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괜찮아? 나 마왕인데? (3)
번쩍.
정신을 차린 미네의 눈에 하늘이 들어왔다.
‘하늘? 숙소가 아니야?’
그제야 미네는 엘프에게 다가가다 정신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함정? 독? 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보네.”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웬 청년이 서 있었다.
몸을 일으켜 피하고 싶었지만, 밧줄로 꽁꽁 묶인 탓에 꼼짝할 수 없었다.
“진정해. 이야기 좀 하자는 거니까.”
“넌 누구냐? 다른 자매들은?”
“난 아르칸이라고 해. 네 동족들은 옆에 있어.”
왼쪽을 보니 자매들이 마찬가지로 묶인 채 누워 있었다.
묶여 있다는 건 최소한 목숨은 붙어 있다는 의미. 속으로 안도한 미네는 아르칸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르칸, 우리를 습격한 이유는 뭐냐?”
“너희를 구해 주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말이야. 멜스크 후작으로부터 구해 주러 온 거야.”
“헛소리! 멜스크 님은 엘프들의 왕으로 엘프 종족을 구원해 주실 구원자시다. 그런 분으로부터 구해 준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엘프들에게 언제부터 왕이 있었다고?”
“엘프들의 왕은…….”
엘프들의 왕에 대해서 떠올려 보려던 미네는 혼란에 빠졌다.
‘정말 언제부터 우리한테 왕이 있었지? 아니, 그 볼품없는 인간족이 왜 자신을 엘프왕이라고 하는 거야?’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미네는 그제야 자신이 세뇌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엘프왕 멜스크는 세뇌로 인해 조작된, 실재하지 않은 거짓에 불과했다.
오히려 엘프들을 비싸게 사들여 엘프를 대륙의 사냥감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괴롭히고 고문하고 죽이고 세뇌까지 한, 종족의 철천지원수였다.
“이, 이럴 수가. 내가……. 그런 놈을 왕으로 모셨다니.”
심지어 그놈의 명령에 따라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했다.
“동족을 공격해 붙잡고 고문하고. 그리고 세뇌……. 우욱.”
그간의 기억과 함께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어어, 토한다. 저거 좀 풀어 줘!”
아르칸이 놀라서 외치자, 어디선가 날라 온 날카로운 바람이 미네를 묶고 있던 밧줄을 끊었다.
동시에 아르칸이 미네의 몸을 옆으로 돌려, 누운 그대로 토하는 걸 막았다.
바닥에 한참 동안 토하던 미네는 손등으로 입을 닦고 일어섰다.
그때 아르칸이 물통과 손수건을 슬쩍 내밀었다.
“자.”
“필요 없다.”
“입 냄새 날 텐데?”
“…….”
미네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물통과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물통으로 입을 헹구고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래서 인간족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 무엇 때문에?”
“용사랑 정령이 너희를 구해 달라고 부탁해 왔거든.”
“용사……. 정령?”
미네가 중얼거리자 제피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네, 오랜만이다. 내가 이분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제피로스? 어떻게?”
“둘이 아는 사이인가 봐?”
“내 계약 정령이다.”
“……이었지. 네가 세뇌된 이후로 계약은 해지되었다.”
“그런가. 어쩐지 세뇌된 이후에 네 모습이 안 보인다 했어.”
미네는 아련한 눈으로 제피로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도와줄 사람을 계속 찾았다. 다행히 여기 이 마왕 아르칸 님을 만날 수 있었지.”
“그랬구나. 고생이 많았……. 마왕이라고?”
“여기.”
아르칸은 자신의 이마에 난 뿔을 가리켰다.
마계에서는 서로 뿔을 보기 바쁜데, 이곳에서는 별로 신경 안 쓰다 보니 눈치채는 게 늦는 모양이었다.
“미, 미쳤어? 마왕에게 부탁했다고??”
“아르칸 님이 다른 마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 나도 부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용사님께 이미 부탁받았다고도 하고, 정령으로서 너무 친근하게 느껴지더군. 거기다가 정령의 가호도 가지고 있었다.”
“뭐, 뭐라고?”
미네는 세뇌에서 풀려났을 때보다 더욱 혼란스러웠다.
용사가 부탁하고.
정령이 친근하게 느끼고.
정령의 가호를 가진.
마왕이라니.
“그런 마왕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있는데? 자, 이거 봐.”
아르칸은 자신의 손등을 보여 줬다. 확실히 엘프가 새긴 정령의 가호가 맞았다.
“이건 어떻게 얻은 거냐?”
“예전에 리브라는 엘프를 구해 줬을 때 받은 거야.”
“리브, 리브가 잡혔었나?”
“그래, 노예로 잡혀서 이곳으로 끌려올 뻔했었지.”
“지금은?”
“아마 리트와 함께 엘프 마을로 돌아갔을 거야.”
“휴.”
아르칸의 설명에 미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브와 리트는 자신보다 어린 자매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미네는 무릎 꿇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무리 아르칸이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자매들의 은인이자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태도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무례라고 할 거까지야. 나도 바라는 게 있어서 구한 거니까.”
아르칸이 멋쩍어하면서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그걸 본 미네는 놀란 눈을 했다.
엘프왕을 자처하는 저 미치광이 인간족 후작보다 눈앞의 마왕이 더욱 소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칸의 마지막 말이 조금 걸렸다.
“그런데 바라는 거라니요?”
“어, 내가 세계수의 씨앗을 하나 구했거든. 그거 마왕성에 심어 줬으면 하는데.”
“아, 그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죠.”
세계수의 씨앗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엘프 마을에 있는 세계수가 아직 어린 상황에서 세계수가 여러 군데에서 자라는 건 엘프로서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걸리는 건 마왕성이라는 거지만,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못 할 짓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래 관계라고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더 안심이 됐다.
“어쨌든 세뇌가 풀렸으니 다행이네. 다른 엘프들도 다 구할 수 있겠어.”
“아, 그런데 세뇌를 어떻게 푸셨습니까?”
미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멜스크 후작은 이 세뇌는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대마왕이나 드래곤은 와야 풀 수 있다고 했다.
“아, 그거? 피용이한테 부탁했지. 자, 인사해.”
“안녕.”
그때 허공에서 피용이 모습을 드러내며 작은 앞발을 흔들었다.
그걸 본 미네는 까무러칠 뻔했다.
“브, 블랙 드래곤!!”
“응, 드래곤 피어 한 방에 기절하더니 세뇌가 풀리더라고. 안 그랬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드래곤 피어를 썼다니.
황당하면서도 궁금한 게 더 생겼다.
“그러면 다른 엘프들을 다 어디 있나요?”
이 숲에만 정령 기사단의 절반. 다섯 개 조가 들어와 있었지만, 지금 잡혀 있는 건 자신의 조였던 자매들이 전부였다.
“아, 걔들은 일단 다 돌아갔어.”
“하지만 소리가 들렸을 텐데…….”
“제피로스가 소리가 안 새어 나가게 도와줬지. 모두랑 싸우려던 게 아니라 구하러 온 거니까, 일단 세뇌가 풀리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었어.”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아르칸의 배려를 느낀 미네가 고개를 숙였다가 멜스크를 떠올리고 굳었다.
“아, 안 됩니다.”
“뭐가?”
“만약 우리의 세뇌가 풀렸다는 걸 멜스크가 안다면 형제자매들을 모조리 죽일 겁니다.”
“에이, 아무래도 한둘 세뇌 풀린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 미치광이는 자신이 가지지 못할 바에는 모두 없애 버리고도 남을 테니까요.”
멜스크에게 온갖 짓을 다 당한 미네의 주장이니만큼 아르칸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좀 더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겠네.”
“네. 최대한 빨리…… 음.”
흥분해서 떠들던 미네가 입을 닫았다.
“왜 그래?”
“이대로 쳐들어가더라도 형제자매들이 위험할 거 같아서요.”
자신을 비롯한 엘프들이 공격해 오면 멜스크는 형제자매들을 해치겠다고도 남았다.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대놓고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
***
정령 기사단이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는 소리에 멜스크 후작이 물건을 던지며 화를 냈다.
“젠장, 엘프를 못 찾았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근데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희 말고는 다른 엘프의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 설마 순찰병이 잘못 본 건가?”
정령까지 사용 가능한 엘프들이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조차 없다는 건 그 가능성밖에 없었다.
“처음 보고한 순찰병을 잡아다 정말 본 건지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엘프가 고개를 숙인 뒤 돌아가려는데, 멜스크 후작이 이상함을 느끼고 불렀다.
“그런데 미네는 어디 가고 네가 보고해?”
“미네 님은 아직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냐?”
“평소처럼 어떻게든 찾아낼 거라고 수색 중이지 않을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미네는 세뇌한 엘프 중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웠다.
그 때문에 자신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기 위해서 종종 무리한 적도 있었다.
“흐흐, 이거 돌아오면 노고를 치하해 줘야겠군. 미네가 돌아오면 곧장 내게 오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때 경비병이 외쳤다.
“후작님, 미네 님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마침 오는군. 미네여, 고생했다. 오!”
안으로 들어오던 미네를 칭찬하던 멜스크 후작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미네의 뒤로 엘프 한 마리가 포박된 채 끌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엘프들의 왕이시여. 저희 동족을 데려왔습니다.”
잡혀 온 엘프는 동족이라는 말에 불쾌한 듯 미네와 멜스크 후작을 노려봤다. 그래 봤자 워낙에 꽁꽁 묶은 데다 입까지 막아 놓은 탓에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멜스크는 저 반항적인 눈매를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도록 바꾸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따질 게 있었다.
멜스크는 다른 엘프를 흘겨봤다.
“아니, 엘프들의 흔적을 못 발견했다 하지 않았나. 미네는 이렇게 떡하니 데려왔지 않으냐.”
“왕이시여, 자매를 용서하십시오. 은밀히 숲에 들어오자마자 돌아가는 걸 발견한 겁니다.”
“아아, 그런가? 그래서 늦었나 보군.”
평소라면 짜증을 냈겠지만, 가지고 놀 새로운 엘프가 나타나 기분이 좋던 멜스크 후작은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자, 다들 고생했으니 저 엘프만 지하 감옥에 데려다 놓고 이만 쉬거라.”
“배려에 감사합니다.”
미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엘프를 데리고 물러났다.
“아르칸 님, 왜 저항하고 그랬어요? 들키는 줄 알았잖아요.”
미네가 잡아 온 엘프는 아르칸이 할루시네이션으로 위장한 거였다.
“연기한 거야. 원래 잡혀 오면 다들 싫어한다며. 그보다 지하 감옥으로는 이 친구를 데리고 가. 나중에 보자.”
아르칸은 용아병을 꺼내 엘프로 위장한 다음, 투명화한 모습으로 얼른 멜스크 후작의 뒤를 따라갔다.
아르칸이 이렇게 잠입한 건.
멜스크 후작이 엘프들이 세뇌가 풀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고, 멜스크 후작이 가지고 있는 감옥 열쇠를 뺏기 위해서였다.
미네가 들어가는 것도 어디까지나 지하 감옥 입구까지. 그 안쪽으로는 특별한 열쇠가 필요하다고 했다.
힘으로 뚫기에는 안에 있는 엘프들이 위험했다.
용사가 성검으로 문을 잘라 버리면 쉽겠지만, 이미 떠난 마당에다가 그것 때문에 용사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것 말고도 아르칸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열쇠를 찾는 김에 멜스크가 가지고 있다는 보물도 찾아봐야지.’
그 보물은 바로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마도구, 정령의 반지였다.
멜스크 후작이 엘프왕의 후손을 자처하는 건, 망상이나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대로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정령의 반지가 있기에 자신이 바로 엘프왕의 후손이라고 여긴 거였다.
‘논리적으로 안 맞지만.’
정령의 반지라는 건 어디까지나 강제로 정령을 가둬 둔 것에 불과하다.
정말 엘프왕의 후손이었다면 그런 마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상급 정령 정도 되면 중급 마왕도 상대할 정도로 아주 강력했기에, 가능하면 얻고 싶었다.
열쇠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엘프 장난감을 가지고 놀 생각에 신난 멜스크 후작을 뒤따라 후작의 방으로 가서 바로 열쇠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열쇠는 멜스크 후작이 가져가고, 아르칸이 손에 넣은 건 멜스크 후작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따로 숨겨 둔 여분이었다.
보물 창고 열쇠도 그 옆에 있었다.
문제는 보물 창고의 위치를 모른다는 거였다.
“혹시 보물 창고가 어딨는지 알아?”
“글쎄요. 몇 번이고 쫓아갔지만, 보물 창고로 보이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 혹시 못 들어가게 막혀 있는 곳은 없어? 지하 감옥도 못 들어간다면서.”
아르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제피로스가 대답했다.
“아, 그런 곳이 한 군데 있긴 합니다.”
“아마 거기가 보물 창고일 거야. 바로 가자.”
“여기 바로 아래입니다.”
“잘됐네.”
아르칸은 제피로스의 안내대로 비밀 통로를 열어 아래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보물 창고는 맞았지만, 그 내부의 광경에 아르칸은 경악했다.
제피로스에게 멜스크의 만행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짓을…….’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