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용사의 의뢰 (4)
용사는 마정석을 받고 싶으면 엘프를 구하라고 했다.
그 요구대로 엘프를 구한 뒤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근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오라고 부른 거였는데, 창피하게 바로 뒤에서 나오다니.’
“나 여기 있는데?”
등 뒤로 용사가 피식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칸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몸을 돌렸다.
“몰랐군. 워낙 잘 숨어 있어서 말이지.”
“왜 자꾸 숨어 있다고 하는 거야?”
용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손이 곧장 검으로 가진 않았다.
“그럼 왜 안 나왔어? 너도 걔들 은인이잖아. 은인 소리를 듣는 게 창피해?”
“은인은 무슨, 지금껏 외면했는데…….”
아무래도 계속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를 움직여서 구했잖아. 그거면 되지. 엘프들도 충분히 고마워할 거야.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런가.”
그 말이 위안이 됐는지 용사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이어지는 말에 다시 구겨졌지만.
“그보다 엘프들 정령술 쓰는 거 보니까 제법 강하던데, 동료로 삼을 생각은 없어?”
“없어.”
“왜? 네가 함께하자고 하면 둘 다 나설 텐데.”
“행여나.”
‘어라, 이게 아닌데?’
용사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아르칸은 당황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동료는 절대로 안 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굴다니.
엘프들이 그간의 일 때문에 인간족을 경원시한다고 해도 용사는 다르다.
그 상징성을 생각해서라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만했다.
용사의 동료라고 하면 엘프들도 인간족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왜 용사는 엘프 자매들이 자신의 동료가 안 된다고 확신하는 걸까?
이해가 안 되는 와중에 용사가 한술 더 떴다.
“넌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군.”
‘누가 할 소리를.’
아르칸은 기가 막혔다.
용사는 마계정벌기 속의 주인공! 주인공이니만큼 엮이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중 단 하나와도 엮인 적이 없다는 거였다.
함께 모험할 동료로 삼지 않더라도 연인, 하다못해 즐길 수도 있을 텐데 하나같이 거리를 뒀다.
그런 용사한테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고 듣다니, 굴욕일 수밖에 없었다.
‘빙의 전에 연애 한번 해 본 적이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고생 많았……. 아, 아니지. 고생은 무슨. 이거 받으려고 한 건데. 자! 여기 약속한 거.”
갑자기 말을 더듬던 용사는 대뜸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아르칸은 바닥에 떨어질 뻔한 주머니를 간신히 낚아챘다. 열어 보니 안에 마정석이 들어 있었다.
“이런 중요한 걸 막 던지면 어떡…….”
투덜거리던 아르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용사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쩝. 물어볼 것도 있었는데……. 뭐 그거야 메시지 보내면 되지만, 인사라도 좀 하고 가지.”
아르칸은 품속에 마정석을 집어넣으며 다시 한번 투덜거렸다.
그래도 마정석 때문에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 * *
한편 사라진 용사는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아까처럼 숨어서 아르칸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좋나 보군.”
들뜬 걸음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오랜만에 홀가분했지만.”
엘프를 끝까지 못 도와준 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아르칸이 자신의 부탁대로 무사히 엘프를 구했다.
그래도 외면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기에 여전히 마음은 무거웠다.
그때 아르칸이 엘프들도 고마워할 거라는 거 아닌가?
그 말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물론 아직 다른 짐이 잔뜩이지만, 그것만으로 숨통이 트였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만 안 했으면 친해졌을지도…….’
그 어처구니없는 소리란 바로, 엘프들을 동료로 맞이하라는 것.
구출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뒤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 엘프들은 아르칸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르칸이 동료가 되자는 말 대신 ‘이제 숲으로 돌아가나?’라고 물었는데도 대답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전시안으로 들여다보니 하나같이 호감도가 높았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아르칸의 정체가 마왕인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저 아르칸이라는 녀석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고생 많았다고 친근하게 대할 뻔했지.’
괜히 더 같이 있다가 친구라도 될 것 같아서 도망치듯 그 앞에서 사라진 거였다.
‘안 될 소리지.’
용사는 이 세계에서 더는 인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과 엮이면 하나같이 불행해졌으니까.
비슷한 처지라고는 해도 아르칸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빙의당해서 여기로 온 것만 해도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지.’
아르칸을 떠올리며 안쓰러워하던 용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 할 때가 아니야.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용사는 어느덧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아르칸의 뒷모습을 슬쩍 봤다.
“그래도 다음에 또 부려 먹으려면 마정석을 좀 챙겨 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용사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 * *
아르칸은 산 중턱에서 대기 중인 마왕군에게로 돌아갔다.
“마왕님!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반갑게 마중한 트릴은 이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성공하셨습니까?”
마정석을 못 얻는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물거품이 되고, 이번 원정은 실패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성공했지. 자, 여기 마정석.”
아르칸이 주머니에서 찬란한 마력을 내뿜고 있는 마정석을 꺼내 보여 줬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트릴이 넋을 잃고 마정석을 바라봤다.
아르칸이 보기에도 대단했다.
얼핏 봐도 자신의 마왕성에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마력이 응축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이걸 기존 마정석에 흡수시키면 1계층은 확실히 늘어나겠지.’
그때 센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하십시오.”
“응?”
뜻밖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사이, 커다란 손이 마정석 위로 내려왔다.
센시아가 자신의 손으로 마정석을 가린 거였다.
놀란 아르칸이 마정석을 다시 품 안에 넣으며 물었다.
“왜? 성에서 여기까지 쫓아오기라도 했어?”
후작의 기사단이 못 쫓아올 정도로 멀리 후퇴했지만, 엘프를 되찾기 위해 무리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병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블린들은 진작 철수하고 물러난 상황.
남은 건 십여 명에 불과했으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럼?”
“……그게 마정석을 조심하라는 말인 거 같네요.”
“아!”
아르칸은 트릴의 말을 듣고서야 센시아가 왜 저러는지 깨달았다.
마정석은 마왕성을 활성화해 마왕이 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지만, 그 자체로도 진한 마력을 내뿜는다.
‘마인족이라면 욕심이 안 날 수가 없지.’
실제로 트릴뿐만 아니라, 주위 병사들 눈도 탐욕으로 새카맣게 번들거렸다.
아마 센시아가 없었다면 강탈하려고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현재 아르칸이 마왕이긴 해도, 마법을 못 쓰면 약하건 사실이었으니까.
‘이거 너무 안심하고 있었나.’
쉽게 뺏기진 않겠지만, 가져가라는 듯 눈앞에서 흔드는 것도 지양해야 할 듯했다.
반면에 센시아에게는 탐욕스러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렇지?’
원래 무표정한 편이라고 해도 해츨링 피용을 봤을 때는 생각하면 욕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권능 때문인가?’
호감도 높은 신하로 삼는 군주의 권능.
그 권능이 마정석을 탐하는 욕망마저 억누른 모양.
한마디로 절대 충성하게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역시 권능으로 최대한 많은 부하를 신하로 만들어야겠어.’
아르칸은 그렇게 다짐하며 마왕성으로 돌아갔다.
* * *
“정말 마정석을 가져오실 줄이야!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아르칸이 가져온 마정석을 본 오웬이 연신 감탄했다.
당연히 욕심내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피이피이.”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고 뺨을 비비적거리는 피용도 마찬가지.
“훈련은 어땠어?”
“후후, 나중에 확인하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벌써? 훈련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오웬이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성과가 꽤 있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피용도 마찬가지로 자신 있다는 듯 날개를 펼치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 마정석을 가장 탐낼 만한 존재를 하나 떠올렸다.
“게티아, 너는 이거 안 먹고 싶어?”
“크릉. 크릉.”
게티아는 허공에서 좌우로 저었다.
‘저 녀석이 사양할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야?”
끄덕끄덕.
하긴 게티아는 권능으로 엮이지 않은 계약관계. 탐냈다면 노릴 기회가 많았는데, 가만히 있었다는 건 못 먹어서가 틀림없었다.
‘근데 이것도 마석의 일종인데 왜 못 먹을까?’
잠깐 궁금해하는 와중에 오웬이 넌지시 물었다.
“아르칸 님, 이 마정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여기 마정석에 흡수시키시겠죠.”
트릴의 말대로 여분의 마정석이 생길 경우, 보통은 기존 통제실의 마정석에 그대로 흡수시킨다.
간혹 믿을 만한 부하에게 줘서 멀티를 늘리기도 하지만, 아르칸에게는 아직 까마득한 일이었다.
마왕성이 반지하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아직 마왕성이라기에는 초라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도 오웬이 물어보는 건 이유가 있겠지.’
짐작대로 아르칸이 대답하기 전에 오웬이 재빠르게 의견을 내놨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마정석을 파시는 게 어떻습니까?”
“진심입니까?”
“에? 마정석을 팔아요? 이 귀한 걸요?”
센시아와 트릴이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마정석을 하나 더하는 것만으로 마왕성이 엄청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마정석이 품고 있는 마력에 따라 다르지만, 못해도 최소 1계층이 더 늘어난다.
몇 개월 전 반지하 신세였던 걸 생각하면 꿈만 같은 상황이었다.
반대로 마정석을 안 쓰면 발전하는 데 한참 걸릴 게 분명했다.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게 마정석인데…….”
“돈 때문에 팔자는 게 아닐세.”
“그럼요?”
트릴은 여전히 납득 안 가는 듯 되물었다. 거기에 아르칸이 대신 대답했다.
“마정석을 팔아서 하인들과 마왕성을 지킬 병력을 구하자는 거지?”
“맞습니다. 현재 마왕성을 지킬 병력도 부족한데, 계층을 늘려 봐야 위태롭기만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 말대로긴 하지.”
“마정석을 팔겠다고 하면, 다른 마왕으로부터 병력과 골드는 물론이고 마왕성 규모를 조금 키울 수 있는 마석까지 제공해 줄 겁니다.”
아르칸의 대답에 자신을 얻었는지 오웬이 장점을 설파했다.
아르칸은 거기에 한마디 더 보탰다.
“아니면, 아버지께 진상하면 기꺼워하시면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내려 주실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바리스탄 대마왕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오웬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말로는 팔자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르칸의 아버지인 바리스탄 대마왕에게 바치는 걸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에게 파느니 그편이 여러모로 유리하지.’
어쩌면 망나니라는 오명까지 벗을지도 몰랐다.
“좋은 방법이군요.”
“그편이 확실히 좋겠는데요? 대마왕님도 좋아하실 테고, 아르칸 님의 명예도 회복할 수도 있고. 일거양득 아닙니까? 역시 오웬 님! 생각이 깊으시군요.”
반대하던 센시아와 트릴까지 동조하는 분위기로 바뀌자 오웬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정작 아르칸은 고개를 저었지만.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마정석은 마왕성에 흡수시킬 거야.”
“아르칸 님?”
다들 당황했다.
지금까지 나온 이점만 따져 봐도 아르칸이 오웬의 의견을 따를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어지는 아르칸의 말은 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업하려면 먼저 2계층으로 늘려야 하거든.”
사업?
마왕성에서 무슨 사업을 한단 말인가?
“잘만 되면 우리에게 부족한 돈과 병력을 보충하고도 남을 거야.”
아르칸의 호언장담에 모두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