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괜찮아? 나 마왕인데? (2)
“마왕이라고. 자, 봐 봐.”
아르칸은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예전과 달리 뿔은 제법 길어져 어지간해서는 눈에 띄었지만, 정령의 기운만을 쫓아 찾아온 제피로스는 미처 못 본 거였다.
‘정령의 가호까지 느껴졌는데, 마왕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마력도 느껴지잖아.’
난처해하는 제피로스를 본 아르칸이 재촉했다.
“어쩔 거야? 계약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원래라면 함께 엘프를 구출하면서 가까워진 다음, 약속대로 계약하기 전에 마왕이라고 밝힐 예정이었다.
별다른 구속력 없는 약속이다 보니 마왕과의 약속은 무효라며 도망치면 끝이었으니까.
그러나 친해진 뒤라면 곧바로 거부하긴 힘들 터.
하지만 곧바로 계약하게 된 이상,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크흠…….”
잠깐 뜸을 들이던 제피로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약속은 약속. 계약하겠습니다. 용사님도 신뢰하니까 엘프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신 거겠죠.”
‘용사는 이제 용사가 아닌데, 그래도 이름은 용사니 계속 용사라고 부르려나?’
문득 용사에 대해서 떠올렸던 아르칸은 용사가 걱정됐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괜찮으려나…….’
워낙 무뚝뚝한 녀석이라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용사라고 위험한 곳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었었다.
그런데 대뜸 용사를 그만두라니 여러모로 상심이 클지도 몰랐다.
‘엘프를 구하고 난 뒤에 한번 이야기해 봐야지.’
오히려 마왕 주제에 위로한다고 화낼지도 모르지만, 마음에 걸려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기 마왕님? 계약하려면 이름을 알려 주셔야 합니다.”
“아, 미안. 나는 마왕 아르칸이다. 그럼 지금 계약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
곧바로 계약을 진행하려는 제피로스를 아르칸이 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정령 계약할 때도 피를 봐야 하냐.”
“아, 아닙니다. 마침 정령의 가호도 있으시니까 그걸 통해서 계약을 맺으면 됩니다.”
다행이었다.
‘엘프 자매들이 해 준 정령의 가호가 이런 데 쓰이다니.’
정령의 가호가 발동할 때는 아르칸이 위급한 상황이라 안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사람 일은 몰랐다.
반면 제피로스도 의아하긴 했다.
이 정도로 강한 정령술사가 정령과의 계약할 때 피를 봐야 하느냐고 묻다니.
마치 계약을 처음 맺는 것 같은 게 아닌가? 하긴, 다른 정령의 가호부터 기운이 느껴지긴 해도, 다른 정령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제피로스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르칸 님, 혹시 정령과의 계약은 처음입니까?”
“어, 응. 능력을 각성한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러면 내가 저 정도의 정령술사의 첫 번째 정령?’
제피로스는 내심 기뻤다.
강한 정령술사와 계약해서 활동하다 보면 그만큼 정령의 격이 높아지는데, 그 때문에 강한 정령술사에게는 여러 정령이 계약을 요청한다.
그때 아무래도 먼저 계약한 정령은 선배 정령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계약하기로 하길 잘했어.’
“그럼 계약을 맺지.”
“알겠습니다!”
제피로스가 힘차게 대답하며 계약을 시도했다.
그러자 바람이 아르칸의 전신을 휘감았다.
부드럽고 청량한 바람에 마음마저 상쾌했다.
동시에 정령의 가호가 새겨진 아르칸의 손등이 푸른빛을 발했다.
그러자 제피로스의 바람은 그대로 손등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피로스와 계약이 마무리된 거였다.
“이제 어디에 계시든 저를 마음대로 불러내실 수 있게 되신 겁니다.”
“그래? 별로 다른 걸 못 느끼겠는데? 그보다 괜찮아?”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재능이 뛰어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제피로스는 태연히 대답했지만,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정령술의 재능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령계까지 그 뿌리가 닿는다는 세계수에는 못 미치더라도, 자신보다 더 강한 상급 정령까지 거뜬히 부릴 수 있어 보였다.
제피로스는 다시 한번 먼저 계약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다시 엘프를 구출하러 가 볼까?”
“네! 이제 드래곤에 탈 필요 없이 제가 모시겠습니다.”
동시에 아르칸의 몸이 살짝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피, 아빠…….”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피용은 아빠가 나는 걸 보고 애처롭게 불렀다.
기껏 오붓하게 같이 날고 있었는데, 아빠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걸 본 아르칸이 다시 피용의 위에 올라탔다.
“그래도 피용을 타고 가는 게 빠르지. 안 그래?”
“피, 피, 맞아. 맞아.”
“제피로스는 더 빨리 날 수 있게 도와줘. 가면서 멜스크 후작의 성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아, 알겠습니다.”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제피로스가 황급히 대답했다.
드래곤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 정도는 다시 정령계로 돌려보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죽지는 않지만, 중간계에서 좀 더 높은 차원의 정령이 되기 위해 이룬 것들을 모두 초기화되어 버린다.
가능하면 드래곤 앞에서는 몸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때 아르칸이 외쳤다.
“피용아, 가자!”
제피로스는 열심히 드래곤을 날리는 마법의 바람에, 바람의 정령을 보탰다.
그러고는 아르칸에게 멜스크 후작에게 잡힌 엘프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령 계약으로 기분 좋던 아르칸은 제피로스의 설명에 굳은 표정이 됐다.
‘그렇게 끔찍한 상황이었다니.’
***
멜스크 후작이 엘프 왕을 자처하면서 대륙의 모든 엘프를 자신의 성으로 끌어온다는 건 유명했다.
그 때문에 카퓨 산맥의 토돌 백작처럼 후작에게 잘 보이려고 엘프를 상납하려는 녀석도 많았고, 노예로서의 몸값도 아주 비싸 엘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다들 기를 쓰고 잡았다.
그렇게 모은 엘프들을 잘 대우해 주나? 하면 잘 대해 주지는 않는 거로 알고 있었다.
왜 애매하게 아는 거냐면, 소설에서 용사는 엘프 동료도 없는 데다 엘프와 관련된 이야기는 세계수의 쌍잎을 얻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피로스가 알려 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멜스크 후작은 엘프들에게 자신은 엘프왕의 후손이니, 그대들이 충성을 바치고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엘프들은 거부했다.
애당초 엘프들에게는 왕이 없는데, 엘프왕의 후손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멜스크 후작의 반응은 그야말로 광기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라고 엘프들을 고문한 거였다.
고귀한 엘프들을 놀라운 의지력과 인내로 고문을 버텼지만, 집요하게 반복되는 고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비극은 멜스크 후작이 고문에 굴복한 엘프들의 충성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디선가 구해 온 마도구로 엘프들을 세뇌해서 부하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세뇌 과정도 아주 고통스러웠는데,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무엇보다 세뇌에 실패한 엘프들은 적반하장으로 엘프가 아니라며 귀를 잘라 내고 지하 감옥에 가둬 뒀다는 거였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지…….’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고 이야기를 들었다.
정리하자면 세뇌된 엘프는 대략 30명가량.
이들은 이른바 멜스크 후작의 기사단, 엘프왕의 정령 기사단으로 불린다.
이름은 유치하지만, 뛰어난 검술과 궁술에 정령술까지 쓸 수 있다 보니 아주 강했다.
거기다가 현재 세뇌를 위해 대기 중인 엘프가 다섯 명.
엘프를 세뇌하는 마도구에도 당연히 마석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 다섯 명은, 일단 잡아 왔지만 마석이 없어 대기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귀를 잘린 엘프가 무려 30명가량 된다고 했다.
“이거 숫자가 생각보다 많은데. 그보다 세뇌 확률이 너무 낮은 거 아니야? 반밖에 안 돼?”
“그 이하입니다. 세뇌 중에 죽거나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엘프도 있으니까요.”
“……그렇군.”
정말 끔찍한 이야기였다.
아마 엘프를 구해 달라고 부탁한 용사도 이 정도로 끔찍했을 줄은 몰랐을 게 분명했다.
‘알았으면 아무리 용사라도 못 참고 박살 냈겠지. 아니, 세뇌당한 애들은 차마 공격 못 했으려나.’
그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세뇌는 어떻게, 푸는 방법이 있어? 못 푸는 거면 걔들 빼고 나머지만 구해야 하나?”
“다 구했으면 좋겠지만, 세뇌를 푸는 방법은 저도 모릅니다.”
“그래? 무슨 단서도 없고?”
“음, 멜스크가 강력한 충격을 주면 세뇌가 풀릴지 모른다고 말한 것만 들었습니다.”
“강력한 충격이라…….”
고민하던 아르칸의 눈에 피용이 들어왔다.
“어디 한번 세뇌가 풀리나 시험해 봐야겠네.”
***
‘벌써 도착했나? 빠르군.’
아르칸의 메시지를 확인한 용사는 조금 놀랐다.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오다니.
‘이러면 나도 도와줄 수 있겠는데.’
다행히 수도에서 자신을 데리러 오는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떻게 탈출시킬 생각이야? 내가 할 일을 알려 줘.
-할 일은 무슨. 네가 나서면 괜히 일이 복잡해져. 네가 거기서 나올 때쯤 작전 시작할 거야.
-그래…….
용사는 힘없이 답신을 보냈다.
이해는 됐지만, 왠지 아르칸마저도 자신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기운이 빠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저 녀석이 뭐라고.’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은 용사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나중에 나 없다고 징징대지나 말고, 죽기 싫으면 똑바로 구해.
-언제 내가 너 실망시킨 적 있어?
“풋.”
저 자신감 넘치는 메시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용사님, 손님입니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미네가 말했다.
용사는 기분 나빴지만, 꾹 참고 물었다.
“손님? 누구?”
“신전 기사님들이십니다. 용사님을 수도로 모실 분들이지요.”
“그런가. 알았다, 바로 가지.”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날 작정이었다.
용사는 자신을 데리러 온 신전 기사들을 닦달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출발했다.
멜스크 후작은 안 그래도 불편했던 용사가 바로 돌아간다고 하자 반색했다.
안 그래도 반대 파벌인 왕당파인 로버른 경과 성녀가 보낸 신전 기사들까지 대접하려니 고까운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더욱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순찰병으로부터 동쪽의 산 방면에서 엘프를 목격했다는 거였다.
‘훗. 또 겁 없는 엘프들이 동족을 구하러 왔나 보군.’
멜스크 후작은 곧바로 정령 기사단을 소집했다.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아, 길 잃은 백성들이 나타났다고 하니 어서 데려오너라!”
“국왕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서클릿을 한 엘프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정령 기사단은 평소처럼 엘프 수색에 나섰다.
30명은 3인 1조로 나뉘어서 멜스크 후작의 저택 인근에서부터 동서남북 성 안팎부터 빠짐없이 뒤졌다.
순찰병이 목격한 건 숲속이었지만, 엘프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충분히 잠입하고도 남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미네 님,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설마 아직 숲속에 있나? 아무래도 경계 중인가 보군.”
그렇게 판단한 정령 기사단의 단장, 미네는 몇 개의 조를 이끌고 직접 숲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지나서 저 앞에 있는 엘프가 보였다.
“미네 님, 저기 있습니다.”
“나도 봤다.”
“숲에서 눈에 저렇게 잘 띄다니, 어설픈 게 아직 어린 녀석인가 봅니다.”
“내가 정면에서 접근할 테니, 다들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도록.”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뒤로 사라졌다.
미네는 엘프 앞에 모습을 드러낸 뒤 천천히 다가가면서 말했다.
“얌전히 따라와라. 우리의 왕께 데려가 주겠다.”
“그거 고마운데,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어.”
“확인?”
미네가 의문을 품는 순간.
세상이 암전됐다.
동시에 엄습해 오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극한의 두려움에 휩싸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공포심이 온몸을 지배해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미네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는 같은 조를 이뤘던 부하들도 마찬가지.
숨어 있던 좌우측에서 하나둘 쓰러졌다.
미네와 부하가 쓰러지는 걸 본 엘프는 허공을 쓰다듬었다.
“피용아, 수고했어.”
그러자 엘프의 모습이 아르칸으로 바뀌고, 피용도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칸이 할루시네이션으로 엘프로 위장해 미끼가 됐고, 피용이 투명화한 채로 옆에 있다가 드래곤 피어를 날린 거였다.
성장의 샘물 덕에 드래곤이 되어서 제대로 된 드래곤 피어를 쓸 수 있게 된 거였다.
아르칸은 정신을 잃은 미네를 보면서 씩 웃었다.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데는 이것만 한 게 없지.’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