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악신들 (4)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였던 평야는 싱그러운 초록빛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피와 살육으로 점철된 치열한 전장이었으나, 아르칸이 점령한 뒤 조용히 생명력을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잔디와 들꽃, 그 사이를 풀벌레와 나비들이 오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평화를 깨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 존재는 평야 외곽에서 나타난 불길한 누런 그림자로, 그림자는 점점 커지면서 천천히 평야를 가로질러 마계로 향하고 있었다.
그 누런 그림자의 실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메뚜기 떼였다.
그것들은 다른 메뚜기와 달리 하나하나가 사람 팔뚝보다 컸는데, 바로 악신 로카스가 소환한 대형 메뚜기들이었다.
대형 메뚜기들이 날개를 떨며 진동을 일으키자 거센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평야의 모든 생명은 공포에 떨었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수풀들은 어쩔 수 없지만, 풀벌레와 나비 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고속으로 밀려드는 대형 메뚜기들에게 잡아먹히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생명이 사그라드는 와중, 대형 메뚜기들이 만든 폭풍이 갑자기 흩어졌다.
그 바람은 그대로 소멸하지 않고 한군데로 모이더니, 내부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람 형상으로 변했다.
바람의 정령왕 제피로스가 나타난 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토화된 평야 한가운데에 작은 불길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 속에서 거대한 붉은 도마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꼬리에 맹렬한 화염이 달린 거대한 붉은 도마뱀은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였다.
“제피로스, 바람을 불어 줘. 이 메뚜기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테니까.”
“알겠다. 맡겨 다오.”
제피로스가 대답하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불과 바람이 힘을 합치자 삽시간에 커진 불길은 해일처럼 메뚜기들을 집어삼켰다.
이 공격으로 평야의 반의반가량이 불타 버리긴 했지만, 이 끔찍한 메뚜기들을 구축하는 데는 이보다 더 나은 방안은 없었다.
실제로 아주 성공적으로 대형 메뚜기들의 숫자를 빠르게 줄여 나갔다.
한편 그 활약에 악신 로카스가 혀를 찼다.
“쯧, 여기서 정령왕이 나타나다니. 좀 더 마계 쪽에서 나타날 걸 그랬나? 그나저나 정령사는 어디 있지? 엘프나 인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로 봐서는 화가 나서 나타난 건가?”
외부에서 이 세계로 침공해 온 악신은 마신과 여신 셀레니아 외에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로카스도 지금 나타난 정령왕들이, 엘프나 인간 쪽 정령사가 소환한 거나 그게 아니면 정령왕들이 화나서 나타난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령왕들은 매우 화가 난 상태긴 했다.
이 잠깐 동안에도 대형 메뚜기들이 뜯어 먹은 생명이 아주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잘한 생명이라도 최대한 많이 거둬들여야 강해질 수 있었다.
“뭐, 저 정도야 내가 조금만 손을 써도 무시해도 될 정도지만.”
로카스가 마음먹자 대형 메뚜기들을 감싸는 그림자가 누런색에서 검붉게 바뀌었다.
그 변화로 나타난 결과에,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가 경악했다.
대형 메뚜기들이 자신의 화염에 불타지 않기 시작한 거였다.
오히려 자신의 화염이 닿지 않았던 대형 메뚜기들도 불에 휘감겨 있었다.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악신이 화염 속성이라도 건 모양이군.”
제피로스도 쓴웃음을 지으며 사방에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한번 공격을 펼칠 때마다 대형 메뚜기들이 십여 마리가 쓰러졌지만, 남은 숫자가 너무 많았다.
뜻밖이었던 건 대형 메뚜기들이 제피로스와 이그니스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고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그니스가 주변을 보며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평야가 모조리 불탈 거야.”
불에 휘감긴 대형 메뚜기들이 평야를 뛰어다니니 화염이 번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정령왕들이 공격을 위해서 범위를 제한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
이그니스가 아무리 불의 정령왕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무차별적인 방화는 원하지 않았다.
원래 불의 정령은 생명이 다해 가는 걸 불태운 뒤, 다시 생명을 꽃피우는 재생을 위한 불.
그러나 대형 메뚜기들이 내뿜는 화염은 달랐다.
상대를 불태워서 그 생명력을 그대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악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그 광경을 보며 좌절하는 이그니스를 제피로스가 달랬다.
“걱정하지 마, 내가 최대한 막을 테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전부가 아니잖아.”
그 말과 즉시 대형 메뚜기들의 전방에 변화가 생겼다.
지면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땅의 정령왕 로카스톤이 나선 거였다.
이동 시 지면에 잠깐만 닿아도 되는 대형 메뚜기들한테는 크게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 멈춰라!”
로카스톤의 말과 함께 흔들리던 땅이 치솟았다.
그대로 높고 두꺼운 벽이 되어 대형 메뚜기들을 가로막았다. 대형 메뚜기들은 거기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화염이 평야 전체로 크게 번지려는 것도 차단할 수 있었다.
“이다음은 내게 맡겨 둬.”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왕 나이어드가 사방에 던진 물 폭탄이 작렬한 거였다.
이 둘이 후방에서 대기하면서 맡은 임무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악신의 대형 메뚜기들이 사방으로 퍼졌을 때 잡는 것.
두 번째는 힘을 아끼고 있다가 악신을 공격해서 쓰러트리는 거였다.
그러나 주변의 물과 땅의 정령들을 모두 동원해도, 악신의 존재감은 느낀다 한들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대형 메뚜기들이 변화해서 더 날뛰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나타난 거였다.
어쨌거나 네 명의 정령왕들이 힘을 발휘하자, 전세는 다시 역전할 수 있었다.
화염을 두른 대형 메뚜기들은 오히려 나이어드의 물 폭탄에 더욱 취약했는지 물이 조금만 튀어도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다.
로카스톤도 벽을 쌓아 대형 메뚜기들의 전진을 막은 뒤, 사방의 돌멩이를 송곳처럼 만들어 수없이 날렸다.
제피로스는 바람의 칼날을 날리면서, 동시에 바람으로 로카스톤의 공격을 강화했다.
화염이 통하지 않더라도 이그니스는 다른 세 정령왕에게 생명력을 나눠 주는 것으로 힘을 보탰다.
그 결과, 대형 메뚜기는 아주 빠르게 소멸해 나갔다.
악신 로카스가 분노했다.
“내 부하들을 이렇게 빨리 해치우다니…….”
자신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소중한 메뚜기들이 어느새 절반이나 줄어 있었다.
‘가능하면 여기서 힘을 쓰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지.’
로카스가 마음먹자 대형 메뚜기들을 드리우던 그림자가 무지개색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형 메뚜기들의 움직임도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을 공격했음에도 무시하고 평야의 생명만 갉아먹는 데 열중했던 대형 메뚜기들이 정령들을 물어뜯기 시작한 거였다.
정령왕은 생명력이 고도로 응축된 존재.
그 생명력을 발휘해 힘을 쓰기도 하지만, 자연에 떠도는 정령들이 중력에 이끌리듯이 정령왕의 생명력에 반응해 그 뜻대로 움직였다.
그 때문에 정령왕들은 자신의 속성에 맞는 자연력이 충만한 곳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연력이 충만한 평야이기에 마계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대형 메뚜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런색에서 붉은색, 이어서 무지개색으로 변한 대형 메뚜기들은 이전처럼 수풀과 풀벌레를 뜯어먹으며 주변의 생명력을 저하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사방에서 맴도는 정령 자체를 먹어 치우기 시작한 거였다.
“이게 가능한 거였다니…….”
“으아, 비명을 지르고 있어.”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와 물의 정령왕 나이어드가 기겁했다.
제대로 된 형체나 자아도 없던 정령들이었지만, 대형 메뚜기들에게 먹히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한편 땅의 정령왕 로카스톤과 바람의 정령왕 제피로스는 놀랄 겨를도 없었다.
대형 메뚜기들이 비교적 가까이 있던 두 정령왕도 먹어 치우려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두 정령왕은 대형 메뚜기에게 뒤덮여 있었다.
“크윽, 이대로면 끝장이다.”
“어떻게 해? 둘 다 잡아먹히겠어.”
이그니스와 나이어드가 당황하는 사이, 메뚜기들을 드리우던 그림자가 뭉쳤다.
그 안에는 또 수많은 대형 메뚜기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묘하게 사람의 형태처럼 느껴졌다.
그 그림자가 당황하는 정령왕들을 보며 비웃었다.
“후후, 메뚜기들에게 특수 능력을 부여하느라 힘을 쓴 보람이 있군. 그러니 나한테 덤비지 말았어야지.”
“아니, 우리만으로 덤비길 잘했지 뭐야.”
“그렇다. 아르칸님 말씀대로 안 했다면 골치가 아팠을 거야.”
나이어드와 이그니스가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림자가 비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유 부리는 것도 이제 끝이다. 곧 너희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릴 테니까.”
그림자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림자를 이루고 있는 대형 메뚜기와 현재 땅과 바람의 정령왕에 달라붙은 대형 메뚜기들을 제외하고 평야에 남은 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흡수한 생명력으로 새로운 대형 메뚜기를 낳으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래 봐야 몇 시간도 안 걸리지만.’
악신 로카스가 그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그 위를 드리웠다.
단순히 구름이 해를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지기에 로카스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겹눈에 비친 하늘을 본 로카스는 경악했다.
“드, 드래곤?”
웬 블랙 드래곤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로카스는 몰랐지만, 블랙 드래곤 피용이었다.
피용은 그대로 드래곤 브레스를 내쏘았다.
그런데 피용이 드래곤 브레스를 날린 건, 그림자 뭉치나 대형 메뚜기들에게 둘러싸인 제피로스와 로카스톤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그 뒤편에 떨어져 있던 몇 마리 안 되는, 대형 메뚜기를 향해서였다.
하지만 그 대형 메뚜기야말로 로카스의 본체였다.
피용을 타고 있던 아르칸은 방어하기 위해 힘을 끌어올리는 로카스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대로군.”
대형 메뚜기는 아주 단순하다.
그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울 뿐인 단순한 곤충.
그런 곤충이 수없이 많이 모인 군집에 내릴 수 있는 명령도 단순할 수밖에 없다.
정령왕들을 달라붙어 생명력을 먹어 치우라고 하거나, 혹은 로카스가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기 위해 만든 그림자 속을 채운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덩그러니 있는 대형 메뚜기가 있다?
그 대형 메뚜기야말로 명령을 내리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도, 어디까지나 정령왕들이 필사적으로 숫자를 줄이고 또 많은 숫자를 붙잡고 있어서였다.
로카스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은 드래곤 브레스를 보면서 혀를 찼다.
“완전히 한 방 먹었군. 그래도 마신의 눈도 아니고, 드래곤 브레스 정도라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
로카스는 자신의 강함을 믿었다.
그러나.
“어? 으아아아아아아앗!”
드래곤 브레스에 맞은 로카스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후후, 다행히 통했군.”
아르칸은 그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마력 공유로 최대한 많은 마력을 얻어 블랙 드래곤에게 보내 줬기 때문이다.
어차피 평야도 초토화된 마당에 피용의 드래곤 브레스가 피해를 주는 것 정도로는 크게 상관없는 상황.
그 때문에 피용에게 최대 위력의 드래곤 브레스를 날리게 한 거였다.
“이걸로 끝이다.”
아르칸도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마탄을 날렸다.
드래곤 브레스 때문에 약화된 로카스는 마탄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악신 하나를 퇴치하는 데 성공한 거였다.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