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4
4화 거래와 협박 사이 (1)
아르칸의 채근에 하인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고블린들은 하인들의 서툰 공격으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무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르칸은 문득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이것도 마왕의 몸에 빙의된 영향인가?’
빙의된 걸 알고 새로운 기회를 잡은 거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 세계는 결투며 전쟁이며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 다반사.
상대를 해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다.
지금껏 그런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기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바로 앞에서도 살육이 벌어지는데도 무덤덤했다.
“아, 아르칸 님! 그건 혹시 권능입니까?”
오웬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르칸은 웃으며 게티아를 들어 보였다.
“아니, 이 마도서로 마법을 쓴 거야.”
“마도서……. 보물 창고에 있었나 보군요.”
“그래. 거기서 찾아내서 계약했어.”
“아르칸 님. 예로부터 마도서는 마력을 탐하다 못해 마인, 마족은 물론이고 마왕까지 잡아먹으려 한다 했습니다만…….”
오웬이 우려를 표하다 입을 다물었다.
아르칸이 애완동물 대하듯이 게티아를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티아도 기분 좋은 듯 크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면 걱정하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괜찮아. 마력도 낮고 권능도 없는데, 이거라도 있어야지.”
오웬은 귀를 의심했다.
아르칸 님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다니!
특히 권능이 없다는 소리는 금기였다.
하인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소리를 듣고 죽여 버리겠다고 날뛴 적도 있으니까.
하물며 이어지는 말은 더욱 놀라웠다.
“이거라도 아버지께 보고하면 그나마 좀 안심하실 테지.”
“……알고 계셨습니까?”
“안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바리스탄이 지나가는 말로 언급해서 아는 거였지만, 따지고 보면 빙의한 지 얼마 안 됐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을 테니까.”
아르칸은 어깨를 으쓱하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그대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건 항간의 말과 달리 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놀랍게도 실제로도 그러했다.
바리스탄 대마왕은 아르칸이 언젠가는 정신 차리고 어엿한 마왕 노릇을 할 거라 기대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차린 아르칸이 갱생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전개로 갈 작정이었다.
‘그 정도면 갑자기 사람이 바뀐 개연성으로 충분하겠지?’
“……네. 아르칸 님을 지켜보고 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목숨 바쳐 보호하라고도 명령하셨습니다.”
실제로 소설 속 아르칸이 용사에게 살해당할 위기 때, 오웬이 먼저 나섰다가 죽었었다.
정말 목숨을 바쳐 명령을 수행한 거였다.
그 와중에도 소설 속 아르칸은 죽은 오웬에게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욕했지만, 아르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령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충성스러운 부하는 억만금을 주고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웬의 호감도는 얼마나 되려나.’
안 그래도 가까이 있는 부하니만큼 가능한 한 신하로 삼으려고 했지만, 권능이 발휘 안 된 걸 보면 호감도가 100이 아닌 건 확실했다.
어쩌면 충성한 건 바리스탄 대마왕이라 호감도가 낮을 수도 있었다.
‘뭐, 오웬의 호감도를 올릴 방법은 몇 가지 있으니까.’
잠시 후.
고블린들을 모두 해치운 하인들에게 사체를 챙기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마왕성으로 가져가 흡수시키기 위해서였다.
이후 하인들을 데리고 다시 숲속을 헤매며 홀드 마법을 계속 펼쳐 고블린 무리를 잡았다.
그렇게 얻은 고블린의 사체는 모두 10여 구.
슬슬 끌고 다니기도 힘들어 마왕성으로 복귀했다.
* * *
‘음, 마치 늪 같군.’
아르칸은 통제실 한편에 죽 늘어놓은 고블린 사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두 반쯤 지면으로 침전된 상황.
마왕성이 사체를 흡수하며 마력을 빨아 대고 있는 거였다.
괴이한 장면이었지만, 아르칸의 정신은 아직 한참 낮은 마정석의 마력에 쏠려 있었다.
‘어디 보자. 마력이 얼마나 올랐을까?’
[마력 : 58]입구를 봉쇄하는 데 마력을 썼다고 해도 아직 두 자리에 불과했다.
고블린마다 가진 마력이 다른지 사체를 흡수시킨 뒤 오르는 마력은 1에서 10 사이.
단순히 문을 봉쇄하는 데만도 필요한 마력은 100.
마왕성을 온전히 지하로 숨기려면 3,000은 있어야 했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마력을 모아야겠군.’
그러기 위해서는 게티아로 홀드 마법을 많이 써야 했다.
아르칸은 옆에 끼고 있던 게티아에게 말했다.
“돌아가면 마력초 열심히 먹자.”
그 말에 마력초의 지독한 쓴맛을 떠올린 게티아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걸 보고 웃던 아르칸에게 마정석 화면이 눈에 띄었다.
“음? 왜 입구 쪽에 다들 모여 있지?”
마정석에는 마왕성 내부를 미니 맵처럼 보여 주는 기능이 있다.
마왕성 소속은 파란 점으로 표시되는데, 그 파란 점이 모두 입구 쪽에 몰려 있는 거였다.
그때 입구 끝에 붉은 점이 다수 나타났다.
‘뭐지? 설마 몬스터가 쳐들어온 거야? 입구는 계속 닫아 뒀는데.’
현재 마왕성 내에는 몬스터를 상대할 병력이 없다. 그래서 마력이 생기자마자 입구를 봉쇄해 둔 참이었다.
‘일단 가 보자.’
통제실로 나와 거주 구역에 가 보니, 오웬과 하인들이 웬 마인족 무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무리 중앙에 고블린들이 힘겹게 메고 있는 커다란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몬스터의 습격은 아니군. 손님인가? 아니면, 상인?’
궁금해하며 가까이 다가가니, 오웬이 미간을 잔뜩 모으고 있었다.
“……아르칸 님, 오셨습니까?”
“어, 근데 누가 온 거야?”
오웬이 대답하기 전에 가마 문이 열리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우힉! 아르칸 님. 안녕하십니까? 저 왔습니다.”
‘뭐지, 이 돼지는?’
아르칸은 주춤하며 물러섰다.
가마에서 나온 건 풍선처럼 부푼 얼굴에 땅딸막한 체형의 마족이었다.
심지어 이마의 뿔까지 돼지코처럼 넙데데했다.
확실한 건 소설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캐릭터였다.
‘저쪽에서 알은척하는 거 보니까 기억에는 있겠지.’
얼른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금업자인 마족 포그밀이었다.
황당한 건 아르칸이 이 녀석에게 대량의 금화를 빌리긴 했는데, 얼마를 빌렸는지 뭘 담보로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거였다.
‘쯧, 돈 빌리는 주제에 하나도 신경 안 썼나 보군.’
“왜 그러십니까? 푸힉. 제가 빈손이라 섭섭해서 그러시는 건 아니시죠? 설마 제가 빈손으로 왔겠습니까?”
포그밀은 히죽히죽 웃으며 가마에서 커다란 술병을 꺼냈다.
“오! 고맙군.”
아르칸은 반색하며 술병을 건네받았다.
화려한 겉치장만 봐도 비싸 보이는 술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푸히힉, 섭섭합니다. 저야 늘 오가면서 마왕님 불편하신 거 없나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돈도 빌리게 하고 말이지. 안 그래도 병사를 고용할 돈이 필요한데 좀 더 빌려 볼까?’
아르칸은 슬쩍 운을 띄웠다.
“선물까지 가져왔는데, 대접할 게 마땅찮군. 요즘 형편이 어려워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마왕님 사정이야 이 포그밀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잘되었군. 안 그래도 자금이 더 필요해서 말이야.”
포그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힉? 저는 일주일 뒤에 2천 골드 갚으시는 거 잊지 말라고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만.”
“일주일 뒤에 2천 골드라고?”
“네, 기억 안 나십니까?”
젠장! 이건 또 기억이 선명했다.
“……기억난다.”
“푸힉! 다행입니다. 못 갚으시면 마정석을 내놓으시기로 했잖습니까. 그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옆에서 듣다 놀란 오웬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칸 님! 저 말이 정말입니까??”
“…….”
정말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르칸도 과거 자신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계약을 한 거야!’
그나저나 쓰기는커녕 보지도 못한 2천 골드를 갚아야 한다니.
청천벽력 같은 상황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아르칸의 몸을 차지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모른 척하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여기 마왕님의 피로 서명한 계약서도 있으니까요.”
포그밀이 허리 쪽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마인족이 피로 서명했다는 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건다는 거나 마찬가지.
계약을 어길 시 저주에 걸리는데, 가볍게는 병을 앓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팔다리를 잃기도 했다.
이번 계약은 마정석이라는 보물을 걸었으니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놈의 마인족은 피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니, 포그밀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고 계셨다니, 오늘 오길 잘했군요.”
‘흥, 돌려줄 돈을 마련해 뒀는지 확인하려고 온 거면서.’
돌려줄 돈이 있는 것 같으면, 빚을 갚는 대신 도리어 더 빌려 가라고 유도했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가 상환일에 돈 받으러 왔다가 모르는 일이라고 뻗대면 곤란하니까 그걸 방지하는 차원도 있었겠지.’
아무리 아르칸이 망나니 마왕이라고 해도 대마왕 바리스탄의 자식.
그런 아르칸의 마정석을 뺏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른 말이 안 나오도록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막무가내로 처리하기에는 후환이 두려울 테니까.
오웬이 지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상환을 유예하는 건 안 되나. 2천2백 골드……. 아니, 2천5백 골드로 갚겠네.”
“푸힉. 저도 그러고 싶지만, 마침 큰돈이 필요해서 말이죠.”
‘못 갚게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미뤄 줄 리가 없지.’
아르칸은 손을 내저으며 포그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됐으니까, 일주일 뒤에 다시 와.”
“알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포그밀은 가마 안으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폭소했다.
‘푸힉. 아르칸 녀석, 완전히 자포자기했나 보군. 그러면 바리스탄도 내게 뭐라고 하지 못하겠지.’
아르칸의 짐작대로 오늘 이곳에 온 건 아르칸의 금전 상황과 대마왕 바리스탄이 시비 걸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애당초 바리스탄이 두렵지 않았다면, 이렇게 금화를 빌려주고 계약서를 쓰게 하는 등의 귀찮은 짓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무능력한 마왕에 지키는 병사도 하나 없는 이런 마왕성 따위는 자신의 사병만으로도 충분히 함락시킬 자신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2천 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긴 하지만, 또 절대로 못 마련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라는 거였다.
대마왕의 이름을 팔며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빌면 마련하고도 남았다.
‘도와달라고 연락 보내는 것도 내가 다 차단해 버리면 소용없겠지만. 푸히히힉.’
포그밀은 가마 안에서 사악하게 웃었다.
한편 포그밀의 가마가 마왕성을 빠져나가는 걸 보며 아르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쓰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한다니…….’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진 않았다.
이미 미리 생각해 둔 계획이 있었다.
‘어차피 용사가 오기 전에 그 녀석들이 지나갈 테니까 그것만 잘 이용하면 문제없어. 물론, 그전에…….’
등 뒤에서 쏟아지는 오웬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아르칸이 식은땀을 흘렸다.
‘오웬부터 진정시켜야겠지만.’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