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용사의 의뢰 (2)
아르칸은 리트더러 따라오라고 한 뒤 앞장섰지만, 가는 내내 뒤를 경계했다.
‘정령술이라 생각보다 강한데.’
바람의 칼날이 자신의 환영을 찢어발기는 걸 보니 등골이 서늘했다.
미리 할루시네이션으로 자신의 환영을 만들어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도 남았다.
당장은 순순히 따라오고는 있었지만, 언제 또 공격해 올지 불안했다.
‘음, 아직 마력에 여유가 있지?’
아르칸은 몰래 환영 마법을 하나 더 쓰고서야 안심했다.
긴장이 좀 풀리자 리트가 새삼 달리 보였다.
소설 속 엘프들은 워낙 평화주의자라 자신이 위해를 당하는 상황에서조차 최소한의 방어만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엘프, 리트는 언니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독하게 공격해 왔는데 그것도 아주 강했다.
어지간한 마족에 비견할 정도.
‘어쩌면 제법 쓸 만한 전투원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참다못한 리트의 말에 아르칸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성벽 아래까지 달려왔다.
여긴 건너편이 카퓨 산맥이라 경비병들도 경계하지 않는 곳.
마침 달빛도 구름이 삼켜 주위가 어두웠다.
“여기서라면 눈에 안 띄겠지.”
주위를 둘러본 리트도 수긍하더니 이내 날 선 눈빛으로 노려봤다.
“네가 용사님이 보내서 온 거라는 걸 어떻게 믿지?”
아르칸은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세계수의 쌍잎을 꺼냈다.
“이거 알지?”
“엇, 그건! 그걸 네가 왜 들고 있어?”
“용사 부탁으로 왔다고 했잖아. 용사한테 받았지.”
“뭐라고? 설마 네가 용사의 소중한 사람?”
리트는 어찌나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쉿, 조용히 좀 해.”
“아, 미안…….”
‘근데 소중한 사람이라니,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심지어 리트의 얼굴까지 발그레했다.
아르칸은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인간족과 달리 엘프들은 선입견 같은 거 없으니까 숨길 필요 없어. 아니, 숨기고 싶은 거면 비밀 지켜 줄게. 나 입 무거워.”
“아니라니까!”
“정말 아니야?”
“서로 연락할 필요가 있어서 가지고 있는 것뿐이야. 만나자마자 살해당할 뻔했는데, 소중한 사람은 무슨.”
“그, 그래? 근데 만나자마자 살해당할 뻔하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길래…….”
리트가 경계하며 악당을 보듯 쏘아봤다.
용사가 살해할 정도라면 악당이 분명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긴, 마왕이니 엘프 입장에서 보자면 악당이긴 하지.’
아르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무슨 짓을 했다기보다는……. 나 마왕이거든.”
어차피 앞으로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정체를 감출 수도 없었다.
“마왕이라고? 하긴 용사님은 입버릇처럼 마왕을 해치워야 한다고 하셨지.”
“어, 별로 안 놀라네? 싫어하는 거 같지도 않고.”
“인간족이나 마인족이나 나한테는 별 차이 없거든. 마왕이 직접 나타난 건 의외긴 했지만.”
하긴 이해는 갔다.
수백 년 전 마신이 이 세계에 강림해 온 대륙이 마기에 덮였을 때는 엘프들도 마신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마신을 쫓아내진 못했지만, 덕분에 대륙의 절반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남은 절반의 대륙에서 인간족은 아주 번성했지만, 엘프들은 쇠퇴했다.
엘프들의 근원인 세계수는 불운하게도 마인족이 점거한 대륙 북쪽에 있었는데, 마기에 침식되어 썩어 버렸다.
그 후 새로운 세계수를 심었지만, 너무 어려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성체가 되려면 수백 년은 더 필요했다.
그렇게 함께 싸웠던 엘프들이 고초를 겪을 때, 인간족은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힘이 약해져서 겪는 설움이지.’
어쨌든, 엘프로서는 마인족 인간족 모두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좋지.’
엘프들을 부하로 삼진 못해도 포섭해 우군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정령술만 해도 강력해서 싸울 마음만 먹게 할 수 있으면 뛰어난 전투원으로 써먹을 수 있어 보였다.
“근데 왜 언니를 구하는 걸 말렸어?”
“무턱대고 덤볐다간 실패했을 테니까. 특히 구한다고 해도 도망치지도 못했을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컹컹!
리트가 되묻는데, 저 멀리서 개 소리가 들렸다.
“벌써 쫓아왔나.”
아르칸은 혀를 차면서 게티아를 펼쳤다.
“마법 스크롤 작성, 할루시네이션.”
“마법?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잠깐만 기다려 봐.”
리트가 경계하든 말든 아르칸은 마법을 완성했다.
환영 마법이 발휘되며 아르칸과 리트가 모습을 감췄다.
그 직후, 저 멀리서 사나운 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말이 개지 그 덩치는 어지간한 성인 남자보다 크고 늑대보다 사나웠다.
“뭐, 뭐야!”
“조용히 해. 네 냄새를 맡고 온 거니까.”
멜스크 후작의 기사단이 데리고 온 엘프 사냥개였다.
“냄새? 근데 이러고 있어도 돼?”
“봐 봐, 지금 못 찾고 있잖아.”
그 말대로 달려온 사냥개는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더니,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다시 냄새를 쫓으려 애썼다.
할루시네이션은 여신이 내린 권능인 용사의 전시안도 속일 정도.
아무리 개의 후각이 뛰어나다고 해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이어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사냥개의 뒤를 쫓아왔다.
“헌트, 엘프는 어딨어?”
“낑. 낑.”
기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사냥개가 고개를 늘어트렸다. 못 찾은 게 분명했다.
“냄새를 잘못 맡은 거 아니야? 이 밤에 헛고생했군.”
“그럴 리가. 한 번도 엘프의 냄새를 틀린 적이 없는 녀석이야.”
“그래도 아무것도 없잖아.”
투덜거린 기사가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로 이곳에는 쥐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 위에 엘프의 냄새가 여기까지 흘러온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거 코가 너무 예민해도 골치 아프군.”
“됐지?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자고.”
결국, 기사들은 사냥개를 끌고 돌아갔다.
기사들이 완전히 시야에 사라지고 나서야 리트는 긴장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언니를 구하기는커녕 자신마저 잡힐 뻔한 거였다.
“괜찮아?”
“어, 응…….”
리트는 내미는 손을 잡아 일어서며 아르칸을 빤히 바라봤다.
왜 마왕이 용사의 부탁을 받아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마왕에게도 이미 구명의 은혜를 입은 거나 다름없었다.
리트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왕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한꺼번에 받지. 나한테 네 언니를 구할 작전이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 도와줄 거지?”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 결연한 대답에 만족한 아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저녁, 토돌 백작의 성이 뒤집혔다.
성 앞에 마왕군이 나타나서였다.
그것도 산 중턱에서 끝도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대부분 고블린에 불과하긴 했으나 그 숫자는 수천에 달했다.
게다가 그 마왕군을 지휘하는 마족은 어찌나 큰지 주변의 고블린과 대비되어 거인처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을 둘러싸며 포위하지 않고, 성문을 향해 진을 치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된 거냐.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마왕군이 나타난 거냐고!”
당황한 토돌 백작이 경비대장을 불러 소리쳤다.
놀랄 수밖에 없긴 했다.
그동안 바로 앞의 험준한 카퓨 산맥은 그저 벽이라고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넘어올 만한 길은 레오벤 성을 지나야 하기에 그쪽 방면만 신경 쓰던 참이니, 갑자기 나타난 마왕군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대부분 고블린 아닙니까? 아무래도 몸이 가벼운 고블린만 저 산맥을 넘어온 모양입니다.”
“고블린이라고 해도 저렇게 많은데, 어찌 상대한단 말이냐.”
경비대장이 별거 아니라고 해도 토돌 백작은 여전히 겁먹은 채였다.
“패트리어 경은 연락이 없나?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붉은 나뭇가지 기사단이 조금만 나서 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소식은 했습니다만, 자기들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엘프들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랍니다.”
“끙.”
“너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래도 성벽을 넘어오진 못할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제야 토돌 백작은 안도했다.
성벽을 둘러싼 해자는 방치 끝에 자취를 감췄지만, 저 높은 성벽을 고블린들이 넘어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럼 전 이만 가서 지휘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주게. 나도 조만간 가서 병사들을 독려하겠네.”
여유가 생긴 토돌 백작이 그렇게 말할 때, 경비병이 급하게 달려왔다.
“서, 성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고블린들이 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시작됐나? 근데 왜 그리 호들갑이냐? 어차피 성벽도 못 넘는 녀석들인데.”
“그, 그게…… 날아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경비대장이 놀라서 반문했다.
토돌 백작도 화들짝 놀라 밖을 보니 정말 허공에 떠 있는 고블린이 슬쩍 보였다.
“대, 대체 저게 어떻게 된 거냐?”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경비대장이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엘프가 마왕군에 붙었나 봅니다.”
“엘프가?”
“네. 엘프가 부리는 바람의 정령이 고블린들을 성벽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흠…….”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혼자다 보니 몇 마리 못 날리더군요. 그 정도야 성벽 위에서 쉽게 상대합니다.”
토돌 백작의 표정이 심각해진 걸 본 경비대장이 재차 달랬다.
그러나 토돌 백작은 적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엘프가 나타났다는 말에 주목한 거였다.
“엘프가 나타났어? 어떻게 잡을 수 없을까? 아니, 반드시 잡아야 한다!”
엘프가 한 마리밖에 없는 걸 본 후작의 기사단장 패트리어 경이 말했다.
이대로 한 마리만 데리고 가면 후작님이 도리어 화낼지도 모른다고.
큰일 났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엘프 한 마리를 더 구하겠다고, 후작의 기사단을 붙잡아 두고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마리가 떡하니 나타나다니.
실수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비대장이 난처해했다.
“백작님, 밖에 고블린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나가서 엘프를 잡아 옵니까.”
경비대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금방까지 고블린 대부대에 겁먹었으면서 엘프가 있다는 소리에 잡아 오라니.
“그건……. 옳지! 패트리어 경에게 알려서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그로서도 가능한 엘프를 두 마리 데려가는 게 좋을 테니까.”
자기도 곤란한 상황이라고 한 만큼,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게 분명했다.
“아, 그러면 되겠군요.”
납득한 경비대장은 부하를 시켜 패트리어 경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남의 일이라고 했던 패트리어 경은 마왕군 측에 엘프가 있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후후, 정말 저기 엘프가 있군요. 당장 가서 붙잡아 오겠습니다.”
수천의 고블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에 토돌 백작은 든든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덕분에 후작님께 차질 없이 진상품을 보내 드릴 수 있게 됐어.”
“진상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응?”
“저 엘프를 제가 잡으면 제 전리품이지, 진상품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패트리어 경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근슬쩍 날로 먹으려는 백작의 꿍꿍이를 눈치챈 거였다.
“그래도 후작님께 약속한 진상품이…….”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과적으로 두 마리만 데려가면 후작님께서는 신경 안 쓰실 겁니다. 후작님께 베푸는 은혜는 적어질 수도 있겠지만요. 언짢아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최악의 상황을 피한 것만으로 만족하라는 뜻이었다.
“아, 알겠네.”
토돌 백작은 입맛을 다시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잡지도 않은 엘프의 처우를 결정한 패트리어는 곧바로 기사단 전원에게 출전준비를 지시했다.
“엘프를 지키는 녀석들은 어쩝니까?”
“열외 없다. 다 나오라고 해!”
아무리 후작의 기사들이 강하다고 해도 수천의 고블린을 뚫고 엘프를 포획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능력도 봉인해 뒀으니 지켜보는 것 정도야 여기 병사들이라도 할 수 있겠지.”
명령에 따라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백작의 경비병과 교대했다.
첨탑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계획대로 되어 가는군.’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