“웃는 게 수상한데?”
진효풍의 눈치만 빼고,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