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대마왕 아르칸 (4)
마계 엘프 마을의 촌장 라이넬은 젊은 엘프들과 면담 중이었다.
특히 이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벨레곤 때문에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촌장님, 저희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다니, 앞으로처럼 지내면 되지.”
“그게 아니라 인간계 원정 때도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이래 가지고는 계속해서 마계에서 무시만 당할 겁니다.”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바리스탄 님의 허락이 안 떨어졌으니까.”
“그놈의 바리스탄 님 타령은 그만 좀 하십시다. 우리가 바리스탄이 기르는 애완동물도 아니고. 허락 없이도 싸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허, 무례하기는. 우리가 지금 누구 덕분에 이렇게 먹고 마시며 살고 있는지 모르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문제. 언제까지 바리스탄에 의지해서 살 겁니까? 마계로 넘어온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이제 자립해야지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다고 가만히만 있으니, 여태 마계 엘프 출신 마왕도 없지 않습니까.”
벨레곤의 항변에 라이넬은 한숨이 나왔다.
마계에 마왕이 못 된 아인종이 한둘도 아닌데 트집을 잡다니.
무엇보다 벨레곤의 바람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다.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마왕이 되려면 마심장이 필요하니까.”
“……마심장이 필요하면 마신으로부터 마심장을 얻으면 될 텐데, 그걸 거부하고 기회를 걷어찬 건 우리 아닙니까!”
벨레곤의 말을 들은 젊은 마계 엘프들이 술렁거렸다.
라이넬도 놀라 물었다.
“너 설마……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냐?”
“어디서 들은 게 중요한 건 아니죠. 그보다 계속 숨길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엘프들이 마심장을 얻을 기회를 차 버렸다는 걸요.”
벨레곤이 말한 기회라는 건 바로 엘프들이 갓 마계로 이주해 왔을 때, 대마왕 키클로테스가 제안한 걸 말하는 거였다.
대마왕 키클로테스는 마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엘프들에게 마심장을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엘프들은 거절했다.
지금은 세계수를 잃고 마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세계수를 심고 다시 정령들과 함께 지내려는 마음에서였다.
마심장을 얻으면 정령들이 더욱 꺼릴 테니까.
실제로 아르칸의 경우 엘프와 마인족의 혼혈로 특이한 케이스인 걸 감안하더라도 마심장과 정령 친화력이 충돌해 여러 부작용을 겪었다.
마심장의 마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성장의 샘물에서 잠재력을 깨치기 전에는 정령 친화력이 있는지도 몰랐다.
라이넬은 젊은 엘프들을 달래듯 말했다.
“기회를 차 버린 게 아니라, 정령과 함께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뿐이다.”
“희망의 끈은 무슨…….”
“실제로 희망이 생긴 걸 너도 알지 않느냐.”
이죽거리던 벨레곤이 움찔했다.
라이넬이 말하는 게 아르칸 마왕성, 아니 이제는 대마왕성에 있는 세계수를 뜻하는 거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세계수를 심어 뒀으니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을 우리에게 주기로 했다고 라이넬이 말했었다.
“지금 아르칸 대마왕성 내에 있는 엘프들은 세계수 덕분에 마계임에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 잘하면 앞으로 인간계에서 세계수를 심고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레곤은 그 희망이라는 게 탐탁지 않았다.
‘세계수의 씨앗을 언제 받을 줄 알고 기다려?’
세계수에 열매가 언제 열리냐고 물어보니 라이넬도 얼마나 걸릴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엘프에게 물어봐도 길게는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또 씨앗을 얻는다고 해도 문제다.
마계에서는 제대로 싹틔워서 세계수로 만들 수 없으니, 아르칸 마왕성처럼 마정석에 세계수를 심어야 하니까.
‘그래서야 또 다른 마왕에게 협력을 구해야 할 뿐이잖아.’
인간계에 심는 건 더욱 암울했다.
엘프가 고가의 노예로 거래된다는데, 아르칸 마왕성에서 지냈던 엘프들의 사례만 봐도, 떡하니 세계수를 심어 두는 건 잡아가라고 표지판을 세워 두는 거랑 마찬가지였다.
이런데도 희망에 부푼 눈빛을 한 라이넬을 보니 벨레곤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것만 바라보고 있느니 차라리 마심장을 달고 말지. 맞아, 내가 먼저 마심장을 다는 걸 보여 주면 되잖아.’
그렇게 되어 마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만 하면 라이넬이 자신을 달리 볼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벨레곤은 면담이 끝나자마자 마을에서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대마왕 키클로테스의 영역.
대마왕 바리스탄의 영역을 지키는 경비대의 눈을 피해 키클로테스의 영역에 들어가자마자, 악마족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뭐냐? 엘프? 그 더러운 몸으로 이곳에 들어오려고 하다니, 죽고 싶나?”
악마족의 윽박지름에 벨레곤은 이를 악물었지만, 지금은 반박할 기운도 없는 상황. 조용히 용건을 말했다.
“키클로테스 님을 뵙고 싶습니다.”
“뭐라고? 키클로테스 님이 너 따위를 왜 만나야 하느냐. 어림없으니까 그만 돌아가라.”
악마족이 무기를 휘둘러 위협하면서 말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를 만나는 건 키클로테스 님이 결정할 사항이지. 말이나 어서 전해 주시오.”
“킁, 알았다. 대신 더 들어오지는 말고 여기에서 기다리도록.”
악마족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모습을 감췄다.
이내 외눈 박쥐가 하나 날아왔다.
“네 녀석이냐?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엘프가.”
벨레곤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키클로테스라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엘프 벨레곤이 대마왕 키클로테스 님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됐고 용건이나 말하라.”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신님께 충성을 바칠 테니, 마심장을 얻고 싶습니다.”
“마심장? 으하하핫. 엘프들의 충성 따위는 필요 없다.”
“하지만 예전에는 분명 제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전? 그때는 마신님이 쓰러지시고 마계가 혼란스러웠을 때니까 못마땅해도 그런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지.”
“아…….”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리는 걸 깨달은 벨레곤이 탄식했다.
“마심장을 얻고 싶으면 뭔가 쓸 만한 걸 가져와라.”
키클로테스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좌절한 벨레곤은 터덜터덜 걸어서 마을로 돌아갔다. 그런데 웬일로 마을이 떠들썩한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잰걸음으로 달려갔더니, 다들 여러 대의 마차에서 짐을 내리느라 바빴다.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걸 봐서는 좋은 일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다 한 엘프가 벨레곤을 발견하고는 불렀다.
“어이, 벨라곤. 거기서 뭐 하나? 이리 와서 도와줘야지!”
“아, 알았어. 이게 다 뭐야?”
“아네스 님이 오셨어. 귀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잔뜩 가져오셨다!”
그때 벨레곤의 머릿속에서 번뜩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키클로테스가 아네스를 싫어했었지.’
거기다가 대마왕성의 저택으로 쳐들어와서 공격했다는 소식도 들은 적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네스를 키클로테스한테 데려가면 좋아하겠지?’
충성을 증명해 마심장을 받기에는 충분한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일로 대마왕 바리스탄이 분노하면, 다들 선택의 여지 없이 키클로테스 쪽으로 붙을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한 수야.”
자화자찬한 벨레곤은 미소 지으며 라이넬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네스를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혼자가 된 틈을 노려,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
“어, 아네스 님이 어디 가셨지? 다들 못 봤나?”
라이넬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아네스를 찾았지만, 마을 어디에도 아네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엘프가 말했다.
“벨레곤이랑 저쪽으로 가시는 걸 봤습니다만.”
“벨레곤이랑?”
라이넬은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벨레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슨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세계수가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던 걸 거야.’
라이넬은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안심시키고는, 아네스와 벨레곤이 사라졌던 곳으로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둘 다 여전히 안 보였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슬슬 불안해진 라이엘은 엘프들을 불러 샅샅이 뒤져 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때 구석에 숨어 있던 한 젊은 엘프를 발견했다.
“뭐야? 너 왜 여기서 농땡이 부려?”
“앗, 그게 아니고…….”
“그보다 혹시 벨레곤과 아네스 님 못 봤어? 이쪽으로 지나갔다던데.”
“…….”
“뭐야? 왜 말이 없어?”
“……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뭐가 안 돼?”
“벨레곤이 아네스 님을 납치해 버리는 거 말입니다. 전 반대했어요.”
“납치?? 그게 정말이냐?”
라이넬이 기겁해서는 되물었다.
그러자 젊은 엘프가 다소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벨레곤이 아네스를 이쪽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다가 강제로 기절시킨 뒤, 끌고 가 버렸다는 거였다.
그것도 여러 젊은 엘프와 함께 키클로테스의 영역으로 향했단다.
벨레곤의 사상에 동조하는 애들까지 가세한 거였다.
“이, 이럴 수가.”
라이넬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대마왕 바리스탄의 아내이자, 이번에 또 대마왕이 된 아르칸의 어머니를 납치하다니.
그동안 지원받은 게 얼마인데 배은망덕도 정도가 있지, 분노한 바리스탄이 엘프 마을을 초토화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 얼마나 됐나?”
“조금 됐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찾으러 가자.”
라이넬은 마을의 엘프들을 총동원해 날듯이 쫓아갔지만, 이미 키클로테스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 듯했다.
‘이를 어쩐다.’
라이넬이 낭패한 얼굴로 마을로 돌아오는데, 처음 보는 청년이 마을에 있는 게 아닌가?
뿔을 봐서는 최소 상급 마족이나 마왕급은 되어 보였다. 무엇보다 어깨에 검은 해츨링이 있었다.
‘저 검은 해츨링은 설마…….’
그 청년은 라이넬은 보더니 다가와서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나? 여기 계신다고 해서 왔는데 안 보이시는군.”
“어머니라면 역시 아르칸 님……?”
라이넬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할지 대책도 못 세운 와중에 아네스의 막내아들이 나타난 거였다.
그것도 망나니 마왕으로 조롱거리였다가 최근에 잘나가다 못해 수인족 영역을 차지하고 대마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딸꾹.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왜 그래? 그보다 어머니는 어디 계셔?”
아르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마왕이라고 해도 이 모습은 얼핏 순진한 청년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화내지 않을지도…….’
순간 그렇게 생각한 라이넬은 자기 생각이 안이했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납치됐다는 말에 아르칸의 표정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방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숨만 쉬기 힘들다고 했는데, 이내 전신을 누르는 기세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뭐라고? 대체 어떤 놈들이 어머니를 납치한 거야? 키클로테스가 보낸 악마족 놈들이야?”
“죄송합니다. 저희 마을의 아이가 아네스 님을 납치해 키클로테스 영역 쪽으로 갔습니다.”
“음, 그래?”
화를 내던 아르칸이 갑자기 차분해지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왜 저러시지? 어?’
돌변한 아르칸의 반응에 의아해하던 라이넬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앞에 있었던 아르칸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서였다.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