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15
15화 고블린의 침공 (4)
다음 날까지 연회를 즐긴 아르칸 마왕성은 미뤄 둔 전후 처리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건 고블린 사체를 정리하는 것.
이번에 얻은 고블린 사체는 어림잡아도 4백은 됐다.
아무래도 좁은 마왕성이다 보니 이걸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잘 모아 두는 것도 일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하인들은 어두운 얼굴로 수군거렸다.
“정말 고블린들이 다시 쳐들어올까?”
“아르칸 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젠장, 아르칸 님 말씀대로 세틱을 복용한 채 덤비면 골치 아픈데…….”
진통제 역할을 하는 세틱은 과다 복용하면 환각 효과를 낸다.
그런데 작은 체형인 고블린의 경우 환각 효과를 넘어 다른 효과를 냈다.
공포는 물론, 통증도 느끼지 못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빌 정도로 흉포해지는 거였다.
말 그대로 광전사가 되는 셈.
그렇게 된 고블린들은 전신이 시뻘게져 있기에 레드 고블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하인들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참고로 레드 고블린은 오크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아주 까다로운 상대였다.
더 큰 문제는 지금껏 해치운 고블린보다 남은 고블린이 더 많다는 거였다.
“아르칸 님은 대체 어떻게 막으실 생각이시지?”
“마왕성을 아예 지하에 숨겨 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이 정도 고블린 사체면 어떻게 숨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건 그래.”
마왕성이 지하로 들어가면 지금과 달리 입구를 완전히 숨겨 버릴 수 있다.
물론 마정석의 마력 소모가 빨라지지만, 고블린 대부대를 피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아무래도 모양새가 안 좋겠지만, 오웬 님도 권하신다고 들었어.”
* * *
그 시각, 하인들의 말대로 오웬에게 입구를 숨길 걸 권유받은 아르칸이 놀라서 되물었다.
“지하로 숨자고?”
“숨는다기보다는 일시적인 후퇴를 하자는 겁니다.”
“그게 그거지.”
“고블린을 피했다는 오명을 쓸지는 모르지만, 이후 힘을 길러 징벌하시면 만회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고블린에게 무너진다면…….”
오웬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마음이 아픔에도 이런 고언을 하는 건 앞으로의 미래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고블린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아르칸 마왕성은 아직 제대로 된 병력도 못 갖춘 상황.
어제는 아르칸 님이 새로 얻은 능력으로 막아 내긴 했지만, 세틱을 먹고 레드 고블린이 된 녀석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끝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르칸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무너진다니 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데?”
“어떻게 말입니까?”
“이번 전투로 마력도 꽤 모았겠다, 마왕성을 본격적으로 이용해야지.”
“마왕성을 이용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모르겠어? 지금 보여 줄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오웬을 보던 아르칸은 마정석 앞에 앉아서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화면을 본 오웬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 * *
한편 아르칸 마왕성에서 후퇴한 토카는 긴장이 풀렸는지 곯아떨어졌다.
그러고는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짜증을 부리며 주변의 물건을 마구잡이로 부수기 시작했다.
“케륵! 겁쟁이들 때문에 이게 다 뭐야! 나 혼자만 강해지면 뭐 해! 이대로라면 절대로 마왕을 못 쓰러트린다!”
조금 진정됐을 때 보코가 조용히 권했다.
“이렇게 된 이상, 철저히 숨어 지내죠. 그러면 마왕이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헛소리! 분명 보복하러 올 거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해.”
“어떻게 말입니까? 망나니 마왕이라 약한 줄 알았지만, 마왕답게 신기한 능력을 발휘했지 않습니까. 그 많은 고블린을 한꺼번에 굴종시키다니…….”
“이것들이 나약해 빠져서 그래. 나처럼 정신력으로 끊어 내고 일어서야지. 옳지! 그러면 되겠다.”
토카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악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보코는 불길함을 느꼈다.
“뭘 하실 작정입니까?”
“정신력이 모자라면 강제로 주입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그 말인즉, 강제로 주입시킨다는 건…….”
“세틱을 준비하란 소리다.”
“그, 그건 안 됩니다. 그걸 쓴 고블린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보코가 사색이 되어서 만류했다.
레드 고블린은 아주 강력한 광전사였지만, 흔히 쓰이지 않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였다.
그건 바로 전투가 끝나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미쳐 버린 채 날뛰다가 힘이 다하면 죽을 뿐이었다.
그걸 알기에 고블린들은 세틱을 먹는 걸 꺼렸다.
즉, 강제로 세틱을 먹인다는 건 다른 고블린들을 소모품으로 쓰고 버린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걱정하는 보코에게 토카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어차피 고블린이야 썩어 빠지게 많잖아.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 그 정도 희생을 불가피한 거지.”
“그럴 수가…….”
보코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고블린들이 빠르게 번식한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은 소중했다. 희생하라는 식으로 쉽게 할 말은 아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어.’
보코는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
정작 토카는 잔소리꾼이 사라지자 잘됐다는 듯 부하에게 소리쳤다.
“방금 말 못 들었어? 온 산맥을 뒤져서 세틱을 가져와! 최대한 빠르게 공격해야 해!”
그 말에 고블린들이 일제히 흩어서 세틱을 채취하러 나섰다.
하지만.
수천의 고블린들이 며칠간 모아 온 세틱은 1백 개 정도에 불과했다.
“케르륵? 왜 이것밖에 없어?”
“마인족들이 죄다 캐 갔습니다. 구석에 있는 것까지 싹 긁어서요.”
“뭐라고??”
토카는 알 수 없지만, 아르칸이 대량으로 사재기한 이후로 물량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가격도 몇 배나 뛰어서, 산 좀 탄다는 마인들이 산맥을 오가면서 죄다 캐 갔다.
“하는 수 없지. 이걸 빨리 반으로 쪼개서 나눠 줘!”
“네!”
그렇게 출정 준비를 마쳤다는 소리를 들은 토카가 물었다.
“마왕성은 어때?”
“그대로였습니다. 단, 전과 달리 마왕성 입구가 막혀 있습니다.”
“이상하네요. 고블린의 사체를 그 정도로 가져갔으면 마왕성을 원래대로 돌리고도 남았을 텐데…….”
“닥쳐!”
보코가 의견을 냈지만, 토카는 일축하고는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케륵! 이제 마왕성을 공격하러 간다! 다들 가자!”
명령에 따라 고블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던 토카가 옆에 잠자코 있는 보코에게 물었다.
“…….”
“너는 왜 가만히 있어?”
“저는 남겠습니다. 이런 늙은이까지 필요로 하진 않으시겠죠.”
“늙어서 못 싸우겠다, 이건가? 쓸모없는 녀석.”
“…….”
모욕을 줘도 반응이 없자 토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예외는 없다. 따라와.”
마음 같아서는 세틱을 먹이고 앞세워 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식으로 세틱을 낭비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토카는 고블린 대부대를 이끌고 마왕성 앞에 도착했다.
보고대로 마왕성 입구는 닫혀 있었다.
‘잘됐군. 이러면 세틱을 먹고 공격하는지 모를 테니, 전처럼 이상한 술수를 쓰든 말든 바로 끝장낼 수 있겠어.’
토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케륵! 위대한 고블린 전사들이여! 어서 용기의 약을 먹어라!”
몇몇 고블린은 약을 먹긴 했지만, 대부분 먹기를 주저했다.
그걸 본 토카가 검을 빼 들고 위협했다.
“이것들이, 어서 안 먹어? 고블린이 마왕성을 차지하는 위대한 업적에 일조하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제야 하나둘 마지못해 세틱을 먹었다.
세틱을 먹은 고블린은 몸을 웅크렸는데, 이내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드니 눈동자는 뒤집혔고, 침이 흘러나오는지도 모른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틱의 효과가 발휘된 거였다.
“돌격!”
토카의 외침에 광전사가 된 레드 고블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마왕성 입구를 공격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서는 무기도 안 쓰고 양손으로 헤집고 이빨로 갉아 댔다.
다른 고블린들이 보기에도 움찔할 정도로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그래도 전투력 하나만은 대단해진 탓에, 저번 침공 때와 달리 금방 입구를 박살 냈다.
“케르르륵! 이거지. 다 박살 내 버려라!”
그 말대로 레드 고블린들은 마왕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왕성 입구 쪽으로 가서 보니, 저 멀리 저번에 봤던 마왕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케르르르, 이제 허튼수작을 부려도 소용없다. 어서 가서 저 마왕을 해치워라! 어?”
토카가 신나서 외치다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거침없이 마왕을 향해 달려가던 레드 고블린들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거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그 의문은 뒤편에 있던 보코가 풀어 주었다.
“……함정이군요.”
“함정??”
그제야 통로 지면이 눈에 들어왔다.
보코의 말대로 마왕성 안쪽에는 10여 미터가량의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곳에 빠지면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앗! 멍청한 것들, 멈춰라!”
토카가 소리쳤지만, 레드 고블린들이 그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하나같이 미친 듯이 돌진하다가 그대로 함정에 빠졌다. 2백 마리의 레드 고블린이 전부 함정에 빠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순한 구덩이라 합심하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겠지만, 세틱을 먹고 미쳐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케르륵, 이럴 수가.”
그걸 본 토카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아르칸이 앞으로 나와 고블린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꿇어라!”
* * *
‘호오, 함정이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오웬은 감탄하며 함정에 빠진 레드 고블린들을 바라봤다.
마력이 들긴 해도 마왕성의 내부는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다.
그걸 이용하면 이런 함정도 만들 수 있지만, 보통 마왕들은 그러지 않았다.
있는 마력으로 최대한 마왕성의 크기를 키우고 계층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왕성의 규모와 계층 정도에 따라 급이 나뉘고 마왕성 랭킹이 오른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르칸은 계층은커녕 반지하 상태에서도 과감하게 마왕성에 함정을 팠다.
‘심지어 거창하거나 복잡한 함정도 아니었지.’
구덩이를 파는 것만으로 적이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선봉을 꺾어 버린 거였다.
오웬은 진심으로 경탄했다.
“아르칸 님 말씀대로 됐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쉬운 일이야. 어떤 적이 쳐들어오는 줄 알면 거기에 맞춘 함정을 준비하면 되는 거니까.”
“말은 쉬워도 그걸 성립시키는 건 아르칸 님이 뛰어난 지략가라서 가능한 겁니다.”
오웬은 여전히 극찬했다.
한편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온 센시아가 물었다.
“이제 공격하면 됩니까?”
센시아와는 이미 저번에 하려고 했던 것처럼 군주의 위엄을 쓴 뒤, 고블린 왕을 먼저 해치우자고 사전에 이야기를 해 뒀다.
다만 전처럼 군주의 위엄을 깨고 일어설 텐데, 고블린 왕이 난리 쳐 주변 고블린까지 군주의 위엄 영향에서 벗어나는 걸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홀드 마법으로 붙잡은 뒤에, 센시아가 달려가 해치우기로 했다.
“잠깐만.”
아르칸은 곧바로 마법을 날릴 수 있게 게티아를 들고 고블린 왕을 노려봤다.
“케르륵. 이따위 건 내게 안 통한다.”
예상대로 고블린 왕은 군주의 위엄을 이겨 내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다. 마법스크롤 작성, 홀드.”
빛의 밧줄이 날아가 토카를 붙잡자마자, 센시아가 쿵쿵거리며 달려갔다.
“케륵! 또 이상한 술수를.”
그런데 토카가 인상 쓰면서 전신에 힘을 주자 홀드 마법까지 풀려 버리는 게 아닌가.
“아니, 어떻게? 마법저항력이 강한 건가.”
그래도 이미 센시아가 달려가는 중.
전처럼 주변 고블린들을 깨우려고 난리 치는 동안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케륵! 젠장! 두고 보자.”
토카가 전투를 독려하기는커녕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이대로라면 또 놓치겠는데?’
아르칸이 낭패라고 생각할 때였다.
소란 덕분에 군주의 위엄에서 풀려난 고블린들이 토카의 주변을 에워싸고 도망 못 치게 가로막는 게 아닌가?
“케륵? 뭣들 하는 거냐?”
토카가 당황해서 주춤할 때, 한 늙은 고블린이 나와 소리쳤다.
“아르칸 마왕님! 전 보코라고 합니다! 저 고블린 왕을 바칠 테니 부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보코? 마침 만나고 싶은 녀석이 나왔잖아.’
아르칸은 눈빛을 반짝이며 보코를 쳐다봤다.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