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27
27화 용사의 의뢰 (3)
붉은 나뭇가지 기사단이 사라진 걸 확인한 아르칸은 곧바로 리트의 언니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리트가 붙여 준 바람의 정령을 타고 첨탑까지 떠오른 다음, 홀드 마법으로 경비병을 묶어 두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리트와 쏙 빼닮은 금발의 긴 생머리의 엘프, 리브가 앉아 있었다.
감금 생활에 지쳤는지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무사한 거 같군.”
“뭐, 뭔가요?”
리브가 경계하며 물러섰다.
기사도 경비병도 아닌 못 보던 이가 대뜸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르칸이다. 네 여동생의 부탁을 받고 구하러 왔다.”
“리트가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리트에게 아르칸이 다가갔다.
“시간이 없다. 일단 봉인구부터 풀어 주지.”
리브는 수갑과 목줄을 하고 있었는데, 이 구속구들은 육신을 업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법과 정령술 같은 능력들도 봉인한다.
그 때문에 지금은 정령과 대화도 못 하지만, 이걸 해제하면 리트가 보낸 정령들이 곧바로 오해를 풀어 주기로 했다.
“……!”
리브는 멍한 눈빛으로 수갑과 목줄을 푸는 아르칸을 바라보다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서 시선을 한쪽에 두고 귀를 기울이는데, 리트가 보낸 정령으로부터 그간의 내막을 전해 듣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리브는 놀란 눈으로 아르칸을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왕님.”
“인사는 동생을 만나고 받지. 어서 나가자.”
“외람되지만, 이제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힘이 돌아오고 정령도 부릴 수 있게 되니 자신감도 되찾은 듯했다.
“좋아. 아, 잠깐만.”
아르칸은 봉인구를 챙겼다.
강하면 이것도 소용없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유용한 데다 값비싼 마도구였다.
“자, 이제 가지.”
아르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리브가 앞장섰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리브는 곧바로 첨탑 밖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놀랍게도 바닥의 흙이 치솟아 그 받을 받쳤다.
흙의 정령이 움직인 거였다.
엘프들은 모든 정령과 소통할 수 있지만, 그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건 상성이 맞는 정령에 제한되어 있다.
리브는 그게 흙의 정령이고, 리트는 바람의 정령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도주하는 것치고는 너무 눈에 띄는 거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깨달은 리브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쩌죠?”
“괜찮아. 다행히 아직 우리를 본 사람은 없는 거 같으니까.”
갑작스러운 마왕군의 공격에 다들 정신이 없는 덕분이었다.
아르칸은 할루시네이션을 시전했다.
“이제 환영 마법으로 가렸으니까 괜찮아.”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래도 성벽 아래로 넘어갈 때는, 리브가 힘 좀 써 줘.”
“네, 맡겨 주십시오!”
이건 작전을 들은 리트가 낸 아이디어로, 땅의 정령을 이용하면 지하를 물속을 거닐듯이 지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상태로는 숨을 못 쉰다니까 무한정 다닐 수는 없지만, 성벽을 지나가는 정도는 가능하댔다.
덕분에 탈출이 훨씬 쉬워졌다.
‘우리는 이러면 됐고…….’
아르칸은 성문 쪽을 슬쩍 쳐다봤다.
‘센시아 쪽은 괜찮겠지?’
* * *
“성문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트릴이 보고했다. 성문을 주시하고 있던 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
“다들 공격에 대비하라! 엘프님도 이제 고블린 그만 날려도 됩니다.”
“아, 네.”
트릴의 말에 한창 진땀을 흘리며 정령술을 쓰던 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센시아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새삼 아르칸에게 감탄했다.
현재 마왕군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고블린 수천 마리는 아르칸 님의 환영 마법으로 만들어 낸 것.
실제는 고작 2백여 마리의 정도에 불과했다.
고블린 왕이 죽은 뒤 대신 통솔하고 있는 보코가 따로 보내온 병력이었다.
게다가 공성 무기도 없으니, 성안을 위협할 만한 공격을 펼치긴 힘들었다.
‘난감해하는 와중에 아르칸 님이 보냈다며 저 엘프가 왔지.’
엘프는 아르칸의 지시라며 정령술로 고블린을 성벽 위로 날렸다.
그걸 본 성벽 위의 병사들이 놀라면서 한껏 분주해졌다.
게다가 엘프는 백작이 자신을 노리니 성문을 열고 기사들이 공격해 올 거라고 했는데, 지금 그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게 모두 아르칸 님의 작전. 참으로 대단한 지략이다!’
그사이 완전히 올라간 성문 아래로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와르르 뛰쳐나왔다.
두두두두두두두!
앞에 잔뜩 깔려 있던 고블린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폭풍과 같은 기마 돌격.
“센시아 님, 피하죠.”
“아니, 막는다.”
트릴의 권유에 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르칸 님이 성내에서 마음 놓고 움직이려면 자신이 기사단을 최대한 붙잡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이대로 후퇴했다가는 대부분 환영인 걸 눈치챌지도 몰랐다.
그러면 도리어 모두가 위험했다.
센시아는 커다란 방패를 앞세우고는 엘프를 불렀다.
“내 뒤에 서 있어.”
“아, 알겠습니다.”
리트는 기사단의 기세에 겁먹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센시아의 커다란 덩치 뒤로 숨었다.
어마어마한 물리력으로 달려오는 기사단의 기세를 꺾는 건 돌격을 멈추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막는 건 내 장기지!’
말을 달리던 패트리어는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아니, 저 마족이 저렇게 컸었나?’
하지만 이미 물러나긴 힘든 상황, 패트리어는 그대로 격돌했다.
콰쾅!
벼락이 내려친 듯한 굉음이 터지며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난리 속에 자신의 특성을 발휘해 거대해진 센시아가 굳건히 서 있는 것만 보였다.
적의 돌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한 거였다.
‘커지면 제대로 싸우긴 힘들지만 막아 내는 건 충분하지.’
아무래도 일체의 마력을 거대화하는 데 소모하기에 느려질뿐더러, 장비나 무기도 따라 커지는 게 아니라 불편했다.
한편 거대화한 센시아에게 막힌 패트리어는 혀를 찼다.
‘젠장,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단단하기가 마치 강철 같군.’
게다가 뒤에 있는 엘프는 보이지도 않았다.
“패, 패트리어 경, 어떡합니까?”
“당황할 거 없다. 물러나서 다시 한번 돌격한다!”
패트리어는 부관에게 소리치며 제일 먼저 말 머리를 돌려 빠져나왔다.
굳이 저 많은 적 안에 고립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성문 앞까지 물러난 패트리어와 기사단은 다시 돌격할 채비를 갖췄다.
“이번에는 맞부딪치지 않고 엘프를 낚아챌 테니 준비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패트리어가 재차 돌격하기 위해 말고삐를 쥐었을 때였다.
“어? 패트리어 경, 마왕군이 후퇴합니다!”
부관의 외침대로 마왕군이 퇴각하고 있었다. 기사단이 물러나자마자 퇴각하기 시작했는지 이미 상당히 뒤로 빠진 상태였다.
당연히 노리고 있던 엘프도 마찬가지로 저 멀리 있었다.
“이런 젠장! 쫓아라!”
“위험합니다! 함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패트리어가 소리치며 달려나가려는 걸 부관이 만류했다.
“산속으로 도망치면 어떡하나!”
“사냥개도 있지 않습니까. 적들도 이대로 철수하진 않을 겁니다. 또 공격할 테니 이번에는 참으시죠.”
“큭, 하는 수 없군. 일단 성으로 돌아간다.”
잠시 후.
성안으로 돌아온 패트리어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엘프가 도망쳐?”
“네. 경비병들 말로는 갑자기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됐는데, 웬 사내가 나타나 데리고 나갔다고 합니다.”
경비대장이 잔뜩 주눅 든 채로 대꾸했다.
“정령술을 썼나? 다른 엘프가 구하러 왔나 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어서 쫓아! 반드시 잡아야 한다!”
패트리어가 소리쳤다.
엘프 두 마리를 데려온다고 기뻐하던 후작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여기 오니 한 마리밖에 없는 데다, 그 한 마리마저 잃어버린 상황.
이대로 놓쳐 버리면 토돌 백작의 경비병 탓을 한다고 해도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게 분명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토돌 백작도 마찬가지.
다들 언제 마왕군이 공격해 왔냐는 듯이 모든 인력을 동원해 엘프 수색에 나섰다.
성 안팎으로 혼란스러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마왕군은 그 뒤로 공격해 오기는커녕 모습이 안 보였다는 점.
그대로 철수한 것만 같았다.
문제는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엘프의 머리털 하나도 찾을 수도 없다는 거였다.
엘프 사냥개도 힘을 못 썼다.
“헌트, 여기 냄새 좀 맡아 봐. 어디 엘프 냄새 안 나? 제발…….”
패트리어는 꼴사납게도 사냥개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사냥개는 앞발로 코를 가리며 낑낑댈 뿐이었다.
“안 되겠어. 차라리 마왕군을 쫓아가자.”
“하지만 함정이…….”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패트리어는 부관의 만류를 무시하고 마왕군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지만, 사냥개는 여전히 아무런 냄새도 안 난다는 시늉만 했다.
엘프 두 마리가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진 거였다.
“다 끝장이다.”
패트리어는 돌아가서 후작에게 이 사태를 보고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 * *
한편 아르칸은 리브의 정령술로 성벽을 무사히 통과했다.
“제가 사라진 걸 눈치챈 모양입니다.”
리브가 정령으로부터 전해 들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성안이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게 느껴졌다.
심지어 성 밖으로도 병사들이 쫙 깔렸다.
다들 어떻게든 찾아내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켠 채 여기저기 뒤졌다.
‘그래도 못 찾겠지만.’
아르칸이 환영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한,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력 소모가 좀 심하긴 하지만, 게티아가 마력초 좀 더 먹으면 되니까.’
잠시 후, 그들은 엘프들의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숲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마왕군과 헤어지고 나온 리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 리트야.”
“언니…….”
극적인 재회에 두 자매는 얼싸안고 한참을 통곡했다.
엘프는 오래 사는 만큼 감정의 동요가 적고 대부분 고요한 성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인간족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려 다니는 등, 여러 고초를 겪다 보니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는 애틋한 가족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아렸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한바탕 울고 겨우 진정한 엘프 자매들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마왕님.”
“마왕님을 앞에 두고…… 무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아.”
아르칸이 멋쩍어하며 대꾸하자 엘프 자매가 서로 마주 보더니 차례대로 말했다.
“마왕님께서 정령의 가호를 새겨 드리려 합니다만 어떠신지요.”
“지금 저희가 가진 게 없어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게 당장은 이것밖에 없네요.”
‘이것밖에라니!’
정령은 자연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런 정령의 보호를 받는다?
엄청난 특혜였다.
물에 빠진다든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든가 하는 등.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목숨을 잃게 될 걱정을 안 해도 될 테니까.
무엇보다 정령 친화력도 높아진다.
마왕이니 정령을 직접 부릴 수는 없지만, 정령들의 힘으로 감춰 놓은 엘프들의 숲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기연으로 성큼 다가간 거나 마찬가지.
아르칸은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뭐든지 마음이 중요한 거지. 고맙게 받을게.”
“가호를 내리려면 옥체에 손을 대는 무례를 범해야 합니다만…….”
“괜찮다.”
“그럼 실례지만, 손을 좀 내어 주시겠습니까?”
리브의 말에 손을 내밀었다.
리브는 심호흡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아르칸의 손등에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푸른 빛이 나왔다.
그대로 손등에 문양을 그리더니 이내 문양이 손등에 흡수됐다.
“됐습니다.”
리브의 말에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확인하는 방법이 있지.’
아르칸이 게티아를 펼치자 관련 내용이 나왔다.
[정령의 가호가 새겨졌습니다.] [정령의 가호] [정령들이 친구로 인식합니다.] [정령들이 위급할 시 도움을 줍니다.]‘정말 얻었네.’
확인을 마친 아르칸이 게티아를 그대로 펼친 채로 물었다.
“그럼 이제 숲으로 돌아가나?”
“…….”
“…….”
두 자매는 서로 마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저 침묵은 무슨 의미지? 숲에 안 가면 다른 갈 곳이라도 있나?
의아해하는데, 리브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그래야죠.”
“그럼 환영 마법을 걸어 줄게. 또 습격당할지도 모르니까.”
아르칸은 그렇게 말하며 자매에게 환영 마법 할루시네이션을 걸었다.
정령의 가호를 얻었다고는 해도 저들이 무사해야 엘프들의 도움을 받을 때 유리해서였다.
‘게다가 기왕 도와주기로 했으면 제대로 도와줘야 나중에 생색내지.’
“세심한 배려에 정말 감사합니다.”
“무사히 돌아가서 꼭 다시 보은하겠습니다.”
아르칸의 생각대로 엘프 자매는 정말 감격한 듯 더욱 큰 보답을 안겨 줄 기세였다.
“자, 그럼 환영 마법이 풀리기 전에 어서 출발해.”
“아, 알겠습니다.”
“아르칸 님, 강녕하시길.”
엘프 자매는 지체하지 않고 출발했다.
둘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아르칸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그만 나오지?”
그러자 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칸의 뒤편에서.
‘젠장, 그쪽에 있었나.’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